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에서 ‘시련과 인내’ 만큼 중대 이슈가 바로 ‘믿음과 행함’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입니까, 행함으로입니까?
당연히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럼, 믿기만 하면 주님의 계명을 하나도 안 지켜도 구원받습니까?
대답이 망설여지죠.
믿음이 진실이라면 그래도 구원을 받는 게 맞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우편에 있던 강도가 십자가상에서 구원을 받았잖아요?
강도가 예수님을 믿은 것 외에 실제 행할 수 있던 것은 하나도 없었잖아요?
그러나 믿고 바로 죽지 않는 우리는 행함이 따라야 하는 것이죠.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뻔한 것인데 이렇게 길게 썼다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본문에서 행함을 더 강조하는 걸 보면 당시 성도들에게 행함이 약했다는 건 알 수 있죠.
그것이 비단 야고보서 성도들만의 문제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는 데는 늘 부족하죠.
본문 말씀에서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짝이 잘 맞는 믿음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1. 야고보사도가 행함을 강조하는 이유를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아주 요긴한 내용이니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 말씀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행함으로 구원을 받느냐의 문제는 당연히 아닙니다.
지금 야고보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은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흩어졌던 사람들입니다.
행함이 없는 성도들의 구원을 의심하며 행함을 강조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말씀을 행하기만 한다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믿음은 사실 받는 것입니다.
안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면 어쩔 수 없이 믿는 것이죠.
아무리 믿으려 해도 안 믿어지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함은 믿음이 있어도 자기가 안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 하셨지만 저 사람은 사랑하기 싫어, 그러면 사랑 안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행함이 부족한 성도들을 바로잡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1) 야고보서의 성도들이 말씀대로 행하는 데 취약했다면 왜 그럴까요?
신앙생활의 나태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종교에서 요구하는 행위를 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행위 구원, 행위 종교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속죄하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행위 종교에 대한 복음의 차별성입니다.
구약성경만 믿는 예수님을 안 믿는 유대교는 행위 종교입니다.
율법과 유대교 전통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믿거든요.
유대교가 구약성경을 믿는다고 해서 기독교의 뿌리는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는 성경에서 완전히 벗어난 세속 종교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성도들을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구약성도들이 십계명과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니 규범을 주셔서 세상과 구별되게 살게 하신 것이죠.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율법의 가장 큰 줄기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계명과 똑같이 구약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주신 것이죠.
그런데 그 알맹이는 빠지고 율법 조항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만들어 버린 게 유대교입니다.
할례받으면 하나님 백성이고, 안식일 지키면 하나님 백성이라는 행위 종교를 만들어 버린 것이죠.
초기 성도들의 신앙에서, 그 유대교와의 구별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행함보다 믿음을 더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행위 구원에 대한 생각을 바꿔주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율법이나 행위, 그런 것들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의 파트너인 행함이 점점 빈약하게 되어 버린 것이죠.
2) 현대교회도 행함보다 믿음 쪽으로 치우친 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기 전에 세상 종교를 먼저 경험합니다.
세상 종교는 다 행위 종교라고 했죠.
이슬람 경우는 알라신을 따르고 선행을 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고향인 메카를 평생 한번 참배하는 것과 메카를 향해 매일 다섯 번 기도하는 것도 종교의 의무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꼭 가야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다 의아하게 생각하죠.
그런데 세속 종교들은 다 그렇게 행위를 조건으로 구원과 복을 보장합니다.
복음이 들어올 때 아무래도 세상 종교와 구별되도록 믿음을 강조하게 된 것이죠.
그래도 우리 신앙 속에 그런 인식들이 좀 섞여 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각종 봉사, 전도, 이런 것을 구원과 축복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을 잘 담기 위한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3) 또 현대 교회가 행위보다 믿음을 더 강조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앙은 천주교 천 년 역사 동안 행위 종교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구약 성도의 신앙이 행위종교가 된 것과 같은 것이죠.
바른 신앙이 끊임없이 변질되고 왜곡된다는 것을 이런 역사를 통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는 게 무엇인지를 성경에서 잘 배우고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천주교에서 가까스로 개혁해 성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 시대에는 유대교 때문에 믿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고, 우리 개신교는 천주교 때문에 믿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천주교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배제하려고 한 것이죠.
사람들 입장에서야 엄격하게 지켜야 할 게 없으면 더 좋죠.
예수님의 대속을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그것으로 끝이라면 우리 정말 너무 편하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의 구원을 미래적인 것으로 보면 행함이 부족하게 됩니다.
구원을 죽은 뒤 천국에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당장 삶을 바꾸려는 동기가 약해지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야고보 당시에나 지금 현대 교회에서나 행함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본문만 해도 얼마나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까?
14절, 행함 없는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7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2. 행함이 없는 믿음의 위험성을 자세한 실례를 통해서 경고합니다.
1)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는 현재 상황을 예로 듭니다.
15절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지금보다 1세기의 삶은 더 궁핍했을 것입니다.
잘 사는 나라 축에 드는 우리 사회에도 음지에서 궁핍하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공익광고에 나온 한 자립청년은 라면 한 개를 세끼에 나눠 먹으며 버틴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끼니를 굶고 교회에 나온 가난한 성도들을 보고 입으로만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그 말이 허기에 지친 사람들의 배를 실제로 배부르게 할 수 있습니까?
집에 가면 냉골인데 그 말대로 몸이 따뜻해지겠습니까?
행함 없는 믿음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실체가 없는 공허함이라는 것이죠.
물론 야고보서의 성도들은 대개가 가난했습니다.
서로가 가난하다 해도 아무렴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형제를 챙길만한 능력을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야고보 당시 교회에도 금가락지 끼고 화려한 옷 입은 성도들이 있다고 했잖아요?
절대적 빈곤과 위기가정에 대해서는 해당 교회가 힘써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를 가졌든 행함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죠.
선행을 베풀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게 아니라, 죽은 믿음이라 선을 베풀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펄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배고픈 사람에게 전도지를 주고 싶다면 샌드위치를 전도지에 싸서 주라’
2) 행함 없는 믿음은 진짜 믿는 것인지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18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행함이 없는 데 무슨 수로 믿음을 증명해 보이겠냐는 것이죠.
입으로 백번을 시인해도 행동이 그걸 뒷받침 하지 않는다면 누가 보이지 않는 믿음을 있다고 인정하겠냐는 것입니다.
임금 체불로 근로자 눈에 피눈물 나게 하고, 자기는 고급아파트에서 비싼 음식 차려 놓고 일용할 양식을 감사하는 악덕 고용주의 기도가 믿음을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행함이 있는 사람은 이웃에 도리를 다 하며 이게 바로 내 믿음의 증거라고 한다는 것이죠.
3)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기분 나쁘게 귀신에 빗대죠.
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신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으십니다.
천상과 지상의 모든 존재들은 다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귀신조차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가 타락한 존재입니다.
천사가 어떻게 타락하냐? 아담도 타락했는데 왜 천사가 타락하지 못합니까?
하나님은 인격적인 피조물에는 다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더 하나님을 잘 알겠습니까, 귀신이 더 잘 알겠습니까?
귀신들은 우리보다 더 하나님을 잘 압니다.
하나님만 신이시고, 신의 위엄과 권능을 경험한 그들은 두려워 떱니다.
그러나 귀신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창조주께 반역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종말의 심판을 지연시키려고 하나님의 뜻을 계속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구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켜 순종하는 행함이 동반해야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죠.
4) 행함으로 인정받은 구약성경의 두 사람을 예로 듭니다.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쳤을 때, 그의 믿음을 인정받았다는 것이죠.
이삭을 제물로 바친 행위가 아브라함에게 이미 있던 믿음을 확증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뤄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죽은 이삭이라도 다시 살려 주실 것을 믿고 제물로 바쳤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에 행할 수가 있는 것이죠.
기생라합은 여리고성에서 여인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행객들로부터 하나님이 오래 전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생존이 불가능한 광야에서 40년을 지키시고, 이제 곧 자기가 사는 가나안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여행객들 사이에 만연한 풍문이나 과장이 아니라는 게 믿어졌습니다.
믿었기에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빼돌린 것이죠.
22절,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믿음과 행함은 굿 파트너입니다.
어느 한 쪽이 약해지면 다른 한쪽도 약해집니다.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믿음이 강해지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누가복음6장46절,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예수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괘씸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 가지고는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지켜보지 않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말씀대로 지켜보지 않으면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잘 모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면 그걸로 다른 사람만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야고보사도가 이 편지를 쓰기 이십 년 전, 초대교회 때 성도들의 믿음은 곧 행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살은 다 발라내고 남은 가시로 남을 찔러대는 믿음이 되어 있는 것이죠.
그것을 야고보사도가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단호한 어조로 행함을 독려하는 것입니다.
3. 이 모든 것을 우리가 모르지는 않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나님 말씀, 예수님이 주신 계명은 정확히 우리 본성과 반대라고 생각하면 맞습니다.
그러니까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죠.
우리 믿음을 실천할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과 나 자신입니다.
(1) 하나님께 대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실천을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의외로 나를 위해 이런 저런 것을 행하라고 구체적인 명령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네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신 말씀 정도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식하려면 실제적인 방편들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기도하는 것, 말씀 묵상하는 것, 예배하는 것,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실체잖아요?
그런 실제적인 방편들로 내 생활 속에서 믿음의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하나님이 실재하심을 점점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 신앙이 나의 인격을 다해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분량, 정해진 장소, 이런 신앙의 루틴을 꼭 만들어가시길 권면드립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신앙의 습관들이 형성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지 항상 막연합니다.
대상을 분명히 알면 어떻게 섬길지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세상 종교들처럼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해라 그런 방법을 정해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이런 신앙의 기본기를 잘 다져가야 한다는 것을 꼭 아시길 바랍니다.
(2) 이웃 사랑에 대해서입니다.
이웃에 유익을 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걸 믿고 기회가 되면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 발자국들이 우리 인생에 무수히 찍히게 살아야 하는 것이죠.
이 말씀은 설명보다 한 성도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투자회사 골드만 삭스에서 십억 연봉을 받던 한국인이 있습니다.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노숙인 사역을 하고 있는 조성민대표입니다.
노숙인은 경제 강국 미국의 어두운 면이죠.
현재 백만 명 가까운 노숙인들이 있고, 그 숫자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조대표가 골드만삭스에서 출장을 다닐 땐 늘 퍼스트 클래스나 비즈니스석을 탔고, 오성급 호텔에서 지냈습니다.
회사가 얻어 준 집은 월세가 몇십 년 전인데도 이천만 원이 넘었습니다.
조대표는 미국 연봉 상위 1%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만족이 없었다고 합니다.
눈에 상위 0.1%로 돈을 버는 사람들만 보였습니다.
그러니 행복과 만족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지금은 홈리스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노숙자 사역이니 우리나라 노숙자보다 더 나을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우리나라 노숙자분들은 술에나 취해 있지만 미국 노숙자들은 다 마약에 취해 있습니다.
상위1%로 살던 사람이 그런 사람들을 정말 형제같이 인격적으로 대하는 게 보였습니다.
대개 베푸는 사람들은 도움받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차별하잖아요?
조대표는 조립식 모듈러 주택을 동네 단위로 지어 노숙자들에게 제공하는 기업을 이끌고 있습니다.
길에서 음식을 주고, 현금을 주는 것으로는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죠.
각자 살 집을 주고 동네를 만들어 주니까 그 사람들이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조대표가 이런 말을 합니다.
골드만삭스에 다닐 땐 머니가 99%고 의미는 1%였지만, 지금은 머니가 1%이고 의미가 99%라고 합니다.
똑같은 100이지만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남을 위해서만 살아도 충분히 행복하고, 나만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죠.
입으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작은 도움이라도 늘 행하며 산다면 우리도 그런 행복을 맛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
(3) 나 자신에 대해서 지켜야 할 말씀도 계속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행복을 위해 주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말씀은 나 자신을 위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대번에 내 마음 상태가 달라지잖아요?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도 나를 위해 지키는 것입니다.
비판하는 입을 절제하는 것도 나를 위해 지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주신 말씀들이 성경에 너무 많습니다.
이웃에 베풀며 행할 뿐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이런 말씀들을 행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야고보의 편지를 받을 성도들은 시련 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힘든 데, 예수님을 더 열심히 따르라고 한다면 짜증이 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 삶에 크던 작든 고난이 없을 때가 없잖아요?
고난이 없는 게 인간에게는 가장 큰 고난입니다.
고난 없는 인생의 권태와 공허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되잖아요?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 인생이 진부하다 권태롭다, 그러다 고난이 덥석 찾아오면 정말 모공까지 다 긴장하게 되죠.
전쟁 중엔 정신질환자도 줄어든다는 통계가 있다고 하잖아요?
미국 사회에서 연봉 상위1%를 살았던 조성민대표에게 삶에서 느끼는 보람은 겨우 1%였습니다.
조대표가 99% 보람있는 인생을 택한 이유에는 역시 고난이 있었습니다.
첫째 딸이 희귀병에 걸려 열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딸은 지금 서른 다섯 살까지 살고 있지만 정신과 신체엔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정상인이 아니지만 그 딸은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느끼게 한다고 하더군요.
남들이 보기에 불쌍한 장애인이지만, 딸을 존귀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았기에, 홈리스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내 삶이 어렵다 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실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삶의 시련은 항상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한다면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남도 살리고, 나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굿 파트너인 행함과 항상 즐겁게 동반하는 삶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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