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배경에는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 진영이 있는 싯딤과 건너편 여리고성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박한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모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가 드디어 대망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입성을 코 앞에 두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진출을 위한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을 엿보라고 은밀하게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에 들여보냅니다.
여리고 성에 잠입한 두 사람은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여리고 왕의 추적을 당한 정탐군은 라합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고 라합은 그 공로로 여리고성이 전멸당할 때 목숨을 보존하게 됩니다.
전 부족민이 멸망당한 여리고성에서 구원받은 한 여인과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심령에 충만하게 임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직업이 기생인 여인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라합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왔습니다.
이런 직업을 가진 여성을 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태도는 이중적입니다.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가 하면 늘 입에 오르내리며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세간을 시끄럽게 했던 상하이 스캔들도 덩신밍이란 여성의 기생행각이 배경에 있습니다.
등소평의 손녀라 사기를 친 여인을 사이에 두고 대한민국 영사들이 벌인 어이없는 행태는 기생에게 놀아났던 현대판 배비장전이나 다름없습니다.
영사가 써준 각서가 가관이더군요.
‘나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배신하면 한국 돈 6억 원을 주고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썼다고 합니다.
요즘은 또 신0아씨가 자기의 죄수번호 ‘4001’을 제목으로 출판한 책이 큰 반향을 일으켜 남녀노소가 서점 앞에 줄을 선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그들의 행태를 비난하면서도 슬그머니 책을 뽑아드는 것은 모두 부적절한 관계를 향한 인간 본연의 죄성과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하는 죄인인 것이죠.
인류 역사상 사탄의 가장 좋아하는 전략 중 하나가 바로 이 죄성을 이용해 사람을 낚는 것입니다.
고대 가나안의 종교를 보면 거룩함은 고사하고 노골적인 뒷풀이로 사람을 끌어들이고 타락하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서 성매매와 그와 유사한 형태의 죄를 무섭게 취급합니다.
신명기 23장 17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라고 했고
창기의 번 돈은 하나님 앞에 가져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직업을 가진 오늘 주인공 라합에 대한 성경의 기술에 우리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학자들 간에는 라합이 매춘 종사자가 아니라 여관 주모였다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당시 가나안의 종교 여사제로 매춘을 함께 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떤 해석이건 라합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는 여성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라합을 칭송받을 믿음의 여인으로 기록하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정탐꾼을 숨겨준 라합의 믿음을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등하다고 기록합니다.
야고보서2장25절에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정말 대단한 평가를 내린 것을 봅니다.
성경이 특별하게 평가하는 라합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첫째 본문을 통해 우리는 라합이 여리고성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인의 삶을 설명하는 데 단 한 줄도 할애하지 않습니다.
단지 라합이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전멸될 것을 믿었다는 것을 본문에서 자세히 기록합니다.
그리고 여리고성 심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의 앞에 찾아 온 기회를 잡았던 것을 기록합니다.
라합은 어떻게 여리고성과 가나안의 멸망을 알게 되었을까요?
여관이란 곳이 수많은 길손이 머무는 곳이고 첨단의 정보가 흘러나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뜨내기 길손들이 지어낸 영웅담을 과장되게 떠벌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라합은 나그네들을 상대하며 덩신밍과 같이 다양한 정보들을 입수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요단강 건너 광야에서 40년째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10절에 보면 라합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출애굽의 사건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강대국 애굽에서 해방시키고 홍해를 가르고 건너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이것이 진짜 정보임을 구별해냈습니다.
그리고 최근 아모리왕인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새로운 정보도 입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이 끝났다는 소식도 들었고 그들의 최종 목적지가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가나안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는 전능한 신은 인간의 손으로 깎아 만든 우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신이 이 땅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겠다고 했으니 그대로 이루어질거라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벌을 민족 신들의 싸움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는 말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심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결론은 우리는 이제 죽게되었구나였습니다.
라합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은 소돔과 같이 심판 받아 마땅한 곳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인숙은 인생의 막장에 들어선 사람들의 집합소죠.
라합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찬 가나안 부족들을 대하고 보고 들었습니다.
어쩌면 라합은 죄로 관영한 그 땅에 심판이 임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요즘도 끔찍한 범죄와 도덕적 타락을 보면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말세니 종말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자연과 정령을 숭배하는 미신이 있지만 가나안의 종교는 인간이 상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사악하고 타락한 종교였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몰렉신에게는 자기의 아이들을 불살라 제물로 바치는 패륜 종교입니다.
마칼리스터라는 한 고고학자가 팔레스타인의 게셀지역을 발굴하다 폐허가 된 한 신전을 발견했는 데 그 안에 어린 아이의 뼈가 담긴 수 백개의 항아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 가나안인들은 집을 새로 지을 때 터를 위한 제물로 아이를 바쳤는 데 오늘 본문의 여리고성에서도 가족의 행운을 위해 아이의 유골을 벽에 넣어 집을 건축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악한 죄성과 사탄의 영감이 만들어 낸 기괴하고 비인도적인 종교가 가나안의 종교입니다.
그런 종교가 가나안부족들의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아 성적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면 스스로 돌이키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이 가나안땅의 심판에 대해 신명기 9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레위기18장 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죄에 대한 심판이 없으면 진정한 구원도 없습니다.
작년 말에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의 과달루페라는 작은 마을에서 한 여자 경찰이 납치되어 사라졌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이 여경이 그 마을을 지키는 유일한 경찰관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을은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반입되는 마약의 통로입니다.
이권을 노린 거대 마약 폭력조직 사이에서 끊임없는 살상극이 반복되고 있는 곳입니다.
그 누구도 이 마을에서는 경찰관을 하지 않으려다 보니 단 한 명의 여자 경찰만 남게 되었던 것이죠.
갱들의 위협에 동료 경찰들이 모두 떠나자 에리카 간다라라는 여경 혼자 경찰서에 남았습니다.
이미 조직원들과 싸우다 얼굴에 입은 상처에 붕대를 감고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28살의 여경이 이 마을 유일한 경찰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리카 여경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무장한 갱들에 의해 결국 자신의 집에서 납치되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지역 주민들은 치안 부재의 마을에서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의 세력에 눌려 공포 속에 떨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저도 잠시 그들과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습니다.
악의 세력을 심판 할 정의의 칼이 없다고 생각하면 절망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악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모른 척하는 무기력한 분이 아니십니다.
때로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뉘우치지 않는 뻔뻔함으로 범행을 재현하는 살인범들을 볼 때 사람들은 그의 죄에 꼭 맞는 벌을 내리라고 고함을 칩니다.
죄와 악은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합니다.
자기 안전과 욕심을 위해 자식까지도 불살라 신에게 바치는 가나안의 이 참담한 죄악을 하나님이 어찌 심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스라엘이 물려받은 축복의 땅 가나안은 한편 패악한 민족에 대한 심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을 구원의 날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벌이 곧 하나님의 심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라합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이스라엘의 진격 앞에 애간장이 녹았습니다.
라합이 구원받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미 여리고의 많은 사람들도 임박한 이스라엘의 진군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9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10절에 기록된 대로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라고 라합은 말합니다.
여리고의 모든 사람들, 가나안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소문이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았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히브리서 11장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합은 믿었고 다른 사람들은 순종치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14장18절에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은 뒤따르던 애굽사람들을 물 속에 수장시키신 이유를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관하는 분임을 온 땅에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소문을 들은 가나안인들이 회개할 것을 기다리셨으나 그들이 순종치 않음으로 멸망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멸망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외면한 세상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 한 다음 누구든지 이 성을 다시 세우는 사람은 성의 기초를 놓을 때 맏아들을 잃어버릴 것이고 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을 잃어버릴 것이다라고 여호수아6장26절에서 경고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16장34절에 보면 이로부터 600년 후 아합왕 시대 벧엘 사람 히엘이 이 경고를 무시하고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려다가 정확히 첫째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었다고 기록합니다.
오늘 여리고성의 심판이 불의한 세상을 마침내 심판하실 하나님의 경고이며 표징이기에 여리고 성의 재건을 하나님이 불허하신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죽음을 망각한 인간의 삶은 동물의 상태에 가깝고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옴을 의식한 삶은 신의 상태에 가깝다" 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전도서 12장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 시리라
오늘 라합은 여리고를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었기에 실패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면서도 그것을 자주 망각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을 등한시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영원히 정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살아갈 죄인의 심판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하신 주님을 묵상하며 늘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로 나눌 것은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였다면 라합이 어떻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리고에 여관이 하나 뿐이었겠습니까?
1절에 여호수아가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라고 되어있죠?
원문으로 보면 그들이 망설임 없이 곧바로 라합의 집으로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탐꾼을 라합에게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비천한 이방여인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구원할 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낯선 두 남자가 여관으로 들어올 때 라합은 그것이 구원의 기회임을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위장을 했을지 모르지만 행색이 남다르게 보였는지 스파이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여리고의 왕에게 전해지고 말았습니다.
군사들이 추적해 올 때 라합은 두 사람을 숨겨주며 자기와 가족의 생명을 살려줄 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단히 맹세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젠 그들이 절대로 발각되지 않게 숨겨주어야만 합니다.
라합이 정탐군을 숨기는 장면이 6절에 나와 있죠.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삼베 실을 만들려고 물에 불려 널어 놓은 삼대 밑에다 그들을 숨겼다고 합니다.
이게 웬 어설픈 숨바꼭질입니까?
침입자를 수색하는 영화를 우리가 한 두번 보았습니까?
이건 100% 둘 다 죽은 목숨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 군사들의 눈을 가리고 그들을 숨겨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합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부지런히 일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말씀이 그렇지만 오늘 본문 중에도 숨어있는 등장인물 하나님이 계십니다.
라합을 살리고 정탐꾼의 사명을 완수하게 하는 데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연히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우리를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심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라합에게 정탐꾼을 통해 찾아오신 주님은 지금도 친히 사람을 찾아오셔서 구원하십니다.
천재작가 김0옥씨를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스물 두살에 쓴 무진기행이란 단편은 한국문학사의 미학적 성취라고 불리며 모든 문학도들의 경전이 된 작품입니다.
엄마를 부탁해를 쓴 신경숙씨도 그 소설을 그대로 베끼며 그의 필체를 배워보려 했다고 합니다.
서울1964년 겨울이란 작품도 많이 알려져 있죠.
언젠가 골든 벨에서 최후1인이 풀었던 문제로 바로 이 작품의 작가를 물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먼지의 방이란 소설이 신군부의 검열에 걸려 그 일부가 삭제되자 절필을 선언합니다.
그 후 작품을 쓰지 않고 문단에서 갑자기 꺼져버린 그의 행적은 한국문학사의 큰 미스테리 였습니다.
시대를 비관하고 낙심의 세월을 보내며 알콜중독자가 된 천재 문학가는 한 선배의 권유에 못 이겨 억지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사람은 일어나라는 목사님의 권유에 강력한 성령의 감동을 받았지만 저건 최면이다 생각하고 꾹 눌러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난 후 그는 참다 못해 밖으로 뛰쳐나와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크게 외쳤다고 합니다.
그날 밤 잠을 자는 데 누군가 탈이 난 명치 끝을 쓰다듬는 게 느껴졌습니다.
잠결에 깜짝 놀라 누구냐 소리 질렀더니 나는 하나님이다란 또렷한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평소대로 아침 상에서 소주를 마시려는 데 도저히 입에 댈 수 없이 술 맛이 써서 결국 술을 끊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참 여러 가지 체험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한 번은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데 성령의 강한 임재가 그를 둘러 싸더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신없이 방언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워커힐호텔에 장기 투숙을 하며 배0호감독과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던 때 그가 혼자 침대에 발을 뻗고 비스듬히 누워 성경을 읽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득 침대와 침대 사이의 공간에 하얀 옷자락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주님이 그를 내려다보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던 중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선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절필 20여년 만인 몇 년 전 그가 책을 한 권 출판했습니다.
천재작가의 컴백을 애타게 기다리던 문학계가 발칵 뒤집혔는 데 출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책의 제목을 내가 만난 하나님이라 붙였습니다.
무진기행, 서울1964년 겨울 이런 제목과 너무 다르죠?
재밌는 것은 1960년대를 풍미했던 난해하기만 하던 천재작가의 글이 너무나 쉽고 순수한 필체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찌 나 같은 놈을 아시고 이 골방까지 나를 찾아주셨나, 너무 놀랍고 놀라울 뿐이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가 허상의 신을 찾아 신전으로 올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정탐꾼을 통해서 라합을 찾아와 구원의 희망을 주신 것입니다.
라합은 수색대가 떠난 후 창문에 줄을 매어 정탐꾼이 도망가게 합니다.
18절에 보면 정탐꾼과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라합이 그들과의 약속대로 창문에 매었던 붉은 줄은 그와 가족의 생명줄이었습니다.
창문에 매여 있어 징표가 된 붉은 줄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 문에 발랐던 유월절 양의 피처럼 죽음에서 그들을 구했습니다.
그로부터 1400년 후 예수님은 바로 이 곳 여리고에 찾아오셔서 동족유대인에게 손가락질 받던 한 남자를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라합과 같이 죄와 절망의 성 중에 갇혀 살던 우리에게도 찾아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구원해 주신 줄 믿습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라합의 믿음이 어떤 축복을 가져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믿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의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멸망 받을 육적 가나안에서 뛰쳐나와 축복의 땅 영적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축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방여인이 낯선 유대인 가운데서 어떻게 삶을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의 전직이 기생이니 어느 유대인이 그를 맞아 아내로 들여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겠습니까?
라합이 유대인 중에서 겉돌며 쓸쓸한 인생을 보냈다면 그 땅을 축복의 땅이 라 부를 수는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합을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그의 인생을 끝까지 보장하고 돌보십니다.
여리고 기생 라합이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5절을 보십시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라합은 살몬이란 청년과 결혼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애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살몬이란 청년이 그날 밤 라합의 집에 숨어들었던 두 정탐꾼 중 하나였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물론 있을 법한 이야기이죠.
어쨌든 둘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 데 그가 누구냐하면 보아스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하나님을 믿겠다고 베들레헴에 돌아왔던 룻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룻과 결혼했던 그 자상한 인격자 보아스가 바로 라합의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계에서 다윗이 나고 다윗의 자손인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해피엔딩입니까?
하나님은 죄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님이 끝까지 책임지시고 왕이신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 사건을 주관하시고 기록하신 하나님의 속 뜻을 알고자 하는 데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땅에는 두 나라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의 통치하에 있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사탄과 악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멸망당한 가나안의 족속을 불쌍히 여기며 가나안을 정벌한 하나님의 심판을 냉혹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 누가 하나님보다 죄인을 더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까?
아무리 이방의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여인이라도 그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면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늘 본문 13절에 라합이 말 한 대로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일인줄 믿습니다.
라합은 그 가족과 자기의 생계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았던 여인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또한 라합 못지 않은 영적 타락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저 또한 우상숭배의 가정에서 자라나 우상의 제물을 앞에 두고 절을 하고 음식을 먹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저를 찾아와 주셔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다윗 왕의 고조모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라합만 수지맞은 인생이 아닙니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저만큼 수지맞은 인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다가도 웃음이 나오고 길을 걷다가도 찬양이 절로 나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양으로 측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아 날마다 수지맞은 인생임을 고백하는 복된 삶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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