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eZyVjqinfT4
지난 주에 이스라엘은 정복한 땅을 지파별로 분배 받았습니다.
어느 지파가 어느 어느 지역을 분배받았는지가 본문 앞 여러 장에 걸쳐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남겨진 땅문서인 셈이죠.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이 땅은 다른 지파에게 매매하고 양도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장치들을 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대대로 지켜지게 하셨던 것이죠.
그 부분은 건너 뛰고 오늘 여호수아 마지막 장입니다.
여호수아도 나이가 많이 들었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죠.
지난 주 튀르키예 지진으로 졸지에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들 모습을 뉴스에서 보며 다들 안타까워 하셨을 것입니다.
무너진 건물 잔해 더미 위에 망부석처럼 앉아있는 한 아버지의 사진에 온 세계가 울었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니 돌무더기 틈으로 간신히 내민 죽은 딸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시간은 거기 그대로 멈춰있는 듯 했습니다.
작별의 말도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사람들이 이미 이만사천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슬픔 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이 함께 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내 가족, 내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작별이라면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제가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엄마, 그동안 너무 감사했고 사랑해요. 항상 든든한 울타리였던 엄마를 존경했어요. 우리 형제를 이렇게 잘 키워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이런 말씀을, 아쉽게도 못 드렸습니다.
설날 가족들 다 모여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갑자기 그날 밤 어머니가 혼수상태가 되고 열흘 만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렇게 될 걸 알았다면, 저도 그렇지만 어머니도 제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지 않으셨겠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시겠습니까?
그동안 나와 함께 해 주었고, 사랑해 주었고, 나를 위해 수고했고, 외롭지 않은 인생이 되도록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맙다.
이런 진심 어린 말을 하겠죠.
그 이별의 애틋한 순간이 온다는 것을 생각하고 오늘을 함께 해야겠습니다.
그날엔 다시 볼 수 없을 사람들이 오늘은 내 곁에 있잖아요?
오늘 여호수아는 죽음을 앞두고 자식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절한 고별 연설을 합니다.
이들이 얻은 가나안땅의 좋은 것을 대를 이어 누리는 것이 여호수아의 바램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자식들에게 그러길 바라잖아요?
그것을 위해 이스라엘백성들과 담판을 벌이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이 당부에 백성들은 믿음으로 화답합니다.
이 말씀에 우리도 화답하는 은혜를 주시길 소망합니다.
1. 여호수아의 마지막 메시지엔 자신의 하나님 신앙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누군가를 권고한다고 우리가 그대로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라면 이 백성에게 권고하는 이 말대로 살았을 것 같습니다.
오늘 권면에는 여호수아 자신의 신앙이 녹아있는 것이죠.
여호수아는 1절부터 13절까지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5백년의 역사를 아주 정확히 간추려서 회고합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민족을 인도하신 것을 되돌아 보는 것이죠.
그리고 14절에서 이렇게 권면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그러므로’라는 것은 앞에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이렇게 인도하셨으니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이죠.
여호수아의 신앙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통째로 이해하고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 구원은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부터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구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어느 정도 알아야 더 확실한 믿음이 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가 아니라 내 구원의 역사인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라고 합니다.
진짜이신 하나님이기에 진짜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우상신처럼 섬기면 안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 성도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증거입니다.
칼빈에 대한 기록을 보면 칼빈이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했는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알고 경외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이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게 됩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자녀들은 하나님을 높으신 분으로 인식합니다.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성도의 모습은 이곳에 하나님이 계시구나라는 걸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성도 역시 가장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기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온전하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온전하게 섬긴다는 것은 1장 처음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대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읽고 묵상하고 지키면 우리가 온전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은 겉으로만 따르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다해 진실하게 섬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알겠죠.
여호수아의 이 권고에는 우리가 갖춰야 할 믿음의 요소들이 간명하게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근거한 신앙,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온전하고 진실한 신앙, 이 신앙을 잘 간수하고 견고히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2. 그러나 여호수아가 염려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에 여전히 우상숭배가 혼합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14절하,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지금도 다른 신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스라엘은 그 긴 역사 속에서 여러 나라의 우상을 경험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은 갈대아 우르의 신을, 가나안으로 이주한 뒤로는 가나안부족의 신을, 애굽에서는 애굽신을 경험하죠.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슬그머니 그 신들을 섬겼고, 아직도 정리가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는 안된다, 너희가 누구를 섬길 것인지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우상에 대해 확고하십니다.
법궤 안에는 하나님이 친수로 쓰신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던 때잖아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냥 두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대대적인 신앙의 결의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15절,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그 신들 중에서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수많은 우상들과 하나님 중에 누구를 섬길지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꼭 여호와 한 분만 섬겨야 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종교 개념과 다릅니다.
복을 빌 대상이야 많으면 좋잖아요?
누가 조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도에는 신의 수가 삼억이라고 합니다.
삼억의 신이 주는 혜택을 다 누려보자는 것이 힌두교입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세상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입니다.
범신론,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겐 무신론자들도 관대합니다.
모든 신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아무것도 참 신이 아니라는 거나 같은 것이잖아요?
이런 풍조 속에서 말은 안 해도 꼭 예수님만 믿어야 하냐 갈등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아무 종교나 믿으면 좋은 곳에 가지 않겠나, 꼭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겠냐.
여호수아의 대답이 그에 대한 답입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의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됩니다.
나중에 이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의 타락의 원인이 됩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의 욕망의 결정판입니다.
골로새서에서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했잖아요?
미신 같은 것 많이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욕심이 많다고 보아야겠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유독 욕심이 많다면 하나님을 미신처럼 섬기는 걸 수도 있습니다.
신까지 동원해서 욕망을 채우려는 집요한 자기애가 우상숭배의 본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현대인들도 모양만 다르지 많은 우상을 섬기고 있을 것이 당연하죠.
사람들은 나를 빛내주고 행복하게 해 줄 많은 조연들을 원합니다.
돈, 학력, 명예, 좋은 직장, 번듯한 배우자, 멋진 외모, 그런 것들이 우리를 돋보여 줄 조연입니다.
서울대 졸업장, 얼마나 나를 빛내 줍니까?
그건 드러내고 다닐 수 없지만 최신형 벤츠는 나를 빛내 주는 조연이죠.
누구를 만나서든 카드로 결재해 줄 수 있는 재력, 너무나 갖고 싶죠.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내 것이 돼 줍니까?
그걸 애타게 좇다 보니 조연이 아니라 그것이 내 주인이 되는 것이 우상의 실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다급하면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돈도 필요하고 좋은 직장과 높은 연봉과 명예와 건강이 다 필요합니다.
이걸 누리고 소비하며 살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인간이 원하는 돈? 그것도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학개2장8절,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왕위도 주시고 부자도 만드시고 권력도 주십니다.
그걸 모른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의 신들을 또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제는 광야가 아닌 기름진 땅에서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풍년을 위해서 이 땅 농사의 신 바알에게 가서 빌 것입니다.
가문을 번창시키려니 다산의 신인 아스다롯 신전에 제물을 올리겠죠.
이 땅에는 또 어떤 복을 주는 신이 있는지 모든 제사를 기웃댈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택하라고 하는 것은 실은 하나님 한 분만이 사람에게 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것이죠.
우리가 이것저것 다 얻으려고 좇아다니지 않아도 하나님 한분만 잘 섬기면 거의 다른 것은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내 인생도 가장 지혜롭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호수아가 우상과 하나님 중에서 택하라는 이 장면이 나중에 엘리야에게서 반복됩니다.
뒷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엘리야도 똑같이 소리쳤습니다.
열왕기상 18장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 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머뭇거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우상이 되는 무언가 때문에 하나님을 선택하길 머뭇거린다면 하나님은 그것들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리실 것입니다.
젊은 세대도 빨리 이것을 깨닫고 목표로 삼은 미래가 우상이 되지 않게 하길 바랍니다.
하나님만을 구하고 하나님만을 섬깁시다.
하나님 안에 내 미래가 있고, 하나님 안에서 세운 미래가 하나님과 나와 이웃을 위한 복된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장년 이후의 성도님들도 없는 것에 너무 미련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 우리도 여호수아처럼 늙어서 세상을 떠납니다.
인생의 마지막 십년은 세상과 작별하는 기간입니다.
건강도, 물질도, 사회생활도, 인간관계도 우리가 원치 않는 상태로 흘러갈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끝까지 붙들려 해도 그것들은 떠나갑니다.
하나님만이 변함없이 노년에도 나의 영을 강하게 하시고 부족함 없는 만족과 평강을 주시며 끝까지 동행하십니다.
우리는 결국 빈 손으로 예수님의 손을 잡고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주님의 손은 무너진 잔해 틈으로 나온 죽은 딸의 손을 잡은 무기력한 인간 아버지의 손이 아닙니다.
우리의 죽은 손을 잡아 다시 살리시고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선택한 것입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행히 하나님을 선택하기고 결심합니다.
16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오리니
이들의 자손이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댄 것과는 사뭇 다르죠.
이스라엘이 이런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었던 이유에도 우리가 유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상 이렇게 하나님께 순전한 믿음을 약속하고 따랐던 세대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인 것이죠.
이들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행하신 일들을 눈으로 보고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에는 성경을 통한 역사 신앙뿐 아니라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적인 신앙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신앙은 어떻게 얻게 됩니까?
예배와 말씀, 그리고 기도, 그 다음엔 말씀을 생활의 원칙으로 삼고 지켜간다면 점점 더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된 믿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세 가지를 대며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 세가지를 경험했다면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첫째는 애굽의 종살이를 면케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17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벗어날 수 없는 노예의 운명을 하나님이 벗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출애굽 시키지 않으셨다면 지금도 이집트에서 하층민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노예처럼 사람이나 환경에 단단히 속박당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화재작이었는데 학교폭력을 다룬 것이라죠.
학폭이든 가정폭력이든 직장에서 갑질이든 당해보면 노예처럼 굴욕적입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쉽게 벗어나질 못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자유인인 줄 알죠.
예수님을 믿자고 하면 종교에 구속당하는 게 싫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사람들이 자기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습니까?
못 살잖아요?
내 환경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습니까?
가난을 내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더 경악할 현실을 성경에서 말해주시는 데 사람이 일평생 죄의 종으로 살다 죽어서도 그 심판으로 영원한 감옥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면 내 죄의 본성과 외부의 강한 힘들과 악한 영들이 결국 나를 지배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것은 다른 모든 악한 주인에게서 자유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나서 우리가 이런 자유를 얻었으니 왜 다시 무언가의 종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을 믿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큰 이적으로 광야에서 우리를 보호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이스라엘은 살인적인 광야에서 어떻게 40년을 지나왔는지 생각할 때마다 꿈이련가 싶었을 것입니다.
혹독한 시련을 지난 뒤 뒤돌아 보면 현실이었던 같지가 않죠.
지난 주 아프리카 사막을 여행하는 한 프로를 보니까 동네 개가 사막의 모래 속으로 얼굴을 처박고 있더군요.
주인의 말이 너무 더워서 그런다는 거예요.
모래 속이 그나마 시원하니까 얼굴에 모래를 잔뜩 묻히면서도 얼굴을 푹 파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구름 장막을 쳐주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생존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뒤 하나님은 우리 위에 안전한 장막을 쳐주지 않으시던가요?
큰 위기, 큰 사건으로 삶이 송두리째 흔들렸던 그때를 어떻게 이겨냈는지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주셨다는 고백을 어떻게 안 하겠습니까?
앞으로도 누가 이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겠어요?
그러니 나와 내 집은 하나님만 섬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가나안 부족을 쫓아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18절,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이스라엘은 지금 얻은 이 땅이 자기 힘으로 얻은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부족은 상대의 진을 밀어버릴 철병거가 자랑이었고 장대한 아낙자손들이 포진했고 전쟁을 밥 먹듯 하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벽돌이나 만들고 주인집 허드렛일이나 거들었던 노예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전쟁을 해서 이깁니까?
활을 쏘고 칼을 다루는 실력도 오래 연마 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광야 생활에서 그런 군사훈련을 특별히 받았다는 내용은 없죠.
그냥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가나안의 맹주들은 사라지고 내 손으로 짓지 않은 집과 과수원과 소와 양과 우물이 내 것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하고 이루려는 선한 목적들을 가로막는 대적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사람이 우리의 꿈을 꺾기도 하고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은 환경의 문이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저도 최근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장애들을 하나씩 해결하며 일을 이루어 주시는지를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헐벗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직접 경험했기에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다 왜 중도에 포기합니까?
처음엔 좀 기대를 하고 교회에 나오지만 이런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 너무 빨리 돌아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이런 하나님을 경험하고 복을 받는 데 수십년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아직 받은 은혜가 없다면 내 믿음으로 견디며 예수님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인생광야에서 도우시고, 원수를 이기고 천국과 이 땅의 복지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다행히 여호수아의 간곡한 설교를 듣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서약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도 하나님은 약속대로 남은 전쟁에서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나 이들의 다음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사사기는 기록합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쳤지만 그들은 후손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식들을 위해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저절로 잘 되겠지 생각하지 말고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기도의 문이 닫히면 축복의 문도 닫힙니다.
또 매일 하나님보다 더 치고 올라오는 우상들에 대한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항상 최우선으로, 최고로 섬긴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가장 최상의 인생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결단하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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