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9QhUjdKlp8Y
올해 마지막 시간과 새해 첫 시간을 하나님께 예배하며 맞는 모든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리라 믿습니다.
3년만에 재개되는 보신각 타종행사에 10만이 모였다는데, 잘 오셨습니다.
한해를 뒤돌아보니 어떻게 일 년이 이렇게 또 지났는지 감회도 새롭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저에게는 올 한해가 정말 그랬기에 오늘 송구영신의 시간이 각별합니다.
올 한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힘이 부족한 것은 직접 해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성실히 예수님을 따르고 교회의 가족으로 의무를 다해 주신 성도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몇 분 뒤에는 새로운 해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해를 준비해야 할지를 오늘 말씀에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가나안 정복을 앞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할례와 유월절, 두 가지 의식을 명령하십니다.
이 두 가지 의식이 없이는 가나안 정복을 시작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새해를 잘 살고 싶은데, 그냥 소원을 빈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오늘 말씀을 통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알고 잘 지킨다면 계획하고 바라는 것들을 축복하시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2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요단강을 건너고 길갈에 열두 개의 돌로 기념비를 세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여리고성을 향한 진격 명령이 언제 떨어지려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겠죠.
드디어 하나님의 다음 명령이 나왔는데, 그것은 진격이 아니었습니다.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부싯돌은 쇠붙이와 부딪쳐서 불을 붙이는데 쓰는 단단한 돌입니다.
칼을 가는 숫돌과는 다릅니다.
부싯돌은 단단하지만 석영처럼 날카롭게 깨지는 돌입니다.
집집마다 사용하던 어떤 칼이든 있었겠지만 할례를 위한 칼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할례의식이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의식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데 할례를 하고 나면 아물 때까지 여러 날 고통을 참아야 합니다.
싸워야 할 대적들 면전에서 군사들이 단체로 할례를 한 뒤 장막 안에 누워있으라는 것입니다.
앓고 있는 사이에 적군이 밀고 내려오면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의 할례 명령에 여호수아와 참모들이 다 당황했을 것입니다.
전쟁도 그렇고 스포츠도 그렇고 흐름이라는 게 있잖아요?
요단강 도하사건으로 적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지금, 내친 김에 공격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할례가 중요하다지만 꼭 이때 해야겠냐는 것이죠.
가나안땅에서 누릴 안식을 앞두고 할례를 명하셨다면 이 두 관계의 필연성 때문입니다.
1) 할례의 기원부터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을 실행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십니다.
그리고 언약을 제안하십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실 것, 아직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주신다는 것,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하신다는 것.
여기서 아브라함의 씨는 지난 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그 씨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정확히 해석을 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시면 꼭 지키시기에 다른 보증이 필요 없으십니다.
단 아브라함에게는 이것을 믿는다는 징표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 자손 중에서 할례의 언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질 것을 경고하십니다.
창시기17장14절,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를 안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 언약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는 것이죠.
구약 시대에도 결국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나안땅에 들어가야 할 백성들 중에는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를 4,5절에서 밝히죠.
애굽에서 나온 군사들은 다 할례를 받았지만 다 광야에서 죽었고 광야 생활 중에 난 자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할례받지 않은 2세대에 가나안땅을 주실 수가 없는 것이죠.
이들을 가나안땅으로 들여보내기 위해서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2) 그럼 할례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할례를 언약의 증표로 삼았을까요?
언약의 증표라면 대개는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 정하죠.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것을 결혼 언약의 증표로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표로 하필 생식기의 포피를 잘라내는 할례를 제시하셨을까요?
사람들끼리 그런 언약의 증표를 요구한다면 괴상하고 꺼림직한 일입니다.
그 할례에 어떤 중요한 상징성을 부여하셨다는 것이죠.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혈육을 통해 이어져 오던 죄인의 사슬을 잘라버린다, 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혈육으로 이어지던 죄의 계보를 끊고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피의 언약이고 옛 사람의 죽음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할례를 통한 구원은 출애굽1세대가 보여준 것처럼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애굽을 나왔던 출애굽1세대가 가나안에 못들어 가고 광야에서 다 죽음을 맞은 것이잖아요?
할례 역시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골로새서2장11절에서 더 온전한 그리스도의 할례를 우리가 받았다고 하죠.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리스도의 할례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단지 포피만 제거하는 게 아니라 육의 몸을 벗고 영으로 다시 사는 것이죠.
그것을 믿는다는 의식으로 신약시대에는 할례대신 세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할례든 세례든 형식을 따르는 게 반드시 구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죽은 출애굽1세대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은 할례의식 자체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의 할례를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모세가 죽기 전에 이 할례언약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들 결국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우상숭배하고 하나님 배반해서 먼 나라로 쫒겨 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이렇게 해 주실 것이다.’
신명기30장6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기서 마음의 할례를 모세가 벌써 예고합니다.
오늘 가나안 땅의 안식을 얻을 준비는 바로 할례였습니다.
그것은 포피만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라는 뜻인 것이죠.
신약성경도 똑같은 것을 강조합니다.
빌립보서3장3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고린도전서7장19절,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우리에게도 이렇게 새 가나안의 축복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행하셨나요?
그렇다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의 할례로 한 해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새해에도 평탄하고 복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 할례를 행한 뒤엔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1) 유월절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40년 전에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풀려나기 위해서 행했던 의식입니다.
유월절 밤에 어린 양이 죽어야만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해마다 이 유월절을 기념해서 지키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신명기 16장,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민수기9장을 보면 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는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은 할례받은 사람들만 지킬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유월절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할례를 명령한 것이죠.
가나안땅의 안식, 할례, 유월절은 서로가 이런 언약으로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의미상 분리될 수 없고 같은 구원을 뜻하는 것이죠.
본문에서 이 유월절을 지킨 날이 언제인지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10절,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이 날이 공교롭게도 애굽에서 첫 번째 유월절을 지켰던 정월 십사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날짜와 할례를 행하게 하신 날짜들을 다 계산하셔서 율법으로 정하신 그 유월절 날짜에 딱 맞춰주셨다는 것입니다.
때로 너무나 정확하신 하나님의 인도와 오차 없는 계산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절묘한 타이밍은 하나님이 우리의 일에 개입하신다는 강력한 징표입니다.
새해에도 하나님은 정확한 시간에 계획 된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이 유월절을 신약성경은 어떻게 해석을 해 줄까요?
이스라엘을 죽음과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게 했던 유월절 양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임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가나안의 안식은 유월절 양이 죽음으로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해에도 끊임없이 이것을 기억하라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가나안복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에서 중요한 것이 유월절 양과 함께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도 이스라엘이 율법대로 무교병을 먹었다고 합니다.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딱딱한 빵입니다.
누룩은 죄를 상징하기에 누룩 없는 무교병을 유월절 양과 같이 먹으라고 하셨다는 것을 역시 신약성경이 해석을 해 주십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의 유월절에도 똑같이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누룩은 옛 죄이고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셔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다’
그러니 이제 죄의 누룩을 내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앞두고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새해에도 예수님의 대속을 기억하고 죄의 악한 습관을 버리라는 것이죠.
마틴루터의 말을 오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 말고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라’
올해 우리를 위한 기이한 일들은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죄와 세속으로부터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해를 살면 2023년 송구영신 때는 한 해가 참 행복했노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이들이 할례와 유월절을 지키고 여리고 평지의 곡식을 먹게 되자 만나가 그쳤다고 합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생존을 위해 주신 은혜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풍성한 먹거리를 누리지 못하는 곳에서의 전시식량 같은 것입니다.
만나가 그쳤다고 이스라엘이 ‘아이구’ 그랬을까요?
우리는 광야 식량이 아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의 소출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광야에서 때로 하루치만 공급되는 만나로 겨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2022년에는 하루하루를 내려주시는 만나로 버틴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만나를 먹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명기8장16절,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우리를 낮추시는 방법이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를 의지하게 하시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훈련들을 작년에도 받으셨고 계속 받아오셨을 것입니다.
올해가 우리 모두에게 마침내 복을 받는 해가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3. 할례와 유월절 뒤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가나안 전쟁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 편에서만 이런 노력과 순종을 하는 게 아닙니다.
1)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새해에도 동행하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렇게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킨 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납니다.
13절,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 마친 뒤 여리고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들어 보니 앞에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여호수아를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앞으로 다가가 묻죠.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아군이냐, 적군이냐라고 물었다는 것이죠.
여호수아의 질문에 이 사람이 전혀 다른 대답을 합니다.
14절, 그가 이르되 (결코)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이 전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편을 갈라 하는 그런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펼쳐질 가나안땅의 전쟁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적인 통치를 드러내기 위한 나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군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나안부족이 적도 아닙니다.
이들 모두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보여주는 인물들인 것입니다.
오늘 군대장관이 하신 말씀은 우리가 새해에 일터에서 만나게 되는 비신자들, 그리고 믿지 않는 가족, 친지들을 어떻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교회가 믿지 않는 분들을 사탄 취급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심판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라는 말씀에 즉시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립니다.
그리고 명령을 기다립니다.
15절,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누구신지 직감적으로 알 수가 있는 말입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부름을 받을 때도 이랬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데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말씀하시죠.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본문의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이 정복전쟁을 주관하기 위해 오신 성육신하시기 전의 성자하나님입니다.
여호수아는 총사령관이신 군대장관의 명령을 받아서 수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발에서 신을 벗는 것입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주인 앞에서 종이 하는 행동입니다.
주인의 말에 복종하겠다는 뜻입니다.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 가서 보니 절에 들어갈 때 다 신을 벗고 맨 발로 들어가야 하더군요.
우리 문화엔 맨발이 공손하지 못하다는 의식이 좀 있지만 신앙에서는 또 그렇지가 않은 것이죠.
옛날에는 목사님들이 강대상에 올라갈 때 구두를 벗었잖아요?
신은 세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자기의 본능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수 패티김씨가 무대에 오를 때 흙을 밟았던 신발은 절대로 신지를 않는다는 일화가 있죠.
가수에게 관객을 만나는 무대는 성스러운 곳인데 어떻게 흙이 묻은 신발을 신느냐는 남다른 직업의식을 가지셨더군요.
새해에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은 종의 마음으로 살아가면 가장 복된 삶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여호수아가 선 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땅은 온갖 우상숭배와 패륜과 죄악으로 얼룩져 사람을 토해내는 땅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서 계시기에 그 땅은 거룩한 땅이 된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돌아다니게 될 새해, 모든 곳은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거룩한 땅입니다.
어떤 환경을 만나게 되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가든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새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고 종의 마음으로 겸손히 주님과 동행한다면 우리의 힘이 닿지 못한 일까지 주님께서 계획하신대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새해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할지를 잘 이해하셨습니까?
마음의 할례를 행하여 겸손히 주님을 섬깁시다.
유월절 양이 되셔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늘 생각하고 죄에서 더 멀어진 거룩한 한 해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할례와 유월절, 이런 것들이 다 믿음의 기본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 그리고 말씀에 더욱 순종하고 봉사하며 사는 것.
이런 기본에만 우리가 충실해도 충분히 승리하는 한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앞장서지 말고 군대사령관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명령대로 살아가는 복된 새해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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