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야고보서1장19절-27절)

남수연 2025. 2. 2. 01:22

https://youtu.be/dsDH5bYLvaA

 

 

야고보사도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시련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앞에서 잘 가르쳐 주었죠.

어차피 다가오는 시련을 기쁘게 맞이하고 참고 견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만이 우리 삶이 아닙니다.

고난을 제외한 내 인생의 다른 부분도 살아야 하죠.

밤새 근심으로 지샜다 해도, 날이 밝으면 일터로 나가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야 하잖아요?

오늘 말씀은 고난 중에도 그런 일상을 믿음으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변함없는 일상을 잘 살아내면 그 가운데서 행복도 얻고, 어느덧 시련의 때를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을 따라 살아가야 할지를 오늘 말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사도는 편지를 이런 형식으로 씁니다.

먼저 1장에 성도들에게 권면할 말들을 간단히 요약합니다.

그 다음 2장부터는 그중 한 가지 주제씩을 택해서 좀 더 심도 있게 설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서를 읽다 보면 앞에서 나온 이야기가 뒤에 다시 또 나옵니다.

전에 시련과 인내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 보았는데, 뒤에 보면 또 나옵니다.

부한 자와 낮은 자에 대해 지난 주에 살펴보았는데, 뒤에 보면 또 나옵니다.

이런 구조를 파악하지 않으면 야고보서는 왜 이렇게 산만하게 썼지?’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사도는 일상에서 지켜야 할 믿음의 태도를 권고합니다.

19절 안에 세 가지 권고가 들어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듣기, 말하기, 분노 다스리기입니다.

 

1. 듣기는 속히 하라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죠.

말하기는 더디하고 성내기도 더디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해당되지만 주로 사람 관계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1)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기준이고 법입니다.

사람이 선악을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알고 사리 판단을 잘 하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그걸 잘 하는 사람은 안정되고 믿음직하고 지혜로워 보이죠.

그런데 사람마다 가진 판단의 기준은 다릅니다.

그렇기에 같은 계엄 선포를 두고도 의견이 양분되는 것이죠.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시는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창조하신 세상에서의 절대적 진리고 기준입니다.

그것을 지키는 게 피조물에겐 가장 완벽하고 복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말씀의 잣대로 사리를 판단하면 절대 틀림이 없습니다.

내 머리를 굴리고 수단과 방법을 다 써 본다 해도, 결국 말씀이 옳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게 시대에 뒤떨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를 볼 때 성경의 표준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이 선구자였습니다.

시대를 이끈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기준으로 정치도 하고, 사회운동도 하고, 세상을 선도했다는 걸 역사가 증명합니다.

말씀은 살아가는 전반에서 우리를 지혜롭게 합니다.

시편11998절은 말씀합니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갈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저는 이 잠언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8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하나님 말씀을 좀 더 알기 위한 간절함과 사모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옛날 돈이 없어서 서당에 못 가는 아이들이 문설주 뒤에 숨어서 아이들 글 읽는 소리를 귀동냥하는 그런 모습이 상상이 되죠.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 하는 것이야말로 복의 시작입니다.

아침마당 MC였던 김재0아나운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김재0장로가 대학생 때, 아는 전도사님이 성경통독 캠프를 열었습니다.

지금은 성경통독 강사로 잘 알려진 조병0목사입니다.

지금 조목사님 교회는 이름도 통독교회입니다.

당시 성경 통독캠프는 일 년에 두 차례 열렸는데, 일주일 합숙하며 성경 한 권을 다 읽는 프로그램입니다.

김재0장로도 성경을 배우고 싶어서 참여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각자 성경을 읽어서는 일주일에 1독을 절대로 못합니다.

누군가 2배속 이상의 속도로 성경을 앞에서 읽어줘야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눈으로 따라가며 읽는 것이죠.

조목사님이 대학생 김장로에게 네가 좀 성경을 읽어라고 맡긴 것입니다.

빨리 읽을 뿐 아니라 틀리지 않아야 하고 하나하나 정확한 발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루 중 밥 먹는 시간을 빼고 일주일에 성경 한 권을 다 읽어야 하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닌 것이죠.

그런데 5년 동안 열 번의 캠프에 참석해서 봉사를 합니다.

그 뒤 김재0장로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지만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없어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미래가 막막하게 된 것이죠.

잠시도 아버지를 혼자 둘 수가 없으니 손발이 다 묶여 무슨 계획을 세우겠습니까?

그날도 병실에 켜있는 TV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거기에 KBS아나운서를 뽑는다는 광고가 나옵니다.

저기에 한번 지원해 볼까?

그렇게 준비해서 필기시험에 합격합니다.

실기 테스트는 당연히 합격이죠.

아나운서의 정확한 발음연습을 성경통독으로 다 했잖아요?

김재0아나운서 발음이 단어를 씹어 먹듯이 똑똑 떨어지고 정확하잖아요?

성경 말씀을 배우고 싶어 갔던 그 캠프에서 이미 하나님이 아나운서로 준비를 시켜주신 것입니다.

아침마당 아나운서를 하면서도 그 속에 복음을 녹여서 진행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는 중심엔 하나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 영의 양식입니다.

병든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입맛이 없다는 것이죠.

병든 사람이 입맛이 당겨서 식사를 많이 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영의 양식에 대한 입맛이 떨어졌다면 내 신앙이 병들어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세상 것들로 너무 배를 불려서 정작 영이 굶주린 것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성장하려면 반드시 성경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설령 읽지 못할 때라도,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 하는데, 그 생각이라도 놓치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하잖아요?

그것은 주님이 하신 말씀과 매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항상 가까이 하는 모두가 되시길 정말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 ‘듣는다는 말 속에는 순종이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 아이는 말을 잘 듣는다고 할 때, 귀로만 듣는다는 게 아니라 당연히 부모 말대로 잘 따른다는 것이잖아요?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공부하고 설교 듣는 것은 좋아하는 데,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수준이 곧 내 신앙의 수준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야고보사도는 기가 막힌 비유를 가져옵니다.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잊어버리거니와

말씀을 거울에 비유한 것입니다.

거울과 말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나를 비춰서 보여주는 것이죠.

사람이 아침에 나올 때 다 거울을 봅니다.

요리조리 얼굴 모양새를 살펴보고 나옵니다.

그런데 거울 속에서 본 자기 얼굴을 일하면서 한번이라도 생각합니까?

다시 거울 볼 일은 있을지 몰라도 먼저 보았던 거울 속 자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23절에 자기 생긴 얼굴이라는 말은 사람의 원초적인 모습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본색을 가리고, 가면을 쓰고 그런 상태가 아닌 본성적인 얼굴을 말씀이라는 거울이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보여주시는 내 모습은 아름다울까요?

내게 있는 오염되고 더러운 모습들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을 힘써서 닦아 내고 깨끗이 해야 하겠죠.

그런데 거울 속 자기를 보고 잊어버리듯이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결국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또 다른 거울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이 사람도 말씀의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그 거울은 특별히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처음 들여다 본 거울은 불완전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당시 유대교 출신 성도들이 들여다 보는 거울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전히 할례와 각종 절기와 의식법을 못 벗어난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그런 종교의 형식을 아무리 지켜도 사람이 온전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은 예수님이 주신 복음과 새계명입니다.

성도들은 그래도 그걸 실천하려고 애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계속 들여다 보고 있는 자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가족에게라도 사랑을 베풀지 못하면 자책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야고보사도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말씀, 율례, 계명, 교훈 안에는 그것을 지킬 때 유익한 복이 선물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성내지 말라는 말씀 속에는, 그러면 너와 네 가족 사이가 평안하리라는 보상이 들어 있는 것이죠.

우리가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마음에 부딪치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내 모습을 비춰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만 해도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내 모습을 보았다고 저절로 고쳐지는 게 아닙니다.

김재0아나운서가 처음 아나운서가 되고 춘천으로 발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간병을 위해 새벽 뉴스를 하고 업무를 마친 뒤 오후에 기차 타고 서울로 옵니다.

간병하는 분과 교대해서 대여섯시간 병원에 있다가 밤 기차를 타고 다시 춘천으로 내려가는 생활을 6년 이상 했다고 합니다.

그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대견하게 보았겠습니까?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아나운서가 되었잖아요?

그런데 춘천방송국에 다니다 보니 서울 TV로는 볼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던 것이죠.

그러던 중 사랑의 리퀘스트란 프로에서 백혈병에 걸린 성덕 바우만을 돕자는 특별 방송을 합니다.

거기에 김재원장로가 드디어 아나운서로 나오게 된 것이죠.

방송을 잘 끝내고 병실에 오니 병실 식구들이 다 너무 기뻐해 주는 거예요.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런데 창가 쪽 병실에 두 다리가 절단되서 입원해 있는 아저씨가 김장로를 부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방송 끝나고 조혈모세포는 기증하고 왔나?

헌혈을 하고 왔나?

그 말이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때리는 것 같았습니다.

죽음 앞에 선 청년을 돕자고, 어쩌면 눈물마저 글썽이며 방송을 잘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던지요.

그래서 나중에 가서 조혈모세포를 기증하고 헌혈도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아나운서로서 말에 얼마나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는지를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정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배우고 그대로 살아야 복됩니다.

말씀이 내게 부딪칠 때, 속히 결심하고 순종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말하기, 그리고 성내는 문제입니다.

1) 말하기를 더디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관계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를 대할 때도 말에 신경을 써야 하잖아요?

자식들도 크면 손님에게처럼 말해야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려면 항상 신중하게 대화하는 게 좋죠.

그런데 말을 더디하라는 것은 그런 뜻만 있는 게 아닙니다.

-좀 더 상대방의 심경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는 것은, 주님은 우리에게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자식의 마음을 살피듯이 주님은 우리 마음을 살피십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해 주면 좋을지를 주님은 생각하십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가족과 형제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라는 것이죠.

-또 말하기를 더디하라는 것은 성급하게 생각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똑똑해서 넘겨짚기를 잘하죠.

때로 큰 기대를 했다 실망도 크게 합니다.

또 일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너무 미리 낙담을 하기도 합니다.

추측에 근거해서 말하고 움직이기보다는 좀 사태를 살피며 뭉근하게 반응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또 더디 말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을 덮어주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말을 많이 하다보면 남의 허물을 들추기가 쉽죠.

말이 경솔해서 서로 시험에 빠지지 않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성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화약고가 명절이라고 하죠.

모이면 화병 터진다고 합니다.

요즘은 뉴스 보며 너무 화를 많이 내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다 화내며 삽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사도가 성내는 것을 중요한 문제로 다루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사용한 성낸다는 단어는 인간의 내면 심층부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분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성격이 아니라 죄의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리 잘하다가도 화를 한번 내고 나면 그 바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내는 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성냈다고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인입니다.

동생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셨고 자기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이 하나님께 성냈다고 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하죠.

분노는 결국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이 다양하지만 성난 감정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사람이 왜 성을 낼까요?

상황이 자기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보통 화가 나죠.

그것은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을 자기가 통제하려는 전제하에, 그대로 되지 않았기에 성이 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모든 상황의 주권자라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도 내 생각에 동조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화 나잖아요?

사실 가족이 왜 그래야 합니까?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내가 조종하려다 안된다고 화내면 그거야말로 안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나오는 대로 화를 내고 자기는 뒤끝이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속에서 나오는 분노와 화를 배설물처럼 내뱉고 시원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성내고, 욕하고, 화내면, 내 속이 시원하게 비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러운 것들도 더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국민들 화가 많이 납니다.

현재 상황을 사회정의와 신앙 양심에 따라 바르게 분별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대로 역사가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5공화국 군사정권 시대가 있었겠어요?

미얀마에 군사 쿠데타가 왜 성공했겠습니까?

역사는 우리가 원하고 애를 써도 그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역사는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자꾸 성내지 않게 마음을 잘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와 내 인생의 주권자이시고 하나님이 공의로 모든 것을 다스리실 것을 인정하고 공분이라 할지라도 자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꼭 화를 내야 하는 찰떡 같은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지난 주 제가 아끼던 가을 코트를 세탁소에 맡겼다 찾아왔는데, 세탁을 잘못해서 탈색이 되고 옷감이 다 낡아서 돌아왔습니다.

그럴 때 화를 내고 따져야 할까요, 화를 내지 말아야 할까요?

제가 처음엔 좀 화가 섞인 목소리로 따지며 말하려다 그것도 마음에 용납이 되지 않더군요.

내가 목사라는 걸 알면, 아니 교회 다닌다는 것만이라도 알게 된다면, 내가 화내는 걸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게 밝혀졌을 때 부끄러울 것 같다면, 모를 때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맞는 것이겠죠.

겨우 참으며 화를 낼 듯 말 듯, 나 자신과 밀당을 하다 다시 세탁을 해 보는 걸로 했습니다.

결과는 똑같았지만 그렇게 끝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화나는 마음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성질부린 선지자가 있죠.

요나선지자가 생각하기에 내 민족을 괴롭히는 니느웨를 구원하신다는 게 너무나 부당했던 것이죠.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께 성내는 요나를 보며 괘씸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를 달래시죠.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보고 배웁니다.

성내는 게 정당하다 할지라도 우선 멈추고 이런 믿음의 필터를 한번 거치는 게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다면, 정말 큰 화를 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화를 내고 관계가 나빠지면 결국 수습하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내게 화냈던 사람, 그 얼굴 인상까지 끝까지 기억합니다.

화해가 되고나서도 나중에 또 불화하게 되는 도화선이 되는 것입니다.

화를 참아서 생기는 화병보다 화내서 불거진 갈등이 더 고통임을 생각하고 화를 잘 다스리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새 마음과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생각과 그 말씀들이 내 마음에 머무는 상태가 길수록 성숙한 신앙인이 됩니다.

그 계명들을 지킬 때 인격이 변하고 말씀 속에 동봉되어 있는 복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렇게 내 믿음이 조금씩이라도 성장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지치고 회의가 옵니다.

그러면 삶의 시련들이 더 힘들고 살 맛이 안 납니다.

말씀을 지키도록 피나는 노력을 할 때 내 믿음이 진짜라는 걸 스스로 알게 됩니다.

말씀을 지킬 때 에너지가 모여 생동감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런 노력을 통해 말씀이 나의 인격에 잘 입혀져서 예수님의 인격이 점점 더 드러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