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 안에는 기도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심지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종교의 중심에는 기도가 있고 기도하는 종교인들을 보면 얼마나 간절한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지나다 하나씩 올려놓은 게 분명한 돌탑에다 대고 비는 사람들이 그게 뭐라고 거기다 그렇게 겸허하게 비는지.
108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또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땀이 뚝뚝 흘러 바닥을 적시며 절을 합니다.
이슬람교인들이 하루 다섯 번 정해진 시간에 교주인 마호메트가 태어난 메카 쪽을 향해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보면 장엄하기 까지 합니다.
모든 종교의 중심에 기도가 있는 걸 보면 사람들이 사는 게 다들 마음대로 안된다는 이야기겠죠.
마음대로 인생이 술술 풀리면 뭐하러 기도를 하겠습니까?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고, 내 힘만으로는 안전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으니 무언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다른 종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절에서 백일기도하는 사람들 중에 대학입시에 합격하는 사람이 안 생기겠습니까?
고요한 산사에 앉아 명상을 하면 복잡했던 마음이 정돈되고 집착했던 일들이 다 무슨 소용 있나 마음을 비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처럼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더니 병이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것은 내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가운데 실제적이고 인격적인 교제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상 앞에서 진지하게 절을 해도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우리는 내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압니다.
세상을 창조하셨고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죄를 속죄해 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서 나를 여전히 돌보시고 사랑해주시는 구원의 주 예수님,
또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고 들으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내 괴로움에 공감하시고 나를 동정해 주시는 긍휼의 눈길로 기도하는 그 순간 나를 응대해주시는 게 분명히 믿어지는 게 우리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는 그야말로 공염불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내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분명하게 성경을 통해 정립해야 합니다.
그런 말씀들이 너무 많아 이 시간 열거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한복음 16장 24절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기도는 이 말씀대로 예수님의 명령이고 주시겠다는 약속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사도가 교회에 보낸 서신을 통해 기도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만 약한 게 아니라 기도 역시 약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기도에 대한 이치들을 깨닫게 해주시고 실제로 우리가 기도의 자리로 나가는 결심을 하도록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먼저 언제 기도해야 하는 지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에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4절에는 병든자가 있느냐 그도 역시 기도하라고 하시죠.
우리는 다 이렇게 생노병사와 희로애락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고난이 오면 순응하지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기도해라.
질병이 오면 병낫기를 위해 기도해라.
그러나 우리가 기도 실력도 없는 데 어떻게 기도해서 병이 낫고 고난에서 응답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좀 답답함을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을 통해 기도에 대해 잘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 중에 시간을 내서 직접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는 중에 점점 기도의 즐거움을 알게 되고, 기도를 통해 누리는 셀 수 없는 유익을 실생활에서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고난당할 때 왜 기도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고난을 예고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을 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에 대해 무조건 두려워하고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의식을 바꿔야 합니다.
삶에 원치 않는 힘든 일이 발생하면 우리는 누군가에 모르게 자꾸 화가 납니다.
내 힘만으로 할 수 없이 상황을 짊어지고 가다보면 점점 슬펐다 처량했다 화가 났다 하다나중엔 자포자기한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고난의 수렁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나중엔 어려운 현실에 의지를 꺾고 자신을 내던지며 영영 무너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환경에 짓눌려서 의지를 꺾고 무릎 꿇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기도하면 현재의 고난을 벗어날 길이 분명히 있다는 뜻입니다.
괴롭고 힘든 가운데 이 말씀대로 기도하면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근심에 눌려 억지로 기도를 시작했어도 끝나고 일어설 땐 항상 왠지 모를 안심과 긍정의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충격적인 문제라 할지라도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한 절대로 그 문제로 인해 절망하고 질식당하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나서도 여전히 부정적이고 어두운 마음일 때는 거의 없습니다.
마음만 그러면 뭐하냐 문제가 해결되어야지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도 안하고. 마음만 괴롭게 들볶으면 또 뭐하겠습니까?
어차피 고난을 통과하는 중에 있다면 기도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중에 잘 이겨내는 게 더 좋지 않습니까?
고난이 깊어지면 내 처지를 주님께서 마치 방관하시는 것 같은 섭섭한 마음에 슬픔과 우울감에 빠져 있지기 쉽습니다.
우울한 사람은 상황을 실제보다 더 부정적으로 보고 판단력도 흐려집니다.
어둡고 우울한 사람은 누가 가까이 오려고도 않고 잘 도와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힘들어도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호감을 느끼고 더 잘 도와줍니다.
야고보사도는 앞에 있는 10절에서 이미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결과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고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이 모든 것을 다 잃은 비참한 고난 중에 오래 참았더니 자비하고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결말이 얼마나 복되었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나중에 보니 갑절의 축복을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조금 잘못돼도 괜찮습니다.
지금 좀 늦고 실패해도 괜찮아요.
심지어 신자들은 죽어도 괜찮습니다.
고난과 시련 중에도 우리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만 바르게 반응하면 당장 결과가 좋지 않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로 내일 반드시 좋은 것을 준비해 주십니다.
이 사람을 놓치면 다 끝날 것 같지만 하나님은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이 사랑이 가면 저 사랑이 온다니까요.
이 학교에 실패하면 내 인생이 완전 망칠 것 같지만 아니예요.
저도 대학 시험을 크게 망쳤었는데도 하나님께서 만족할 만한 삶으로 인도해 주시더군요.
이 일을 실패하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지만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어떤 고난 중에도 당황하지 말고 기도하며 도움을 구하시면 반드시 좋은 결말이 있다는 오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하라고 합니다.
인생에 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햇살이 반짝 우리 삶을 비출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마음이 환해지고 이만하면 세상 살아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즐거운 일은 왜 그렇게 쉽게 사그러드는 지 금세 빛이 흐려지고 다시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좋은 일이 한 나절을 안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찬송하라고 오늘 말씀합니다.
찬송도 기도입니다. 곡조 있는 감사기도가 찬송이죠.
내게 생긴 좋은 일을 자만하고 혼자서 그 기분을 즐기다 보면 금새 시들해집니다.
오히려 내 성공을 자꾸 되새기고 음미하다 보면 나중엔 그게 좋지 않은 생각을 이끌어내서 오히려 근심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즐거워하면 그게 오래갑니다.
감사하면 그 즐거움이 언제까지 계속 갑니다.
퇴색된 기쁨도 우리가 하나님께 그 사실을 상기하고 다시 감사하면 그 기쁨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난다는 것 아십니까?
즐거움과 기쁨 속에서 계속해서 살고 싶으면 방법이 있습니다.
과거에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을 다 끄집어 내서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같은 일에도 즐거움이 더 커지고 행복감이 더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슬프고 우울하게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잖아요.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하셨습니다.
언제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는 신자들의 표식 중 하나가 희락이라는 것입니다.
즐거울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의 작은 기쁨을 징검다리 삼아 고난을 사쁜 사쁜 건너가며 살 수 있겠습니까?
크고 작은 즐거움에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감사 찬송과 기도를 틈틈이 우리 주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투병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뵈니 사람이 사는 게 참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아픔이 없으면 그걸로 감사하고, 입맛이 돌아 밥 한 그릇 드시면 그걸로 행복한 것이더군요.
결국 말년엔 몸을 뉠 병상 하나 밖에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다 급성장 사회를 겪으며 너무 큰 성공만을 추구하는 민족성이 생긴 것 같습니다.
작은 일엔 좀채로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대학도 좋은 데만 가야하고, 직장도 일류기업에만 들어가야 하고,
그러다보니 선두 그룹만 빼면 나머지는 다 불행하게 사는 것이죠.
물론 그들 역시 쫒기는 불안감으로 만족하지 않다고들 하더군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또 고린도후서10장13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창세기 49장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 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한군데 더 보실까요?
예레미야 45장 5절입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우리가 그렇게 크게 되고 큰 일을 하려고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아도 오늘에 충실하고 하나님께 바른 믿음으로 반응하면 얼마든지 만족한 인생이 됩니다.그러니 분량이 넘치는 일에 너무 마음을 두지 않는 것도 믿음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남보다 소원이 크고 원대한 일에 대한 포부가 있고 능력이 출중하면 그게 그 사람의 그릇입니다.
그런데 소박하고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게 좋고, 큰 욕구가 없다면 그렇게 살며 행복하면 됩니다.
나는 아닌 데, 남의 시선과 다른 사람의 의견에 굳이 동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릇대로 사는 게 행복인 데 작은 그릇에 굉장한 걸 담으려고 하는 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현재 내게 주신 것들로도 얼마든지 우리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좁은 침대지만 따뜻한 이불을 덮고 누울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추위를 막아주고 편히 쉴 한 칸 방이 있다는 것도 흙바닥에 가마니를 펴고 잠드는 세상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호사스러운 축복 아닙니까?
계란후라이와 김치 한 종지의 소탈한 밥상이지만 일주일을 굶었다는 기아 난민의 눈물을 생각하면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런 작은 일에 끊임없이 감사하면 우리 삶이 항상 행복으로 가득 차리라 믿습니다.
마음이 행복한 게 최고의 인생입니다.
다음 14절부터 16절까지는 병들었을 때의 기도입니다.
먼저 병든 자가 있으면 그냥 죽을 때가 됐나보다 생각하지 말고 낫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영혼을 거듭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죄로 망가진 성격과 품성도 어느 정도 고쳐나가게 하십니다.
사람이 안 바뀐다는 것은 사람을 많이 치어 본 사람들은 인정합니다.
태생이 잘 안 바뀝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거룩한 삶을 위해 작지만 꾸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정신적인 측면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면, 우리의 육체적인 측면에 개선이 없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분리될 수가 없는 같은 본질입니다.
영혼이 잘 되고 평온을 누리기 위해서는 육체도 강건해야 하는 것이죠.
육체의 약함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의 원리입니다.
제가 이번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과거에 좋지 않던 것들이 많이 개선이 되었더군요.
본래 제가 약간의 혈뇨가 항상 있었는데, 그게 사라졌습니다.
콜레스테롤이 좀 과도하게 나왔었는데, 그것도 정상이더군요.
저혈압이었는 데 그것도 정상이고, 초음파결과도 다 무난했습니다.
그래서 검진 결과 정상A를 받았다는 것 아닙니까?
이게 얼마 만에 받은 A인지 모릅니다.
제가 이래저래 신경 쓸 일도 많고 시간도 여의치가 않아서 무슨 운동이나 제대로 했겠습니까?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몸도 개선을 시켜주신다는 것을 제가 느낍니다.
그러니까 병든 사람에 대한 치유의 기적이 지금도 분명히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성도들의 건강에 관여하십니다.
오늘 말씀대로 병든 사람을 위해 교회의 지도자들과 믿음의 선배들과 함께 기도할 때 분명히 낫게 해주신다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4절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름을 바르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듯이 당시에 상처에 감람유를 바르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몸에 병이 나면 병원에 가고 수술을 하고 약을 먹지만,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약 드실 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의 치유를 기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조목사님 처럼 한 순간에 병이 씻은 듯이 낫는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다른 기도를 들어주실 때 그렇지 않잖아요?
오래 기도하며 환경으로 인도받고, 도울 사람을 붙여주시고, 그러면서 서서히 문제가 해결되게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우리의 질병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서 좋은 의사를 만나게 하시고, 투약의 효과를 좋게 해주시고, 부작용이 없게 해주시고, 몸이 잘 회복되도록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기도는 제한 없이 하고 응답도 받는 데 건강 회복을 위해서는 아닐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 치병을 위해서 기도할 때, 선행할 일이 있습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고 병이 낫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15절에 보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이 두 구절을 통해 죄와 질병이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들이 죄와 관련된 경우가 많습니다.
탐식이나 과식, 과도한 알콜이나 담배, 지나친 방종, 소모적인 여가생활, 몸을 돌보지 않는 과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분노, 적당한 운동을 기피하는 게으름, 스스로 비활동적으로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죄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돌아보고 죄를 회개하고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자신을 잘 살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저를 가만히 관찰하면 죄가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게 죄인줄 뻔히 보고 경계하면서도 어느새 거기에 끌려들어가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이래서 또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의지하며 회개하러 나갑니다.
우리는 매일 거의 매순간 회개해야 할 죄인들입니다.
병든 몸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특히 우리의 죄와 관련되지 않았나를 잘 살피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발생한 질병이고 거기에 우리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개입된 것이라면 그게 해결되기 전엔 치유가 순조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몸을 거룩하게 잘 보전하고 건강하게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다음 기도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사도는 기도응답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를 구약성경의 엘리야선지자에게서 가져옵니다.
엘리야선지자가 얼마나 기도의 실력자입니까?
본문에서 나오듯이 엘리야선지자는 비가 안오게도 하고 오게도 한 사람입니다.
그렇잖아도 기도라면 자신감이 부족한 데, 하필 예를 든 인물이 엘리야가 뭡니까?
그런 기도자와 우리를 어떻게 동일 선상에 놓고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니 우리도 기도하면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건 너무 얄궂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헛점이 많았던 야곱이나 요나나 이런 인물을 예로 들으면 좀 자신감이 생길 텐 데 엘리야라니 되려 주눅이 들 판입니다.
야고보감독의 의도는 아마 이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차피 응답은 기도자의 실력이 아니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실력이시라는 것입니다.
왕하2장9절에 보면 엘리사가 스승인 엘리사에게 이렇게 간청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엘리야의 이적이 ‘성령님이 하시는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위대하게 기도했던 엘리야도 인간적인 약점을 갖고 좌절하지 않았습니까?
약한 우리도 얼마든지 믿음으로 기도할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은 우리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다만 엘리야의 기도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핵심적인 부분은 17절에 ‘간절히’라는 단어입니다.
삼년 반 비가 오고, 안 오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에 포인트를 두라는 것입니다.
열왕기서에 보면 엘리야가 구름 한점 없는 하늘 아래에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는 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머리를 무릎사이에 넣고 간절히 기도한 뒤 제자에게 가서 하늘을 살피라고 말합니다.
아무런 징조가 없자 또 그런 자세로 간절히 기도하고 제자에게 가서 살피라고 말하기를 무려 일곱번을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비를 주시겠다고 했는 데도 일곱번, 징조가 보일 때까지 끈기있게, 간절히 기도한 것에서 응답받는 기도의 원리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가 간절합니까?
기도응답에 대해 오늘 본문을 통해 받아야 할 교훈은 죄를 먼저 돌아보는 것과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꼭 기억하고 그렇게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끝으로 오늘 기도에 대한 교훈은 개인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교회에 주신 특권이고 엄청난 무기라는 것입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기도하라는 말씀은 성도들이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분노 조절이 안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번번히 이 문제로 시험에 든다.
이런 것들을 서로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기도가 더 잘 응답된다고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낼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만일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않았더라면 혹여라도 시험에 들어 진리를 떠날 때 누가 간절히 기도하고, 끌고 돌아오게 하겠습니까?
가족조차도 해체가 되고, 극도의 이기주의가 만연한 마지막 때, 하나님은 이 세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새가족을 모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그런 예수님의 사랑으로 굳게 맺어진 그런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 다른 환경에서 모였지만 한 가족으로 서로 용납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서로를 칭찬하며, 고난 중에 함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로 엮여 있어야 이 믿음의 싸움을 끝까지 감당하고 함께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응답에 대해 마태복음 18장19절에 중요한 보장을 해주십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그리고 이어서 말씀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의 모임 중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혼자 기도하는 것 보다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해서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신다고 하십니다.
교회의 일원으로 함께 기도할 때 더 큰 축복과 응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기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고난 중에 기도하고 즐거울 때 기도하고 병든 때 기도하고 항상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또 함께 우리의 시험 중에 기도로 지원해 줄 성도들과 공동체가 되어 우리 삶이 더 행복하고 풍성한 은혜 가운데 다 살아가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4.11.30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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