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여호수아9장 설교 (기브온 조약)

남수연 2015. 6. 9. 14:37

여호수아98-16

 

오늘 본문은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의 부족들을 정벌하고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묘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기사건입니다.

정벌의 대상이 된 기브온이라는 부족들이 마치 가나안땅이 아닌 먼 지역에 사는 사람들처럼 위장하고 평화조약을 따 낸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지고, 도덕적 윤리적으로도 죄악이 도를 넘어선 가나안의 부족들은 여호수아의 군대에 의해 완전히 진멸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 부족이 사기를 쳐서 생존하게 된 희한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건이 이상한 만큼 이 속에는 깊이 파면 팔수록 놀라운 메시지와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건을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브온부족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이 기브온조약의 전모를 본장 전체를 통해 간단히 훑어 보겠습니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이미 여리고와 아이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가나안 땅의 중심부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1절에 보면 이 소식을 들은 가나안땅의 막강한 부족들이 여호수아의 군대와 맞서려고 연합군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연합군에 가담한 히위족속 중에서 기브온 부족들이 연합전선을 이탈해 몰래 여호수아군대에 투항하고 평화조약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이 가나안땅의 모든 사람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여호수아에게 내리셨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투항하겠다고 해서 받아들여질 가망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기브온 사신들이 묘책을 만들어 냅니다.

마치 가나안 땅이 아닌 먼 곳에 거주하는 부족들처럼 위장을 하고 여호수아를 찾아옵니다.

먼 여행에 다 닳아진 것처럼 낡은 옷과 신발로 꾸미고, 오는 중에 음식물이 다 부패한 것처럼 곰팡이가 핀 떡과 기운 포도주 부대를 들고 옵니다.

처음에 7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우리들 중에 거주하는 것 같다고 말하죠.

그런데 그들은 어디서 왔냐는 여호수아의 말에 당신의 하나님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심히 먼나라에서 왔다 고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믿는다는 듯이 말해서 호의를 얻어 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미리 준비한 위조물들을 보여줍니다.

결국 여호수아는 속아서 기브온부족을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고 족장들과 함께 맹세까지 합니다.

사흘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이죠.

진멸했어야 할 부족이 남아있다는 건 실제적인 부담 뿐 아니라 가나안 정복전쟁의 의미에 큰 오점을 남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정복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정복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사건은 단지 고대 이스라엘 건국 역사를 기록한 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죄와 옛 성품을 정복하고, 또 세상에서 우리를 겨냥하는 마귀의 세력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수아의 실책을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교훈을 삼아야 할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족장들의 기브온조약의 실패의 원인은 여리고와 아이성을 함락시킨 뒤 얻은 자만심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공 뒤에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바른 판단을 하기 어렵습니다.

잠언2721절을 보면 풀무로 금을 단련하듯이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한다고 말씀합니다.

고난만 우리를 단련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칭찬으로도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여리고를 해치운 사실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승리로 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데다 저렇게 옷이 다 낡아질 만큼 먼 나라에 까지 자기들의 명성이 알려진 것에 우쭐해진 것입니다.

좀 의심이 들지만 그대로 믿고 싶었다는 것이죠.

7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그들이 가까이 사는 것 같다는 낌새를 눈치 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일이 잘되고, 남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을 때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때로 우리 자신을 격려하고 칭찬할 필요도 있지만 우쭐함은 경계해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을 왜 하셨겠습니까?

정치인, 연예인들도 보면 한참 잘 나갈 때, 말실수나 경솔한 행보를 해서 큰 타격을 받는 것을 우리가 종종 보게 되지 않습니까?

반대로 실패하고, 일이 원하는 대로 안되고, 의욕이 없을 땐 큰 일을 저지르진 않습니다.

전도서73절에서 인생을 통달한 솔로몬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일에 실패하고 자신감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비뚫어진 마음을 고치십니다.

삶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술술 풀릴 때, 사람들은 자만하며 우쭐대며 하나님을 앞서 갑니다.

그래서 14절에 말씀하는 대로 그들이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않는 더 큰 실패의 요인이 발생합니다.

그 조약을 체결할 지 말지를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2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때 여호수아에게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대제사장의 우림 판결을 물어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대제사장의 가슴에 달린 흉패 안에는 우림과 둠밈이란 돌이 들어 있었습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치적인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의 판결이 무엇인지 두 개의 돌 중에서 제비뽑기로 결정했던 것 같습니다.

예를들면 Yes면 우림, No면 둠밈이 꺼내진다는 거죠.

어제 우리 딸이 짜파게티와 참깨라면을 놓고 무엇을 먹을지 갈등을 하더니 초코 앞에 가서 할 때 왼 발을 주면 짜파게티, 오른 발을 주면 참깨라면이라며 웃기게 놀던 데 이런 게 일종의 제비뽑기죠.

신비한 결정방식이지만 그 때는 완성된 성경도 없고,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없으시고, 이런 특별나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응답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물을 때 반드시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왜 하나님은 결정권을 우리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께 자꾸 물으라고 하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대가 만만치가 않다는 뜻이고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사는 게 힘드시죠?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상대하며 사는 게 우리 역량으로 지금 잘 안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몸을 숨긴 악의 세력과 마치 어느 지점에 지뢰가 묻혀있다 터질 것 같은 환경과 나를 괴롭히는 본연의 나를 상대하기엔 우리가 역부족이란 것입니다.

일을 하다보면 내 경험과 내 실력으로 넉넉히 해 낼만한 일들에도 무수한 변수들이 끼어들어 어려움을 겪습니다.

본문에서처럼 원수들은 가나안연합군이 되어 환경을 뒤엎고, 사람을 격동시키며 전면전으로 공격하기도 하지만 기브온사람들처럼 마치 우리의 우방인 척 위장하고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선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우리 믿음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협하는 원수의 함정인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내 앞에 다가오는 삶을 덥썩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위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으며 신중하게 인도하심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으면 우리의 선택은 분명히 죄의 본성과 마귀의 미혹과 세상의 안목에 의해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신자들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얼마든지 자기 실력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아무 것도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분명히 육체의 열매일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내 방식대로 했는데 저절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한 일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우리 임의로 행한 것은 오늘 여호수아가 기브온과 맺은 조약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오늘 여호수아가 기브온과 맺은 조약의 결과로 무슨 댓가를 치릅니까?

당장 다음 장에 보면 기브온의 변절을 안 가나안의 연합군이 기브온부족을 치러 갑니다.

기브온은 여호수아에게 지원군을 요청했고 이스라엘은 그들을 위해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가나안 강대국들의 연합군을 맞설만한 실력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쨌든 그들이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큰 위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찌보면 삶의 수많은 곤란들이 이렇게 잘못 된 우리의 선택으로 생깁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군, 적군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평생을 끼고 살면서 그게 아군인줄 알고 있는 많은 죄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게 항상 우리를 곤란한 지경으로 몰아넣는데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죄도 죄인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동안 잘 살아 왔다면 그게 대견스럽고 잘 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적인 성장이 없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열매가 없고, 현실의 삶은 대적들의 방해와 공격으로 요동하고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을 실패의 원인으로 보았다면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분명히 문제가 풀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물으면 반드시 우리 길을 지도해주십니다.

그러나 기도하며 인생을 체계적으로 꾸려나가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은 어려울 때 마다 잠깐씩 기도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시겠습니까?

우리의 안테나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기 위해 항상 오픈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하나님께 나가 필요한 것들을 구하고, 계획을 의논하면 정말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연히 듣게 된 한마디 정보를 통해 다음 할 일을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아주 결정적인 선택을 할 때도 의외로 별 중요해 보이지 않는 대화 속의 사소한 말에 의해 인도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또 기도하는 중에 문제를 헤쳐 나갈 비상구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를 확신할 수 있는 믿음도 기도 중에 생겨납니다.

신촌에 가면 청년들만 수백명이 모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대학가다 보니 성도들이 대부분 대학생들이죠.

교회는 부흥되어 많은 수가 모이게 되어 공간이 비좁아 장소를 옮겨야 되겠는 데 신촌이 부동산 가격이 만만치 않잖아요.

대학생들이 돈이 없으니 헌금을 제대로 못하고 목사님이 아무리 기도를 해도 도저히 교회를 옮길 방법이 보이질 않는 거에요.

이들이 모일만한 곳을 물색 했는데, 자그마치 5억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평소 알고 지내던 S교회 목사님이 보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교회 이전에 대한 어려움을 얘기했더니 놀랍게도 선뜻 5억을 지원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실은 그 교회에서 수양관을 하나 사려고 특별헌금을 해서 5억이 마련되어 마땅한 장소를 골라 지난 주 계약을 하러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보니 오전에 다른 데서 먼저 계약을 해버렸다는 것입니다.

화도 나고, 어이도 없이 올라오는데 문득 하나님이 이 돈을 다른 데 쓸 데가 있으신가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 돈을 신촌의 청년들을 위해 쓰라고 하시는 것 같다며 자그마치 5억을 지원해 주었다고 합니다.

, 얼마 필요하십니까?

우리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응답은 때로 일상 속에 숨겨져 오고, 때로 기적으로 덥썩 다가오기도 하고, 한참 지나고 돌아보니 응답하셨다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삶의 크고 작은 일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오늘 여호수아와 같은 실책을 매 순간 감수하는 모험이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하나님께 묻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다음은 이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어이없는 사기극에 놀아난 것에 대해 노코멘트 하신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잘못 된 것은 짚고 넘어가야 맞는 데, 이 사건에 대해 의외로 입을 다무십니다.

아니 오히려 이 사기극을 적극 지지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일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연합군과 큰 전쟁을 치르지 않습니까?

전쟁에서 대패를 해야 그게 잘못이었다는 게 분명해지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이 싸움을 엄청나게 지원하시는 게 다음 장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못하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저지른 일의 결과에 대해 왜 이렇게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수습을 해주시느냐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더 중대한 영적인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잘못한 것은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이었고, 잘 한 것은 그래도 그 언약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기극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언약은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곧 자신의 일부로 생각하신다는 것을 여호수아가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상 중 하나가 약속입니다.

성경의 주제는 한마디로 말해 구원의 약속과 성취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계속해서 사람들과 약속을 하십니다.

처음엔 아담, 그 다음엔 노아, 아브라함, 야곱, 다윗을 찾아와 계속해서 내가 반드시 복을 주겠다, 영원히 거할 축복의 땅을 주겠다고 약속을 거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게 옛 창조의 목적대로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계속 약속한 것이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반드시 지키겠다고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까지 하십니다.

약속은 왜 합니까?

너무 주고 싶은 데 지금은 줄 수 없을 때, 나중에 꼭 주겠다는 게 약속입니다.

절대 변치 않고 지키겠다는 것이 약속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처음부터 주시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영광과 행복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누리며 살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인해 지금은 그걸 주지 못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때가 되면- 그것은 인간의 죄를 다 속죄할 때죠-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에덴보다 더 완전한 천국을 반드시 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걸 모형으로 보여주시는 게 구약의 인물들과 약속한 가나안땅입니다.

옛 약속이라 구약이라고 합니다.

신약은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우리에게 새롭게 거시는 약속입니다.

구약과 비교해 신약, 새로운 약속이라고 합니다.

신약의 새언약은 구약의 가나안 땅이 아니고 본래 주시려고 했던 바로 그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속죄가 완성되어 이제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천국을 유업으로 주실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나누실 때 누가복음에 22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우리가 지금 무엇을 근거로 해서 영생이 보장되었다는 것을 확신합니까?예수님의 피를 부어 세우신 이 새약속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가나안땅을 주신다는 언약이 여호수아를 통해 성취되고 있는 것은 신약에서 예수님을 통해 천국의 기업도 반드시 주신다는 맛보기입니다.

성경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은 언약을 자신의 일부로 지키십니다.

그러니 오늘 사기극에 놀아났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을 했다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묻혀 있던 사건이 하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살다 이십년 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사건이 창세기에 있습니다.

그때 야곱의 딸 디나가 가나안여자들이 신기해 구경하러 나갔다가 부락의 추장 세겜에게 겁탈을 당합니다.

세겜은 야곱을 찾아와 기왕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아예 디나를 아내로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그 때 디나의 친 오빠인 시므온과 레위가 동생에게 몹쓸 짓을 한 세겜에게 보복하기 위해 한 계략을 세웁니다.

너희가 우리와 같은 민족이 되려면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와 통혼하고 함께 거하자는 것이죠.

이 약속을 받아들여 세겜의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고 낫기를 기다릴 때 시므온과 레위가 들이닥쳐 이들을 죽이고 복수합니다.

이 세겜 사람들이 바로 히위족속이라고 나옵니다.

오늘 기브온 사람들을 7절에 히위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된 사실인지 아시겠습니까?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 위한 언약조건이었던 할례를 갖고 거짓 언약을 맺었던 것이 5백여년이 지나 이루어진 것입니다.

방식도 똑같이 사기극이죠.

그리고 이 기브온 족속들을 여호수아가 어떻게 하는지 27절은 기록합니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이들을 성소에서 일하는 자들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성소를 맡은 지파가 바로 레위지파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가 약속한 대로 히위족속의 후손을 레위지파 곁에 딱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실제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된 언약이기에 하나님이 그것을 스스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구약과 신약을 통해 약속하신 구원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완벽한 보증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죠.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새언약대로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 혹은 아직 살아있을 때 주님의 재림과 함께, 약속된 영원한 생을 눈으로 보게 되고 손으로 붙잡게 될 것을 확실히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마지막은 기브온족속에 대해서입니다.

이들은 가나안의 부족으로 마땅히 진멸 받아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의 언약으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여호수아의 군대가 가나안의 부족들을 다 전멸시키는 과정에서 거듭해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진멸해서 여호와께 바쳤다고 합니다.

이 가나안 전쟁이 단순히 국가 간의 정복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군대가 한 일은 그들의 생명을 끊어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무엇입니까?

우상과 세상의 권력을 잡고 지배하는 마귀를 세력을 섬기고, 악한 본성을 따라 극악하게 달려가던 삶을 더 이상 못하게 끊어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런 삶을 살지 못하도록 생명을 끊어서 하나님 앞에 바쳐져 영원히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서 벌을 받는 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마귀를 섬기며 자기 죄에 끌려 추악하게 사는 것보다 고통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게 더 낫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부족들이 그들의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해 하나님께 바쳐졌다면, 기브온족속들은 살아서 하나님의 성소에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죄악은 똑같고 기브온부족이 더 낫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브온은 여호수아와의 언약 덕택에 살아서 하나님께 바쳐졌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너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기브온이 잘한게 있다면 사기를 쳐서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조약을 맺으면 반드시 살게 될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고 약속하신대로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해서 가나안까지 데려오신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아니 모든 민족이 그렇게 되길 간절히 원하신 것입니다.

기브온은 치명적인 가나안의 죄악문화를 가졌지만 성소에서 일하고 섬기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전히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갔다 돌아와서 성벽을 재건할 때, 함께 돌아와 그 일을 감당했던 기브온사람들이 95명이라고 느헤미야서는 기록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향해 가는 이 땅에서 내 안에, 그리고 내 삶의 주변에서 모든 일들이 항상 멋있고 보기 좋게 펼쳐지지 않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처럼 사기도 당하고, 사기도 치고, 온갖 죄가 뒤섞인 중에 억울한 고통도 당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펼치시고, 이루어가신다는 것을 본문에서 우리는 발견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가 점점 의롭고 선하게 변해서 주시는 게 아닙니다.

가나안땅을 다 정복하지 못해 결국 기브온사람도 살고, 블레셋사람도 살고, 아모리 사람도 살 듯이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근성들이 삽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창피하고, 죄에 넘어지기도 하며 살아가지만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 안에 견고합니다.

다만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길 원합니다.

우리가 묻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냥 두십니다.

사울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패전하고 죽은 것에 대해 성경은 그가 여호와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온갖 시련과 풍파와 실패, 그리고 의심과 혼란 속에서도 우리를 예수님께 굳게 붙잡아 매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물으며 가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약속 안에 살면 결국 가나안이 여호수아의 손에 정복되듯이 우리 인생도 점점 믿음으로 정복되어가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인 나와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의 성소에서 살게 하셨으니 주안에서 끝까지 충성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5년6월7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