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약속하셨고 오늘도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고 있는 이 구원의 여정을 실제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을 통해 죄와 사탄에 종 되었던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오늘 나눌 말씀은 그들이 드디어 광야40년 시대를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에 들어간 이야기입니다.
홍해를 건넌 후 당장 들어갈 줄 알았던 가나안 땅이 4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서 그들 눈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의 여리고 평야는 밀과 보리의 추수기를 맞아 황금물결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사막의 뽀얀 흙먼지와 냉혹한 바위 산 대신 푸른 감람나무 잎들이 햇빛에 윤기를 내며 반짝거리고 있었겠죠.
제가 지난번에 내장산을 다녀왔는데 정말 단풍에도 명품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어쩌면 잎사귀들이 그렇게 윤기가 나고 반들거리는 지 너무 신기해서 몇 번이고 감탄을 했습니다.
토양이 기름지면 초목도 윤이 나고 단풍도 더 아름다운 가 봅니다.
강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흙먼지에 쩔은 이스라엘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마른 침을 삼켰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40년 전에 이들에게 이 땅을 주길 원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가나안부족들의 병력과 견고한 성들을 보고 원망하며 가나안 땅을 원치 않았기에 광야에서 죽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엄청난 구원을 주신 대신 이 세상에서는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라고 우릴 부르신 게 아닙니다.
잠언10장 22절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영육 간에 우리에게 가장 완전한 복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자녀가 되었는 데 여전히 심령이 곤고하고 여전히 삶의 문제들이 악화되어 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만사형통하다는 것도 잘 해석해야 할 문제이지만 만사불통한 것도 전혀 아버지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되길 우리 자신보다 더 원하십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성공을 갈망하는 것 보다 사실 우리 심정이 더 간절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태에 있으면 거의 현실의 문제들도 불신앙 때 보다 더 형통한 것이 보편적인 영적인 원리입니다.
혹시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간절히 소망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아 낙심되고 근심 가운데 있다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40년 만에 기도응답을 받은 이 민족을 보고 우리가 용기를 얻길 원합니다.
드디어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초읽기에 들어간 백성들의 마음은 지금 어땠을까요?
40년 동안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면 기대도 퇴색되고 이젠 불가능하다고 생각할만도 합니다.
자신을 광야의 유랑민 팔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가나안 땅 입성을 앞 둔 대다수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혹은 어릴 때 애굽을 탈출해 평생을 광야에서 늙어 간 사람들이죠.
많은 사람들이 과연 유랑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성읍을 짓고 안착할 수 있을 지 반신반의한 채 요단강 건너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에도 일이 불발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었을테죠.
오랫동안 소원하던 것이 코 앞에 있을 때 불안감이 급상승하지 않습니까?
올 봄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앞 둔 골프선수 김인0씨가 어찌나 불안해했는지 30센티 거리의 우승퍼트를 놓쳤습니다.
결국 2위선수와 동점이 되어 연장전에 들어가 패배해서 1억3천만원의 상금을 날리고 말았었죠.
제가 아는 분은 제대를 딱 하루 남겨놓고 전역파티를 하고 있는 데 비상 싸이렌이 울리며 전쟁 실제 상황이 발생했으니 모든 군인들의 휴가와 제대가 정지되었다는 방송을 듣고 정말 까무러칠 뻔 했다고 합니다.
86년도에 비행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0씨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였죠.
전쟁보다 제대 못한 다는 게 더 무서웠다고 합니다.
넘실거리는 요단강 너머로 보이는 여리고평야를 바라보는 이 순간 이스라엘사람들의 심경에 불안과 의심과 초조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걱정은 기우였을 뿐 결국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 40년 만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국하게 됩니다.
흐르던 강이 어떻게 끊어지고 2백만명의 민족이 어떻게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갔느냐고 불신하는 세상 분들은 아직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모든 만물을 직접 만드신 하나님께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지금도 필요하다면 한강 물도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주실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기적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상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기록이며 진실이라는 것을 성경 스스로가 권위를 갖고 입증합니다.
본문의 뒷 부분 16절에 보면 이스라엘 앞에서 물줄기는 칼로 무 자르듯이 뚝 끊어져 상류 쪽으로 20킬로 미터 지점에서 쌓였다고 정확히 기록합니다.
인근 부족들이 생전 처음 보는 광경과 엄청난 물기둥을 보고 기가 막혀 하얗게 질렸을 것입니다.
또 반대 쪽 염해로 흐르는 지형은 물이 완전히 말라 물줄기가 사라졌다고 기록합니다.
5장1절을 보면 인근 국가들이 요단물줄기가 마른 것을 보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표현합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하기 위해 성 주변을 도는 이스라엘 행렬에 대해 아무런 공격도 하지 못했던 이유가 이렇게 설명이 되는 것이죠.
오늘 이스라엘이 들어간 축복의 땅 가나안은 우리가 장차 들어 갈 천국을 상징하지만 이 땅에서 지금 우리가 매일 누려야 할 삶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 가운데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역경들을 영적인 요단강이라고 해야겠지요.
우리 인생을 가로막는 요단강을 어떻게 뛰어넘어 승리와 축복을 누릴 수 있을지 본문을 통해 살펴볼 때 우리를 만져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임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먼저 우리 앞에 요단강을 만났을 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직접 넘어 갈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3절에 보면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면 그 뒤를 따르라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시죠.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모릅니다.
4절에 보면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라고 말씀하시죠.
얼마나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자상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초행길을 가는 자녀들을 챙기는 부모의 마음이십니다.
광야만 보고 살았던 이스라엘백성에게 요단강은 불가능과 두려움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강을 건너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뗏목을 만드는 방법도 부교를 만드는 방법도 어떻게 강물을 다스려야 하는 지도 모릅니다.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약궤가 앞서가는 길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보지 않은 우리의 인생길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잘 모릅니다.
지금 내 직장의 문제를 우리 가정의 문제를 내 진로의 문제를 내 앞을 가로막은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정말 잘 모릅니다.
사람들이 나름 인생을 계획하고 철저하게 준비해간다 해도 참 묘하게도 그대로 되지가 않는 것을 봅니다.
여기 처음 원하던 학교에 들어가신 분이 얼마나 됩니까?
원하던 직장에 들어가고 원하던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찌 보면 철저하게도 내가 원치 않았던 완전히 다른 삶을 지금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불과 1시간 후의 일도 미지의 세계이고 확신했던 것이 빗나갈 수도 있는 게 인생이 아닌가요?
며칠 전 중곡동주부살인사건의 공판이 열렸죠.
4살, 5살 난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온 그 짧은 사이 잠입했던 성폭행범에게 저항하다 아이들의 엄마는 처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아내가 죽은 집이 너무 끔찍해 남편은 아직도 두 아이를 데리고 단칸방에 사는 노모의 집에서 기거한다고 하더군요.
범인을 사형시키지 않으면 자기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고 남편은 법정에서 절규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로 코 앞에 무슨 일이 엎드려 기다리고 있는 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를 삼킬 듯 넘실대는 요단강 같은 두려운 존재와 부딪칠 수도 있겠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희가 이 전에 지나보지 않은 인생길을 내가 앞서 가며 인도하신다고 말씀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니 안심해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아무 걱정 없이 직장에 가고 학교에 가고 일터로 향하고 돌아와 따스한 이불을 덮고 눕는 것입니다.
우리 앞 길에 왜 예기치 못한 당황스런 일이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일은 전능하신 아버지의 다스림 안에서 이루어지고 아버지께서 책임지고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장래의 직업에 도전하고 인생을 건 결혼을 결단할 때도 이전에 한번도 지나보지 않은 길이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언약궤가 가는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전하게 미지의 시간을 향해 나가려면 항상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때로 믿음이 짐이 되는 것 같아 내려놓고 좀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가 있죠.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자유는 커녕 온갖 염려와 걱정과 지루함과 낙망이 몰려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만이 우리가 진정한 자유로움과 담대함과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피곤하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아버지 앞에 나와 예배하는 것이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위로와 축복을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따를 때 아주 구체적으로 언약궤와 이천규빗, 9백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를 두고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가까이 몰려서는 언약궤의 행진을 볼 수가 없죠.
지금 당장 우리 눈 앞에선 하나님의 인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조급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확인하려 하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멀리를 바라보고 약속을 보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응답은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고 기적은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죠.
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당장 펼쳐 보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마다 아버지께 시선을 떼지 말고 좋으신 아버지를 신뢰하며 천국의 아름다운 도성을 향해 끈기 있게 믿음으로 걸으라고 권고하십니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인생은 실족하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시편 25장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보아야 할 언약궤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절대로 변경하지 않으시고 식언치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말씀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구체적인 삶은 하나님의 계명인 말씀이 제시한 기준을 따라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겠다는 결심은 세상에 대해 놀라운 담대함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은혜의 방편들을 끊임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 믿음의 교제 이런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와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기 때문이죠.
세속적인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 이 땅의 주도권을 잡고 활동하는 마귀의 음성을 주로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의 삶을 소망하는 우리 모두가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 인도하심을 기대하길 원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우리 발은 험난한 요단물결을 이기고 축복의 기름진 땅을 밟고 서게 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요단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굳이 요단강 쪽으로 건너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출애굽 당시 진입을 시도했던 것처럼 가데스바네아 쪽으로 들어가면 강을 건널 필요가 없는 것이고 다른 경로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요단강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에도 때로 요단강이 막힌 것 같은 어려운 상황을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요단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본문 10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말하되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들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쫒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요단강의 기적은 그 기적을 목격하고 앞으로 가나안 땅에 있는 대적들을 하나님께서 쫒아주실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걸 보여주시려고 일부러 강을 건너야 할 코스를 선택하셨다는 것이죠.
이스라엘에게 눈 앞에 요단도 문제지만 사실 건너가서 치를 전쟁이 더 두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이 40년 전 가나안 땅을 정탐한 뒤 어떻게 보고했었습니까?
장대한 거인의 자손들이 견고한 성읍을 이루고 사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고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다고 했었죠.
그 말이 사실이거든요.
여전히 철병거를 가지고 산지에 성읍을 건설한 잔인한 가나안 부족을 상대할 실력이 그들에게 이제 와서 생겼을 리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실력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차지하게 될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해 요단 앞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노예 출신의 무능한 민족이 완벽한 병기를 갖춘 가나안의 일곱부족을 정벌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했던 것은 절대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매일이 싸워야 할 일들이고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들은 산재해 있습니다.
우리 실력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돌아보니 우리가 건너 온 고통과 한숨과 눈물의 요단강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또 기도하며 탄식하며 씨름한 것 같은 데 어느 덧 그 문제를 건너왔습니다.
하나님이 그 강을 건너게 하셨듯이 앞으로 모든 우리 삶의 원수들과 시련들과 하나님이 싸워주시겠다고 하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깊고 푸른 요단강이 넘실대고 강 너머 강한 대적들이 진을 치고 있다 해도 두려워하지 마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들이 바라는 좋은 것들 보다 훨씬 빨리 온다는 말이 있죠.
우리가 두려워 할 때 마귀는 신속하게 우리가 두려워하던 그 문제들을 우리 앞에 던져 놓는 교활한 존재입니다.
욥기 3장 25절에서 욥이 고백하지 않습니까?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신 아버지는 반드시 우리를 이끌어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 원수와 대신 싸우겠다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마귀가 덮는 두려움과 근심의 그늘을 담대히 뿌리치고 승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통해 보여주시는 구속사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의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지시합니다.
하나님 관점에서 오직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 된 과거의 역사적 이야기들 속엔 그래서 십자가의 구원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영적인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의미를 깨달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이 더 풍성하고 더 견고하게 말씀 위에 믿음을 세울 수 있는 것이죠.
대개는 듣기에 어렵고 딱딱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이건 씹을수록 맛이 나는 한우고기와 같은 스페셜한 음식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신앙경력에 따라 젖을 먹을 수 있는 성도가 있고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수영반으로 말하자면 우리 중엔 아직 발차기를 하는 사람이 있고 버터플라이를 하는 사람도 있고 박태0선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말캉한 말씀만 들어서는 능력 있게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담대한 믿음으로 성장하기 어렵기에 좀 딱딱한 말씀도 나누어야 합니다.
이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이 상징하는 천국을 가지 위해선 결국은 육체가 죽어야 갑니다.
그래서 보통 요단강을 죽음의 강이라고 하죠.
언젠가 ‘아마존의 눈물’ 촬영 팀의 고충을 보도한 기사에 얼마나 촬영이 위험했는지 아마존강을 건너려다 요단강을 건널 뻔 했다고 말한 것을 보았습니다.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하고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이 요단강에 들어간 것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일에 세례 요한이 이 요단강에서 유대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을 아실 겁니다.
세례는 머리 속까지 물에 잠겼다 나오는 침례가 원조입니다.
현대에는 여건 상 물을 뿌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죠.
그 의미는 죄 가운데 태어난 나의 옛 사람이 물 속에 빠져 죽는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거듭나기 위해서 먼저 있어야 할 일은 죄 가운데 태어난 과거의 나란 인격이 죽어야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바로 자연적인 생명이 물에 빠져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단강 도하 사건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홍해 도하 사건이 있죠.
신약성경이 그 사건을 홍해 바다 속에 빠져 국민 전체가 단체로 죽음을 뜻하는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오늘 요단을 건넌 사건도 옛사람의 죽음인 영적인 세례를 말씀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여정 중에도 옛사람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세례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한 마지막 말씀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입니다.
이 세례는 애벌레가 차원이 다른 나비가 되듯 죄로 오염 된 내가 놀라운 나로 다시 태어나게 하실 하나님을 믿고 내 자아와 옛사람을 과감하게 수장시키는 고백입니다.
실제적으로는 그동안 살아왔던 나의 방식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란 것을 고백하는 것이죠.
이 요단에서 반드시 죽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도 아까워할 것 없는, 우리와 가족을 괴롭게 하는 죽어야 할 옛사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옛사람이 죽기를 동의할 때 비로서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오셔서 착한 일을 시작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발적인 동의가 없으면 성령께서 절대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물론 죄의 본성을 갖고 태어난 자연적인 내가 죽는 다고 나의 인격이 갑자기 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죄를 다스릴 능력을 주시고 조화로운 성도의 인격을 갖도록 우리를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요단에서 옛사람이 죽지 않은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에 들어 간 이스라엘이 어떻게 죽지 않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언약궤가 먼저 요단 물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요단의 물이 아직 발 밑에서 넘실댈 때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물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죽음의 요단물이 끊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죠.
예수님을 상징하는 이 언약궤가 먼저 물에 빠져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물에 잠겨 영원히 죽지 않고 구원을 받고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물 속에 들어간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합니다.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누가복음 12장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마가복음 10장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명확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세례로 표현하셨던 것이죠.
언약궤가 상징하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례를 받으시고 사망의 권세를 끊으셨기에 죽음의 요단강을 이기고 우리가 영적 가나안인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오늘 본문의 영적인 의미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옛사람이 죽어야 하고 그렇게 하겠다는 공식적인 고백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의 강인 요단에서 살아나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도 인생의 역경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와 동행하시고 원수를 쫒아주시고 우리가 죽은 뒤엔 더 아름답고 완벽한 영생으로 인도하시니 할렐루야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1999년 영국 BBC방송이 여론 조사를 통해 지난 백년 간 최고의 탐험가 10인을 선정했습니다.
마르코 폴로, 아문센 같은 우리가 들어 본 탐험가들이 선정되었습니다.
그 중 어니스트 새클턴이란 사람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실패자라고 불립니다.
27명의 대원을 이끌고 남극대륙 횡단에 나섰던 그는 유빙 사이에 배가 갇히는 악재를 만납니다.
얼음덩이에 갇힌 배 안에서 영하 60도의 추위와 싸우며 사투를 벌이던 중 얼음의 압력에 배마저 깨지고 맙니다.
그들은 몇몇 씩 얼음덩이를 타고 표류하였고 가장 먼저 육지에 도착한 새클턴은 구조대를 이끌고 망망한 남극해를 돌아다니며 나머지 대원들을 한명 씩 구조합니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출항한지 무려 18개월 만에 27명 전원이 모두 살아 귀환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새클턴은 훗날,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악의 얼음산을 넘을 때 일행은 분명 세 명이었는 데 마치 네 명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 때 함께 했던 동료들에게 물으니 그들도 역시 그렇게 느꼈다고 말했다.’
유빙이 위험하게 떠내려오는 남극해를 건너던 그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죽음의 강 요단과 같은 곳입니다.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결국 죽음을 향해 허우적거리며 떠다니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 가운데 서셨기에 우리는 죽음의 물결이 엄몰하지 못하는 마른 땅을 밟으며 힘차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 건너도록 온 땅의 주의 언약궤는 요단 가운데 우뚝 서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사망의 강에 우뚝 서셔서 만국의 허다한 무리를 건너게 하시는 우리의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또한 요단을 건너 천국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요단강이 우리를 삼킬 듯 넘실대며 위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앞서 가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간절히 소망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의 땅 축복의 삶으로 우릴 인도하실 줄 확신하시고 기쁘게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2.11.11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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