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1장1절-9절 (강하고 담대하라)

남수연 2022. 12. 2. 00:21

https://www.youtube.com/watch?v=xIsTafzlPYo 

 

이번 주 부터는 여호수아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알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은,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과 내가 어떻게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할지가 우리가 평생 해야 할 몫입니다.

물론 우리 혼자 힘으로는 한 걸음도 뗄 수가 없기에 성령께서 인도하시죠.

제자들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했는지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배우려는 여호수아서는 구약성경의 사도행전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으로 세상을 구원하듯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국가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방나라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제사장 국가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가나안정복은 이스라엘의 건국사이면서 한편 하나님이 구상하신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여호수아서를 보며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전체가 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여호수아처럼 세상을 정복해야 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본문을, 1)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정복의 임무를 맡기시는 것과 2)감당할 용기를 주시는 것과 3)임무를 성공할 비결을 알려주시는 것, 이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정복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1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절,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출애굽 과업을 달성하고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모세가 가나안땅 진입을 앞두고 죽음을 맞습니다.

모세의 죽음은 단순히 한 임기를 맡았던 지도자가 죽은 게 아닙니다.

옛날 박정희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나라가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박대통령처럼 나라를 통치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들 걱정했습니다.

모세의 죽음은 그에 비할 정도가 아닙니다.

모세 같은 지도자가 과연 세상에 또 있을까, 단연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의 마지막에 모세의 죽음에 대한 애석함을 이렇게 기록하죠.

신명기34장10절,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그런 모세는 왜 가나안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해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광야 므리바에서 반석의 물을 낼 때 불순종한 것 때문으로 알고 있죠.

그것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모세가 가나안땅에 못 들어간 이유도 이스라엘역사를 ‘구원 섭리의 상징’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가나안땅은 영적으로 구원을 받고 안식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구원백성으로의 언약을 하고 십계명과 율법을 받아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백성들을 보호하고 규제하여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최선의 방편입니다.

구원으로 볼 때 모세는 그 율법이고 아직 안식을 얻지 못한 것을 뜻합니다.

모세가 가나안땅으로 백성들을 데려간다면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혼선을 빚을 수가 있는 것이죠.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들어가면 안됩니다.

대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인솔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신약성경의 언어로 바꾸면 예수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종들은 메시야를 비추어주는 역할도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름부터 그런 것이죠.

모세는 비운의 출생으로 나일강에 버려지고 애굽공주의 아들이 되어 왕자로 자란 극적인 배경으로 전 생애가 성경의 조명을 받고 있죠.

그에 비해 여호수아는 출애굽의 역사에 갑자기 등장합니다.

그것도 마치 예수님이 묻혀진 삼십년 생애 뒤에 갑자기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나타나신 것과 비슷하죠.

그렇다면 모세 대신 민족의 수장이 된 여호수아는 기뻤을까요?

사회생활에서도 전임자가 너무 잘하면 후임자가 어지간히 잘해서는 인정받기가 힘듭니다.

사람이 늘 비교하잖아요?

비교 당하는 것을 느낄 때 얼마나 마음이 힘듭니까?

내내 모세와 비교당할 것, 실제로 모세만큼 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 말을 따를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겠죠.

여호수아가 광야 40년 동안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께도 대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질리도록 보았잖아요?

에스겔서를 보면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들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광야라는 심판 중에서도 부모들을 따라 애굽에서 가져온 우상을 섬긴 자들이라고 밝힙니다.

1절에서 여호수아를 모세의 수종자라고 지칭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여호수아를 어떻게 인식했냐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를 돌로 치려던 사람들이니 모세의 종 여호수아에게야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여호수아가 그런 사람들 2백만명을 인솔해야 하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들어가 싸워야 할 가나안의 부족들은 또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에겐 소달구지가 있었지만 그들에겐 철병거가 있었습니다.

성벽은 철옹성이었고, 매일 전쟁만 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강하라, 담대하라, 두려워말라 계속 명령하시겠어요?

하나님은 이런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지명하셨습니다.

여호수아의 어떤 점이 이런 중책을 맡을만 해서일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일군으로 인정받길 사모하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현대의 성도들이 세상에선 실력자가 되고 싶어하면서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일군되는 것은 사양하는 현실은 정말 안타깝고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1)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를 모세 아래로 보는 의미도 있겠지만 모세의 계승자라는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 신앙을 말할 때 항상 강조하는 말씀이 있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해 준 성경에 대한 믿음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은 어디를 펼쳐도 진리입니다.

구약은 원시적이고 불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특히 여호수아서와 같은 정복전쟁을 그 의미와 역사의 실상을 잘 모르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각각 완벽한 진리이고 서로 연계성을 갖고 이어져 있습니다.

사도행전28장을 보면 바울사도가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지 보여줍니다.

23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성경으로 예수님에 대해 더 정확히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겐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반드시 어떤 부분을 담당하게 하시는 게 있잖아요?

교회의 어떤 봉사든 성경에서 배워 그 기준대로 해야 합니다.

성도의 세상 일도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에 역시 성경대로 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성경대로 헌신하고 봉사하기에 시대나 국가나 신분에 상관없이 추구하는 것이 신기하게 일치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형상을 함께 이뤄가게 되는 것이죠.여호수아는 모세에게 배운 그 연장선상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완결할 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경은 진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피가 묻은 성경입니다.

성경을 올바르게 잘 배워서 다음 세대에 계승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선생이 되어야 할 오래 믿은 성도들이 초보 상태에 있음을 책망한 것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2) 여호수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본래 광야생활 40년이 필수코스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 1년 뒤에 하나님은 가나안땅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미리 정탐한 12명의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가나안 정복은 불가능하다는 부정적인 보고를 하죠.

그로 인해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갈 집단 행동을 보임으로 받은 징계입니다.

그때 12명의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백성들을 설득합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부정적입니다.

우리 안에도 열 둘 중 열은 부정적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정적인 것을 믿음이 없는 것으로 칩니다.

야고보서는 의심하는 자는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하고 하나님께 얻을 생각을 말라고 합니다.

우리 입에서 부정적인 언어가 얼마나 나오는지를 체크해 보면 정확히 내 믿음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남다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광야시절의 한 대목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33장11절,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고,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모세가 회막을 떠난 뒤에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죠.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믿음이 생깁니다.

기도도 바람이 지나쳐가듯 짧게 하면 믿음이 안 생깁니다.

기도는 지속적으로 꾸준히 하되 방해받지 않고 기도에 몰입 될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영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활성화 되고 육체의 소욕이 억제되기까지 충분한 기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마음을 지배하던 부정적인 마음, 의심, 불안, 산만함, 복잡함, 이중성이 사라지고 믿음과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부족하면 백프로 믿음도 부족합니다.

여호수아가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은 늘 회막 안 하나님 앞에서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과 함께 일하실 수 있습니다.

능력 있는 믿음을 위해 좀 더 오래 기도 시간을 갖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여호수아는 성령의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일군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반드시 성령의 감화를 받았다는 말이 따릅니다.

성경이 얼마나 일관된 것을 가르치는지 알 수 있죠.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성령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을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민수기27장1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후계자로 삼으라

신명기 34장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무시고 지혜로 충만케 하실 때 하나님의 일도 세상 일도 능력있게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발탁된 이유는, 모세를 승계하는 신앙이었고, 하나님 앞에 머물러 믿음을 얻었고, 성령충만한 사람이었다는 세 가지입니다.

신앙에서나 세상에서나 인정받고 발탁되도록 이 세 가지를 갖추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하나님은 이런 여호수아에게 사명을 감당할 힘과 용기도 주십니다.

여호수아에게 이백만명을 인솔해서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중압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40년 전엔 모세가 있었기에 들어가서 싸울 용기를 더 낼 수 있었겠죠.

지금은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형편입니다.

작던 크던 무언가 떠맡고 책임져야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가급적 책임지는 일은 피하려고 합니다.

책임을 자꾸 회피하는 사람은 단단한 믿음과 인격을 갖추기 힘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한 달란트를 받았지만 땅에 묻어 둔 사람에 비유하셨습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주인의 돈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중압감을 이기고 책임질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5절,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용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생깁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이전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말씀하신 적은 없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때 우리와 함께 하심이 믿어지고 용기를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에 북한선교를 하던 캐나다 국적의 임현0목사님이 북한에서 종신형을 받았다가 삼년 만에 석방된 일이 있었죠.

캐나다에서 목회를 하던 임목사님은 처음 북한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처참한 모습을 보고 북한선교에 뛰어들게 됩니다.

진짜 사람들이 못 먹어서 서서히 말라서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30년간 150번 북한에 들어가서 만 명이 넘는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을 지원했는 데 550억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어느 집회에서 설교를 할 때 이런 북한의 심각한 상황을 얘기하다 김일성 동상이 다 무너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날 설교가 외부에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 어떤 장로님이 영상을 촬영해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방송에 올린 거예요.

그걸 북한 정보국에서 보게 된 것이죠.

당시 북한으로부터 이천 명이 목욕할 수 있는 목욕탕을 지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목욕탕이 완공된 걸 보러 들어갔다 그 때 체포되었습니다.

최고존엄모독죄로 종신노동교화형을 선고 받게 됩니다.

좋은 일을 그렇게 했는데 그 배신감과 억울함이 어땠겠습니까?

두 평 남짓한 더러운 독방에서 첫날을 보내며 캄캄한 앞날이 공포로 다가올 때 히브리서3장1절 말씀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고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거기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어떤 위기에 놓였어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삽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많은 근심과 염려로 우리가 살았어도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 지옥 같은 북한 감옥에서 그렇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에 대한 사랑을 다시 회복하며 3년을 견딜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계속 말씀을 주셔서 머리 속에 설교 7백편을 만들어 나왔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며 고난의 시간을 이겨냈던 것이죠.

몸무게가 30킬로가 빠지고 동상으로 발이 썩고 장기들이 다 망가져 나왔지만 돌아보니 그때도 복된 날이었다고 하시더군요.

임목사님도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용기를 얻게 됩니다.

또 기도와 찬양과 다른 여러 방편들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주님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하길 원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 평범한 날은 감사와 기쁨으로 힘겨운 날들엔 더 용기를 내며 내가 인생에 정복당하지 않고 정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복할 수 있는 비결을 주십니다.

7절,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큰 전쟁을 앞 두었다면 전술을 연구하고 군대를 훈련 해야겠죠.

그러나 하나님의 승리의 전술은 율법을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할 일은 그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승리할 수 있도록 나머지 모든 것을 지원하신다는 것이죠.

실제로 가나안에 들어가 싸울 때 각 성마다 점령할 전술을 하나님이 직접 주십니다.

하나님이 왕벌을 보내셔서 적의 진영을 흩어 버리기도 하십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나 채취하며 살았던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단련 된 가나안국가들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이길 수 있다면 그 이유는 한가지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싸워주시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도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에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율법대로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하기에 8절에서 다시 강조해서 반복하십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이 말씀은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기며 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입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로 항상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고 형통하리라’는 보장은 말씀을 항상 생각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일을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하시죠.

그것은 무슨 신비한 세계가 있다는 게 아니라 말씀대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깨우쳐 주시고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성령의 열매는 평생 신앙생활을 연마하고 성숙해진 인생의 황혼기에 맺히는 게 아닙니다.

매일 성령을 따라, 말씀에 복종하며 살면 당장 그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성령님 안에서 말씀에 복종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성령의 열매만 내게 있어도 이미 충분한 승리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돈과 건강도 성령의 열매 맺는 삶과 함께 받아야 진짜 복되고 형통한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왜 말씀대로 살지 않나를 생각할 때 짚어보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고 내 위에 계시다는 것을 인정했냐는 것입니다.

그게 없었다면 굳이 말씀을 지켜야 할 이유를 모르는 것이죠.

내가 예수님의 계명을 신경 써서 지키려고 애쓰는지 아닌지로, 하나님이 나에 대한 권리를 가지신 주인이시라는 근본적인 관계가 잘 설정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불확실한 것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도, 거의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나라의 지상 실현을 위해 가나안 정복전쟁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전쟁이 누구의 일입니까?

이건 여호수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비즈니스니까 명령대로 하면 되지 두려워할 것도, 결과를 염려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전쟁을 위한 하나님의 전술은 오직 말씀대로 똑바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것을 보장하십니다.

9절,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데 어떻게 못 이기겠습니까?

오늘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동일한 말씀을 신약성경에서 다시 우리에게 주셨죠.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을 내 인생에 지휘관으로 모시면 우리도 승리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매일 지휘하시도록 오직 말씀에 순종하며 형통한 승리를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