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여호수아11장1절-23절)

남수연 2023. 2. 4. 22:06

https://www.youtube.com/watch?v=xHReVNclDeo 

지난 주 여호수아는 남방 연합군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늘은 북방 연합군과 싸워 승리합니다.

반가운 것은 마지막 절에 나오듯 이로써 이 땅의 전쟁이 그쳤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전쟁을 마치고 기업으로 얻는 가나안땅에서는 여전히 싸워야 할 전쟁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안식을 얻었지만 여전히 물리치고 해결해야 할 삶의 전쟁들은 계속 되고 있죠.

그렇기에 오늘 북방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믿음의 싸움에 대한 중요한 이치를 배워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1. 북방 연합군과의 전쟁은 여호수아에게도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먼저 전쟁의 개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중부와 남방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죠.

이 소식을 들은 북방 나라들이 연합군을 조직해 이스라엘에 대항합니다.

1절에서 이 연합군의 우두머리가 하솔의 왕 야빈이라고 하죠.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 된 하솔성은 여리고성의 스무 배 이상의 큰 성이고 북방의 맹주국이었습니다.

이 하솔왕 야빈의 명령으로 북방 나라들이 뭉친 것입니다.

4절에서 그 연합군의 수가 해변의 수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다고 하죠.

엄청난 병력이 메롬 물가에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길갈 진영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120킬로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군사들이 걸어서 나흘 이상 가야 하는 거리죠.

여호수아는 이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이미 북쪽으로 진군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격전을 앞두고 계속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6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넘겨 주어 몰살시키리니

그때까지 여호수아는 기도하며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죠.

여호수아는 왜 가나안정복에 승리를 약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여호수아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죠.

우리도 예수님께로부터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잖아요?

기도하면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어떻습니까?

문제가 생기면 말할 것도 없고 일어나지 않은 일에도 불안해 떨잖아요?

여호수아에게도 현실 전쟁은 두려운 것입니다.

북방 연합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해변의 모래 같고 병거와 기병은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이스라엘 군대를 장악할 것 같았습니다.

전쟁 경험이 많은 장수로서 이 전쟁의 승률이 나오는 것이죠.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이 이기기엔 역부족인 상대인 것입니다.

만일 한 성읍씩만 상대하는 전쟁이었다면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았겠죠.

어쩌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했던 경험이 그를 더 불안하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이 잘 서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대로 된 것보다 안 된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응답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른 것을 받은 것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받고 싶기에 혹시 이번에도 아닐까봐 불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쪽에 자꾸 집착하는 기도는 할수록 점점 더 불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며 기도하면 오히려 더 담대해집니다.

내가 대응하는 것도 거기에 맞춰지니 더 빨리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구한대로 응답된다는 기도의 공식은 없습니다.

어떻게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어떤 것은 우리 기도한 대로 이뤄지게 하시죠.

그게 하나님 생각에도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기도는 하나님이 손대지 않고 그냥 나쁜 상황대로 진행되도록 두십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 결과에 실망하죠.

왜 그런 결과를 주셨는지는 훗날 이해되기도 하고, 죽을 때까지 해석이 안되고 아쉬움으로 남기도 할 것입니다.

오래 하나님을 믿어 온 성도들은 그래도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인도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내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내 힘으로 여기까지 헤쳐왔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기도가 늘 시원하게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점 잘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내일 또 풀어야 할 문제들이 하솔의 연합군처럼 앞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때로는 건강이, 때로는 사람관계가, 때로는 직장문제와 재정의 어려움이.

그리고 우리는 여호수아처럼 또 하나님께 두려운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단번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일이 더 악화되는 것 같기도 할 것입니다.

악화되면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기도 중에 우리를 계속 인도하십니다.

여호수아에게 ‘두려워말라, 내가 이 문제에 함께 하고 있다’ 이런 주님의 마음을 알 때까지 끈기있게 기도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평범한 날에도 우리는 매일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루의 일과를 위해서, 나와 가족들의 안전과 평안을 위해서,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가길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지혜롭게, 평안하게 하루하루를 지내게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영이 교통하며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쌓여가는 친밀한 믿음이 큰 어려움을 만날 때도 하나님께 나가 기도할 수 있고 평안 가운데 일을 잘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언제든지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좋으신 하나님아버지께 아기처럼 나가서 힘들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으시길 바랍니다.

 

3.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리십니다.

6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사르라 하시니라

여호수아가 할 일은 적들이 자랑스럽게 동원한 병거를 불사르고 말 뒷발의 힘줄을 끊는 것입니다.

왜 이런 명령을 내리셨을까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말 뒷발의 힘줄을 끊으라니 말에게 너무 잔인하다, 말이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들죠.

성경 말씀을 사실을 벗어나 내 기분대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적을 진멸하는 것도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을 떠나더라도 실제 전쟁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내 남편이 출전하고 내 아들이 출전한 전쟁입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내 아내와 자식이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전에 염전노예가 있다는 보도에 사람들이 얼마나 공분을 샀습니까?

지난 주 뉴스에 그 중 한 명인 박영0 씨의 기막힌 사연이 보도되었죠.

발달장애인이었던 박씨가 염전에 끌려가 하루 한두 시간씩 자고 얻어 맞으면서 7년을 염전에 갇혀 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씨의 7년 임금이 고작 사백만원이었습니다.

제가 기사를 읽고 놀랐던 게 새우잡이 배와 염전 노예로 끌려다닌지 17년만에 탈출해 이 분이 스스로 가족을 찾았다는 거에요.

그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며 이제는 쪽방촌이 된 그 옛날 집에 계속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부모는 그런 것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할 때 그 아버지 마음이 어땠을지 가슴이 뭉클하죠.

고대의 노예는 요즘 착취 당하는 염전 노예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의 아킬레스건을 끊으라는 것을 동물보호 차원에서 잔인하다고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욥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분입니다.

38장41절,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우리를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말은 그 당시 위협적인 전쟁병기입니다.

말을 살려주면 다시 누군가에 손에 들어가 사람을 해치는 병기가 됩니다.

말은 전쟁터에서 사람을 살상하는 데 동원되었다 결국 전쟁터에서 화살과 칼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아킬레스건을 끊은 말은 달릴 수 없기에 아무도 탐내지 않습니다.

초원에서 살다 먹이사슬로나 병들어 생을 마감하는 것이죠.

불태우라는 병거는 요즘으로 따지면 전차와 같이 무적의 병기입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에 미국과 독일에서 드디어 전차를 지원한다고 하죠.

그동안 많은 무기를 지원하면서도 자제했던 전차를 보낸다는 것은 그만큼 전차가 게임체인저와 같은 막강 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부족들에겐 철병거가 있었습니다.

말과 병거는 가장 위협적인 전쟁 병기이고 그렇기에 부럽고 욕심이 났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남은 전쟁이 많은 데, 저런 무기를 갖는다면 얼마나 유리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소유하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시겠어요?

분명히 말의 숫자와 병거의 숫자를 세며 병력을 계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과 병거를 의지하는 것을 금지하십니다.

이사야서31장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절,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2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병거와 마병을 의지하기에 그것으로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힘을 쓸 수 있는 것들을 동경하고 의지합니다.

돈, 얼마나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든든한 병기입니까?

건강, 학력, 재능, 연봉 높은 직장, 인맥.

다 대단한 병기들이잖아요?

저도 유교적인 한국교회에서 여성목사로서 덜 무시당하려고 총신대 설교학박사 과정에 도전을 했었습니다.

영어를 잘 못 해서 낙방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그게 다 말을 의지하고 병거를 의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과 병거가 충분하면 어떻게 할지를 잘 아십니다.

좋은 집 사고, 벤츠 타고 , 해외여행 다니고, 골프 치러 다닐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고 결국 몸도 멀어지겠죠.

신명기에는 왕은 병마를 많이 갖지 말라는 규례를 이미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걸 많이 가져서 망한 사람이 솔로몬왕입니다.

열왕기상10장26절,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 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솔로몬왕은 율법을 무시하고 애굽의 유명한 준마들을 들여와 자신의 왕위를 견고히 했습니다.

그런데 말만 들여온 것이 아니라 애굽왕의 딸까지 왕비로 들여옵니다.

그 후로 많은 이방 아내들을 데려와 결국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 되죠.

그 죄로 인해 나라가 아들 르호보암의 시대에 남과 북으로 분열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선망하는 인생의 빼어난 준마와 아름다운 병거들은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다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게 훨씬 힘듭니다.

사실 이 땅의 삶에서도 그 말과 병거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세상엔 어딜 가도 나보다 더 실력 있는 사람들이 있고, 어디서나 내 라이벌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말과 병거가 더 모자라 보이는 데 어떻게 행복하겠습니까?

늘 비교하고 실패감을 느끼니 일생이 불행한 것이죠.

우리를 무엇으로 승리하게 하시는지 호세아서1장7절에서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호세아1장7절,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입니다.

하나님으로 준비되어 있으면 모든 게 준비된 것입니다.

일에 대한 능력이나 사업 환경이나 내 현실이 전부가 아닙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힘이 함께 할 때 넉넉히 승리함을 지혜롭게 깨닫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4. 여호수아의 순종으로 가나안의 모든 부족들을 진멸하고 전쟁이 그쳤습니다.

성경엔 굵직한 성읍을 점령한 전적을 기록했지만 18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18절,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들과 싸운 지가 오랫동안이라

주요 성읍들을 함락하는 데만도 칠년 정도의 전쟁기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 이후도 분배받은 땅의 원주민들과의 싸움은 지파별로 계속됩니다.

그러나 가나안 일곱 부족에 대한 큰 성읍들을 진멸해서 바침으로 그 전쟁의 의미는 일단락 된 것입니다.

23절,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이 말씀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이 있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을 여호수아가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전쟁 경험과 지략과 용맹으로 치면 여호수아가 모세보다 더 뛰어난 장수입니다.

그런데 자기 방식으로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 가나안전쟁에 대해 이미 명령을 주셨고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대로 여호수아가 다 순종했다는 것이죠.

만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니었다면 가나안정복 전쟁이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도들의 인생은 하나님이 맡기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사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들이 하솔왕처럼 우리를 넘어뜨리려 끊임없이 수를 씁니다.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절대로 악한 영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전쟁터에서 매일 패배를 하기에 삶이 고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상황마다 달라지지 않습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각자의 형편에 따라 달리 해석해서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 말씀, 수요기도회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산상수훈에서 자세히 가르쳐 주신 원칙대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이 되신 대로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것만이 인생 승리의 비결이고 복된 길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대로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진멸하여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단 히위족에 속한 기브온 주민들만 살았습니다.

19절, 기브온 주민 히위 족속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 자손이 싸워서 다 점령하였으니

왜 다른 가나안부족들이 이스라엘과 맞서 싸우다 진멸되었는지 20절에 의미있는 말씀을 합니다.

20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가나안 원주민들이 여호수아와 싸우러 나온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진멸하시려고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오해가 없도록 왜 그런지 잘 이해해야 합니다.

가나안 부족들이나 지금의 세상사람들이나 모두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친구를 붙들고 복음을 전해보면 압니다.

단칼에 거절하죠.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아주 분명하게 그 관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3장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절,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모든 사람들이 이미 심판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면 그것이 곧 심판입니다.

로마서에서 밝히듯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양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벗어나려는 것이 심판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미 심판의 상태에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 가나안의 부족들에게 적용하자면 그들도 이미 심판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굳이 내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이 심판의 상태 있지만 자기 스스로 구원을 선택할 수 없듯이 심판도 선택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구원과 심판이 백프로 사람에게만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미 심판의 상태에 있는 죄인들이라 해도 자기들 스스로 영벌의 심판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확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아직 심판의 상태인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부족들에게도 사백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지나가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과 의지가 완악한 그 상태로 굳히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의 구원도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아무리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버둥대도 결국은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믿겠다고 온 것도 아니고 믿음이 내게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관여하신 것입니다.

기브온 주민이나 라합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들었을 때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백프로 자기들의 결정이 아니라 이 또한 하나님이 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다가오실 때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편에 굳건히 서 있는 것만이 오늘 내가 구원받은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미심쩍어 하는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선다면 그때도 똑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의 완악함 대로 굳히실 것이기에 하나님을 보고도 절대로 그 마음이 안 바뀝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 중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대해서는 유독 부정적인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히브리서3장에서 강권하십니다.

7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절,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 마음을 두드리실 때 주님을 환영하여 기쁘게 마음에 모시고 이 세상에서도 영생을 누리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북방 전쟁을 마치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과 병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처럼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완고한 마음을 갖지 말고 늘 주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매일 이 원칙을 잘 따름으로 모두의 마음과 가정과 환경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