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MfKiBI_NsaU
지난 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로 부터 가나안정복에 대한 사명과 승리의 비결을 받았습니다.
승리의 전술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까이하고 지켜 행하는 것이었죠.
그렇게 지내셨습니까?
우리가 영적 싸움에 대해서 잘 몰라도 말씀을 묵상하고 잘 지키는 것만으로도 시험과 악에서 승리하고 평탄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은 이스라엘의 건국역사이지만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상징하는 전쟁입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읽을 때는 실제 중동에서 있었던 전쟁사라는 것을 고려하되 거기 담긴 신앙의 상징성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이 전쟁에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요소들을 찾아내고 유익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본격적인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두 정탐꾼을 보낸 이야기입니다.
이 정탐 작전에서 눈에 띄는 결과는 기생 라합을 구원해 낸 것입니다.
이 사건은 사실 가나안정복 전쟁을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이 열쇠로 이 전쟁사를 열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이런 안목을 갖고 오늘 말씀으로 차려주시는 영의 양식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여호수아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여리고성을 정탐할 정탐꾼을 보냅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 동편 싯딤이라는 곳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10킬로를 가면 가나안의 첫성 여리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여리고 성을 치기 전 먼저 동태를 살피러 정탐꾼을 보낸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더 이전에 있었던 한 사건을 염두에 두면 좋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땅에서 과거에 상징적인 심판을 내리셨던 역사가 있죠.
아브라함 때 악의 도시 소돔을 심판하신 일입니다.
그때 소돔의 죄악의 진상을 현장 확인하러 두 천사가 먼저 파견되죠.
그 결과 소돔은 불과 유황불의 심판을 판결받고 실제로 도시가 멸망합니다.
거기서 구원받은 사람이 바로 롯과 그의 두 딸입니다.
그 역사와 견주며 오늘 본문을 이해하면 성경이 말씀하려는 의도를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롯의 집에 들어갔듯이 정탐꾼이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죠.
그러니까 지금도 라합을 구원하실 천사를 보내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라합의 집은 여리고 성벽 위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서울을 둘러싼 한양도성 성벽이 남아있는데 어떤 구간에는 성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선 집들이 있고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여리고 당시도 성안의 인구밀집도가 높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성벽 위까지 밀려나 집을 지었을 것입니다.
기생이라고 번역한 원어의 뜻은 매춘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라합의 집은 여관처럼 사람들이 묵어가기도 하고 매춘도 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이런 데 들어간 것이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 상황으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지금 어디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겠습니까?
여행객처럼 여관을 찾아가는 게 안전한 전략인 것이죠.
그곳에서 유숙하고 정보도 얻고 동태를 살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수상한 행색이 여리고 사람 눈에 띈 것입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이 들어왔다는 말은 즉각 여리고왕에게 보고되죠.
군인들이 라합의 집에 들이닥쳐 정탐꾼을 찾지만, 라합은 미리 알았다는 듯 두 사람을 지붕 위에서 말리던 삼대 아래에 숨겨 놓은 뒤였습니다.
그리고 대담한 거짓말로 군인들을 따돌리고 정탐꾼을 살려줍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하고 자기는 살아난 라합의 믿음이 옳으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라합이 나라를 팔아 먹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라합이 어찌 행동했건 여리고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운명입니다.
라합이 두 사람을 넘겨주었다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여리고가 회개하지 않을 거잖아요?
그렇다면 보통의 관점으로도 오히려 죽을 생명을 살려주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이죠.
2. 그렇다면 라합은 왜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주었을까요?
본문을 보면 라합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교회생활, 사람등등 보다 하나님께 더 관심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차지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9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어떻게 이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라합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10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라합이 말하는 이 출애굽 당시의 사건은 40년 전 일입니다.
우리도 40년 전 일은 가물가물한데, 젊은 라합이 어떻게 태어나지도 않았던 40년 전 일을 소상히 알고 있을까요?
가나안땅 주민들에게 이스라엘은 전설적인 민족입니다.
라합의 말대로 강대국 애굽이 노예민족 전체를 풀어주었다는 것은 기적이죠.
더 큰 기적은 2백만의 국민들이 인간 생존불가 광야 사막에서 40년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뭘 먹고 뭘 마시며 사십년 째 살고 있냐는 것이죠.
그렇게 하신 그들의 인도자가 바로 여호와라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이고 지금 여리고로 부터 10킬로 앞 요단강까지 와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겐 소름 끼칠 일이죠.
40년 전 일이 다시 가나안땅 전역에 회자되며 무성한 소문들이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에 대해 들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고 합니다.
11절,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이스라엘의 진격에 모두가 정신을 잃을 만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원어 그대로 하면 공포가 위로부터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사실 실력으로 따지면 전쟁 잘하는 가나안 부족들이 떨 일이 아닙니다.
전투력으로 보자면 브라질과 우리나라 축구 실력의 차이 정도가 아닙니다.
게다가 한 민족 대 가나안 민족 전체와의 싸움이잖아요?
하나님이 두려움을 쏟아 부으신 것이죠.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라합이 가나안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을 크고 유별나게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의 신관은 바다의 신이 따로 있고, 농업의 신, 산의 신, 다산의 신, 어딜 가도 관장하는 신들이 다 따로 있었습니다.
많은 하등 종교들이 그렇잖아요?
라합은 하나님을 그런 류의 이스라엘 민족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온 세상에 진짜 신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깎아 놓은 우상에 절하고 빌며 그것이 나를 위해 뭔가를 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라합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에서 진짜 기적을 행하시는 살아계신 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기서 또 확인되는 불변의 진리가 있죠.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는 데서 나지 않습니다.
열가지 재앙을 눈으로 보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눈으로 보고, 광야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눈으로 보고, 만나를 보고 먹었던 이스라엘은 라합과 같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가나안에 못 들어간 거잖아요?
눈으로 보았다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죠.
믿음을 위한 유효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기의 믿음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수많은 간증자들처럼 뭔가 확실한 기적이나 증표를 보면 내 믿음이 분명해 질 거라고 아쉬워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적을 보고 열광했던 유대인들이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기적이나 증거를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기한 현상이나 기적을 보는 순간은 믿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순간,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믿음이 아님이 밝혀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변치 않는 말씀을 주셨고 말씀을 통해 항상 하나님을 계시해 믿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23절에서 베드로사도가 이렇게 말씀을 주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으려면 거듭나야 하는 데, 말씀으로 된다는 것이죠.
라합은 소문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에 대한 더 많은 정보들을 수집했고 분석하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원하신다면 성경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에 더욱 관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듣고 보는 말씀들이 거듭남의 씨앗이 되어서 반드시 믿음의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된 라합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있는다면 여리고성과 함께 멸망 당할 것은 자명합니다.
라합은 당연히 살고 싶었습니다.
또 본문에서 라합이 가진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부러움과 하나님 백성이 되고 싶다는 염원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온 천하가 부러워할 일인 것입니다.
라합은 살고도 싶고 하나님 백성도 되고 싶지만 그렇다고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혼자서 이스라엘에 투항할 수도 없고 투항한다고 살려 준다는 보장도 없죠.
그런데 기회가 온 것입니다.
낯선 두 남자가 여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 라합은 담박에 이들이 이스라엘 정탐꾼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척 보면 사람을 알아볼 만큼 사람 영업을 해 봤잖아요?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기회를 보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에서 단 한 사람, 소문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되길 원했던 라합을 구원하기 위해 기회를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진심으로 원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하나님이 왜 너는 안된다고 하시겠습니까?
여리고성 사람들도 소문대로 신 중의 신이신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에 투항할 생각을 했다면 구원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여리고성 전투에서 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이스라엘과 맞섭니다.
기브온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가나안족속 모두가 동맹을 맺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군대에 맹렬히 대적해 싸우다 전멸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회를 잡은 라합은 정탐꾼과 생명의 맹약을 합니다.
12절,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여호와로 맹세하라는 것은 라합이 지금 사람에게 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간청하는 것입니다.
라합이 간절히 하나님 백성과 함께 되길 원하는 게 느껴지잖아요?
정탐꾼들은 라합이 끝까지 함구하면 라합의 요구대로 라합과 가족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약속을 합니다.
단, 두 가지 조건을 지켜야 합니다.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다는 것과 라합의 집 안에 있는 사람만 구해주겠다는 것입니다.
18절,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신앙생활을 좀 하신 분들은 연상되는 성경의 내용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출애굽 때 열 번째 재앙, 유월절 양을 잡아 문 주위에 피를 바르고 그 집에 들어 앉아 있는 사람만 구원을 받았던 게 생각나죠.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었고 신약시대에 드러난 그 사건의 실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피였습니다.
그게 오늘 라합의 창문에 매단 붉은 줄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라합이 살아날 유일한 방법은 계약대로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계약하신 것은 ‘십자가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붉은 줄이 대체 무엇이었는지가 좀 궁금해지죠.
왜 집에 붉은 줄이 있었을까.
이 줄은 창문으로 정탐꾼을 달아 내린 줄하고는 단어가 다릅니다.
서양에서도 붉은 색은 창녀를 상징했습니다.
중세시대 창녀들은 반드시 빨간색 천 조각을 몸에 걸쳐야만 했습니다.
방탕한 공간이나 사창가의 문간에는 붉은색의 깃발이나 붉은색 초롱을 달았습니다.
아마도 빨간색이 분출하는 충동성 때문에 매춘의 상징으로 쓰여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라합의 시대에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 수 있도록 라합의 문간에는 붉은 줄의 장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생집의 표식인 붉은 줄을 창문에 매 놓았던 것입니다.
만일 그게 아니면 성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라합의 창문에 묶여 있는 붉은 줄을 보며 수상쩍게 생각했을 게 뻔하죠.
사람들은 그냥 기생집에 나부끼는 붉은 실타래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라합에게 구원을 보장해 준 붉은 줄은 사실 기생 라합의 치부이자 수치였던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가 우리의 죄와 수치로 인함이지만 우리의 구원인 것과 똑같은 것이죠.
우리가 내 죄와 수치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듯이 라합은 죄의 상징인 언약의 붉은 줄을 매달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라합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신약성경 두 군데서 라합을 평가합니다.
히브리서11장, 우리가 잘 아는 믿음 장이죠.
믿음의 조상들이 등재 된 명예의 전당인 이 믿음장에 라합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13절,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믿음의 전당에 라합의 이름이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와 대등하게 올라가 있다는 게 놀랍죠.
또 한군데는 야고보서 2장입니다.
25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번엔 믿음장이 아니라 행함장에서 라합이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라합이 하나님이 하실 일을 분명히 믿었기에 죽음을 불사하고 정탐꾼을 숨겨주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믿음과 행함의 일치를 라합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에서의 생활은 부끄럽지만 라합에게 모든 것이었습니다.
가족까지 걱정하는 걸 보면 매춘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 희생을 했기에 나중에 라합이 가족들을 다 집으로 불러 모았을 때 순순히 가족들이 모여있다 살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롯이 소돔이 멸망하니 도망가자 했을 때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기고 따라오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죠.
아무리 여리고가 라합의 세상 전부였다 해도 구원을 위해서는 버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값어치를 비교해서 하나는 버리고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라합은 그것이 정확하게 계산되었기에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숨겨 주고 구원의 기회를 붙잡은 것입니다.
우리는 라합과 같이 극적으로 신앙을 선택한 게 아닙니다.
우리들 중에 라합처럼 죽음을 불사하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온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렇기에 항상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행함으로 확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사도는 입으로만 사랑하는 것을 경고하며 긍휼이 없는 자는 긍휼없는 심판을 받으리라는 엄중한 말씀을 전합니다.
사랑이라는 행함으로 너의 믿음을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모든 것보다 더 하나님을 택했다면 하나님은 훨씬 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하나님이 모든 경우에 그것들을 능가하시는지 종종 확인을 해 봅니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 잠시 좋아하기를 멈추고 주님이 그것들보다 더 내 기쁨이 되는지를 확인해 봅니다.
마음이 힘들고 근심이 있을 때도 잠시 걱정을 멈추고 그 순간도 내가 여전히 예수님 안에서 평안할 수 있는지를 체크합니다.
삶의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그게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며 누리던 것들이 없어질 때가 옵니다.
노년기에 접어들면 모든 게 슬슬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전에 권사님이 이제는 치아도 내 이가 몇 개 남지 않았다고 하시더군요.
인플란트 같은 종류가 더 많아졌다는 거예요.
장년기에 직업을 잃기도 하고, 청년기에 꿈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그 이상이 되셔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야 어떤 것이 떠나고 사라져도 하나님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번에 되는 게 아니라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면 삶에 무엇이 더해지든 빼지든 크게 요동하지 않고 항상 평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택했다고 해서 세상에서 망하지도 않습니다.
라합은 당장 자기의 세상을 다 놓은 것 같았지만 얻은 것은 그것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결혼도 하고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갑니다.
마태복음1장에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죠.
5절,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예수님이 이 다윗의 족보에서 태어나셨잖아요?
아마도 라합과 결혼한 살몬이라는 사람이 오늘 등장한 두 정탐꾼 중에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살몬은 이스라엘의 명문 가정입니다.
라합이 명문가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 전승에 그렇게 나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라합의 구원이 가나안전쟁을 열고 들어가는 열쇠라고 말씀드렸죠.
하나님에 대한 소문이 알려졌지만 가나안땅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심판을 택합니다.
이것이 앞으로 있을 정복 전쟁으로 가나안을 진멸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이 세상도 결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을 선택한 라합만 구원을 받은 것은 그 가운데서 믿는자들은 구원하신다는 복음의 메시지와 상통합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죄인으로 낙인찍힌 창녀, 세리, 가난한 자들이 주님을 영접했듯이 자타가 공인하는 여리고성 최고의 죄인인 라합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죄와 구원, 죄와 구원의 십자가는 분리될 수 없는 한 짝입니다.
라합은 바닥 인생에서 인간들의 죄악의 밑바닥을 보았을 것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이나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우리도 그렇잖아요?
독일의 철학자 아돌프 알렉산더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무거운 짐이 나를 지고 간다.’
라합도 우리들도 무거운 죄짐이 우리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했을 것입니다.
여전히 무거운 인생의 짐들도 내가 예수님을 따르도록 나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라합의 믿음의 영광스러운 결말처럼 우리의 믿음의 결말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믿음의 선택을 하며 용감히 말씀대로 행하고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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