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2u2TZdNPKi8
하나님의 은혜가 설 명절을 보내는 모든 성도님들 가정에 넘치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의 즐거운 명절 중에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갑니다.
평화롭던 나라가 이렇게 전쟁에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일 년을 버틴 것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 세계들 때문입니다.
남의 나라 전쟁에 공조한다는 것은 순수하게 그 나라를 위해서는 아닐 것입니다.
자국민을 위한 복잡한 셈법이 들어있겠죠.
오늘 기브온이 전쟁의 궁지에 몰려 도움을 청하자 여호수아는 아무 셈법 없이 싸워줍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천체의 이적이 이 전쟁 중에 일어납니다.
태양과 달이 종일 하늘에 머물렀던 일이죠.
이런 특별한 사건에는 다 심오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요즘 여호수아서에서 계속 전쟁에 대한 내용들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전쟁이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는 게 전쟁이니 전쟁을 잘 배워두어야 합니다.
그래도 오늘 남부 전선에서의 승리로 전쟁의 절반이 끝납니다.
북부전선은 의외로 간단하게 11장에서 마무리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기브온을 공격한 남방 연합군과의 전쟁을 살펴 보겠습니다.
설날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두에게 큰 은혜를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1. 전쟁의 개요
전쟁은 사기극으로 화친한 기브온 부족으로 인해 시작됩니다.
그동안 여리고성과 아이성이 함락되었고 기브온은 여호수아에게 투항했죠.
가나안땅은 남북으로 긴 지형인데 그 허리 부분에 여리고와 아이와 기브온이 있습니다.
중부지방이 함락된 것이죠.
오늘 본문은 남부지방을 함락하는 전투입니다.
기브온성에서 남쪽 방향으로 제일 가까운 성이 예루살렘성입니다.
예루살렘 원주민들이 전쟁이 이렇게 진행되는 것을 보니 그 다음 차례는 보나마나 자기들이라는 것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남방에 있는 여러 나라들에 사신과 친서를 보냅니다.
우리가 연합해서 배신자 기브온을 응징하자, 이스라엘이 기브온을 남부 전투의 교두보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죠.
1887년 이집트의 아마르나라는 곳에서 고대 쐐기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이 무려 382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걸 아마르나 문서라고 합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여호수아가 활약하던 때의 이집트 문서들입니다.
그런데 이 아마르나 문서 중에는 팔레스타인의 외교문서들도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중에 예루살렘왕이 자기를 괴롭히는 대적들을 도와달라고 이웃나라에 보낸 토판 문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피루에 대항하여 가나안 왕들이 연합했던 내용의 토판도 있습니다.
하피루라는 말은 히브리와 같은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을 침공했던 하피루가 히브리인 즉 이스라엘인 것이죠.
발달되는 고고학이나 과학은 그것을 편견 없이, 정직하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성경의 정확성을 뒷받침해 줍니다.
이렇게 남부지방의 다섯 왕이 연합군을 조직해서 기브온을 침공한 것입니다.
다급해진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영으로 사람을 보냅니다.
6절, 당신의 종 돕기를 더디게 하지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 우리를 구하소서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와서 도우라고 사람을 보냅니까?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의 위급함을 듣고 여호수아가 아무런 셈을 하지 않고 즉시 기브온으로 달려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의 일로 수고하게 된 것이라도 남의 전쟁이 아니라 이미 내 전쟁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 전쟁은 기브온을 돕는 의미도 있지만 결국은 이스라엘이 치러야 할 전쟁이었습니다.
기브온을 돕기 위해 왜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냐 생각할 게 아닌 것이죠.
이 전쟁을 살펴보면 기브온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히려 동시에 다섯 나라를 섬멸할 여건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각자의 성읍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 기브온을 치기 위해 성을 비우고 다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잖아요?
성문을 걸어 잠근 나라들을 하나씩 상대하려면 시간과 전력을 더 많이 소모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울 때 그걸 남의 일을 돕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브온이 아니었다면 여호수아는 더 힘겨운 전쟁의 수고를 했을 것입니다.
내게 수그리고 사는 사람들 절대로 무시하면 안됩니다.
나를 수고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내게 복 주시려고 붙여 놓으신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내 문제, 네 문제에 상관없이 한마음으로 서로 도와야 합니다.
결국 성도들은 기브온과 이스라엘처럼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여호수아는 가나안 남방 연합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 정복전쟁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상징한다고 했죠.
그렇다면 왜 악을 심판하시는 종말의 모형으로 가나안부족들이 뽑힌 것일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 가나안족들의 심판은 아주 오래전에 예고되었습니다.
바로 노아의 때입니다.
홍수 심판 뒤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방주에 탄 노아의 여덟식구 밖에 없었죠.
성경은 홍수 심판 전에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실 정도로 지구상에 인간의 죄악이 꽉 찼다고 합니다.
그들에게서 후손이 태어나도 소망이 없는 것이죠.
이제 노아를 통한 경건한 자손들이 다시 지구상에 편만할 것을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아들 중에 다시 악의 뿌리가 급속히 자라납니다.
세상이 다 물에 잠긴 기막힌 심판을 본다고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게 참 두려운 일입니다.
마지막 때에도 천체의 이변과 전염병과 전쟁으로 사람들이 고통당하지만 회개하지 않는다고 성경이 말씀하잖아요?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 중에 함에게서 다시 악이 불거집니다.
물론 사람의 죄에는 항상 마귀가 기생합니다.
함은 아버지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잠든 하체를 구경했다고 하죠.
그리고 가족들 앞에서 아버지의 실수를 흥미삼아 누설합니다.
셈과 야벳은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몸을 덮어주었다고 하죠.
우리말 성경보다 원어로 보면 함이 아버지에 대해서 존경심은커녕 오히려 외설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안 노아가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고 종이 될 것을 예언합니다.
심판을 예고한 것입니다.
죄는 함이 저질렀는 데 왜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함의 죄의 적극적인 성향이 가나안에게 이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근친상간, 동성애 이런 것이 다 가나안 부족에게 만연했던 죄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노아가 예견했듯이 가나안의 후손들이 바로 이 가나안 땅에 무고한 피를 흘리고 음란과 악으로 더럽혔던 것입니다.
이런 사유가 가나안 부족을 진멸하신 것과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역사 이래로 끝없이 악과 싸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죄인들에 대한 심판 뿐만이 아니라 죄인들을 볼모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에 대한 심판이 포함됩니다.
가나안은 이미 사탄의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사탄과 악한 영들은 진멸하여 바쳐지는 게 아니라 영원히 버려집니다.
이 마지막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 가나안 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오늘 일어난 일들도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이 가나안 연합군과의 전쟁의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8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가 없으리라
여호수아가 이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죠.
두렵지도 않은 데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실리는 없죠.
우리만 두려움이 많은 게 아니라 여호수아와 같은 장군도 두려워 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보지 않은 산지에 거주하는 남방 연합군을 상대로 싸우는 게 겁이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동기가 자기의 잘못된 조약이 발단이 된 것이잖아요?
하나님이 과연 이 전쟁을 도와주실지가 가장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응답하신 것입니다.
문제없다, 걱정마라. 내가 승리를 주겠다.
다섯나라 연합군이 모였다 해도 그 중 한 사람도 너의 적수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수시로 판단을 잘못하고 실수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죄를 지은 것도 용서해 주시는 데, 무지하고 연약해서 지은 실수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만회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살다가 잘못된 판단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낙담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다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승리를 확신한 여호수아는 즉시 기브온으로 출격합니다.
9절,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니
여호수아가 전 군사들을 이끌고 40여킬로 떨어진 고지에 있는 기브온까지 밤새도록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40킬로면 마라톤 거리죠.
42.75킬로 마라톤 신기록이 2시간01분09초라고 합니다.
생각보다 너무 빨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선수가 아닌 이스라엘 군사들로서는 밤새 쉬지 않고 걸어야 했을 것입니다.
남방 연합군들이 잠든 새벽에 기습하기 위해 밤새 행군을 한 것이죠.
하나님이 승리를 보장하셨다고 해도 최상의 작전과 전력투구가 영적 전쟁에서는 필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 것에 전력투구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집착하고 에너지를 다 쏟아 붓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만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이 전쟁과 승리가 하나님의 뜻이기에 여호수아는 꼭 그 일이 이뤄지길 바라면 밤새워 거기를 달려가는 것입니다.
무엇에 전심을 다하냐가 그 사람의 본심을 말해주죠.
여호수아의 본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기에 전심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남방 연합군과 맞서 싸우려 밤새 달려 간 이스라엘에게 무슨 전투 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 다음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의 시간인 것이죠.
저도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종종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이제는 주님의 시간입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이 혼자서 다 싸우십니다.
10절,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살육하고 벧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니라
이 구절은 약간 오역이 있습니다.
원문에는 여호수아라는 말이 없고 ‘그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를 빼고 ‘그가’라고 읽으면 내용이 분명해지죠.
다 여호와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칼만 들고 갑자기 나타났을 뿐이지 전쟁은 여호와의 군대대장이 혼자서 하신 것입니다.
원문에 보면 그들을 교란 시켜서 싸우게 하셨다고 합니다.
또 큰 우박덩이로 그들을 죽이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전쟁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기적을 눈 앞에서 구경하는 것입니다.
실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죠.
신명기 3장22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항상 든든한 것이 무엇입니까?
원하는 일들을 기도하고 내가 할 분량의 최선을 다하면 그 이상은 하나님이 나서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일이 내가 최선만 다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4. 이 전쟁 중에서 여호수아는 아주 유명한 선포 기도를 합니다.
12절,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세상에 이런 무모한 명령을 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죠.
13절,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수아의 명령에 해와 달이 종일 멈추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걸로 알던 때입니다.
지구가 1초에 30킬로미터의 속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여호수아가 알 턱이 없죠.
여호수아의 지식이 아직 이 사실을 몰랐을 뿐이지 그렇다고 성경이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의 말을 그대로 사실로 알고 루터와 칼빈도 당시엔 태양이 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명령으로 태양이 멈추어 섰지만 사실 지구가 운행을 멈추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부분에서 어떻게 믿어야 할지 당혹감을 느끼죠.
오병이어의 기적까지는 어떻게 소화해 보겠는데, 지구가 멈춘 이 사실은 좀 쎄죠.
그래서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시적인 표현이다, 왠지 하루가 더디 가는 것 같았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넘어갑니다.
이게 그렇게도 못 믿을 이야기입니까?
더 믿기 어려운 기적은 지구가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일 초의 착오도 없이 태양 주위를 따박 따박 돌고 있는 것 아닌가요?
멈춘 것 보다 왜 도는지를 먼저 밝혀야죠.
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고 별들의 항로와 정밀한 법칙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면서, 그것이 멈추는 게 불가능이라고 말하는 건 넌센스죠.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은 16세기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음을 알고, 우리가 모르는 것을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것이 참된 지식이다.’
어떻게 지구가 멈췄는지 모른다고 해야지, 아니라고 하면 안되는 것이죠.
그것을 만드신 분이라면 얼마든지 천체의 법칙을 잠시 바꾸셔서 이 상황을 만드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분을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핵심은 그걸 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하셨느냐가 오늘 본문에서 더 중요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때 상황으로는 여호수아가 해가 지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밤이 오면 어둠을 틈타 성으로 도망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글 거잖아요?
그렇다면 그 성을 함락하는 데 시간과 전력이 더 많이 소모될 수밖에 없습니다.
밤이 오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내려면 낮이 좀 더 길어야 했던 것이죠.
여기서, 여호수아가 그걸 하나님께 아뢰고 선포한 것은 이미 성령께서 그런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하다보면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을 기도하게 되고 이뤄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가 길을 닦는 것이죠.
기도로 없는 길을 계속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소원을 주시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게 되는 것은 반대로 보면 하나님께 받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게 얼마나 손해인지 우리는 매일 되새겨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주신 믿음대로 태양아, 머물라 명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명령한 것이 여호수아가 선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이 명령은 하나님의 아이디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당일에 적들을 섬멸해야 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뒤에 보면 가나안의 남방과 북방의 큰 성읍들만 진멸하는 데도 칠년 정도가 걸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이 전쟁의 마무리를 위해서만 천체의 법칙을 바꾸셨다면 당위성에서 좀 아쉽죠.
- 물론 하나님이 이 전쟁을 그만큼 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권능을 이스라엘과 가나안 부족들의 목전에 보이실 의도도 있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가나안 정복 전쟁이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모형이라는 데 더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장차 일어날 지구종말에는 이보다 더 큰 천체의 이변들이 속출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그 심판의 날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장29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요한사도 역시 환상으로 본 종말의 날에 엄청난 천체의 이변들을 진술했죠.
계시록6장14절,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8장7절,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요한이 본 마지막 때 광경에서도 오늘처럼 우박 이변이 나오죠.
그러니까 오늘 일어난 천체와 기상의 이변들은 이 가나안정복전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종말에 있을 심판의 시리즈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전쟁 속에 천체가 변하고 우주가 뒤집히는 마지막 종말의 모습의 일부를 삽입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날엔 여호수아 때처럼 태양이 잠시 멈추는 게 아니라 영원히 멈춥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듯 우리에게도 영원한 안식의 나라를 상속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은 세상의 종말과 구원에 대한 모형이고 경고이고 예고편입니다.
우리가 한평생 지구살이를 하는 목적이 항상 여기에 맞춰져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성에 이끌려 내 배만 불리려는 생각과 세상의 성공만 좇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도 믿음을 이용해 하나님께 덕을 볼 생각만 셈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에는 믿음의 완주를 한 허다한 증인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에 맞춰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증인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성도들의 연대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 완주가 힘들기에 교회가 서로 힘이 되고, 서로 증인이 되며 함께 가게 하신 것이죠.
이 세상에서의 우리 인생이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받고 누리며 살 수도 있고, 남과 비교할 때 내 인생이 참 받은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바라보고 그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마침내 하늘의 기업을 받을 것입니다.
이 믿음의 승리자가 이 세상의 삶에서도 결국은 승리합니다.
그런 우리 모두가 되도록 더 힘을 내서, 밤새워 달려간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이 주신 삶에 전력을 다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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