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야고보서를 통해 시련과 인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절에 보니 본서의 저자가 야고보라고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야고보란 이름이 네 명 나오는 데 기록시기와 정황을 근거하여 본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라고 봅니다.
지난2002년 뉴욕타임스에 한 유골함에 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한 동굴에서 도굴된 이 유골함은 이스라엘의 개인 소장자가 비밀리 보관해 오다 공개한 것입니다.
학계를 떠들썩하게 한 이 유골함은 길이가 50센티미터 정도 되고 겉면에 예수님 당시 사용되던 고대 아람어 서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글씨는 야고보, 요셉의 아들, 예수의 형제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저자인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유골함이란 것이죠.
고고학계와 종교계에서 진위여부를 놓고 큰 공방을 벌였습니다.
이스라엘 문화재청은 유골함은 당시 것이 맞으나 새겨진 글씨는 그 이후에 기록되어 조작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지금까지 소장자와 진위 논란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야고보의 유골함이든 아니든 우리에게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2천년 동안 보존하려 하신 것은 유골함이 아니라 그 야고보가 기록한 편지인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 당시 편지야 파피루스 종이나 양피지 정도에 기록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 편지를 베끼고 전해서 오늘날 우리 손에 완벽하게 넘겨주신 것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두에게 주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야고보서를 통해 우리에게 시련과 인내에 대한 지혜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것은 인생의 문제들을 파악하는 안목과 대처할 능력을 주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많은 시련 속에 고생하며 살고 있습니까?
성도님들과 신앙상담을 하다보면 인생이 평탄하고 모든 게 잘 풀리는 데도 괜히 마음 한 구석에 두려움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 행복 끝에 곧 어렵고 힘든 일이 찾아 올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든다는 것이죠.
누구나 인생을 반 정도만 살아도 좋은 일 뒤엔 어김없이 어려움이 온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도서 7장 14에서 지혜자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는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거듭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형통한 날 조차 곤고할 날을 미리 걱정하니 인생이 한층 고달프고 힘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련의 날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시련 가운데 있는 우리의 마음에 소망을 주시고 모든 시험을 이길 지혜도 충만하게 주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본문의 배경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기록자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요셉사이에서 태어난 예수님의 바로 아래 동생입니다.
야고보는 처음에 예수님이 메시야란 걸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겠죠.
주님은 30년간 성실한 갈릴리의 목수이자 마리아의 장남으로 평범한 일상을 사랑하며 가족들 틈에서 사셨습니다.
어느 날 큰 형님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야라고 할 때 동생들의 충격도 꽤 컸을 것입니다.
어쩌면 형님이 가족을 부양할 의무를 버리고 자기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했던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에 주님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후 사도 대열에 합류했고 예루살렘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이방인에게도 할례와 율법을 지키게 하자는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 이 야고보가 일어나 논리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이 논란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온 교회가 그의 말을 인정하고 따랐을 만큼 권위 있는 지도자였다는 뜻이죠.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야고보가 주후 62년 유대교 이단자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전승은 바리새인들에게 끌려가 성전의 꼭대기에서 던져졌고 그 후에 매 맞아 순교 당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오늘 본서의 기록년도는 주후60년경 네로 황제의 박해 때이고 그가 순교하기 2년 전쯤 쓰여 진 것입니다.
이미 여러 형제가 죽음을 맞았고 자신에게도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네로 황제의 큰 박해 속에서 목숨이 내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네로의 광기어린 핍박에 수 많은 형제들이 맹수의 먹이가 되고 나무에 달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 잔혹한 박해로 성도들을 죽였던 이 네로 황제의 동상이 작년에 그의 고향인 이탈리아 안치오시에 세워졌습니다.
안치오시의 시장은 네로를 재평가해야 한다며 동상 명판에 평화와 개혁의 황제라고 써 넣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도시를 알리고 싶고 관광수입이 탐난다 해도 수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 된 포악한 광인을 그렇게 미화시킨다는 게 좀 어이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네로의 핍박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 용기와 믿음을 주시려는 성령의 감동으로 서신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매일이 고난이고 시련인 우리들을 위해 주신 말씀이기도 한줄 믿습니다.
본서의 시작을 보니 1절에 안부를 한 줄 묻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시련의 문제를 다루는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자녀들을 응시하시고 그 필요와 고통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험과 고난 중에 있을 때도 하나님은 응답을 지체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시련에 대한 첫 번째 하나님의 교훈은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을 참느라 얼마나 힘드냐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위로하는 게 아니라 아예 시험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시험과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이 들으면 억지처럼 들리고 기분이 상할 수 도 있습니다.
시련을 당할 때 누가 그걸 기쁘게 생각하겠습니까?
건강검진 결과 치명적 질병이 나왔는 데 기뻐할 수 는 없습니다.
믿었던 자식이 대학에 불합격 했는 데 기뻐할 수 있습니까?
최선을 다해 운영하던 사업체가 무너지는 데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시험을 만날 때 기뻐하라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시험이 우리를 견고하게 만드는 좋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잘못 걸린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3절에 말씀하시길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너희가 잘 앎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시련을 겪어 본 너희가 잘 알고 있지 않는냐?
너희가 그것을 통해 믿음이 견고해지지 않았었느냐? 라는 뜻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시련을 통과한 성도들이 한결 같이 고백하는것은 그 시련이 없었다면 현재의 은혜도 믿음도 없었을 거란 것입니다.
조지 마티슨이란 사람이 고난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과거의 위인들에게 가장 잊지 못할 풍요의 자리가 어디였던가 물어보라.
그들의 대답은 내가 엎드렸던 차가운 바닥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물어보라
모리아의 번제단을 가리키리라
요셉에게 물어보라
차가운 감옥을 가리키리라
다윗에게 물어보라 그의 시가 밤에 씌어졌다고 말할 것이다.
한 사람 더 예수님께 물어보라
겟세마네의 피 땀 흘린 밤에 왕관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리라.
우리에게 묻는 다면 어디를 가리키시겠습니까?
그곳이 어디든지 우리가 시험당하고 고통을 느끼던 곳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니 내가 당한 시련이 내게 결코 해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났고 죄를 버리고 돌아올 수 있었던 축복이었습니다.
1970년 너란 노래로 인기가요순위 정상을 8개월이나 지켰던 이0용씨가 있습니다.
가수로서 부러울 것 없는 부와 명예를 누렸던 그가 1975년 가요대상 시상을 앞 둔 최고의 순간 대마초 소지죄로 구속됩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벌거벗은 죄수들 앞에서 윤0주장로와 함께 저별은 나의 별 저별은 너의 별을 불러야 하는 수치를 당하고 죽고 싶었다고 합니다.
처참한 나락으로 떨어진 감옥생활에서 그는 비로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석방된 후에도 4년 동안 방송출연 금지 상태에서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그 일이 결국 축복 된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된 계기였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119장 6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러니 고난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련이 올 때 낙심하고 원망하고 한숨 쉬지 말고 온전히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 시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좋은 것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결과가 좋다는 걸 뻔히 알고 있어도 시험이 오고 고난이 올 때 인생이 싫고 괴로울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주시는 시련에 대한 하나님의 해법은 이 시련을 이길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필요한 것은 하늘의 지혜입니다.
우리 지혜와 이 땅의 방법으로는 시험과 고난을 감당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들인가요?
큰 시험이 다 뭡니까?
아주 사소한 시련에도 가슴이 뛰고 불안과 걱정으로 낙심하고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연약한 우리들입니다.
우리 앞에 시험이 올 때 오늘 하나님께서는 내게 지혜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약한 자라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좀 부족한 자라도 하나님은 누구든지 구하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시련이 올 때 감당할 수 있도록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내 힘으로 감당 못할 고난이 닥칠 때 누구에게든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후하게 도와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관계를 생각해서 그냥 도와주는 흉내만 내는 것이 우리가 의지했던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을 향해 손을 벌려 봤자 돌아오는 건 상처 뿐이니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이죠.
큰 시련에 갇히면 아무리 벗어나려 갖은 애를 써도 우겨 싸인 환경을 벗어나는 게 불가능해 보입니다.
누군가 큰 도움의 손으로 끌어내주지 않으면 내 힘으로 불가능한 것을 깨달을 때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주시고 반드시 시험을 이길 방법을 가르쳐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올 연초에 삼호주얼리호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되어 온 국민에게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아덴만 여명작전으로 석선장을 비롯해 모든 선원이 구출되었는 데 참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다행스러워했습니다.
이상하리만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선원들의 생환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피랍 된 2011년 1월15일 아랍에미리트를 출발하여 스리랑카로 이동하던 삼호주얼리호는 늘 그랬듯이 평온한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 때 인도양 북부해역에서 소말리아 해적선이 모습을 드러내며 배 안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 날 당직근무를 서던 이0용선교사는 최초로 해적을 발견한 후 생각할 틈도 없이 비상 벨을 울리며 해적이 온다고 소리쳤습니다.
이 선교사는 무전기로 구조요청을 하려했으나 청해부대의 작전지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구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대피소로 몸을 숨긴 선원들 귀에 소란한 외국말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결국
대피소를 발견하고 안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이 선교사는 항상 성경공부를 하던 선원 몇 명과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기관총과 로켓포로 무장한 해적들이 들이 닥치자 선원들은 아무 힘없이 제압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선교사는 매순간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간절한 기도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이 틀 후 안전하게 배를 피랍했다 생각한 해적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몽골선박을 추가로 빼앗기 위해 해적 몇을 데리고 배를 떠났습니다.
최영함이 가까이 있는 데도 해적들이 엉뚱하게 그런 오판을 한 것입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최영함이 링스헬기와 고속단정을 투입하여 첫 번째 진압을 시도했으나 해적의 총격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선원들은 하나님께 더욱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엔진을 꺼야 우리가 산다라는 생각이 번쩍 들어 기관실에 잠입해 배의 엔진을 껐습니다.
석선장은 기지를 발휘하여 해적의 피랍을 방해하며 작전을 도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청해부대의 아덴만 여명작전이 펼쳐졌습니다.
총알이 날아오는 숨막히는 접전 끝에 한국해군입니다. 선원들 나오세요란 우리말이 감격스럽게 들려왔습니다.
총상을 입은 석선장 외에 한 명의 희생도 없이 놀랍게 작전이 성공했습니다.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언론들이 한결 같이 말했던 것이 선원들이 지혜롭게 행동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기용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위기 가운데서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죽음의 늪에서 그들을 건져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기와 시련을 만난 다 할지라도 헤쳐 나갈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실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시련이 닥치고 앞이 캄캄해 질 때 기도는 하지만 믿음이 생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련 중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시험을 통해 그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려냅니다.
히브리서11장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절에 보면 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 주께 얻기를 생각지도 말라고 합니다.
고난과 시험이 우리를 괴롭힐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우심을 구했다면 우리가 할 일은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고 기다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열어주시는 환경을 통해 하나 씩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어느새 시련은 사라지고 우리 믿음이 점점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나서 의심하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이라고 8절에 지적하십니다.
두 마음이 무엇입니까?
언제든지 한 쪽 마음을 버리고 또 다른 한 쪽 마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되 오직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살 궁리를 다른 쪽으로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 기도하며 다른 한 쪽으로 점을 보러 가는 것 같은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원리와 방법을 따르지 않고 불의한 세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우들입니다.
이런 행위는 시련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고 때로 죽을 힘을 다해 시험을 빠져나갑니다.
그러나 오늘 치른 시험의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견고한 믿음입니다.
그는 시련을 통해 얻어야 할 하나님께 대한 견고한 믿음을 이루지 못했으니 결국 고생했으나 낙방입니다.
시험에 낙방한 사람들에게 뭐가 있습니까?
재시험이 있죠.
곧 다른 종류로 또 시험이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에 그가 의지했고 사용했던 조건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거두어버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양육방법은 때로 혹독하게 보일정도로 하나님이 주권을 갖고 일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은 오직 환난 날에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어려운 일 있을 때 우리 자식이 내게 의논하지 않고 옆 집 아저씨 하고 상담하면 기분 좋을 리 없죠.
시험 가운데 있다면 마땅히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믿으십시오.
이 세상 누가 하나님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신실하게 인도해 주십니까?
이런 주님의 은혜로 시련의 한 고비를 또 넘기며 우리의 믿음이 정금같이 단련 돼 가는 줄 믿습니다. 아멘.
시련에 대한 마지막 교훈은 9절과 10절에 있습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시험에 관련 된 권면으로 좀 맞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시험에 관련하여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내용입니다.그 당시 성도들에게 여러 시험 중 생명의 위협을 받는 신앙의 핍박이 가장 큰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돈이 좀 있고 사회적인 지위와 배경이라도 있는 성도들은 그걸 이용해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분이 낮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야 어디에 도움을 호소합니까?
누가 구렁텅이에 빠진 그들을 도와주겠다고 나섭니까?
즉시 죽음에 넘겨지지 않았다면 보석금이 없어 태형을 당하고야 다 죽게 되어 풀려날 수가 있겠죠.
그래서 가난한 성도들도 인간인지라 부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비천한 처지를 한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높아짐을 자랑할지니라.
비록 천대받고 고난 당한다 할지라도 너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천국의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로마시대에 기독교인들의 순교의 현장에서 로마인들을 감동시킨 것은 사자밥이 되어 죽어가면서도 기품과 평안을 잃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였다고 합니다.
시련이 오면 어느새 돈 없이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고 좋은 배경 없는 우리 집이 한탄스러울 때 있습니다.
괜히 자기를 비하시키며 우울해하지 말고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고 당당하게 구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자기의 재물과 배경과 지위를 은근히 자랑하고 의지하는 성도들에게 경고합니다.
너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라.
시련을 피해 갈 수 있는 물질과 능력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기 위해 오히려 스스로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권한과 능력이 있는 데도 주님을 위해 스스로 낮은 데 처하며 고난 받는 것이야 말로 자랑할 만한 진짜 믿음이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신 말씀 기억나십니까?
부자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만큼 하나님보다 돈을 믿기 쉬운 게 인간입니다.
그러나 돈과 부귀가 심판의 날에 의지할 것 없는 허망한 것임을 생각하고 오직 낮은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라는 명령이십니다.
이번에 서0나라라는 책을 낸 오0필 감독은 중국 광저우에서 탈북자들의 외국공관 진입 장면을 촬영하다 중국 공안에 두 번이나 체포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17개월을 중국 감옥에 갇혀 인생의 바닥에 내려 앉은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섬기며 지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 먹을 게 없어 도둑질한 사람들의 처절한 모습을 보며 차가운 감옥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울었습니다.
사회로부터 냉대 받는 불쌍한 작은 자들과 함께 살며 사랑으로 모든 것을 나누며 지내 보니 지옥 같던 감옥이 천국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지독히 가난한 자들 틈에 하나님이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차가운 감옥에서 오 감독은 거기 계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영필아, 이곳에 두 번이나 오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나는 오랫동안 나와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나의 기쁨을 원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나의 슬픔을 함께 나누기 원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네가 젊은 시절 이렇게 기도했지?
주님의 아픔을 알기 원한다고 부르짖던 네 기도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향기로웠다.
그래서 내가 있는 이곳으로 너를 불렀다. 영필아.
예수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자신이 만든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낮은 곳으로 기꺼이 내려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하고 높은 데 두지 말고 주님의 낮아지심과 함께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을 닮은 낮아짐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때 당하는 무시로 우리 얼굴이 달아오를 때 우리는 주님의 낮아지심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요한 재물이 있고 내세울 좋은 조건이 있다면 참 감사합니다.
그러나 부요함도 가난도 우리의 시련과 아무 상관 없다는 게 오늘 말씀의 가르침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본을 받아 낮은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시련은 오직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만 이겨내는 줄 믿습니다.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을 견딘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때문입니다.
로마서8장18절도 말씀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련 중에 혹시 낙담하고 쓰러질 까 오늘 야고보서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앞에 오는 시련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온전한 기쁨으로 이겨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고린도전서10장13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련의 배후엔 우리를 성장시키고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기도로 지혜를 구하며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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