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의 땅, 가나안땅의 정복 전쟁이 일단락되었습니다.
아직은 가나안땅에 남은 부족들이 많았지만 살면서 정복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삶이 그렇죠.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살아가면서 정복해야 할 안팎의 적들이 여전히 남아있잖아요?
오늘 본문은 가나안정복전쟁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단강 동쪽 길르앗땅을 분배받은 르우벤지파와 갓지파와 므낫세 반지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이 가나안땅의 동서남북 경계를 알려주십니다.
이외 지역 다른 민족들의 땅을 점령하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에게 주셨던 동쪽 경계선은 요단강까지입니다.
요단강 건너 동쪽에 있는 길르앗 땅은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이죠.
아니, 이런 중요한 일에 하나님의 계획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까?
네,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 중 하나님의 뜻대로만 따라서 여기까지 와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이 두 지파 반이 길르앗땅을 차지함으로 본래 약속받은 땅보다 국토가 절반 정도가 더 커졌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달랐던 이 미스테리한 영토 획득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과 신앙과 삶의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1. 드디어 정복전쟁이 끝나고 요단강 동편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들이 자기 소유지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9절,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
가나안땅 정복전쟁이 시작되고 약 7년이 지났습니다.
땅 분배가 다 끝나고 이스라엘 민족들에겐 드디어 안식이 찾아왔습니다.
요단 동쪽 땅을 먼저 분배받았던 두 지파 반은 이제 자기 땅으로 돌아가게 되었죠.
여기서 이들이 요단 동쪽 땅을 받게 된 배경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세가 죽기 전 민수기 21장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을 향해 진격하던 때입니다.
그 여정 중에 다른 나라 영토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통행 요청을 거절하고 맞서 싸우러 나온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과 싸워서 얻은 땅이 바로 길르앗 땅이라고 불리우는 요단 동쪽 편 땅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 얼마간 이스라엘은 이 길르앗땅에 머뭅니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가보면 대체로 너무 황량하고 척박합니다.
과연 이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을까 의아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 환경이 많이 달라진 면도 있죠.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이 길르앗 지역은 넓고 싱그러운 초원이 아름답게 필쳐져 있습니다.
광야만을 떠돌던 이스라엘이 그 넓은 목초지를 볼 때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입니다.
이 길르앗은 잠시 머물다 가나안땅으로 갈 곳이었지만, 이 땅을 탐내는 지파들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의미가 벌써 드러나죠.
본문에 나온 르우벤지파, 갓지파, 그리고 므낫세지파 절반이 모세에게 와서 이 땅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합니다.
대신 가나안땅에서 기업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속보이고 약삭빠른 요구 아닙니까?
아브라함을 떠난 롯이 풍요로운 소돔땅을 선택했던 생각이 확 들죠.
이제 곧 그 오랜 역사 동안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는 데 기대되고 궁금하지도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약속보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풍요가 이들의 선택이었던 것이죠.
모세는 이런 요청을 하러 온 지파들을 질타합니다.
가나안땅 코앞에서, 40년 전 조상들처럼 또 입국을 거부하는 것이잖아요?
만일 두 지파 반이나 정복 전쟁에서 빠지면 전력이나 사기 면에서 타격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에 만류에 이들이 이런 제안을 합니다.
길르앗땅에 가족과 가축은 남겨두고 장정들은 가나안땅 정복전쟁에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성읍을 건설하고 가축우리를 만든 뒤 전쟁에서 선두에 서겠다고 합니다.
결국 모세가 제일 먼저 이 두 지파 반에 길르앗 땅을 분배해 준 것입니다.
이들은 약속대로 가나안정복전쟁에 참여해 선두에 섭니다.
오늘 본문 앞에 보면 여호수아가 그렇게 동족과 함께 한 이들을 치하하고 축복합니다.
믿음 공동체에 함께 하던 이때까지는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뒷일이 궁금하죠.
그때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이 사만 명이라고 나옵니다.
두 지파 반의 장정들을 제가 계산해 보니 한 십만 명 정도됩니다.
사만 명만 참가하고 남은 사람들은 자기 성읍을 방어했던 것이죠.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 길르앗과 가나안땅의 길갈 진영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아마도 교대로 전쟁에 참여하며 가족들과 왕래했을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왜 모세는 약속에 없던 요단강 동쪽 땅을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었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곳이 아니니 묵살 할 수도 있었잖아요?
그 이유를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가나안땅이라는 그 실체적인 장소가 하나님이 주시려는 완성된 땅이 아니라는 걸 조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장소가 절대적인 곳이 아닙니다.
가나안땅은 다만 예수님이 그곳에 오셔서 우리를 대속해 천국 기업을 주신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죠.
2) 만일 불허할 시에는 이미 길르앗에 눈독을 들인 사람들의 계속되는 불만이 오히려 정복전쟁에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갔더니 길르앗 땅만 못하거든요.
우리가 뭔가를 간절히 얻으려고 안달할 때가 있죠.
내 머리로 계획도 다 세우고 하나님 뜻과 상관없이 치달 하면 하나님은 그냥 허용하십니다.
두 지파 반은 이미 그 땅을 차지하려고 모의도 하고 계획도 다 세운 뒤 모세에게 가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식으로 이미 마음을 정하고 진행시키는 일에 대해 하나님은 굳이 막지 않으십니다.
저도 그렇게 성급한 마음으로 개척 초기에 제이스도시락을 창업했다 1년 만에 1억을 날렸습니다.
1억 날릴 걸 아시면서도 그냥 두시더군요.
이미 우리 마음이 기울었으면 누가 막겠습니까?
그게 우리를 막장으로 몰고 가는 게 아니라면 하나님은 가보라고 하십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 선택에 맡기시는 것이죠.
왜 하나님이 이런 상황으로 인도하셨냐고 말하는 건 책임회피입니다.
우리는 내 선택에 대해선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2) 이들이 그렇게 길르앗을 선택한 결과가 어땠을까요?
본문에서 이들이 민족과 떨어져 요단강을 건너 동쪽 소유지로 돌아오죠.
그런데 왠지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국가의 원래 동쪽 경계가 요단강이잖아요?
강 건너 사는 우리 지파를 나중에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드는 것입니다.
또 성소와 멀어졌으니 하나님 신앙을 잘 지켜낼 수 있을까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 언덕 위에 큰 제단을 세운 것입니다.
이 제단엔 약속의 땅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불안감, 하나님 신앙이 혼탁해질 것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이미 들어 있는 것이죠.
이들이 세운 큰 제단을 보고 열지파가 격노합니다.
왜냐하면 신명기서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가나안땅에 가면 그곳 부족들처럼 여기저기 산당을 만들지 말라.
정해 준 한 곳에서만 모든 지파가 와서 제사하라
동쪽 지파들은 자기 민족과의 분리불안에 사로잡혀 서쪽 지파와 상의도 없이 덜컥 단을 세운 것입니다.
이제 겨우 가나안땅에 안식을 얻은 이스라엘로서는 기겁할 일이죠.
모압땅에서 우상숭배에 참여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게 십 년도 안 넘어 아직도 그 고통이 남아있었습니다.
이래서 동족 간에 전쟁이 일어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행히 서쪽 지파의 대표들이 먼저 길르앗땅으로 가서 제단에 대한 해명을 듣습니다.
이 제단은 같은 민족이라는 증거의 단이다, 다른 신에게 제사 드릴 제단이 아니다, 하나님께도 우리끼리 제사 드리지 않겠다.
이런 해명을 듣고 안심하고 돌아갑니다.
자칫 동족 간의 전쟁으로 치달을 뻔했던 상황은 이렇게 잘 해결됩니다.
그런데 길르앗땅을 선택한 위험성은 또 있었습니다.
가나안땅은 지형으로 볼 때 서쪽엔 지중해, 남쪽은 사막, 동쪽은 요단강, 북쪽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인근 국가들의 우상숭배와 침입을 막기에는 최적의 땅인 것이죠.
길르앗 땅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눈에 탐나는 좋은 땅이면 다른 나라가 봐도 똑같이 탐나는 곳입니다.
요단강 동쪽 편 길르앗은 더 많은 외세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내 것을 지키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3. 길르앗에 살던 두 지파 반은 그들의 생각대로 하나님 신앙을 잘 지켰을까요?
그들도, 우리도, 우려했던 대로 이들은 제일 먼저 우상숭배에 빠지고 제일 먼저 멸망합니다.
역대상 5장에 길르앗땅에 살던 지파들의 종말이 나옵니다.
25절,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26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에)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
본국에 있는 것과 똑같은 제단을 세우면서 신앙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지만 제일 먼저 우상 숭배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곧 도덕적 타락으로도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셔서 세상나라의 타락과 구별되게 하셨잖아요?
우상숭배하고 점치는 사람들에는 윤리와 도덕을 배우러 가는 게 아닙니다.
길흉을 점치고 복을 빌러 가는 것이잖아요?
기복종교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땅을 지정해 주시고, 같은 신앙을 갖도록, 한 곳에 성소를 정해 주신 것은 그런 위험을 예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상과 종교가 혼합되는 마지막 때엔 어느 것이 옳은지 성도 개인이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잘못된 종교지도자 한 사람이 많은 영혼들을 탈선한 신앙으로 이끌기도 하죠.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한 믿음의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또 우리 신앙에서 동쪽 지파들처럼 하나님 말씀에 대해 세상적인 이익을 생각해 융통성을 많이 두면 분명히 위험합니다.
사람들에 대해선 관용적이고 관대한 게 좋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말씀을 따라 좁고 협착하게 가는 게 안전합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믿음에는 편의대로 융통성을 갖고, 이웃에 대해서는 편협하고 옹졸한 생각을 갖지 않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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