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리고가 무너졌다 (여호수아6장1절-11절)

남수연 2012. 7. 19. 20:51

오늘 우리는 이 땅의 전쟁 역사상 가장 이상한 전술을 보게 됩니다.

군사들은 견고한 성벽 주위를 7일간 행진했고 함성을 질렀고 성벽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설화라고 말하던 이 여리고성 전투는 여리고 성터가 발굴되며 결국 사실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이 진실이라고 믿은 많은 고고학자들의 끊임없는 도전으로 1868년 여리고가 발견 돼 첫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100년 동안 만 명의 고고학자들과 인부들이 투입되어 여리고성터를 발굴해냈습니다.

드러난 증거들은 오늘 성경의 기록이 하나 하나 사실임을 입증해 줍니다.

무너져 내린 돌 더미와 그 아래 깔려 죽은 사람들의 뼈가 발견되고 항아리 마다 가득 담긴 채 불에 타있던 곡식들은 이 전쟁의 특이성을 말해줍니다.

곡식이 귀했던 고대에 전쟁에 패했다면 식량을 약탈당했어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여리고성의 전투에서 하나님이 곡식을 포함한 모든 것을 탈취하지 말고 불에 태우라고 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이 입증된 것이죠.

여리고성 전쟁은 영적인 전쟁으로서도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교훈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본문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축복의 땅 가나안에 전투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4백년 간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2백만명의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장엄한 탈출을 성공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가나안을 향해 광야를 행군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정말 전율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들의 반역으로 40년간 광야에서 떠돌게 된 내용은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불순종한 세대가 광야에서 모두 죽고 새로운 세대가 드디어 가나안 땅에 첫 발을 디딘 것이죠.

가나안의 첫 정복 대상이 바로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여리고는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불리우는 기름진 땅으로 역사상 가장 오래 된 고대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굴 된 여리고 유적지를 보면 성벽이 외벽과 내벽의 이중구조로 축조되어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벽이 얼마나 두터운지 그 위로 사두마차가 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변변한 전쟁 장비 없는 미미한 군사력으로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첫 상대가 바로 이 여리고성이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약속의 땅에 신천신지가 펼쳐진 젖과 꿀이 흐르는 푸른 초원이 기다리고 있어야 맞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괴물처럼 버티고 있는 철옹성 같은 적의 요새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전투였지만 또한 우리의 영적인 삶을 상징하는 전투이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영적인 축복의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정복해야 할 여리고 성들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정복해야 할 여리고성은 사탄과 악이 지배하는 세상과 여전히 우리마음 속에 존재하는 죄의 성품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천국에 이르기 까지 이 땅에서는 끊임없는 영적싸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인지하든 못하든 매일 이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피곤한 거예요.

이 땅에서도 우리가 평안하고 풍성한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감람나무와 포도열매와 밀과 꿀을 먹으려면 여리고를 싸워 이기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싸움을 비켜서 여리고를 지나쳐가면 반드시 뒤에서 우리의 목덜미를 잡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별거 아닌 걸로 알고 그저 대충 교회 나오면 되는 걸로 생각하고 영적 성장을 게을리 하면 어느 순간 난감한 문제가 덜미를 잡습니다.

내 안의 죄성과 싸우기를 회피하면 남들에게도 상처와 불행을 줍니다.

불의한 사회와 직장에서 세상적인 가치관과 싸우기를 포기한다면 성도의 능력을 잃게 되는 것이죠.

세상은 세속적인 성도들을 자기편처럼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 같지만 실은 짜퉁신자라고 은근히 비웃습니다.

세상은 우리보다 더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판단하고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죠.

인생도 힘겨운 데 우리를 비참한 불행에 빠뜨리는 마귀의 올무와 함정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당하고 모든 행복을 송두리째 뺏기지만 우리는 영적세력을 간파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사실 그렇게 큰 욕심과 허황된 꿈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잖습니까?

내게 주신 능력대로 성실하게 살고 노력한 만큼 돈 벌어 우리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게 소박한 바램이죠.

이걸 위해 모든 인간은 쉬임 없이 수고하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와 부조리의 그물에 얽히고 설킨 이 세상에서 누가 노력한 만큼 내 행복을 보장해 줍니까?

세상 구조와 사탄의 흉계로 그게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물질을 혹시 얻었다 해도 불시에 만나는 중병과 가정불화와 우울증이 여리고성 처럼 우리를 위협하고 버티고 서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싱가포르에서 알고 지내던 집사님 동생의 병원심방을 다녀왔습니다.

제 나이 정도 되는 그 여동생은 평범한 가정주부로 부지런히 가족들 뒷바라지 하며 살뜰하게 가정을 꾸려왔더군요.

남편도 직장에서 안정 된 직위에 올랐고 큰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으니 이젠 인생의 걱정거리가 다 사라져 인생을 즐기면 되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몸에 이상이 있어 병원을 찾았더니 암 말기였습니다.

믿음이 없이 죽음을 맞을 동생을 좀 도와달라고 집사님이 도움을 청해 오신 것입니다.

급한대로 교회에 있는 사영리 책자를 주고 먼저 예수님을 영접시키게 가르쳐 드리고 시간이 맞지 않아 지난 주에서야 방문을 하게 됐습니다.

가서보니 한 눈에 봐도 동생은 이미 회생 불가능한 상태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몸 여기저기 달린 줄들도 심란했지만 두 손을 침대 양 쪽에 묶어 놓은 채 파리 한 마리 쫒을 수 없이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이 측은해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이런 나약하고 비참한 것이 결국 인생이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백목사님이 간절히 기도해주시고 제가 또 믿음으로 권면해 주는 데 진짜 믿음이 있는지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해주셨다는 게 믿어지세요라고 물으니 말은 못하는 상태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시더군요.

다시 복음을 전하며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아프셨겠어요. 십자가에서 못에 박혀서 돌아가셨어요.’ 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자매가 눈물을 왈칵 쏟으며 몸이 앞으로 확 튀어올랐다 누우시는 거예요.

그 때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머나먼 얘기가 아니라 자신과 관계있게 느껴지는 게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몇 번 더 와서 복음을 잘 가르쳐서 믿음을 견고하게 해줘야 겠다 생각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틀 뒤 자매님이 소천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가족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너무나 평안하게 제가 가져간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정말 삶과 죽음이 한 걸음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과 두세 달 전까지는 웃고 화내고 걱정하고 자만하고 세상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려니 했지만 암이라는 병마가 그를 쓰러뜨릴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건강도 재물도 행복한 가정도 오늘 아닌 내일엔 보장 된 게 아닙니다.

병원에 가보면 정말 내 손으로 마음껏 먹고, 가고 싶은 곳 걸어 다니고 우리 가족과 평범하게 사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형편에서 감사하고 행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렇게 우리를 가로막는 인생의 여리고를 만나면 피해갈 수 없기에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영적인 전쟁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앞에 여리고처럼 큰 시련이 나타난다 해도 두려워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싸워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역대하32장8절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말씀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영적으로 약체가 되면 정말 작은 문제와 질병에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절절매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영을 강하게 만들 모든 방편들을 적극적으로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기도를 하고 공예배에 꼭 참석하고 신앙서적을 읽고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기 이런 것 들이죠.

이렇게 영적인 힘을 키워나가며 하나님을 의지할 때 사탄의 견고한 진은 무너지고 영육간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가나안의 전투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곽은 바닥으로부터 25미터 정도 높이의 요새였습니다.

이미 여리고에 정탐군을 보냈던 여호수아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저 성벽을 부수고 어떻게 군사를 진입시킬 것인지 참모들과 고심했을 것입니다.

고심한다고 해답이 나오면 여리고성이 아니죠.

우리가 당면한 골치 아픈 문제들 머리를 싸매고 고심한다고 어디 답이 나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해결 못할 문제들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3절부터 5절까지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직접 지휘하시며 전략을 세워주시죠.

우리 인생의 모든 전략을 반드시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과 함께 세우시길 축복드립니다.

현실적인 문제도 영적인 문제도 모두 하나님께 방법이 있는 줄 믿습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지만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아주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구할 때 하나님은 위기를 벗어날 영적 전술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실력만으로 문제를 대처하면 우리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며 생각하고 기도하며 머리 속에 주시는 아이디어를 좇아야 합니다.

평범한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하고 깨달으려 노력하는 것이 위기의 때 주님의 음성을 듣는 소중한 훈련이 됩니다.

또 신앙적으로 이렇게 깨어있는 사람들에게 갑작스런 곤경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이 매순간 주시는 지혜로 그런 분들은 대개 평탄한 삶을 살고 위기가 온다해도 수월하게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잠언 3장 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약속하신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지시하신 전략이 어떻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전술을 들었을 때 얼마나 당황이 되었을까요?

지금 적들은 높은 요새 위에서 모든 무기를 총동원해서 이스라엘을 향해 공격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낮은 곳에 위치한 게 얼마나 불리한지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유명한 진주성 싸움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김시민장군이 3800명의 군사로 2만명의 왜군을 이겼다는 싸움입니다.

성 안에 있는 것이 전쟁에서 얼마나 유리한 지 알 수 있죠.

그런데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전략은 대오를 벌이고 그 위험한 성 아래에서 행군을 하라는 것입니다.

머리 위로 불 화살과 돌덩이와 창들이 쏟아질 께 너무나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실패가 너무나 뻔한 전략을 주신다면 순종하기가 얼마나 어려울까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인도에 어리둥절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00목자교회의 0기성목사님은 신대원 공부 중 공부 그만하라는 하나님의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런 음성을 들으면 귀를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목사가 되려면 당연히 충분한 공부를 해야하는 데 하나님이 경우를 모르시는 분도 아니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시죠.

등록을 하루 앞 둔 날 까지 몸살을 앓으며 끙끙거리고 씨름하다 결국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석사학위도 없는 자신은 이제 목회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유목사님을 청빙한 교회들이 전혀 학위를 문제 삼지 않았고 00목자교회에서 너무나 겸손하게 훌륭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의 인생전략인 이 성경의 말씀들을 따르다보면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게 아닌가 염려되지 않습니까?

긁어 모아야 살 것 같은 데 때로 흩어서 나눠주라고 하십니다.

주일을 위해 가게 문을 닫으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 대단한 믿음입니다.

제가 오금중학교에 있을 때 주일마다 학교를 각종 시험장으로 사용했는 데 시험감독 수당 벌려고 크리스챤 교사들이 교회를 안가고 시험감독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전략을 불순종하고 얻는 인생의 이익들은 손에 모래를 쥔 것과 같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사람의 전술을 썼다면 첩자를 들여보내 성내를 교란시키고 밖에서 토담을 쌓아 성벽을 넘어 정면승부하고 뭐 이런 방법을 썼겠죠.

전쟁 경험이 부족한 이스라엘은 무참히 패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확실한 것은 현실적으로 이해가 안되고 당장 손해가 되는 것 같고 더딘 것 같아도 순종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순종은 하늘의 상급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도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 순종한다고 내 인생 망가지지 않고 내 것 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자녀인 우리들이 충분히 이 땅에서 품위유지하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는 줄 믿으세요.

지금 내 형편과 내 믿음으론 할 수 없는 것 같은 데 하나님의 뜻에 한 가지씩 순종해 가면 믿음이 성숙되고 삶은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지난 주 새롭게 하소서에서 한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선교사가 되기 위해 영국에서 유학을 마쳤는 데 하나님의 음성이 아프리카 감비아로 가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열악한 게 아프리카 땅인데 30년전 아프리카야 어땠겠어요?

혼자 가서 보니 자신은 어떻게 해보겠지만 아내와 두 딸이 살 곳은 절대로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감비아에서 선교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10년이 지나자 중학교를 마친 딸이 진급할 고등학교가 없는 것입니다.

총명한 딸을 중졸 학력으로 마치게 하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소라도 팔아서 대학을 보내려던 게 우리나라 부모들 교육열 아닌가요?

자식의 앞 날이 걸리니 그 때 정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사역을 접고 자식의 장래를 생각해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선교사님이 갈등 속에 기도하며 아프리카에 눌러 앉아 있는 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 한통의 편지가 날라왔는 데 생전 알지도 못하는 교포 한 분이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김선교사님의 두 딸을 데려다 가르치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비행기표와 학비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두 딸을 6년간 맡아 주었습니다.

큰 딸은 이번에 미국 상류층 1%만 들어간다는 존스 홉킨스 의대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절대 손해 보지 않습니다.

사업할 때 원칙대로 하시고 장사할 때 믿는 가게니 정직한 물건 쓰고 믿음으로 베풀면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미워서 얼굴 맞대기 싫은 동료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긍휼히 대하면 그 영혼을 얻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법칙과 논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도를 따라 살아갈 때 성도의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그 길이 마침내 형통하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님들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렇다면 이 독특한 하나님의 전술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 여리고 전략을 아주 상세히 정해 주십니다.

이 행군 대열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열의 한 가운데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위치합니다.

언약궤 앞에는 일곱 제사장들이 양의 뿔로 만든 뱃고동 소리 같은 나팔을 불고 섭니다.

그리고 그 앞 뒤로 무장한 군사들이 항오를 벌여 행진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마치 종교적인 행사처럼 보입니다.

종묘제례를 지내러 가는 어가행렬 같은 모습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이 모습은 우리 신앙의 모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삶의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삶에 최우선 순위에 두고 우리 마음에 성령님을 모시고 매 순간을 동행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고 세계적이라는 지금의 경제난과 질병과 무기력의 두려운 여리고를 이겨 낼 방법은 다름 아닌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 길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궤 앞 뒤에서 완전무장하고 행군해야 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의복은 잠옷이 아니라 군복이어야 합니다.

믿는 성도들은 세상에서 더 치열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알아서 해주시겠지는 낭만적인 오해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이 땅의 시련들을 대항하며 온전한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믿는 청년들 세상 친구들보다 더 공부 열심히 해야 하고 장래 무슨 일을 할 것인지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의논하며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는 감사하게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입니다.

단 심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세상에서나 믿음 안에서나 거둘 것이 없는 것입니다.

토머스 스탠리가 쓴 ‘백만장자의 정신’에서 그는 미국의 백만장자 1300명을 만나 그들의 특징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은 꿈이 뚜렷했다는 것과 기본기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기본기에 충실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이 무엇인지 잘 발견하고 내 처지와 능력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기본기를 충실하게 준비해서 사회에서 훌륭한 인재들이 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 모두 현실에서 말씀의 원칙과 기본을 지키며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업과 직장에서 반드시 최상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신앙의 삶이 날마다 기적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오늘 이스라엘이 6일 동안 똑같은 전술로 묵묵히 여리고를 도는 것과 같습니다.

첫 날 여리고 성벽 위에서 쏟아질 공격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돌았고 그 다음 날은 어땠을까요?

첫 날 이스라엘을 지켜본 여리고군사들이 공격할 가능성이 더 높았기에 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두려우심이 여리고성에 임했을 때 그들은 아무 공격을 못하고 공포에 떨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함께 설 때 세상도 사람들도 우리를 가벼이 보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육 일 동안 단 한 장의 벽돌도 떨어지지 않고 성벽에 작은 실금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죠.

그렇기에 그들은 아무 소리도 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지켜야 했습니다.

사람은 혼자보다 둘이 있으면 더 부정적이 되기 쉽습니다.

혼자 잘 추스르고 있다가도 처지를 공감할 사람이 곁에 있으면 대개는 긍정적인 말 보다는 불평과 원망하는 말을 쏟아 놓고 무너지게 되죠.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고 기적을 소망한다면 부정적인 상의보다는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족 간에 대화에서 이런 부정적인 대화들을 조심하고 언제나 긍정적인 소망을 나누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 앞에 있는 여리고 성 같은 거대한 문제들과 오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미진하게 남아 있어도 실망하고 지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직장문제와 질병과 전도되지 않는 친구와 가족들로 인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믿음이 인정받는 순간 반드시 여리고는 무너질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리고 전쟁의 영적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이스라엘을 위해 여리고의 모든 생명을 죽이는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가나안의 부족들이 멸망한 것은 그들이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았고 심지어 귀신에게 자기 자식을 불태워 바치는 극악한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여리고성에 대한 심판은 불의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표하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성의 남녀노소와 모든 가축을 죽이고 전리품을 취하지 말고 모두 불태워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이스라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명령이 잔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로마군에 절대 항전하던 이스라엘 정예군이 함락되기 직전 그들의 가족들을 자기 손으로 다 죽였다는 맛사다 전투가 생각났습니다.

여리고성의 심판은 죄의 노예로 살며 사탄을 숭배하는 처참한 인생을 하나님 손으로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심판하는 것은 절대 보복이나 증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을 심판하고 공의로 그 죄의 형량을 정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거룩하신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이면에는 은혜의 구원이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이 외칠 때 여리고 성벽 중 무너져 내리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셨습니까?

바로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집이 있던 성벽입니다.

여리고 유적지엔 무너져 내리지 않은 북쪽 성벽 한 귀퉁이가 남아있습니다.

본서 2장에 여리고를 정탐하러 온 정탐군을 믿음으로 숨겨주었던 기생 라합은 여리고전투에서 구원을 받았죠.

가족들을 집에 모으고 붉은 줄을 창문에 늘어뜨려 놓으면 살려주기로 약속했던 그 라합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다고 여호수아2장은 기록합니다.

여리고의 심판 중에 목숨을 건진 이 라합은 후에 다윗 왕의 할머니가 되었고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를 심판하시며 심판을 피할 길을 보여주시는 줄 믿습니다.

무너지지 않은 성벽 위에서 나부끼는 붉은 끈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라합을 보라!

그의 후손으로 오실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라!

우리는 여리고성의 세상을 즐기고 탐닉했던 죄인들이었지만 믿음으로 구원받은 축복의 사람들이 된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끊임없는 영적 싸움과 환란이 닥쳐옵니다.

그게 정상이니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중심에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땅의 모든 여리고를 하나님의 전략으로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