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다니엘서1장1절-9절 (뜻을 정하면 도우신다)

남수연 2026. 9. 25. 00:52

https://youtu.be/-tGrUsS3QKY

 

구약성경을 간단히 열 시대로 구분해서 알고 있으면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제일 먼저가 창조시대입니다.

그 다음 족장시대, 출애굽시대, 정복시대, 사사시대, 통일왕국시대, 분열왕국시대, 포로시대, 포로귀환시대, 침묵시대.

그러면 다니엘서는 어디에 해당할까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함락되고 포로로 끌려갔던 포로시대에 해당합니다.

오늘부터 다니엘서 말씀을 함께 공부해 보겠습니다.

다니엘은 포로 시대에 하나님이 세우신 정치가이고 예언자입니다.

우리가 다니엘의 결말을 알고 있어서 본문을 편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목에 칼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간담이 서늘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청년들의 이런 도전은 다니엘서에 계속됩니다.

사람은 한번 길이 난 곳으로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오늘 발걸음이 내가 앞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좋은 걸음도 나쁜 걸음도 다 길을 만듭니다.

한번 타협하면 그 다음은 더 쉽게 그 길로 가게 되죠.

감정의 골도 한번 생기면 그렇잖아요?

조심하다가도 방심하면 금방 그 감정의 골에 빠집니다.

믿음의 길을 잘 만들어 가면 항상 기쁘고 평안하게 그 길로 행하게 됩니다.

다니엘과 함께 포로가 되었던 동료들의 생각은 이랬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걸 모르겠나?

세상이 달라졌다면 거기에 순응해야지.

공동체 중에 유난히 신념이 강하고 강직한 사람은 은근 구성원들의 경계 대상입니다.

잘못하면 불똥이 포로민 공동체에 튈 것이잖아요?

그러나 다니엘서는 분명히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도, 세상도, 믿음의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이죠.

바벨론 왕이 결국 이 네 친구들을 선택하잖아요?

성도들에게 현시대는 바벨론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실세는 세속적인 권력과 어두움의 주관자인 사탄의 세력들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모든 것 위에서 통치하시죠.

다니엘이 그랬듯이 더 높은 곳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벨론 포로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고, 바벨론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법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이스라엘의 70년 바벨론 포로기 역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배우게 되고, 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됩니다.

구약을 잘 알고 있으면 나의 구원의 기초가 더 확고해집니다.

1) 이스라엘의 70년 바벨론 유수는 왜 필요했냐는 것입니다.

바벨론 유수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심판입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에도 나오죠.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끌려가던 포로들.

그 이상 비참한 것이 고대의 전쟁포로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했던 이스라엘을 왜 이렇게 가혹하게 심판하셨을까요?

바벨론 유수의 실제적인 원인은 이스라엘의 신앙 변절에 있습니다.

다니엘과 동시대 사람이 에스겔입니다.

다니엘은 1차 포로기 때, 에스겔은 2차 포로기 때 잡혀 옵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 곳곳에 가나안 우상을 숭배하는 구역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장로들이 성전에서 공공연히 우상숭배를 자행했습니다.

강단에 불상과 마리아상을 놓고 빌면서, 예배는 예배대로 드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대한 지독한 모욕이죠.

가나안 우상종교에 물들면 도덕적 타락이 따라옵니다.

우상숭배는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지 않거든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실종, 이웃에 대한 무자비, 개인의 도덕적 타락이 우상숭배의 결과였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적으로 타락하면 거의 비슷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곪고 썩어버린 이스라엘에 극단적 해법을 내리십니다.

사람이 부패하고 뼛속까지 타락하면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게 노아시대 대홍수 사건입니다.

이번에는 강대국의 철퇴를 통해 심판하시는 것이죠.

당시 앗수르를 제패한 신흥 강국 바벨론제국을 통해 우상숭배로 가득했던 이스라엘을 3차에 걸쳐 거의 다 쓸어 버리십니다.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데려다 쓸만한 사람 외에는 인정사정 볼 거 없이 다 죽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방종과 불순종에 대한 이런 심판의 칼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이 포로기 역사를 통과하며 비로서 이스라엘엔 고질적인 우상숭배가 근절됩니다.

70년 뒤 하나님이 포로들을 본토로 귀환시키시죠.

이후 이스라엘 사회에서 우상숭배는 발작버튼이 됩니다.

본디오빌라도가 총독으로 왔을 때 황제의 얼굴 깃발을 밤중에 몰래 들여와야 했을 정도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에게 발각되어서 황제 깃발을 걸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사람들은 철저히 율법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아서 심판을 받았다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시기에 개별 성경들을 모아서 지금 우리가 보는 구약성경이 완성됩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 와서는 율법이 우상이 되어 버린 상태였죠.

그러나 포로기를 통해서 야만적인 우상숭배가 끝나고 말씀을 중시하게 된 것은 획기적인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위한 평탄화 작업이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것이죠.

하나님이 준비 안 된 사람에게 우격다짐으로 임하시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마음이 기경 될 때 주님이 우리 마음에도 임하시는 것입니다.

 

2) 바벨론유수 사건은 이스라엘의 징계와 개조 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포로들과 함께 세계의 중심부 바벨론, 페르시아 제국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움직이신 것입니다.

뒤에 보면 왕들의 입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고백이 나오죠.

하나님이 세상의 중심에 존재를 드러내신 것은 구원이 그들에게도 임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오잖아요?

동방이 오늘 배경이 되는 바벨론과 페르시아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메시아의 탄생을 알았겠습니까?

유대 포로들을 통해 바벨론 땅에도 메시아가 전해졌다는 뜻이죠.

바벨론 유수에 대해서는 이렇게 두 가지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나는 우상숭배와 타락에 대한 엄중한 징계와 개조를 위해서.

또 하나는 이때로부터 구원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대상이 아니라 메시아를 믿는 모든 민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시련과 징계도 같은 목적입니다.

세속적인 삶에서 돌이키도록, 그리고 대개는 고난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 신비입니다.

 

2. 본문으로 들어가서 다니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정치가로 성장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절,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이때가 주전 605년입니다.

바벨론은 총 3차에 걸쳐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본문은 그 중 첫 번째 침공 때입니다.

2절을 보면 이때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나옵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과 성전 기물 일부와 왕족과 귀족 청년들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약 삼천 명 정도를 골라서 끌고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겉으로는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약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사실은 바벨론이 강해서 이들이 곤궁에 처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주께서 그들의 손에 넘기셨다고 합니다.

아무리 무서운 상대가 와도 하나님이 넘기지 않으시면 안 넘어갑니다.

우리에게 큰 시련이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에 환난에 굴복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온 준수한 소년들은 왕궁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4절에 보면 이때 잡혀 온 소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나오죠.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며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당시 바벨론제국은 중동아시아 전체를 제패한 최강국입니다.

최고의 문명국입니다.

바벨론의 앞서가는 문명을 포로로 잡아 온 소년들에게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든 지도자와 오너들은 똑똑한 인재가 필요합니다.

많은 나라를 속국으로 거느린 바벨론 왕에게는 많은 인재가 필요했습니다.

자기 궁정에서 일할 사람도 필요했고, 지방을 관리할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때로는 포로의 모국에 파견 보낼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런 육각형 인재를 만들기 위해 똑똑한 청년들을 데려와 교육시킨 것이죠.

 

왕은 이 소년들을 왕궁에서 삼 년을 길렀습니다.

어찌 보면 선진 문물을 배울 황금 같은 기회인 것이죠.

다니엘과 친구들이 이 기회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갖는 걸 왜 마다하겠습니까?

높은 지위에서 좋은 일을 더 할 수 있을텐데요.

이 소년들에겐 왕이 보내주는 왕의 음식과 포도주가 제공되었습니다.

바벨론 왕의 음식과 포도주가 얼마나 호사스러웠겠습니까?

한창 먹고 자랄 나이 소년들이라면 나라가 망하든 말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출세할 기회를 기뻐했을 수도 있죠.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뜻을 정하고 왕의 음식을 거절한 것입니다.

8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왕이 하사하는 음식과 포도주가 자기를 더럽힌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음식이 뭐라고 사람을 더럽히겠습니까?

이것은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음식에 대한 규례입니다.

주변 나라들이 먹는 음식 중에 이스라엘에겐 금기된 것이 많습니다.

그게 베드로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잖아요?

환상 중에 내려온 부정한 동물을 먹으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은 먹은 적이 없다고 거부하죠.

율법을 배운 청년들은 바벨론 궁중의 음식이 부정한 걸 알았습니다.

왕궁에서 나온 고기들이 대부분 바벨론 신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돼지고기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율법엔 돼지고기에 대한 금기사항이 있죠.

하나님 앞에서 성별 되게 살아온 다니엘에게 그런 음식을 거리낌 없이 받아먹는 걸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바벨론에 동화되지 않으려는 신앙적 결의 때문입니다.

좋은 음식을 받아 먹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것이죠.

사람이 편의를 제공받고, 혜택을 누리다 보면 거기에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 길들여진 입맛, 경험한 권력의 맛은 포기할 수 없게 됩니다.

왕으로부터 하사된 산해진미를 보았을 때 다니엘이 직관적으로 안 것입니다.

그 화려한 식탁과 왕이 주는 특권 의식에 내가 넘어가겠구나

그러면 왕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 길들여지지 않을 결심을 한 것이죠.

잘못되면 성공의 기회도 잃고 목숨도 잃을 수 있는 뜻을 정한 것입니다.

지금 왕궁의 고기와 포도주 먹는 청년들을 탓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신앙 양심이 그걸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죠.

성도들은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가 불편한 일이면 누가 옳다 해도 그건 아닌 것입니다.

뒤에도 계속되는 이들의 신앙이 극단적이다, 그래서 어떻게 이 사회에서 살아가나, 우리 삶에 적용이 불가능하다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심중에 분명히 말씀하시면 누가 뭐래도 내게는 거기순종하는 게 옳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때로 성도들의 충성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구심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천 영종도에서 목회하던 한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오래전 영종도에 아주 작은 교회에 부임을 합니다.

당시 영종도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빈곤한 섬이었습니다.

힘들게 시작했던 교회가 조금씩 성도들이 모이며 자리가 잡혀가게 됩니다.

그런데 영종도가 신도시로 개발되게 된 거예요.

문제는 교회가 불법 건물이라 영종도 내에 땅을 불하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어떻게서라도 종교부지를 분양 받아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야겠다 생각합니다.

그게 목사님 생각에는 예수님께 끝까지 충성하는 길이었습니다.

도시개발이 시작되고 공사에 들어갔는데도 목사님은 꼼짝 않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나중엔 주변 땅이 사방으로 깊이 파들어 가고 목사님 교회와 앞마당만 봉우리처럼 남게 됩니다.

이걸 보며 알박기라고 사람들 시선도 좋지 않았습니다.

시에서 교회 문제를 논의해 보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내려옵니다.

그러나 진척이 없자 목사님은 시청을 찾아가서 계속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목사님의 끈질긴 요청에 공원의 일부를 종교부지로 분양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땅값 대출과 건축비를 감당하느라 목사님은 잡부일을 스스로 하며 교회를 짓기 시작합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를 완공하지 못하고 탈진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겠죠.

진작 포기했어야지 목회도 못할 예배당에 뭐하러 그렇게 집착했느냐.

하나님을 잘 섬기려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합니다.

그 목사님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뭐 하러 쓸데없는 교회 건축만 하다 왔냐고 책망하실까요?

그게 사명이라고 생각했기에 한 몸을 다 바친 거잖아요?

그 목사님이 포기했어도 하나님은 수고했다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한 것이 예수님께 대한 충성된 마음이었다면 그것도 귀하다 칭찬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사위가 그 교회와 빚을 떠맡아 목회를 하고 있더군요.

누군가는 사위목사에게도 말할 것입니다.

교회를 팔아서 빚을 갚고 깨끗이 털고 나와라

그러나 뒤를 이은 사위 또한 교회를 지키는 게 맞다 생각했던 것이죠.

사람들의 인생과 신앙의 길은 미로처럼 복잡합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삶과 신앙을 평가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사참배를 하며 용서를 비는 신앙도 있고, 고개를 숙이지 않고 순교하는 신앙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아시고 각자의 믿음의 스탭에 맞게 인도해 주십니다.

만일 다니엘과 청년들의 결과가 나빴어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죽음에 이른 어린 청년들의 비장한 믿음은 더욱 우리 마음을 울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소년들의 마음을 보시더니 어떻게 하십니까?

9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다니엘이 극단적인 결심을 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성도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장인의 교회를 이어가게 된 사위 목사의 손을 하나님이 들어주셨습니다.

장인목사님이 남긴 빚이 10억이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노인 한 분이 교회를 찾아와 둘러 보고 땅값 빚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봉투를 하나 주고 떠났는데 그 속에는 1억짜리 수표 다섯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다시는 그 노인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3억5천 정도의 빚이 남아있다고 하더군요.

불리한 상황은 얼마든지 하나님이 반전 시켜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문제들은 이미 우리의 뜻을 정한 것입니다.

기도를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 간구하면 반드시 선하게 이루어 주십니다.

제가 1층 헤어샵 원장을 전도하려고 뜻을 정하고 기도한 게 5년입니다.

이번에 남편이 심장질환으로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갈비뼈를 열고 병변을 치료하고 인공심장박동기까지 심을 정도로 큰 수술이었습니다.

수술실 문 앞에서 간호사가 이렇게 말해서 황당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하실 말 있으면 하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각별한 애정도 없는 사이인데도 울컥했다고 합니다.

남편도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하더군요.

아마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문턱 하나 차이라는 걸 느꼈을 것 같습니다.

3주간이나 입원하고 지난 주 퇴원 했습니다.

저는 전도 대상자이기도 하고 이웃의 어려움이니 계속 기도했습니다.

지난 주에 미용실에 갔는데 병원 생활 중에 신기한 일이 있었다고 얘기하더군요.

수술 뒤 중환자실에서 일반 4인 병실로 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장에서 무슨 바이러스가 나왔다고 합니다.

격리해야 되니 1인실로 옮기라는 거예요.

1인실 사용료를 생각을 하니 걱정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3주를 1인실에서 보내게 된 것이죠.

그런데 반전은 강제 격리라 4인실 비용만 내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3주를 1인실에서 널널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바이러스가 무슨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구요.

원장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편히 지내게 해 주신 것 같다고 하는 거예요.

5년을 교제하며 처음 들어본 말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뜻을 정하고 행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믿음의 손을 들어주심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젊은이들의 결단을 보며 깨닫는 것이 또 있습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세상과 어느 정도 선을 긋고, 담을 쌓는 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우리가 도와야 할 곳이고, 전도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패와 악이 내게로 넘어오지 못할 경계선은 우리가 정해야 합니다.

소를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소 떼 중에서 일부는 초원의 울타리 안에서 키우고 일부는 울타리 밖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소 젖을 짜서 그 양을 비교했습니다.

어느 쪽 소가 더 많은 젖을 내었을까요?

울타리 밖에서 자유롭게 자란 소가 아니라 울타리 안에서 자란 소가 더 많은 젖을 냈습니다.

이 실험이 도출해 낸 결과는 이것입니다.

울타리가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죠.

울타리 밖의 소는 마음껏 돌아다니지만 뭔가 안전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불안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울타리 속에 갇혀서 자란 소가 더 안정적으로 젖을 낸다는 것이죠.

우리 신앙생활이 꼭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게 속박이 아니라 안전한 울타리라는 것입니다.

또 안정된 신앙을 위해 내 주변에 하나씩 울타리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죠.

주일예배의 울타리를 세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와 성경읽기의 울타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내 신앙의 성장을 위해 그런 울타리를 촘촘하게 세워가면 훨씬 더 안정적인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모든 것을 허용하지 말고 믿음을 기준으로 울타리를 하나씩 세워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벨론유수는 우상숭배 근절과 성경 중심으로 돌아오게 된 사건입니다.

또 혈통적 이스라엘의 구원에서 메시아를 통한 모든 민족의 구원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경건했는데 포로로 잡혀 온 이유를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7년 기근을 대비해서 요셉을 미리 보내셨듯이 다니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고 수많은 포로들이 바벨론으로 잡혀옵니다.

포로사회에서 다니엘은 민족을 위한 든든한 정치가가 되었던 것이죠.

그리고 총리의 지위에서 하나님 신앙을 보존하는 중요한 일을 하게 됩니다.

당장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있다 해도 마음을 굳게 정하고 예수님을 따르면 좋은 결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또 다니엘처럼 부정한 것에는 명확한 경계를 그으시기 바랍니다.

세상과 세속이 밀려 들어오면 신앙은 희석되고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있는 고난들이 우리를 세속화에서 지켜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평안할 때에 더욱 뜻을 정하고 믿음의 울타리를 하나씩 세워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