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속아서 맺은 조약 (여호수아9장)

남수연 2023. 1. 20. 03:25

https://www.youtube.com/watch?v=U4CqPf5apdc 

 

오늘 본문은 사기극으로 인해 진멸되어야 할 한 민족이 살아남게 된 내용입니다.

사람이 작정하고 속이려 들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최근 빌라왕 전세사기 사건이 뉴스에 자주 나오죠.

피 같은 전 재산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저도 신혼 때 첫 집을 구하는데 비슷한 일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이사를 가려는 데 보증금을 안 돌려 주는 거예요.

알고 보니 주인인 줄 알았던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세입자였습니다.

서류를 확인하고 계약을 했었던 것 같은데 다 위조였던 것이죠.

당시 백목사님이 은행원이었습니다.

얼마나 서류를 꼼꼼히 살펴 보았겠어요?

속이려 들면 정말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보증금을 떼일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구했는지 보증금을 기적적으로 돌려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큰 손해를 면하게 해 주신 것이죠.

평생 피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남에게 사기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브온 주민들의 사기행각인데요.

여호수아가 왜 이것을 가려내지 못하고 조약을 맺었는지 하나하나 잘 따져 보면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기브온 부족들의 속임수의 전말과 실수의 원인, 결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함락한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땅의 중심부로 진격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두 성이 진멸 당했다는 소문이 가나안땅 전역에 퍼지며 전쟁이 더 힘든 양상으로 바뀝니다.

1절을 보면 가나안의 여섯 부족이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려고 합니다.

이제는 한 성읍씩이 아니라 연합군과 싸워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그 연합군 중에 히위 부족인 기브온 주민들이 동맹을 깨고 은밀히 이스라엘과 화친 조약을 맺으러 여호수아를 찾아온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기브온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속인 게 발각되고 여호수아에게 추궁을 당하자 이렇게 말하죠.

24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의 모든 주민을 당신들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들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목숨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가나안 주민들이 다 똑같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라합도 같은 말을 했었죠.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게 제각각입니다.

연합군을 결성해서 맞서 싸우려는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라합 같이 기회를 잡아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이 있고, 기브온 사람들처럼 속여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죠.

기브온 주민들은 민족의 생사가 달린 이 사기극을 성공시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준비합니다.

평화조약을 맺으려면 가나안땅이 아닌 먼 데서 온 사람처럼 꾸며야 합니다.

옷과 신발, 떡과 포도주 부대를 죄다 낡은 물품으로 꾸미고 대화 내용도 빈틈없이 준비했습니다.

7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처음엔 이들을 의심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위장을 했다 해도 뭔가 의심스러웠다는 것이죠.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성을 듣고 조약을 맺으러 왔다는 말에 경계심을 풀어 버립니다.

먼 길을 오는 동안 곰팡이가 폈다는 떡만 증거물로 조사하고는 결국 평화조약을 체결합니다.

여기서 여호수아의 실수가 무엇인지 본문 14절, 15절에서 이렇게 명시합니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1) 속아서 조약을 맺게 된 것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한 원인은 아간이 바친 물건을 가진 것 때문이지만 그때도 전투에 대해 하나님께 물었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여호수아는 아이성 전투의 패배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 묻지를 않았을까요?

이 정도 사안은 참모 회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매번 의견을 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 기도해야 하는지 우리가 압니다.

기도하면 그 힘든 순간을 이겨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기도하지 않고 버거운 상황을 감수할 때가 사실 더 많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실지 신앙의 짬밥이 좀 있으면 다 알거든요.

그냥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한 고집이 우리에게 있는 거죠.

여호수아와 참모들이 보기에 기브온 사람들의 말은 사실 같았고 증거물들은 믿을만 했습니다.

이 정도면 원거리 국가와의 전쟁에 대한 율법 지침에 맞춰 우리끼리 결정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지난 한 주도 늘 살던 대로, 내 생각대로 살아도 충분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항상 깨어있고, 기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성도들이라 해도 비신자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나 기량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해서 미래를 알게 됩니까, 악한 영들의 이런 계략이 눈에 보입니까?

아니잖아요.

기도할 때, 우리에게 없는 하나님의 탁월한 것들을 성령께서 적당량씩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탁월한 능력은 내게는 결코 없는 것이기에 그게 나의 비밀무기입니다.

그것을 매일 구해야 하는 것이죠.

골똘하게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일들을 우리가 자주 만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항상 답을 주십니다.

잠언 20장5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누가 명철한 사람입니까?

잠언은 단호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명철이라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도하며 방법을 구할 때 어느 순간 답이 보이고 길이 보이는 건 하나님도 우리의 경외심에 보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뭔가 순종하고 하나님께 봉사했을 때 되돌아오는 그 보람과 만족이 얼마나 큰지 봉사해 본 사람들은 다 알잖아요?

기도하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면 그런대로 잘 살아가는 게 아니라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덫에 다 걸려 가며 사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이 조약의 결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진멸해야 할 가나안 부족이 이스라엘과 함께 살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 가나안부족들과 사이좋게 살지 않고 진멸하라고 하셨는지는 지난 주 설교 ‘하나님께 바친 물건’에서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가나안 전쟁을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모형으로 이해했죠.

그런데 실제적으로도 가나안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죄악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자연법칙이든 특별 섭리에 의해서든 지구상의 악을 적절히 심판하셨기에 지금까지 문명이 유지되고 사람들이 생존해 있는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 부족들은 우상숭배와 죄악이 한계에 달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주시겠다는 계획을 말씀하실 때 지금 당장은 아니라고 하시죠.

아직 거민들의 죄악이 가득 차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그들의 죄는 더 흉악해졌고 죄의 양도 쌓여서 심판 게이지가 다 찬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복하게 사는 양민을 몰살시키고 이스라엘을 이주시키는 게 아닙니다.

그 이전에 있었던 소돔의 심판을 보면 소돔사람들이 얼마나 성적으로, 인륜적으로 악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나안부족들입니다.

그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곱게 자란 사람들이죠.

현실적으로도 그들을 진멸해야 이스라엘이 살 수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옆에서 평화롭게 살라고 이스라엘을 그냥 두겠습니까?

전쟁이 계속되는 가나안땅이라면 하나님이 안식을 주신 게 무색해지죠.

또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려면 가나안 같은 죄악은 안됩니다.

만일 그들을 남겨두면 이스라엘은 그 타락한 문화와 종교를 따를 것입니다.

자식까지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우상숭배에 하나님이 진노하셨잖아요?

안타깝게도 여호수아 이후로 이스라엘은 남은 부족들을 진멸하지 못합니다.

결국 우려한 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화 됩니다.

성도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한 문화 속에 물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멸해야 할 것을 그냥 두었다가 결국 그것이 화근이 되어 그 땅에서 쫒겨나 바벨론 포로의 수모를 겪게 되죠.

이것을 우리의 믿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죄의 본성을 없앨 수는 없지만 죄성이 만들어 낸 악한 습관들은 끊어내며 살아야 평화가 옵니다.

그렇지 않기에 우리 마음이 때로는 화로, 때로는 불안으로 죽 끓듯 부글거리는 것입니다.

싸워서 얻어야 할 것은 상대도 못하고 내 자신에게 발목이 잡혀있는 것이죠.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로 세우시고 마침내 이방인들도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님을 통해서 온 민족이 구원을 얻게 하실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가나안 일곱 부족 이외의 먼 나라와의 전쟁에 대해서는 이런 지침을 주십니다.

신명기20장10절,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그들이 성문을 열면 평화의 조약을 맺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대표들이 먼 데서 왔다는 말을 믿고 평화조약을 맺은 것이 이 말씀에 근거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들은 길갈 진영에서 불과 사흘길 지척에 살던 히위인들이었습니다.

 

3) 이 일을 여호수아가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8절에 보면 이 잘못된 결정으로 회중들이 지도부를 원망했다고 합니다.

진멸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으니 앞으로 또 아이성과 같은 패배가 돌아올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죠.

기도하지 않고 실패한 일은 신망을 잃게 하고 현실적인 손해로 나타납니다.

그럴지라도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해결을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비록 속아서 맺은 조약이라 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기에 이 조약은 파기할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대신 이들이 속였기 때문에 평등 조약이 아니라 종주권 조약을 맺습니다.

기브온 주민들에게 대대로 레위인 제사장들의 제사 업무를 위해서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종이 되게 한 것이죠.

27절,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왜 하필 기브온 사람들을 성소의 일군으로 레위인들에게 붙여 놓았을까요?

그들은 본래 진멸되어 바쳐져야 하는 가나안 사람이잖아요?

레위인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먼저 하나님의 것이 된 사람들입니다.

기브온 주민들도 성소의 종이 되게 해서 결국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성령의 사람이었기에 가나안전쟁의 의미에 맞게 이 사건을 잘 수습한 것입니다.

 

2. 여기까지는 겉으로 드러난 사건인데, 그렇다면 이 사건 안에 담겨있는 중요한 의미와 교훈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브온 주민들이 이 조약으로 이스라엘에 편입된 것은 우연이나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긴 역사를 거쳐 가며 완성한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브온 주민들을 살린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노코멘트 하신 것입니다.

물론 기도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벌을 내리지는 않으십니다.

우리 일이 힘들게 꼬이는 것 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주 중요한 일을 여기서 처리하십니다.

과거 속에 묻힌 이 히위족과 이스라엘 사이의 찜찜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30장에 야곱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십 년을 지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던 야곱이 노정 중에 히위족 마을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야곱의 고명딸 디나가 마을 구경을 갔다가 그 땅 족장인 세겜에게 겁탈을 당합니다.

그리고 나서 세겜이 야곱에게 디나를 아내로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디나의 오라비가 레위와 시므온인데 이 일로 크게 분노합니다.

그래서 이 둘이 세겜에 복수할 계략을 세웁니다.

‘우리는 할례받지 않은 민족하고는 가족이 될 수 없다, 너희 부족의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고 우리와 한 민족이 되면 허락하겠다.’

할례 하면 한 민족이 되게 해 준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세겜의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고 앓아 누웠을 때 레위와 시므온이 가서 세겜 남자들을 다 몰살시킵니다.

할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깨뜨린 것이죠.

이 사람들이 바로 기브온 주민과 같은 히위족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건이 오백여년이 지난 과거에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레위가 하나님의 언약인 할례를 두고 사기 친 것을 지금 그 후손들에게서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고 그때의 약속을 지킬 수 밖에 없게 하신 것이죠.

때로 하나님은 겁나리만큼 정확하십니다.

이 사건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걸린 약속에 대해서 하나님의 원칙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로부터 다시 오백여년 뒤 사울왕 시대에 불미스러운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울왕이 진멸하라는 아말렉을 살려두었다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잖아요?

아마도 뭔가 다른 일로 만회 할 궁리를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이스라엘 중에 살고 있는 이방인인 이 기브온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안 보면 이렇게 됩니다.

살려주기로 한 맹세의 언약 안에 있는 기브온사람들을 죽여서 언약을 깨트린 것이죠.

그렇게 그 일이 또 묻혔냐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울왕이 죽고 다윗왕 때 삼년 동안 계속 기근이 발생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근에 대해서 간구하자 하나님이 그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사울이 기브온과의 언약을 깨고 그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기브온사람들에게 어떻게 사울왕의 잘못을 보상해 주면 원통함을 풀겠냐고 묻습니다.

그때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아들 일곱을 달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목메어 죽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님이 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아들과 히위인이 맺은 사기 언약을 오백년 간 기억하셨다 오늘 그 조약을 지키게 하셨죠.

오늘 이 언약을 다시 오백년이 지난 다윗왕 때까지도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철저하게 언약을 지키시고 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지켜주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언제 꿈에라도 나타나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 예수님이 우리와 언약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가 믿는 것은 옛언약인 구약과 새언약인 신약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얼마나 많은 복된 약속들을 성경에서 주셨습니까?

안 믿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반드시 지키실 것을 오늘 이렇듯 성경을 통해서 증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가나안 땅 이름을 사람들이 아예 약속의 땅이라고 하겠습니까?

성경을 이렇게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큰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브온 사람들은 얹혀 살면서 설움도 당하고 사울왕에게 학살당하는 큰 환난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본 자손인 이스라엘에 삼년이나 비를 내리지 않으시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시는구나.’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아가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되어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오백여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때는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포로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을 다시 중수하던 때입니다.

그때 귀환자들 중에 바로 이 기브온사람들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때 느디님 사람들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역대상9장2절, (본토로 귀국하여) 성읍에..처음으로 거주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이라

폐허가 된 고국에 제일 먼저 귀환한 사람들이 제사장과 레위인들, 그리고 그들을 도와 제사를 섬기게 했던 바로 그 기브온 사람들인 것이죠.

바벨론 포로기 동안까지도 기브온 사람들이 레위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그냥 바벨론에서 자유인으로 눌러 살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느헤미야서 3장을 보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벽을 함께 재건한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그들이 어느 부분을 중수했는지도 함께 기록해 두었습니다.

26절, 그 때에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주하여 동쪽 수문과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내민 망대까지 이르렀느니라(중수하였느니라)

오늘 기브온 부족이 평화의 조약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건 전후에 이런 역사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역사의 연결고리는 바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세워놓으신 구원의 언약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비록 기브온사람들은 단지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진실하신 사랑을 깨닫고 최선의 섬김으로 보답한 것이죠.

사람들은 기브온 사람들이 꾀를 내서 구원을 받은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브론 사람들은 종이 되어도 좋다는 불평등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길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온 민족이 종이 되는 계약은 안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로또에 당첨 될 확률이 팔백만분의 일인데도 복권을 사잖아요?

기브온 주민들은 하나님을 상대로 이길 확률은 제로라고 믿은 것입니다.

기브온사람들의 행위가 믿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까?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이대로는 인생이 다 무너질 것 같고,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 살아보려고 하나님 앞에 나왔던 것 아닌가요?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기브온 주민들처럼 예수님의 구원언약 안으로 들어온 자녀로 받아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얼마나 후대해 주셨습니까?

이젠 우리도 나를 위해 목숨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아 기브온 주민들처럼 대를 이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게 되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쩐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일을 저질렀건만 하나님이 노코멘트하신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브온부족에 대한 이런 섭리가 있으셨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기브온 주민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견고하듯 예수님의 새언약 안에서 우리 믿음은 영원히 견고합니다.

인간사가 다 속고 속이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그렇게 흘러갑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만 살아가냐 하면, 실수하고 넘어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오늘 여호수아의 경우처럼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내십니다.

우리의 실수 그대로 내 인생이 결정되었다면 진작에 망했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 성경은 여호수아가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선 분명히 잘못이라고 합니다.

기도가 없이 살면서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독단으로 행동한 수많은 것들로 인해 우리 삶이 더 힘든 것입니다.

염려할 환경들이 단숨에 해결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기도를 통해 지혜를 얻고 잘 관리해 나가면 반드시 다 해결되는 때가 옵니다.

우리 앞날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영이 약해지면 악한 영들이 더 활약하고 우리를 방해합니다.

그런 부분들도 성령충만을 간구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잘 대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언약에 굳게 서서 매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신 복을 다 받아 누리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