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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두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 여리고의 승리를 통해 마음을 다잡고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한 주간 다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좋은 말을 하며 사셨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 한 장을 넘겼을 뿐인데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는 큰 시련을 만납니다.
승리나 성공에서 얻는 것보다 실패나 고난으로 얻는 것이 더 많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사실 실패하는 날이 더 많죠.
그런 면에서 오늘 아이성 전투의 패배에서도 한 해를 잘 살아갈 수 있는 값진 교훈을 얻게 되리라 믿습니다.
1. 아이성 전투의 실패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유다지파의 아간이란 사람이 여리고 전쟁에서 가져서는 안될 물건에 손을 댔기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밝힙니다.
여리고성은 다 진멸하고 불사르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여리고성 전투는 영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죽이고 뺏는 세상 전쟁과 다른 것임을 진멸로 확실히 구별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단순히 물건을 도둑질한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진 중에 죄가 들어왔고, 그로인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셨기에 아이성전투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오늘 내가 세상에서 넘어졌다면 그 전에 신앙의 실패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1절에서 이미 아이성 전투의 패배를 알고 있기에 2절에 나오는 여호수아와 참모들의 작전이 의미 없다는 걸 압니다.
실패의 원인인 믿음의 문제를 간과한 채 문제에 매달리는 게 그런 것입니다.
실패의 원인은 아간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진술들은 하나님 없이 사람 스스로가 어떻게 일을 실패로 몰고 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던 패배의 요인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1) 아이성 전쟁은 전략면에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지혜가 없이 사는 것은 세상에서 지는 싸움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할 지략도 둔해집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아이성을 정탐하도록 사람을 보냅니다.
아이성 유적지는 여리고로 부터 20킬로 정도 떨어진 고산지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아이성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이 쳐내려왔다. 그런 부분에서 아이성이 고산지대에 있었다는 것과 일치하죠.
8장25절에 보면 아이성의 주민들은 만이천 명 정도라고 합니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발굴된 성벽의 둘레도 여리고성 보다 훨씬 길고 더 큰 성입니다.
그러나 정탐꾼들은 돌아와 아이성은 작은 성이니 군사를 이삼천 명만 보내자고 합니다.
3절,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성공과 승리가 사람을 이렇게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교만은 작은 성공에도 우쭐댑니다.
언제부터 이스라엘이 이삼천 명으로 만이천 명을 이길 수 있는 용사들이었습니까?
여리고성의 성공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힘이라는 걸 벌써 잊었나봅니다.
이런 전술은 그냥 망하자는 것입니다.
아이성 사람들이 여리고처럼 멸망 당하지 않으려 죽기 살기로 대항하지 않겠습니까?
사자가 사슴을 사냥할 때도 사슴이 죽기 살기로 도망 다니니까 결국 사냥에 실패하더군요.
사자의 사냥 성공률이 30%라고 하잖아요?
결국 아이성 사람들의 기세에 몰려 이스라엘은 퇴각하고 그 와중에 삼십 육명의 전사자까지 발생합니다.
교만해진 마음은 상황을 얕잡아 보게 되고 무모한 판단을 하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도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배웁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도 백프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선의 노력이 없이 막연히 잘 될 거라는 생각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건 요행을 바라는 본성이죠.
이스라엘의 승리는 다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면 삼천명이 아니라 삼백명으로도 아이성을 정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드온이 삼백명의 군사로 미디안군대 전체를 물리쳤잖아요?
우리 힘으로 상대하기 힘든 일을 우리 힘으로 해봤자 당연히 상대가 안됩니다.
실력에는 다 레벨이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남보다 더 대단하고 나은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작은 힘으로 올해 높은 산을 넘고 계획한 일들을 이루려면 더 신중하게 노력하고, 겸손히 행합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내 능력에 핵심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2) 이 전쟁의 패배에서 우리가 얼마나 약한 자들인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정말 맥없이 넘어집니다.
아무 일이 없어도 서서히 그냥 무너지잖아요?
5절,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참, 사람 별 것 아니죠.
이삼천 명이면 충분하겠다고 자만심에 넘치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끊어지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가나안 사람들 마음이 녹았었는데 순식간에 상황은 역전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방금까지 건재했는데 단 한 방의 공격에 마음이 녹아 물처럼 됩니다.
말 한마디로도 사람의 기세를 완전히 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족들에게 특히 기세를 꺾을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면 상대방이 기가 죽을지 다 알잖아요?
마음만 먹으면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마귀도 귀신같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우리의 약점,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압니다.
낙담한 여호수아의 모습을 보십시오.
6절,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사실 전쟁에서 질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군사들을 다 이끌고 다시 공격해 볼 만도 하잖아요?
낙담한 마음이 얼마나 의지와 의욕을 끊어버리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서야 여호수아는 이 실패에 대해 하나님께 묻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서 후회와 원망이 느껴지죠.
7절,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라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
귀에 많이 익은 말입니다.
광야에서 시험이 올 때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말투죠.
여호수아가 정말 그 정도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광야세대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원망한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못 믿고 적대적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싸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살려고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낙담할 상황을 만나면 믿음도 흔들립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갈등은 내 안에 있는 믿음과 의심하는 본성과의 싸움이지 하나님과 다투는 것은 아닙니다.
한순간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튀어나온다 해도 곧 바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마음이 그게 아니라고 그 마음을 막아서죠.
이런 믿음의 갈등과 싸움은 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결국 이겨왔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믿는 마음에 힘을 주셔서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이죠.
삶이 실망스러울 때에라도 여호수아처럼 하나님 앞에서 갈등과 의심을 쏟아 놓는다면 곧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3) 실패하고 낙담해 보면 우리 본성 속에 하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갈등이 있다는 게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본성은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 않다는 것이죠.
여호수아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가나안땅을 차지하겠다고 요단강을 건너 온 것을 후회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모세가 죽기 전, 이 요단강을 건너오기 전에 요단 동쪽 땅에서 이스라엘은 큰 전쟁을 했습니다.
그때는 모세가 지휘했고 대승을 거두어서 요단 동쪽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 땅이 바로 길르앗이라는 지역입니다.
땅이 얼마나 비옥하고 목초지가 좋았는지요.
이스라엘 열두지파 중에서 르우벤지파 갓지파와 므낫세지파 절반이 가나안 땅 대신 이 땅을 달라고 모세에게 요청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들의 말대로 승낙을 해 줍니다.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이 다 똑같지 않았겠습니까?
가나안땅에 가봤자 큰 전쟁을 해야 하는 데 누가 두렵지 않겠습니까?
‘저 사람들처럼 우리도 여기 남는다고 할 걸.’
‘여기도 땅이 이렇게 넓고 좋은 데 여기서 다 같이 살면 안될까.’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사명, 이런 것보다 적당히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우리의 옛 성정 속에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다고 기뻐하다가 잠시 어려움이 오면 여지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때 이 길로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지금 과거보다 좀 힘들다 해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가는 우리의 미래는 과거보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좋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동역자들이 슬그머니 발을 빼는 게 남은 사람들을 이렇게 낙담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지파의 군사들은 모세와의 약속대로 요단강을 건너서 함께 정복 전쟁에 동참 한 뒤 요단 동편 길르앗 땅으로 복귀합니다.
그러나 요단 동편에 살게 된 이 세 지파는 결국 제일 먼저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영토도 지켜내지 못하고 흩어지게 됩니다.
함께 가는 것이 서로에게 힘이 되고 복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또 여호수아에게 모세보다 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약점이 실패를 통해 노출됩니다.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가 있었던 그 전쟁에서 거두었던 승리와 지금 자기의 전쟁의 패배를 보니 그 열등감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9절,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모세처럼 해내지 못하고 이 정복전쟁을 실패할 게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쟁에 패배한 자기와 모세를 비교할 것이잖아요?
비교의식은 자신감을 잃게 합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만큼 힘빠지게 하는 게 없습니다.
특히 내가 잘 해야 하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남과 비교당하면 정말 기분 나쁜 것 아시죠?
농담으로라도 절대로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스스로를 남과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과 비교해서 내 가치와 수준을 증명하려고 한다면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계속 뛰어나든, 아니면 상대방이 나보다 못하길 계속 바래야 하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우리의 가치를 정해주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다 하나님이 정하신 건데, 그렇게 다르게 주시고 비교하시겠어요?
내게 주신 만큼 열심히 살면 각자가 다 최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이것이면 우리가 누구와도 비교당하지 않을만큼 대단하고 존귀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하나님이 없는 인생이 왜 실패할 수 밖에 없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교만, 과도한 낙담, 자꾸 뒤를 돌아보는 믿음, 비교하며 느끼는 열등감.
우리에게 이런 약점들이 있기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며 올해도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패배의 원인을 알려주시고 승리할 방법도 알려주십니다.
10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누군가는 이 말씀이 책망이라고 하지만 저는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걱정해 주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저도 지난 주에 힘없이 기도할 때 이런 주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오직 신이시기만 하셨다면 우리의 이 약함을 어떻게 속속히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와 같은 신체와 감정으로 성육신하셨던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기에 더 우리의 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성 전투의 패배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제야 여호수아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이런 의문이 좀 들죠.
하나님이 아이성 전투가 실패하기 전에 미리 알려주시고 바로잡게 하시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런 뼈아픈 실망과 좌절을 당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하나님은 때로 미리 피할 길을 주셔서 우리로 큰 고통을 면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그 일을 당함으로써 더 좋은 것을 배우게도 하십니다.
1) 이 전쟁의 참패의 원인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에 아간이 손을 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에 있는 것은 한 개도 남김없이 진멸하고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금, 은, 쇠붙이 종류만 성소에 보관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그 중에 일부를 빼돌려 집에 감추었던 것입니다.
21절에 아간이 이렇게 자백하죠.
내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2킬로 정도의 은과 오백그램 정도의 금덩이를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를 가졌다고 합니다.
바벨론 지역에서 수입해 온 비싼 옷으로 요즘 명품과 같은 것이겠죠.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입은 옷이래야 양털과 염소털에서 실을 뽑아 만든 투박한 옷이었습니다.
고급 옷감으로 만든 아름다운 외투를 보았다면 탐이 날만도 했을 것입니다.
교통의 요충지로 상인들이 오갔던 여리고성이기에 집집마다 이런 고가의 물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걸 다 불태워야 한다니 불태우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죠.
그러나 24절을 보면 아간에게는 이미 소와 양과 장막을 충분히 가졌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뭐가 없어서도 아니고, 1절에 족보가 죽 나온 걸 보면 게다가 아간의 집안이 명문집안입니다.
그런데도 아간의 이 탐심으로 인해 민족이 망하게 된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속 떠나 계시면 여호수아의 말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족속에게 전멸당할 판입니다.
2) 하나님께 바친 물건이란 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왜 하나님께서 아간에게 진노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친 것’이라는 말은 원래의 히브리어로 ‘헤렘’입니다.
이 ‘헤렘’이란 단어는 봉헌, 진멸의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바쳤다는 뜻과 진멸하다라는 정반대의 뜻을 동시에 가진 특별한 단어죠.
여리고에 대해서는 바치라고도 하고 진멸하라고도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진멸해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정복 전쟁은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통치가 완성되는 종말을 상징하는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뭐하러 한 구석에서 벌어지는 나라 간의 전쟁에 이렇게 관여하셔서 정교하게 이야기를 만들어 가시겠습니까?
이것은 구원과 심판이 장차 이렇게 완성될 거라고 미리 그려놓은 조감도와 같은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하나님께 바쳐지게 됩니다.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은 우리도 다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집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치욕스런 심판을 받고 바쳐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수치와 고통의 댓가를 치르도록 심판을 내리셔서 그들도 다시 받으시는 것이죠.
왜냐하면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으로 바쳐질 자들이기에 진멸로 바쳐질 가나안부족들과 섞이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진멸하실 헤렘을 탐내서 소유하면 그 사람은 봉헌 될 헤렘에서 진멸 당할 헤렘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이 어떤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울왕때도 그런 일이 있었죠.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사울왕이 선심 쓰듯 왕을 살려주고 좋은 가축들과 전리품들을 챙겼다가 아말렉과 똑같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잖아요?
하나님은 진멸하라 하신 것을 동경하지도 아까워하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또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것들을 사용하되, 하나님을 부정하는 문명과 문화에는 항상 나를 스스로 구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들 가운데 끼려고 하는 사람들이 결국 거기서 나오지 못하고 함께 헤렘이 됨을 엄중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아간만 헤렘이 되지 않고 왜 이스라엘 전체가 헤렘이 되었냐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원리에서 아주 중요한 흐름을 잇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백성들이 된 것은 한사람 한사람이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개인의 자격으로가 아니라 구원의 언약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언약 안에 다 함께 구원받은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죠.
그 구원 공동체를 하나님은 한 몸으로 보십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이신 것처럼 하나라는 뜻입니다.
장차 성도들은 그런 완벽한 하나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그렇게 하나로 보시기에 누가 진멸로 바칠 것을 공동체에 들여오면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 언약을 파기한 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도 언약 이전처럼 진멸 당할 헤렘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가 헤렘이 되어야 했지만 아간만을 처벌하고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시 언약 안으로 받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죠.
뒤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모인 가운데 아간을 돌로 쳐 죽입니다.
모세오경의 율법을 보면 이스라엘의 사형제도는 다 투석형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투석형을 보고 죄를 짓지 못하게 일벌백계 하는 게 아닙니다.
여리고성에서 아간과 같이 금덩이를 보고 유혹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들이 죄인에게 돌을 던질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벌하는 것’과 똑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잡아 와 돌로 쳐야 하냐고 물을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투석형의 의도이신 것입니다.
저 죄인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죄로부터 구별 된 거룩한 공동체가 유지되길 원하셨던 것이죠.
아간의 문제가 해결되자 하나님은 다시 여호수아와 함께 하셨고 여호수아는 승리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언약공동체 안에서 함께 요단을 건넜던 아간이 가나안과 함께 진멸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지전능하셔도 공경하고 복종하지는 않는 것, 그것이 가나안과 똑같은 아간의 불신앙입니다.
가나안사람들처럼 진멸하여 바쳐진 헤렘이 된 것입니다.
항상 예수그리스도의 언약 공동체 안에 있으시길 축복드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도 역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가 있을 때는 지원해 주지 않으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언약에서 우리가 떨어져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명을 벗어나 죄를 지으며 산다면 죄가 빚어낸 추하고 고단하고 근심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살아갈 지혜를 항상 간구하시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한주간도 승리하는 삶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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