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과 병원을 찾으면 어디가 아파서 갔든 항상 의사가 보자고 하는 곳이 있죠?
‘혀 좀 내밀어 보세요’ 하고 건강을 체크합니다.
오늘 야고보사도가 성도들의 믿음을 체크하는데, 혀를 좀 내밀어 보라고 합니다.
혀를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보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답니다.
야고보사도는 ‘말’이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고 경고합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혀는 자기 몸을 더럽히고 자기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고 경고하죠.
잘 굴러가야 할 삶의 수레바퀴를 태워버리고 덜컹덜컹 거리며 인생길을 힘겹게 가게 만드는 것이 ‘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이 그렇게 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잖아요?
아침에 말 한번 잘못했다가 하루가 망한 적을 생각해 보면 과장 된 말이 아닙니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 인생이 꼬인 유명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말에 대한 교훈을 잘 깨닫고 축복된 언어생활을 하는 모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혈육의 동생입니다.
열두제자는 아니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뒤에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루살렘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됩니다.
1장1절에 보면 대상이 누군지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이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편지내용은 주로 성도들이 겪는 신앙의 문제들이겠죠.
주로 ‘시험의 문제’와 ‘믿음과 행위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지도합니다.
그 중 오늘 본문 말씀은 말에 대해 집중해서 다루고 있는 부분입니다.
1. 먼저 말에는 심판이 따른다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1절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이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나 성경교사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말을 할 때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말을 많이 하게 되는 지도자들의 책임은 더 막중합니다.
저희 같은 목사들의 경우 하나님의 입이 되어 말씀을 전해야 하고, 또 성도들의 입이 되어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니 말의 실수는 훨씬 더 두려운 것이죠.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 아주 강경히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말은 사람의 마음을 밖으로 드러냅니다.
그러니 마음에 숨겨진 것을 찾아서 심판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한 말로서 이미 모든 죄를 실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도 고난 중에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입으로 범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말을 실수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2절에서 말씀하죠.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화하고 돌아서서 ‘내가 말을 잘못했나’ 꺼림직 했던 경험들 있으시죠?
특히 사람들 많이 만나고 말을 많이 한 날은 실수했던 말들 때문에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실수의 차원이 아니라 말은 상상 이상의 위력을 발휘합니다.
2. 혀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세 가지 예를 들고 있죠.
3절에서는 사람의 혀가 말에 입에 물린 재갈과 같다고 합니다.
재갈 없이 말을 부린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말이 얼마나 힘이 셉니까?
서양에서는 아직도 힘을 측정하는 단위로 마력을 쓰잖아요?
옛날에 어떤 프로에서 말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성인 남자 18명과 말 한 마리가 줄다리기를 하게 합니다.
결과는 남자들이 싱겁게 끌려가 말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말의 속력을 말하자면 보통 경주마가 시속 65킬로를 달린다고 합니다.
말은 라틴어로 에쿠스입니다.
힘 좋고 잘 달린다는 의미에서 현대의 고급세단에 에쿠스 이름을 붙인 것이죠.
에쿠스의 엠블렘이 천마를 형상화 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강한 말을 사람 뜻대로 조종하는 것이 재갈입니다.
말의 입의 구조를 보면 앞니 여섯 개가 위아래 나있고 앞니와 어금니 사이에 공간이 있습니다.
그 앞니와 어금니 사이 공간에 재갈을 끼워 넣는 것입니다.
재갈에 묶인 끈을 좌우로 잡아 당길 때 아픔을 느끼기에 그 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방향 전환을 하도록 훈련합니다.
재갈은 작지만 힘센 말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큰 힘을 가진 것이죠.
작은 혀가 그렇게 사람 전체를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4절은 배를 조종하는 키를 예로 듭니다.
광풍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덩치 큰 배를 선장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작고 예쁘장하게 생긴 배의 키입니다.
그리고 5절은 혀의 위력을 작은 불씨에 비유합니다.
거대한 산악을 불태우는 산불도 작은 불씨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죠.
이렇게 혀의 위력을 재갈과 키로 시작해서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씨로 이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부분 사람들이 혀의 힘을 파괴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신창0 이란 유명한 절도 전과자를 아시죠?
신씨가 어렸을 때 집이 아주 가난해서 늘 기성회비를 밀렸다고 합니다.
그는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 하고 머리 한번만 쓸어 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씨가 5학년때 담임교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놈아, 돈도 안 갖고 뭐 하러 학교는 와, 빨리 꺼져'
신창0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그때 악마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런가 하면 중증외상외과 이국0종교수를 다 아실 것입니다.
이교수 어린 시절을 보면 신창0 이나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어려웠습니다.
아버지는 6.25때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2급 유공자였습니다.
가난은 늘 그림자처럼 그를 둘러쌌고 학교에선 병신의 아들이라고 놀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중학교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아서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갑니다.
이교수가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는 국가유공자복지카드를 내밀자 간호사들이 멸시하는 표정으로 환자가 많으니 딴 병원으로 가라며 내쫒습니다.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당해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 병원을 찾아갔을 때 이학0 이라는 의사를 만납니다.
그 의사는 이교수가 내민 복지카드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그리고 정성껏 이교수를 치료해 준 뒤 돌아가는 이교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그날, 이 말에 이국0 교수는 내가 저 분처럼 훌륭한 의사가 되어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이학0 의사의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 놓은 것이죠.
우리가 이런 극적인 말의 위력을 경험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매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누군가를 낙담시키기도 하고 힘을 주기도 합니다.
정말 한 마디 말에 힘이 쭉 빠진 적이 있잖아요?
아침에 학교 가는 아이들에게, 출근하는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하십니까?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뇌과학에 따르면 우리가 뇌의 지시에 따라 말하기도 하지만 뇌가 말에 의해서 세뇌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젠 포기해야지’,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잘 될 리가 있나’ 이런 말을 자꾸 내뱉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뇌가 그걸 사실로 받아 들여서 신경계에 영향을 주고 진짜 무기력한 느낌에 점점 빠져 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을 더 자주 하게 되죠.
왜 그렇습니까?
물론 기대했던 일들이 잘 안된 경우가 많다보니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충격을 좀 줄이려는 방어기재가 작동을 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냅니다.
3. 혀가 태생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혀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가 태생적으로 악해서 온 몸을 더럽힌다는 것이죠.
아무리 단정하게 인격을 가꿔 놓아도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는 순식간에 그 인격을 무너뜨리고도 남습니다.
명품으로 잘 차려입은 재벌가 가족들 입에서 저질스런 말들이 쏟아져 나올 때 사람들이 경악했잖아요?
말로 그 속의 더러움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히는 게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게 너희를 더럽힌다’
모든 말들이 죄의 본성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보통 우리가 하는 말 안에는 자기중심, 이기심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죠.
상냥하고 교양 있고 남을 칭찬하는 말들은 어떨까요?
그런 말들도 엄밀히 보면 다 자기 이익을 따지고 하는 것입니다.
남을 걱정해 줄 때 조차도 사람들은 상대방보다는 내게 조금 더 마음이 쏠려있게 마련입니다.
제가 아는 권사님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몇 년 전 남편이 위암 판정을 받았는데, 당장 드는 생각이 ‘우리 남편 이제 어떡하지? 너무 불쌍하다’ 이런 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나 과부되는 건가? 남편이 월급을 안 갖다 주면 난 뭘 해먹고 살지?’
이 생각이 먼저 들더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남편을 걱정한다 해도 속마음은 내 걱정에 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 나쁜 말을 할 때야 어떻겠습니까?
말로 사람을 완전히 죽여 버리려고 하잖아요?
‘인격 살인’이죠.
그러니 7절에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자들은 혀를 길들이고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8절에서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하죠.
혀를 길들일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 혀를 길들여 착한 말을 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길들일 수 없지만 성령께서는 길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시편141편3절에서 이렇게 기도하죠.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우리 입이 예수님의 말을 닮아가기 위해 성령께서 도와주시길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힘써 우리는 남을 험담하는 말, 부정적인 말, 낙담하는 말, 기를 꺾는 말, 부정직한 말이 점점 바꿔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야고보사도의 우려는 좀 더 심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을 부르는 혀가 남을 험담하고, 저주하고, 욕하는 혀와 같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입니다.
단물이 나오는 샘에서 짠물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샘의 근원의 좋으면 좋은 물이 나오고 근원이 나쁘면 못 먹는 물이 나오죠.
만일 좋았다 나빴다 한다면 그 물은 그냥 나쁜 물입니다.
나쁜 것이 조금만 섞여도 나쁜 물이잖아요?
그래서 우리 입에서 나쁜 말이 계속 나오면 근원이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각심을 갖고 우리의 언어 생활을 잘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우리 언어생활을 고쳐나가야 할까요?
먼저 항상 믿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현실을 판단하고 말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하면 현실은 불투명하고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보장된 게 없잖아요?
우리에게 있어서 최대의 변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기 시작하셨다면 끝까지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갈라주시고 여기까지는 인도하셨지만, 저 가나안땅은 마치 네 힘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양 좌절하고 원망하다 결국 그 땅을 밟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뭐라고 가르치십니까?
바울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모든 것은 ‘예스’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민수기 14장 28절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 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우리가 말하는 대로 이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도 불신과 부정적인 말을 그치고 소망과 감사의 말을 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또 우리 가족에 대해서도 말을 바꿔야 됩니다.
직장생활이나 특별히 가깝지 않은 사람들과는 그래도 격식을 차리고 말을 조심하는 편입니다.
그런 긴장이 무장해제 되는 곳이 어딥니까? 바로 집입니다.
가족 앞에서는 긴장하지 않고 속에 있는 대로 툭툭 말을 던집니다.
친한 사이에서도 그러기가 쉽죠.
그래서 우리가 말로 상처를 심하게 받았다하면 거의 가족이나 친한 사이에서입니다.
가장 편안하고 행복해야 할 곳에서 가장 마음이 상하는 것이죠.
편하다고 속에 있는 대로 말하기 시작하면 단언컨대 조만간 그 관계는 파탄이 납니다.
그럼 마음에 있는 말은 하지 말고, 있지도 않은 위선적인 말을 해야 하냐고 물으실지 모릅니다.
우리 속이 완전하다면야 내 속에 있는 대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제일 좋겠죠.
그런데 말이 지옥불에서 나온다고 하잖아요?
속이 좋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땅에선 남을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좋은 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죄인이고 상대방도 죄인이기 때문이죠.
우리 말이 너무 속다르고 겉다른 것을 좀 일치시키려면 남들을 볼 때 장점을 보는 습관을 들이면 됩니다.
항상 단점을 먼저 생각하면 자식들에게도 부정적인 말부터 하기 쉽잖아요?
우리 식구들을 보면 다 나름의 장점이 있습니다.
단점을 먼저 보기보다 장점을 먼저 생각하면 고맙고 대견한 생각이 들죠.
아무래도 긍정적이고 칭찬하는 말을 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 늘 고마운 점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도 항상 봉사하는 분들의 수고를 당연시 여기면 안됩니다.
물론 마음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걸 서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깨끗한 예배당에서 은혜롭게 예배드리고, 교제하고, 맛있게 식사하는 것 다 드러나지 않는 헌신과 봉사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맡은 몫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항상 서로의 공을 인정하고 ‘수고했다, 고맙다’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서로를 위해주며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야고보사도가 교회를 향해 그걸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에 그게 안되고 있었다는 뜻이죠.
또 집에서 늘 수고하는 부모님들, 각자가 애써서 할 일을 해내고 있는 가족들 서로 토닥이며 행복한 가정생활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말실수로 삶의 수레바퀴가 삐걱거린다면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아무리 좋던 사이라도 말다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얽히며 살아가는 게 정 싫다면 오지로 가서 오지인이 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다 그런 상황이 벌어질 때는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갈등의 내면엔 상대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셔야 합니다.
만일 나보다 잘나고, 어렵고,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 같으면 절대로 관계가 그렇게 악화되지 않습니다.
내가 아쉬워서 먼저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려고 하겠죠.
이건 하나님께서 아주 안 좋게 보시는 면입니다.
본문말씀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형제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느끼게 되는 게 하나님이 우리 이 평범한 믿음의 자녀들을 너무 귀하게 여기신다는 거예요.
대단하게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꾸물꾸물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축복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그러니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저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또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내게도 문제가 있지 않았냐를 철저히 짚어 봐야 합니다.
나빠진 관계는 대개 한쪽만 잘못하거나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거의가 쌍방과실입니다.
저도 지난주에 남편이 농담으로 한 말에 감정이 좀 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몇 시간을 무뚝뚝하게 대하다 내게는 문제가 없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게 문제가 왜 없겠습니까?
결국 제가 마음을 풀자,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목사 두 사람도 이러고 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야고보서의 결론은 우리의 믿음은 행위로 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고 믿는다면 힘써 노력해야 하는 것이죠.
신앙생활을 하며 조금이라도 나아진 부분이 있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저절로 된 게 아닙니다.
기도하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기에 기도하는 습관이 된 것입니다.
주일성수 하려고 노력했기에 꾸준히 예배하며 복된 믿음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말씀 읽기도, 전도도, 친절한 말씨도 다 노력해서 얻어진 것입니다.
앞 1장25절에서 이미 야고보사도가 선언해 놓았습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교회에서 좋은 말, 남을 세워주는 말, 나를 격려하는 믿음의 말을 훈련하시길 권면합니다.
최근 경제지표가 우리가 얼마나 혹독한 사회경제 속에서 버티고 있는지를 보여주더군요.
음식점 10곳이 개업하면 9곳이 문을 닫았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런 불황 속에서 어렵게 생활을 꾸려 가다보면 편한 가족들과 친한 사이에서 더 상처를 주고 받기가 쉽습니다.
말이 우리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게 하지 맙시다.
얼른 혀의 불을 끄시기 바랍니다.
함께 힘든 인생을 헤쳐가는 서로를 말로 더욱 격려하고 위로하며 삶의 수레바퀴가 형통하게 굴러가도록 사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8년8월19일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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