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LDjHYqf1JHc
지난 주 여리고로 들어갔던 두 정탐꾼은 라합의 도움으로 무사히 진영으로 돌아옵니다.
정탐꾼의 보고로 승리를 확신한 여호수아는 이제 가나안 땅으로 건너가기 위해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으로 이동합니다.
지난 주 올려드린 지도를 보시면 좋겠습니다.
요단강은 현재 국가로는 시리아에서 시작해 이스라엘을 지나 요르단까지 북에서 남으로 이르는 강입니다.
헐몬산에서 발원해서 갈릴리 호수를 이루고 최남단은 요르단의 사해에서 끝납니다.
중동 땅을 동과 서로 나누고 국경선의 역할을 하는 강입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죠.
구약성경의 나라로는 요단 동편은 모압과 암몬족의 땅이고 요단 서편은 가나안 일곱 부족들이 살던 곳입니다.
가나안부족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실 땅은 서편 가나안인의 땅으로 지정하셨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고 때가 되어 그 자손 이스라엘 사람들이 차지하러 들어가는 것이죠.
오늘은 요단 도하 사건을 역사적으로 살펴 보고 현재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합니다.
1절,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2절을 보면 사흘간을 머물렀다고 하죠.
1) 이 전쟁을 수행할 첫 번째 전략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사흘을 요단강 가에서 머무는 것입니다.
아무 계시가 없어도 하나님만 신뢰하고 기다려야 하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아무 응답도 계시도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가 하나님의 시간인 것이죠.
내가 원하는 일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고 환경이 미동도 하지 않는 속상하고 답답한 시간이라면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때는 묵묵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여호수아가 요단 앞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사흘을 머물 때 사람들은 수런댔을 것입니다.
막상 와 보니 요단강 물은 제방까지 넘실대고 있었잖아요?
대체 어떻게 하려는 거지?
방법은 있는거야?
왜 모세처럼 하지 않지?
배를 구해야 하는 것 아냐?
하나님의 시간엔 사람의 궁리와 의견을 앞 세우면 안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런 소리들이 시끄럽게 들려올 것입니다.
사흘 동안 요단강에 진을 치고 침묵하는 이스라엘 진영을 주시하며 여리고는 숨막히는 긴장과 공포감이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시간에는 하나님이 중요한 작업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사흘이 지나자 여호수아는 다음 작전을 시행합니다.
3절,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매복한 적들이 나타나 공격할지 모르는 대치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작전은 무장한 군사가 먼저 요단을 건너는 게 아닙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을 향해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이천 규빗 정도의 뒤에서 언약궤를 따라 오라고 합니다.
이천 규빗은 약 구백 미터 정도로 보면 됩니다.
(1) 앞선 언약궤를 따라야 하는 이유를 오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언약궤가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4절,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으니라 하니라
처음 가 보는 가나안땅에서 그 땅 원주민들과 싸운다는 것은 백프로 불리합니다.
스포츠 경기도 홈경기가 유리하죠.
잔디의 길이도 알고, 얼마나 습기를 먹었는지도 알고, 매일 연습했던 곳에서 홈경기를 하면 원정경기에 비해 당연히 유리하잖아요?
원정 경기에서 이기려면 언약궤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요단강을 건너는 길을 인도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가나안 정복의 모든 것을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안전하게 목적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죠.
어제 출근했던 똑같은 길이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에는 처음 가 보는 길입니다.
오늘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어제와 다 다르기에 처음 가 보는 길인 것이죠.
매일 등교하고 출근하던 성수대교가 눈앞에서 끊어지듯 예기치 않은 참변도 만날 수 있는 게 우리 앞에 있는 처음 가 보는 길입니다.
평범한 하루도 안전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사고들이 다 평범했던 하루에 일어났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처럼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언약궤는 무엇일까요?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것은 십계명 돌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언약의 조건이었습니다.
돌판이 든 이 언약궤를 덮은 뚜껑은 속죄소라고 불립니다.
이 속죄소에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제물의 피를 부어서 법을 못 지킨 전체 국민들의 죄를 속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심판과 구원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언약궤인 것이죠.
신약에 와서 이것은 공의와 사랑이 완성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밝혀집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언약궤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시죠?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님을 따르며, 주신 말씀들을 잘 지키는 게 언약궤를 따라가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렇게만 우리가 따른다면 내가 잘못 된 길을 갈 리가 없고, 매일 처음 밟아보는 세상에서 안전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언약궤를 따르는 백성들은 스스로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5절에서 말씀하죠.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을 행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기이하신 인도를 받으려면 이대로 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성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성결은 죄와 세속으로부터의 깨끗함을 말합니다.
늘 생각없이 죄를 짓고, 세상에 빠져 세속적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본인도 알 것입니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신에게 빌려면 자기를 깨끗하게 하려고 하잖아요?
물론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의 인생을 언약궤가 이끌 듯이 평생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다 속죄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성결은 예수님의 거룩하신 피가 나를 깨끗하게 하신 것을 단단히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믿는 성도라면 주님이 피 흘리셔야만 했던 내 죄를 혐오하고 늘 경계심을 갖게 되죠.
그래서 죄와 세속으로부터 구별되기 위한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약하고 의지도 박약하다고 무릎을 꿇으면 가나안을 점령하기는커녕 내 성곽이 무너져 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길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잖아요?
기도로 성령충만을 구하고, 받으면, 지혜와 믿음 뿐만이 아니라 의지도 강하게 됩니다.
매일 이 거룩한 싸움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은 기이한 도우심으로 우리 삶의 승리를 견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3) 백성들은 이 언약궤로부터 일정 거리를 떨어져서 따라야 합니다.
구백 미터 정도 거리면 선두에 선 그룹들이 육안으로 앞서 가는 언약궤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요단강은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침하지형을 흐르는 강입니다.
언덕 위에서 요단강을 향해 아래로 서서히 내려가는 언약궤의 모습을 볼 수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지시하는 방향이 분명하지 않은 데 너무 성급히 결정하며 앞서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길이 맞는지, 이 선택이 옳은지 먼저 기도로 하나님의 의견을 묻고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또 언약궤로부터 떨어진 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거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겨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만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이 조작되는 것을 원천봉쇄 하셨습니다.
성막을 만들 때도 모세에게 설계도를 주셔서 어떤 금속으로, 어떤 모양을, 어떤 크기로 만들지까지 정해 주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성전의 설계도를 솔로몬에게 넘겨주면서 하나님의 손이 이것을 그리게 하셨다고 하죠.
제사 방법도 정밀하게 규정해 주셨습니다.
모든 종교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자기들 나름대로 존재감을 부여하고 원하는 대로 각색합니다.
누가 신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 저것을 인간의 생각대로 추가하다 보니 신전이라는 게 점점 기괴해지고 종교의식도 조악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의 생각대로 섬기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명령하신 말씀이 기록된 성경의 방식대로만 섬겨야 합니다.
인간이 잔뜩 만들어 놓은 형식을 지키며 그게 하나님을 섬기는 거라고 고집스럽게 믿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우리가 느끼는 것은 내 본성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사이의 간극이 하늘과 땅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그 큰 간극을 모르기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을 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쉽게 생각하기에 신앙에 있어서 자기 의견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높으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거리를 갖고 따르길 축복드립니다.
2. 모든 준비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기 시작합니다.
8절, 너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본문은 요단강이 끊어지고 마른 땅이 되어 건너게 된 사건을 소상하게 전합니다.
어떻게 강이 끊기냐, 물이 얕고 폭이 좁은 쪽으로 건넜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현대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런 말들을 여지없이 일축합니다.
15절을 보면 이 때가 보리수확을 하던 때이고 그 계절엔 요단강 물이 제방까지 가득한 때라는 것을 밝힙니다.
지금 시기로 하면 1월에서 3월입니다.
우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지금도 요단강에 물이 제일 많은 때입니다.
여호수아가 기록한 이 가나안 정복 역사를 받고 후대에 전할 사람들은 요단강을 직접 건넌 사람들입니다.
이게 사실이 아니라면 요단 도하를 뻔히 알고 있는 자손들에게 황당한 거짓말을 물려주는 것이 됩니다.
여호수아서는 역사서입니다.
오늘 성경을 따라 요단강이 어떤 식으로 멈추었는지를 살펴본다면 이 모든 게 팩트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1)13절에서 여호수아가 도하 작전을 지시하죠.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서리라
그대로 했더니 15절에서 그대로 됩니다.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물에 잠기면 일단 멈추어야 합니다.
첨벙첨벙하고 걸어가는 게 아닙니다.
물에 발이 닿자마자 상류에서 흘러오던 물이 딱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욥기 38장11절에서 하나님이 바닷물의 경계를 그어 더 이상 육지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이 떠오르죠.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그렇지 않다면 왜 바닷물이 들락달락만 하고 육지로 무한정 넘어오지 못하겠어요?
하나님이 오늘 요단 물이 넘어오지 못할 선을 그으신 것입니다.
상류에서 오던 물이 끊어지니 하류 쪽으로 가는 물은 다 빠지고 그냥 맨바닥이 드러나게 되죠.
상류에서 흘러오던 물은 다시 상류쪽으로 역류하여 흐르게 된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물길이 막히자 흐르던 물이 상류 쪽 아담 성읍 변두리로 역류해서 내려오는 급류와 충돌해 점점 높이 쌓였다고 합니다.
아담성읍은 여리고 앞 요단에서 약 20여킬로 떨어진 지역입니다.
그 멀리까지 물 기둥이 세워진 것이죠.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로 걸어가서 그 자리에 굳게 섭니다.
17절을 보면 그때 땅이 이미 말랐다고 합니다.
물이 빠진다 해도 바닥이 질퍽한 뻘이라면 이백만명이 건너는 데 얼마나 아수라장이겠습니까?
홍해 때도 분명히 성경은 사람들이 마른 땅으로 건넜다고 하고 오늘 요단강도 말랐다고 밝힙니다.
9백미터 떨어져 언약궤를 따르던 백성들은 물이 끊어진 마른 땅을 밟고 요단강을 건너게 된 것입니다.
이백만 명이 요단강을 건너가는 장관을 생각해 보십시오.
천천만만의 성도들이 구원의 강물을 건너 천국의 안식에 들어가는 모습을 연상하게 되죠.
백성들이 다 건넌 뒤 마지막으로 제사장들이 올라오자 막혔던 요단 물이 다시 제자리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3.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굳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이 머물던 광야 남쪽에서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서쪽으로 진입하는 길도 있습니다.
그런데 홍해 때도 그랬듯이 이들을 데리고 일부러 물을 건너게 하셨다는 것이죠.
그 이유에 대해 오늘 본문 말씀이 잘 설명해 주십니다.
7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이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리라
(1)여호수아가 공식적으로 모세에게 안수를 받고 영도자가 되었지만 백성들 눈에는 여전히 모세의 그림자로 덮여 있었을 것입니다.
홍해의 기적을 행했던 그 모세처럼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고 계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겠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때로 돌고 돌아 요단강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으실 것입니다.
요단의 고난이 없으면 요단 도하의 영광도 없습니다.
물론 요단 물이 끊어진 것은 단 한번 일어난 역사이고 표징입니다.
우리의 고난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도 본문처럼 갑자기 요단강이 멈추고 땅이 마른 땅이 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실제로 우리의 영적 모습은 질퍽이는 뻘에 빠지고 뒹굴며 사투를 벌이며 요단을 건너는 것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여기까지 쉽게 살아오신 분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결론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건널 것이고, 그걸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영광을 덧입혀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한걸음씩 요단을 건너는 모습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처럼 비장합니다.
‘무슨 힘이 저 사람을 붙들고 있지?’ 이런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그렇게 요단을 이겨내는 성도들을 하나님이 강하게 붙드시고 여호수아와 같이 높여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심을 사람들이 알게 하셨다고 하죠.
그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힘든 요단을 건널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사람들이 인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그 요단을 건넌 것을 보니 하나님이 계신 게 확실하구나.’
(2) 그리고 이 요단 도하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있을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신다고 합니다.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말하되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모든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쫒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이것이 증표라는 것입니다.
지난 날 주님과 함께 요단을 건너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앞에 있는 모든 대적들을 쫒아내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요단강을 끊어 버리고 말리신 이 사건은 건너편 가나안부족들에게도 증표입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홍해를 가르신 그 하나님이 지금 요단강을 가르시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게 하신 것입니다.
라합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나안사람들이 40년전 홍해의 기적을 다시 떠올리며 두려워 떨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형적으로 국경 방어선인 이 요단강을 하나님이 홍해처럼 가르고 마르게 하실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죠.
실제로 요단강이 끊어져 마르고 20여 킬로미터까지 높은 물기둥이 세워진 것을 요단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며 경악했을 것입니다.
자연재해, 기상이변 그런 걸 보면 두렵잖아요?
그러나 40년전 애굽 군대가 홍해가 갈라진 그 광경을 보고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뒤따라 오다 수장되었죠.
가나안 부족들도 똑같이 그들의 전철을 밟아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이 요단강 도하사건에서 법궤를 멘 제사장들의 헌신입니다.
본래 법궤는 레위지파 고핫자손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법궤를 멘 사람들은 고핫자손이 아니라 레위지파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입니다.
고핫자손이 아닌 제사장들이 법궤를 멘 것은 이것이 단지 법궤를 운반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매었다는 것은 법궤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예배로 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1절,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우리 삶에 항상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있어야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제사장들의 헌신입니다.
법궤는 단단한 나무와 금은동의 금속으로 만들어졌고 무게는 90킬로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합니다.
성인 남자 네 명이 어깨에 잠깐 메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겠죠.
그런데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서 있던 시간이 문제입니다.
온갖 살림살이와 텐트를 수레에 싣고, 등에 지고, 가축을 몰고, 이백만명이 요단강을 건너려면 족히 반나절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동안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에 법궤를 메고 서 있었습니다.
그 무게를 버티며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반나절을 서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섬기는 것은 이런 무게를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영광의 무게라고 말한 것이죠.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의 무게를 견뎌야 합니다.
성도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버티고 견디는 헌신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위상을 알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이런 공경을 받으실 분이시라는 걸 표현하는 헌신입니다.
아무도 예배하러 나오지 않는다면 누가 하나님을 영광스러운 분이시라 믿겠습니까?
성도들이 기쁘게 헌신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서로 하나님이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우신 분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법궤를 제사장이 메고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이뤄지게 하셨다는 것이죠.
오늘 제사장들은 그 법궤의 무게를 견딤으로 요단물이 덮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제사장이고 가정에서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한 죽음의 강물이 우리 가정과 교회를 덮치지 못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매일 가 보지 않은 길을 갑니다.
우리 앞에는 여지없이 요단강이 앞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무수히 주님과 함께 요단을 건너 이겨냈지만 새로운 요단강 앞에서 겁이 납니다.
‘이번에도 잘 건널 수 있을까, 이번에도 도와주실까’
마귀가 우리 안에 이런 두려움과 의심을 줄 때 우리가 바라 볼 언약궤는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와 지켜야 할 언약의 말씀과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려는 노력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주는 핵심입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현실 문제가 주는 집요한 걱정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긍정의 힘과 낙관적인 생각으로 이겨낼 수 없습니다.
현실에 계속 시달리다 보면 내가 가진 노하우와 커리어와 인격이 다 바닥납니다.
힘들 때나 새로운 일 앞에서 더욱 예수님을 믿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매일 성령충만을 구하고 믿음과 의지를 강하게 받아 하루하루 말씀대로 순종하며 거룩한 승리를 이루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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