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HIS4NC-gA9M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난 주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습니다.
언약궤가 요단물에 들어서는 순간 흐르던 물이 뚝 끊겼죠.
상류로 역류되던 물은 내려오던 물과 엉겨 거대한 물기둥을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경외심에 사로잡혀 신속하게 요단을 건넜습니다.
10절에도 기록하길 그들이 속히 건넜다고 합니다.
누구와 말할 생각도 못하고 가족의 손을 꽉 붙잡고 서둘러 건넜을 것입니다.
물기둥 구경을 할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한복판을 지난 사람은 경외심을 가지기에 신앙을 구경거리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목숨을 주신 만큼 성도의 신앙은 절실하고 진지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예배드린다면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땅에 이른 것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주님의 대속으로 살아서 구원과 안식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법궤가 없었다면 이스라엘도 요단을 건너 안식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강을 다 건넌 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적을 역사로 기념하게 하십니다.
실제 일어난 요단 도하사건을 역사로 남기지 않으면 뒷날에 후손들은 이것을 전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도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기념일로 정해서 지키죠.
요즘은 공휴일로 지키는 한글날도 전에는 경제계 요청에 의해서 오랫동안 공휴일에서 제외 된 때가 있습니다.
한글날에 놀지를 않으니 그날이 한글날인지도 모르고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글의 소중함, 한글에 담긴 민족의 공동체 의식이 흐려지게 되는 것이죠.
한글학회와 시민단체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2012년에 다시 한글날이 공휴일로 복권된 것입니다.
그게 22년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일을 지키고, 기념일을 지키는 것도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소중했던 것을 끝까지 소중하게 지켜보자는 것이죠.
하나님도 이 사건을 기억하도록 기념돌을 세워 길이 기념하길 원하셨습니다.
그 돌들은 사라졌지만 무려 삼천 오백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성경의 기록을 통해 기념되고 있는 것이죠.
오늘 이 말씀과 더불어 내게 있어 기념할 신앙의 사건도 생각해 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리고 감사하는 귀한 시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1.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넌 뒤에 열두 개의 돌로 기념비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요단을 다 건너고 난 뒤 하나님은 2절에서 새 명령을 주십니다.
2절, 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
1)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인도와 명령은 순차적입니다.
미래를 모르는 우리는 늘 결과가 궁금하죠.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한번에 다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계획대로 하실 수 있지만 사람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결과를 알려주시면 그 과정을 다 따라가실 수 있으신가요?
또 결과를 알든 모르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똑같습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사는 거지 결과를 안다고 뭐가 달라질 게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루하루 하나님을 의지해서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의 건강을 위해서 오늘 기도하는 것이고, 내일의 건강을 위해서는 또 내일 기도하며 몸을 챙겨야 합니다.
그게 내일 일을 내일 염려하라고 하신 뜻입니다.
일의 결과가 좋기를 원하십니까?
계획과 과정을 기도로 하나님과 맞춰가며 하나하나 순종하면 좋은 결과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당연히 좋은 것만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오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여호수아에게도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강을 다 건넌 뒤 이 명령을 주십니다.
각 지파에서 열두 사람을 택하여 요단 가운데로 다시 돌아가 돌을 하나씩 어깨에 메고 나오라고 하시죠.
사실은 3장에서 이미 하나님은 지파별로 열두 명을 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택하라고만 하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저도 읽다가 그 부분이 궁금했었습니다.
뽑아 놓으셨지만 그들에게 정탐을 시키실지, 앞장 서서 싸우라는 건지,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는 것이죠.
요단강을 다 건넌 뒤에 비로서 이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열두 명의 대표들은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할 때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네? 다시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서 돌을 떠오라구요?’
이들은 대단한 역할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어진 일은 단지 무거운 돌을 지고 나르는 일이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잘 할 수 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 단지 돌을 옮기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때 그때 주시는 말씀을 따르는 게 최선입니다.
2) 오늘 돌을 메고 나른 열두 명의 헌신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난 주 반 나절을 언약궤를 메고 서 있었던 제사장들의 헌신을 우리가 생각했었죠.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자손들이 요단을 다 건너간 뒤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도 임의로 명령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열두 명의 대표들이 돌아와 언약궤 주변에서 열두 돌을 택해서 운반하기 시작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시간이 또 짧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막중한 임무이고 영광스런 일이지만 사람이 지치고 힘들면 뭐든 내려놓고 싶어지잖아요?
그러나 돌을 멘 이들이 완전히 언덕 위로 올라간 다음에서야 명령이 떨어집니다.
15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절, 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마음에 새겨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일은 하나님이 이제 됐다고 하실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다리가 마비가 되고 힘이 다 빠져 후들거린다 해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죠.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좋은 열매를 보지 못합니다.
두고 두고 후회가 됩니다.
때로 우리는 이런 회의를 느낍니다.
이게 맞는 건가?
이 시시해 보이는 일을 계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계속 교회를 다니는 데 왜 달라지는 게 없지?
이런 의문이 들더라도 하나님이 그만하라는 사인을 주시지 않는다면 끝까지 하시길 바랍니다.
시작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면 끝을 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하나님의 시간에 끝내 주시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믿음과 가장 비슷한 말이 저는 인내라고 생각합니다.
믿기에 인내할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일을 견디고 있다면 그것은 곧 믿음이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축복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사장들처럼 헌신한 사람들이 바로 돌을 떠서 운반한 열두 명의 대표들입니다.
돌 좀 들어 보셨나요?
진짜 무겁습니다.
저희 집에 어머니가 쓰시던 오이지 눌러 놓았던 돌이 두 개 있었습니다.
제가 오이지 담을 일은 없지만 어머니의 돌이라 버리고 싶지가 않아서 몇 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게 만만해 보이는 크기인데도 그걸 옮기려면 꽤 힘을 써야 했어요.
어깨에 메고 갈 정도의 돌, 기념비로 세울만한 돌이라면 어땠을까요?
거기에 걸맞은 돌이어야 하기에 꽤 크고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것을 수레에 싣고 오라지 않고 어깨에 메고 오라고 하셨다는 것이죠.
마치 언약궤를 어깨에 메야 했던 것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돌은 길갈에 세워졌는 데 길갈은 요단으로 부터의 거리가 3킬로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틀림없이 이들은 명령대로 돌을 어깨에 메고 걸었을 것입니다.
내가 힘들지 않은 한도 내에서 하는 것을 헌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들의 사명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열두지파의 대표자로 뽑힌 만큼 앞으로 펼쳐질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돌을 지고 나르는 일이나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일이나 똑같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미약하다고 스스로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성도와 하나님은 계속 함께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돌의 기념비를 떠올려 보십시오.
광개토왕비처럼 웅장한 기념비가 아닙니다.
광개토왕비 높이가 사람 키 세 배를 훌쩍 넘잖아요?
하나님이 길갈에 세운 기념비는 어떻습니까?
사람 허리 쯤에나 찰 돌 열두 개가 올망졸망 세워진, 기념비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만만해 보이고 이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돌의 집합인 것이죠.
사람들은 남의 눈을 의식해서 허세를 부리고, 기왕이면 실제보다 더 그럴 듯하게 보이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에 아무 관심도 없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모습에서 배워야지 과시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아가는 세상에서 배우면 안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작은 일을 하고 살다가 죽습니다.
지금 내게 주신 작은 일을 성실히 감당하면 해 아래의 삶을 충분히 복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에 먼저 만족할 줄 알 때 하나님은 소원을 주시고 다음 계획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3) 그런데 왜 이들이 먼저 요단을 건넌 뒤에 다시 돌려보내셨을까요?
요단을 건너오는 도중에 아예 돌을 캐서 메고 오라고 하실 수도 있었잖아요?
그게 더 합리적인 명령이 아닌가요?
그럼 제사장들이 서 있는 시간도 한 시간은 줄었을텐데요.
왜 모든 백성들이 다 건넌 뒤에 다시 이 사람들이 돌을 가지러 요단 가운데로 돌아가게 하셨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두 가지 정도로 헤아려 보았습니다.
이백만명의 백성들이 정신없이 강을 건너가는 중에 이들이 함께 돌을 운반했다면 이 사건은 별로 주목받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강 언덕 위로 올라간 뒤에 다 같이 이 일을 주목하게 하신 것이죠.
11절에도 보면 제사장들과 언약궤가 마지막으로 올라오게 하실 때도 의도적으로 이렇게 표현하죠.
모든 백성이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
언약궤가 올라오고 요단물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모습을 다 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자기 지파의 대표로 뽑힌 사람들이 돌을 어깨에 무겁게 지고 언덕으로 오는 모습을 백성들이 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들의 헌신, 성도들이 헌신하는 모습을 잘 지켜봐 주어야 합니다.
섬기는 이들이 수고하고 애쓰는 것을 지켜보고 고마워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경우 단지 요단강에 있는 돌을 가져왔다더라는 말을 듣는 것과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인 가운데 열두 명의 사람들이 돌을 메고 오는 걸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눈으로 본 증인이어야 하고 이 사실을 후손들에게 증거해야 할 의무를 진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목전에서 이 일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죠.
또 열두명의 대표들이 먼저 요단강을 다 건넌 뒤에 일을 맡기셨다는 것은 중요한 신앙의 원칙을 시사합니다.
요단을 이미 건넌 사람이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하나님은 신약성경에 그 해석을 달아 놓으셨습니다.
먼저 요단강을 건넌 것과 홍해를 건넌 것은 똑같은 것이라고 23절에서 규정을 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 말하자면 요단을 건넌 의미를 신약성경은 세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단체로 세례를 받았다고 고린도전서는 기록합니다.
10장1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절,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요단을 건넌 것과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이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세례를 받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던 과거의 나는 죽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새사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세례는 물 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예수님과 함께 새사람으로 다시 부활했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게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헌신과 봉사는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인 것이죠.
일군은 먼저 요단을 건넌 사람이어야 합니다.
요단을 건너는 게 구원의 상징이기에 그 속에 봉사가 섞이면 안됩니다.
그게 섞여서 내 선한 행위로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천주교이고 헌신과 희생을 강요하는 율법적인 교회들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있다면 돌을 나르는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봉사를 많이 하면 내 봉사의 댓가로 당연히 구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봉사한 만큼 대우하셔야 된다고 생각하고 아니면 실망하고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 내가 얼마큼 빚진 자라는 것을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좀 헌신한 것, 내가 주님을 따르면서 고생하며 사는 것, 그런 것이 주님 앞에 가서 의의 면류관을 받고 영생을 누리게 될 그것과 비교가 됩니까?
천국을 다녀 온 바울사도가 말했잖아요?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교회생활에서 있어서도 어떤 단체나 모임에서처럼 자기 역할을 조금씩 찾아서 함께 짐을 나눠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내 구원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함께 성장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주시지 않고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주지도 않은 아들을 바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시고 바치라고 하시는 것이죠.
만일 믿음으로 바치라고 하셨다면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것들 중 받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내게 주신 시간, 물질, 재능들을, 내게 주신 믿음의 분량만큼 헌신하면 모두에게 기쁨과 유익이 될 복된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또 다른 열 두개의 돌이 요단강 가운데에도 세워졌습니다.
9절,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요단 밖으로 가져 나와 세운 기념돌 외에 요단강에도 똑같이 돌 열둘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돌들은 요단물이 복원되면 바로 물 속으로 잠겨 버릴 것입니다.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밖에 열두 개의 돌을 세우고 요단강 안에도 열두개의 돌을 세운 것은 무슨 뜻이 있겠죠?
밖에 세워진 열두 개의 돌이 요단을 건너 살아나온 이스라엘을 의미한다면 요단강 가운데 세워져 물에 잠긴 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단에서 죽은 옛사람, 요단에 두고 나온 옛사람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열두개의 돌을 언약궤가 있던 자리에 세운 것은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고 밖에 있는 돌은 다시 새사람으로 살아난 의미인 것이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길갈에 세워진 열두 돌을 보며 요단 물에 잠겨있을 똑같은 열두 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 흉흉한 요단강 가운데에 우리가 있었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 저 속에 있는 돌들처럼 요단물에 잠겨서 죽었을 것이야.’
요단 물 속에 잠겨 있던 열 두 돌은 바로 이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올해 하나님이 내 앞의 요단을 멈추게 하고 나를 건너게 하신 일들이 없으십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 거센 물결에 휩쓸려 큰 일 날 뻔한 일이 없으신가요?
저는 올해 세 개의 기념돌이 있습니다.
한 개는 큰 위기에서 구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멈추게 하시니 정말 걱정하고 두려웠던 그 요단물이 단 한방울도 넘어오지 못하게 하시더군요.
두 개는 생각지도 않았던 기대 이상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지나 온 더 많은 날들을 뒤돌아 보면 나를 삼키고도 남았을 수많은 요단들을 다 하나님의 은혜로 건너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님들도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요단만 건너면 단번에 안식이 오는 게 아닙니다.
이제 가나안의 막강한 부족 전체를 상대해 하나님의 전쟁을 해야 합니다.
그때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기념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힘들었던 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셨지.’
이스라엘은 이 기념돌을 여리고에 가까운 길갈에 세웠습니다.
가나안 본토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전쟁을 했지만 승리한 뒤에는 다시 이 길갈로 돌아왔습니다.
내일 다시 출정하며 이 돌들을 보며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셨는지를 보면서 다시 믿음으로 나가는 것이죠.
우리도 하나님의 도우심의 기념돌을 세우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내일도 도우실 것을 믿고 살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3. 하나님은 이 돌들이 무슨 뜻인지를 자식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6절,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여리고 평지 길갈에 세워진 열두 개의 기념석을 보며 자식들이 물을 때 이렇게 대답하라고 7절과 24절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저 돌들은 요단 가운데서 가져온 돌이라고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물으면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물이 끊어졌다고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저 돌들이 요단 밖에 나와 있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권능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의 무수한 죽은 신들과 다른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르치라는 것이죠.
요단을 마르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만 온 땅의 유일하신 신이십니다.
또 24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이 돌들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항상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비단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강한 손이 요단의 거센 물살을 막으시고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 것을 땅의 모든 백성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을 싹 다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땅의 모든 백성들이 이 소문을 듣고 강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영원한 안식을 얻으라는 것이죠.
우리가 구원의 기념비를 세웠다면 이것이 먼저 내 자식에게, 그리고 누군가에게도 구원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어야 합니다.
왜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냐고 내 기념비에 대해 누가 물으면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증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동안 살아오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어떤 기념비를 갖고 계십니까?
먼저 세워야 할 것은 사망의 요단을 주님과 함께 건넌 구원의 기념비입니다.
또 주님을 따르는 동안 우리를 위기에서 구하시는 은혜에 대한 기념비를 세워야 합니다.
남들처럼 큰 간증은 아니라도 좋습니다.
길갈에 평범한 돌들을 모아 놓은 것처럼 우리의 믿음의 기념비도 그러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 기념의 돌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올 한해도 어떤 위기와 아픔들을 주님의 은혜로 건너왔는지를 생각하며 앞으로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위한 계획을 다 이루실 주님을 향해 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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