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신약시대 예수님을 놀라게 했던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구약시대 하나님께 인정받은 갈렙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 속의 인물들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에서도 진정 성공한 인생을 산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때로 오해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방식이 아닌 신앙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도다운 삶을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제일 먼저는 우리에게 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은 이상 사실 안심이십니다.
천국에서 하나님 자녀로 영원히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 삶을 하나님의 뜻에 조율하고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안전한 삶과 천국에서의 상급의 보장인 것이죠.
물론 우리의 성숙하고 성장하는 믿음을 볼 때 하나님께는 더 할 수 없는 기쁨이 되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내 본성대로 세상의 풍조와 가치관을 따라 살아간다면 과연 내 인생이 행복해지겠습니까?
본성은 타락했고 이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사상으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거대한 부를 거머쥔 재벌이 더 벌려고 편법을 쓰고 소상공인들 주머니를 터는 걸 보면 그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세계적인 재벌가 록펠러에게 기자들이 사람이 얼마만큼 돈을 가져야 행복한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지금 보다 조금 더’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재벌의 돈은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조금 더 가지려는 재벌 일가의 행태에 존경을 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악 된 인간 본성 위에 건축한 인생이 겉으로 화려하고 거창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이나 기업이나 하나님의 원칙 위에 세울 때 자기도 복되고 세상도 복되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복의 근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가 잃었던 온전한 복을 되찾고 성공적인 삶을 이루는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구약시대 손꼽히는 믿음의 인물인 갈렙을 통해 배우길 원합니다.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인물을 살펴보면 우리 믿음과 큰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셨지만 과연 우리도 아끼시고 위해주실까 의문이 생기기도 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내게 관심을 갖고 계시고 나를 통해 기쁨을 느끼시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우리가 용기를 낼 것은 이 말씀이 위대한 사람 갈렙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 범죄하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아버지께서 이제는 우리에 대해 무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황당한 발상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사랑하셨다면 지금 자녀가 되었는 데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연약한 믿음이라고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도 적어진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약하고 병들었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전에 장애인들에게 제빵기술을 가르치는 사회적기업이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자녀가 기술을 배워 만든 마드렌느를 처음으로 집에 가져갔을 때 그게 너무 귀해서 차마 먹지를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가 만든 마드렌느를 보기 위해 일부러 빵이 납품 된 빵집까지 찾아가 진열된 빵을 보며 그렇게 행복해 하더군요.
자식이 우리에게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런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아직 작은 믿음이지만 우리 교회가 다 함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반드시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 성령께서 아름답고 믿음직한 갈렙의 삶을 통해 우리가 더 강건한 믿음을 배우고 따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갈렙의 믿음을 45년 전과 현재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45년 전 갈렙이 어떤 믿음의 사람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출애굽1세대 중 유일하게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밟은 사람입니다.
본문6절에 보면 갈렙이 여호수아 앞에 나와 45년 전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꺼냅니다.
4백년을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해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셨을 때 일이죠.
레미제라블이란 영화를 보니 노예의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섬찟할 정도로 실감이 났습니다.
그런 그들이 구출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질긴 죄와 집요한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출 받았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해 중동 가나안지방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광야지대를 지나야 합니다.
이스라엘 광야는 대단히 두렵고 무서운 곳입니다.
불뱀과 전갈이 있고 밤에는 추위와 맹수가 습격해 옵니다.
이 광야를 지나며 이스라엘은 날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으로 유턴하길 원했습니다. 그 노예생활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앙에 때로 진노하고 때로 달래가며 가나안 땅이 바라다 보이는 가데스바네아란 곳 까지 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대표자 한 명씩을 뽑아 가나안 땅을 샅샅이 정탐하게 하라고 명령하시죠.
그 때 이야기를 지금 갈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가나안땅의 형편을 미리 탐색하게 하셨을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정탐을 명령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물밀듯이 그냥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달아보신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들어갑니다.
불가능한 현실을 똑바로 알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가나안의 실정을 정확히 보게 하십니다.
열악한 이스라엘의 병력과 힘으로는 도저히 차지할 수 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들어 갈 천국이 우리 능력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력으로 들어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열두명의 정탐꾼은 40일에 거쳐 가나안의 여러 곳을 탐색하고 돌아와 회중 앞에서 사실대로 보고를 합니다.
가서 보니 과연 젖과 꿀이 흐르고 기름진 축복의 땅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 땅에 살고 있는 많은 부족들은 견고한 성읍 안에 거하고 철병거를 가지고 있고 특히 가나안의 중심부인 헤브론에는 거인족인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들은 거기까지만 사실대로 보고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자기의 불신앙대로 가나안 정복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장담하는 부정적인 해석을 덧붙입니다.
8절에 보면 그들이 백성의 간담을 녹게 했다고 말하죠.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낙망하게 합니다.
우리 부모들의 부정적인 말과 불신의 모습은 우리 자녀들을 낙심하고 주저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날 60만명이 절망적인 보고를 듣고 이성을 잃고 감정에 휩쓸려 밤새 통곡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7절에서 갈렙은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보고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감정보다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반응입니다.
감정에 따라 기복이 심한 신앙은 성숙하기 어렵고 위기에 약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감정을 잘 다스리게 되고 성령이 충만하면 감정이 고조되는 게 아니라 먼저 머리가 명민해지고 지력이 향상됩니다.
우리 학생들 이런 명민한 지혜를 받으시길 축복드립니다.
감정의 기쁨과 평안은 그 다음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들은 현실을 똑바로 보았지만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누구신지 생각하기를 잊었고 감정대로 반응한 것입니다.
믿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기억하고 의지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아버지가 누구신지를 잊으면 세상은 늘 두렵고 문제는 항상 거인과 같이 우리 앞을 막아 섭니다.
우리의 눈은 삶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철저히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두루 감찰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으로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감정에 휩쓸려 거기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열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과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기적을 베풀고 그들을 인도하시지 않았습니까?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잊어버리는 것은 큰 손실입니다.
경험을 믿음으로 해석하지 못하면 어려움을 만날 때 마다 두렵고 불안하고 언제나 똑같은 타격을 받습니다.
혹시라도 내게 안좋은 일이 생길 까봐 항상 염려하며 전전긍긍합니다.
왜 인생에서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생기죠.
하나님이 어떻게 지난 날 고난과 시련을 이기게 하고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셨는지를 기억할수록 삶이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인도하심을 통해 배워야 하고 성경과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도 배워서 의지적이고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백성들이 공포에 휩싸여 울부짖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믿고 올라가자고 했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합니다.
60만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폭동이 일어나려 할 때 그들 앞에서 하나님을 믿고 진격하자는 말을 할 용기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믿음은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이렇게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갈렙은 그 때 자기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긍정적인 보고를 한 것에 대해 8절에서 하나님께 자신이 충성하였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이란 현실이 불리할 때도 끝까지 하나님 편에 서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9절에서 하나님도 그것으로 그가 충성되다고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 충성된 자, 얼마나 축복된 사람입니까?
충성,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입니까?
우리가 많은 일에 헌신하지 못한다 해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항상 하나님편에 서는 것으로도 주님은 우리를 충성되다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망하고 울부짖는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며 너희가 언제까지 나를 멸시하겠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고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멸시하신다고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불신의 결과로 그들에겐 가나안 땅 입국이 금지되고 다음 세대가 가나안 땅을 차지할 거라는 선고가 떨어집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살아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민수기14장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분명히 말씀하시길 나를 원망한 자 전부라고 하셨습니다.
59만9천9백9십8명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아끼지 않으셨겠습니까?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없이는 절대 천국에 갈 수 없음을 다음 세대에 경고하고 있는 것이죠.
원망은 불신앙의 표출입니다.
가나안 입국과 광야의 죽음을 갈라놓은 결정적인 원인이 원망이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지 않고 범사에 원망하는 악한 습성을 의지적으로 몰아내지 않으면 항상 축복의 문 앞에서 다시 돌아서야 합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원망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 입에 원망을 거두고 날마다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갈렙과 같이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하는 모두가 되기를 축복드립니다.
다음 45년 뒤 갈렙의 믿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수아서 1장부터 12장까지는 드디어 출애굽2세대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입국하고 정복전쟁을 치르는 내용입니다.
한 5년 정도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살만한 성읍들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백성들은 지쳤고 그런대로 살 땅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자 가나안 전쟁에 대한 열정도 식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노인이 된 여호수아에게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들을 지도로 그려서 지파별로 제비뽑아 분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갈렙이 여호수아 앞에 나와서 요청하는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45년 전에 헤브론 산지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제비뽑기와 상관없이 그 땅을 자기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땅분배는 제비뽑아야 한다는 원칙을 벗어난 갈렙의 행동에 다른 지파들이 소동했을 법 한데 그렇지가 않죠?
헤브론이 어떤 곳입니까?
45년 전 민수기13장33절에서 정탐꾼들이 보고한 내용이 이렇습니다.
거기(헤브론에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싸워보기도 전에 굴복했던 상대가 바로 이 헤브론 산지에 살고 있는 아낙자손들입니다.
정복전쟁 5년동안 만만한 성읍들은 정복했지만 헤브론 산지는 엄두를 못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바로 이곳을 갈렙이 자기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만일 다른 지파가 이 지역을 할당 받았으면 어땠을까요?
갖지도 못을 땅을 주다니 이제비뽑기 무효라고 난동을 피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이 85세가 된 갈렙이 바로 그 헤브론 산지를 자기에게 달라고 나선 것입니다.
갈렙은 왜 하필 헤브론 산지를 요청한 것일까요?
그것은 12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두의 간담을 녹게 했던 그곳을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했던 바로 그 갈렙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강력한 요새를 가장 충성 된 갈렙에게 허락하신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천국의 좋은 것들을 차지하기 위해 이 땅에서 마음껏 공략하라고 주님이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힘들고 가난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 어리숙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이야말로 진짜에다 투자한 사람들입니다.
노년에 가장 험악하고 치열한 전투를 치르기로 갈렙이 작정한 이유는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산지를 주신 것이 곧 하나님의 인정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그 난공불락의 요새인 헤브론 산지를 주신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우리에게 힘든 산지를 주셨다면 믿음을 인정하신 것이고 어렵게 취할 만큼 가치도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헤브론 일대는 가나안 중앙산지 중에 가장 비옥한 땅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헤브론은 유대민족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에게 장차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의 시대엔 단지 작은 밭을 하나 상징적으로 사게 하십니다.
말하자면 가나안 땅을 찜을 해놓는 것이죠.
거부 아브라함 평생에 가나안에 소유했던 유일한 땅이 바로 이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입니다.
사라와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 야곱이 장사 된 곳입니다.
이 헤브론을 정복하지 못하고 약속의 땅을 취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후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 헤브론에서 왕조를 세우라고 지시하십니다.
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 땅을 하나님은 충성된 갈렙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헤브론과 함께 영원히 갈렙이 기념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45년 동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기대했습니다.
온 백성을 낙담시켰고 광야에서 죽게 했던 바로 그 땅을 자신이 반드시 정복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가 광야에서 생존했고 85살의 노령에도 여전한 힘과 능력이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헤브론 전투에 보내시는 증거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힘만 여전한 것이 아니고 그의 믿음도 여전한 걸 보게 됩니다.
약속을 받고 기다리고 계십니까?
45년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반드시 주실 것을 믿은 갈렙처럼 끝까지 신실하신 주님을 믿고 바라는 모두에게 반드시 응답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께서는 정복할 산지를 약속하고 나누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게 하실 지를 계획해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시편 37장 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리고 또 그 걸음을 직접 지도하신다고 예레미야 10장 23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우리 걸음도 하나님이 지도하십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산지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정과 가업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산지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본문에서 갈렙은 여호와께서 이르신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라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거듭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산지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착실한 믿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산지가 무엇인지를 점차 가르쳐 주십니다.
일제강점기의 민족지도자인 남강 이승훈선생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이고 오산학교를 세운 교육가이자 민족의 스승이었죠.
이 남강 선생이 젊었을 때는 시대를 비관하며 술과 도박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번은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데 한 외국선교사가 그를 보고 책망을 합니다.
‘아니 나라가 이 지경인 데 젊은이가 술을 마시고 세월을 낭비해서 되겠소?
예수 믿고 인간답게 사시오‘
비록 취중이었지만 선교사의 책망이 귓전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술이 깨자 그는 그 선교사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는 먼저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남강선생은 믿음을 갖고 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업을 시작했고 재산을 모아서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나님이 깨닫게 하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 갈 길을 보여주고 기도는 그 길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특히 처음 인생의 발을 떼는 청년들은 더욱 진지하게 내게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말씀과 기도 가운데 인도받길 축원드립니다.
정말 알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내 소원과 재능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맞아 떨어질 때 철저히 산지를 탐색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길로 인도해주시길 기도하며 신뢰하십시오.
지금 내게 맡겨주신 작은 일에 충성할 때 그 다음 길을 열어주십니다.
큰 일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한 번에 응답되지 않습니다.작고 초라한 시작을 싫어하는 사람은 절대로 번영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모든 큰 일은 다 미약한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꿈은 있지만 이루기에 막막하기만 하다면 갈렙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실하게 노력하길 축원드립니다.
갈렙도 다른 사람들 처럼 불가능한 현실을 제대로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신 분이 반드시 이루실 줄을 확신했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절대로 가볍게 여기고 되는대로 다루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우리가 내 인생에 대해 심각한 것 이상으로 우리를 절대적으로 진지하게 대하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끝까지 주님의 인도를 기도하며 나가면 한 걸음씩 우리에게 주신 산지를 정복해 나가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마음의 소원과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땅에 주신 하나님의 법칙은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합니다.
약속을 받았다고 헤브론이 그냥 갈렙의 손에 떨어진 게 아닙니다.
갈렙이 헤브론 산지를 점령한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산지 위 요새에 철병거를 갖춘 기골이 장대한 아낙족속에 비교할 때 실제로 그는 메뚜기 같았을지 모릅니다.
상대가 되지 않는 전쟁에서 갈렙에게 무슨 뛰어난 전략이 있고 우세한 병기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14절은 말씀합니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그 이유를 이어서 말씀하죠?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전술과 무기로 이긴 게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믿음으로 이겼다는 것입니다.
갈렙은 산지를 공략하기 위해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동안 전쟁에서 탈환한 각종 무기들도 동원했겠죠.
그러나 아무리 최악의 병법과 녹슨 병기를 썼어도 이건 이길 수 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우리 앞에 철옹성 같이 도저히 엄두조차 못 낼 목표가 있고 두려운 문제들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믿음이 있으면 결국 우리가 이깁니다.
갈렙의 생애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가데스바네아 정탐이후 오늘 본문까지 45년이 흘렀지만 그 사이 성경 속에는 그의 이름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명 여호수아와 똑같은 믿음을 인정받은 갈렙입니다.
유대지파의 대표자로 뽑혔던 만큼 지도력과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가나안입국과 정복전쟁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지도자로 섰을 때 갈렙의 자리는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갈렙을 보고 모두가 가데스바네아의 영웅이라고 수군댔겠지만 더 이상의 영웅담도 없습니다.
본문 앞 부분에 보면 땅을 분배하는 일도 엘르아살과 여호수아가 주관하고 갈렙은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를 평가하듯 그는 평생 온전히 하나님을 좇았습니다.
여호수아는 물론 축복의 땅에 우리를 이끌고 들어가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예표의 인물입니다.
축복의 땅 가나안을 백성에게 주는 것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여호수아이지 모세도 아니고 갈렙도 아닙니다.
축복의 땅의 구원역사에서 갈렙은 감춰져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헌신과 사명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갈 때도 우리는 감춰지고 낮아질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당시 누가 봐도 여호수아에 비해 갈렙이 형편없이 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가나안의 정복 전쟁에 이름 없는 장수로 최선을 다해 용맹하게 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헤브론 산지를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그에게서 어떤 패배자의 모습도 자존감의 상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인정하고 최고의 상급을 약속하신 하나님만 온전히 좇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치이고 남보다 내가 주목받지 못할 때 마음이 참 어렵죠.
하나님이 낮추실 때 낮아지면 때가 될 때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이시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반드시 낮추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거장들은 자신이 스스를 높이게 될까봐 그렇게 조심합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은 영적인 원리를 너무 모른다고 봐야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수록 우리를 그렇게 얽매게 하는 주변의 인정에도 평판에도 자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 때 사람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당당합니다.
환경이 좀 나빠도 시련이 좀 있어도 주눅 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예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고 바로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사람의 인정과 세상의 자랑에 목말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늦고 다른 사람이 좀 앞서간데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렙이 45년 전 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철썩 같이 믿고 그 사랑과 축복을 의심하지 않았듯이 끝까지 주님의 인도를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이런 확신이 있다면 지금 내 처지와 형편이 어떻든 마음은 평안하고 담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국 갈렙에게 가나안 정복사의 위대한 역사를 기록하게 하십니다.
그가 정복한 헤브론은 가나안 중심부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그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가나안의 평안은 언제고 위태롭습니다.
헤브론 요새의 전사들은 틈만 나면 이스라엘을 공격해 올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5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갈렙이 헤브론을 점령하고 나니 그 땅에 전쟁이 그쳤다고 기록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끌지만 할당 된 땅을 싸워서 차지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몫입니다.
단 하나님은 말씀하시죠.
내가 그 싸움에 동참하겠다.
우리 인생에, 우리 가정에, 내가 속한 공동체와 직장과 이 나라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정복해야 할 싸움들을 감당해야 축복의 땅은 펼쳐지고 영적인 싸움은 끝이 납니다.
헤브론에 아낙자손들이 남아있는 한 평안과 안식과 온전한 기쁨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차지해야 할 축복의 산지를 장악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이 무엇입니까?
내 인생을 좌절시키고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고 믿음을 나태하게 하고 평안과 기쁨을 뺏는 악한 대적을 몰아내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반드시 승리를 주실 하나님을 갈렙처럼 신뢰함으로 축복의 땅을 차지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3년1월20일 주일예배 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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