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이어 다니엘서에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벨론왕이 세운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아서 용광로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많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사실 신앙 때문에 이런 위험한 형편에 놓인다는 것 자체가 별로 달갑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하나님이 불 가운데서도 살려주실 거라는 믿음까지는 괜찮습니다.
우리도 불 같은 시련을 당할 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이런 건 좋잖아요?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믿음을 좋아하는 성도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서원이가 오늘 설교가 뭐냐고 해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했더니 ‘기독교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네’ 하더군요
우리는 항상 ‘그리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쪽이죠.
그 뒤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안 믿을겁니다.’ 이런 비장의 카드도 숨겨놓았을지 모릅니다.
바울사도의 선교여행의 숱한 박해와 고생목록들은 바울도 또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섬겼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 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세 청년이 보여준 믿음을 통해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 그 힘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 하나님이 이 믿음을 얼마나 축복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말씀에 비춰보고 이 진실하고 강한 믿음을 위해 한걸음 더 나가는 은혜가 있으시길 축복드립니다.
1. 먼저 3장 전체를 통해 바벨론의 금신상 사건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 기괴한 신상의 꿈을 꾸고 불안에 떨었던 느부갓네살은 오늘은 금으로 된 거대한 신상을 세웁니다.
이야기가 신상에서 신상으로 이어지고 있죠.
지난 주 왕의 꿈에 나타난 기괴한 신상은 세속국가들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엔 다 무너지는 환상이었죠.
오늘 왕이 세운 금신상은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고 하나님 신앙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불교, 힌두교, 이슬람, 공산국가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박해를 받습니다.
오픈도어즈 통계에 의하면 작년에 기독교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43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박해는 아니라 해도 우리 사회에서도 신앙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지난 연말 시상식에서 이영자씨나 신현준씨 데프콘씨 등 여러 사람이 수상소감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당연히 공적인 자리에서 신앙을 표현하는 게 불편하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도 자유롭게 믿음을 표현하는 데 압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세상의 우상은 하나님 신앙을 억압하는 것들만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는 우상들이 더 많습니다.
그 모든 우상의 뿌리는 ‘이 땅에서 잘되는 나’입니다.
나를 위해 스스로 마음에 모셔 들인 온갖 우상들이 박해하는 우상보다 더 많은 것이죠.
오늘 금신상만 보더라도 세 친구들에겐 목숨을 걸고 거부해야 할 우상이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의 금빛 찬란한 위용에 스스로 매료되어 엎드려 복을 빌었습니다.
이 거대한 우상제국에서 저렇게 금으로 치장하고 잘 살게 해주길 빌었겠죠.현대의 바벨론 세상엔 성도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파산시킬 안팎의 금신상이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이 약할수록 작고 시시한 우상에도 시험을 당합니다.
드디어 금신상의 낙성식날, 왕은 바벨론제국의 모든 관료들을 동원합니다.
악기가 연주되면 일제히 우상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만일 절을 안 하는 사람은 훨훨 타오르는 용광로에 던져지게 됩니다.
지난 주 다니엘의 꿈 해석 뒤 함께 기도했던 세 친구는 지방도시의 관료가 되었었죠.
이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낙성식에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내용 중에 다니엘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왕이 출타 중이었기에 총리였던 다니엘은 왕궁에 남았을 것입니다.
드디어 낙성식이 시작되고 악기가 연주되자 모든 사람들이 다 엎드려 신상에게 절을 합니다.
그리고 세 사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만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왜 이들은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선택을 했을까요?
십계명의 1계명과 2계명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나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너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이걸 안 지키고 우상에게 복을 빌다 나라가 망한 것이잖아요?
세상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기준은 하나님말씀대로 하냐 아니냐입니다.설마 했던 패망을 경험한 유대인들은 포로시대 이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강력하게 우상숭배를 거부합니다.
에스더서의 모르드개도 그래서 절하지 않다 곤욕을 치른 것입니다.
우상포비아는 예수님의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예수님시대에 로마황제가 새겨진 동전은 우상숭배라 성전에 헌금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내면의 우상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예수님께 질책을 당했었죠.
그렇기에 이들은 금신상에 절할 수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확인한 바벨론 사람들은 쾌재를 부릅니다.
유대인포로들이 자기나라 고위 관직을 맡는 거에 내심 불만이 있던 그들은 즉시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왕 앞으로 끌려 옵니다.
평소 이들의 지혜와 업무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왕은 크게 선심을 씁니다.
이번은 용서할 테니 또 주악이 연주되면 그때는 금신상에게 절하라는 것이죠.
그때 이들이 왕에게 대답합니다.
16절,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이미 마음은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17절,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리이다.
18절,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신앙이 쫄깃하면서도 이들의 담대함에 속이 다 후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결국 세 친구들은 분노한 왕의 명령대로 일곱 배나 뜨겁게 달군 풀무불 안으로 던져지게 된 것이죠.
2. 이들은 우상에게 엎드릴 것이냐 하나님께 엎드릴 것이냐를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실감이 좀 안 날지 모르지만 우리는 신앙을 위협하는 많은 제도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지 않더라도 당장 불이익이 뻔하다면 선택은 쉽지 않습니다.
지금도 대한항공 같은 데는 새 비행기가 들어오면 고사를 지냅니다.
만일 회장님이 돼지머리 앞에서 모두 절하자고 하면 어떡해 하시겠습니까?‘저는 기독교인이니 서서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기가 쉬울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우상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하는 게 우리 일상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이냐, 누구에게 엎드릴 것이냐의 싸움입니다.
무한정 염려를 선택할 것이냐 기도를 선택할 것이냐 같은 것이죠.
바벨론의 우상은 사람에게 두려움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혹하는 매력으로 끌어 들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과 권력과 쾌락이 교회에 있습니까, 세상에 있습니까?세상에 있기에 온 종일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올해 부동산 동향은 어떤가, 누구는 유튜브를 해서 한 달에 수천만원을 번다던데.
세상의 즐거움을 더 누리기 위해, 사람들은 선망합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업, 남들이 무시하지 못할 권력.
사람들은 그걸 좇아 평생 입에서 단내가 나게 달려갑니다.
그것은 두라 평지에 높이 선 금신상 처럼 휘황찬란하게 눈에 보이지만 하나님은 뒷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서가 주는 교훈 하나가 무엇입니까?세상 권력도, 세상의 역사도 하나님이 쥐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4장에 보면 하나님이 그것을 보여주시려고 교만한 느부갓네살의 왕위를 7년간 폐위시키십니다.
오늘 세 사람의 결말은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는 것도 세상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다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 주변에서 사는 사람들을 둘러보면 깨달아지는 게 있지 않습니까?
다들 자기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살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잘 살아보려고 다 아등바등 살았지만 삶은 다람쥐 쳇바퀴처럼 거의 그 수준입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가운데 성공해서 큰돈을 만지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제 주변에서도 사업하시는 분들 평생 이것저것 손대지만 돈 한 푼 못 만지고 나이만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아무리 매달려 봤자 돈과 권력과 명예가 거들떠도 안 본다니까요.
그것 잡아보려고 영혼도 팔고 양심도 팔고 인간 본색 다 드러난 사람들 이야기가 요즘 엄청난 인기죠?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잖아요.
갖출 만큼 갖춘 사람들 손에도 그렇게 안 잡히는 게 우리 손에 쉽게 잡히겠습니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바벨론제국의 고위 관료가 되었지만 왕과 신상에게 빌어서 얻은 게 아닙니다.
그걸 바라고 인생의 목적을 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데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에 두려운 게 뭐가 있겠습니까?
기껏 지금 사는 것 정도의 삶을 위해 우리가 모든 걸 바치고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요?이 정도 삶은 하나님께서 기본으로 강구해 놓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한가지 목적, 위대하신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데 두고 살아간다면 적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젊은 세대는 이 청년들처럼 일찍 하나님께 목적과 뜻을 두고 믿음의 엘리트로 성장해 가길 축복드립니다.
공부하는 지혜와 총명, 앞날을 열어갈 능력, 누가 주십니까?다니엘서1장17절에서 이미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그리고 세상 세력에게 구걸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을 주십니다.
30절,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위해 세상에서 영광을 구하는 사람을 하나님도 굳이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냥 이 땅에서 얻고 누리고 끝날 삶을 위해 사력을 다해 살지만 결국 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살다 가는 것이죠.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삶의 목적으로 둔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가장 복된 삶을 누리시길 축원드립니다.
3.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앙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에서 판단됩니다.
오늘 왕 앞에 끌려 나온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뭘 보여줍니까?우리를 불 가운데서 구해주지 않을지라도 왕의 신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엎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준은 ‘그렇게 해주어야만’ 인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인지로 판가름이 납니다.
내가 이렇게 해 주어야만 유지되는 연인관계는 위험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남겨줄 유산이 많고 세상적으로 자랑스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돌아가실 때 빚만 물려준다 할지라도 부모와 자식 간에는 계산이 안되는 사랑이라는 변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거나, 복을 주시거나, 종교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나아서라는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존재하게 한 친아버지시고 자신의 독생자를 내주셔서라도 우리를 구원해 내려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예수님의 피를 나누어 가진 진짜 아버지와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 관계가 진짜라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때때로 금신상의 기회나 금신상의 위기 앞에서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에게 선택되시길 조마조마 주시하고 계실 것입니다.
‘내가 당장 안 도와줘도 나를 선택할까?’
모든 것을 가지시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왜 우리의 선택을 원하실까요?
사랑하기 때문이죠.
부모이신 성도님들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무언지를 다 아실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마음은 자율신경처럼 통제가 안됩니다.
삶의 목적지가 거기인 것처럼 그냥 자식을 향해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독생자의 피로 씻으신 그 자식들에 대한 사랑은 인간 부모의 애정을 초월합니다.
사랑은 선택받기를 원하고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랑이 확증되길 바라잖아요?지난 주 제가 천안에 다녀왔습니다.
점심때라 마침 생활의 달인에 나온 맛집이 있어서 한번 찾아가 보았습니다.
TV로만 보다가 유명 맛집을 찾아가 본 게 처음입니다.
석산장이라는 돼지갈비집이었는데 신선로처럼 생긴 특이한 불판에 불고기처럼 육수를 부어가며 숯불에 구워먹는 물갈비가 유명했습니다.
제가 한참 고기를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세 사람이 들어와 앉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사람만 무릎을 꿇고 계속 고기를 굽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직장상사와 함께 온 신참직원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무릎을 반은 꿇은 채 먹지도 않고 계속 고기만 굽는 건 너무하다 싶어서 옆 테이블 손님들을 한번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고기 굽는 사람은 나이든 남편이었고 맞은편에는 아내와 딸이 앉아 구워준 고기를 깨작깨작 집어 먹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무릎을 꿇고 구워주는 고기를 집어 먹고 있는 아내는 마치 왕비나 된 듯 자부심이 가득 찬 표정이었습니다.
부부나 식구들이 다른 사람들 하고 어울릴 때 그런 마음 다 있잖아요?
나를 좀 존중하고 아끼는 그런 모습을 남들 앞에서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상한 것이죠.
자식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우선 챙겨주고 내 말에 순종할 때 부모 어깨가 으쓱해지잖아요?
오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하나님을 얼마나 높여드렸습니까?왕이 하나님 앞에서 한 것 코를 치켜 들고 말합니다.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그 권력자 앞에서 이들은 당당히 하나님을 높힙니다.
왕이여,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겠나이다.
느부갓네살왕의 코가 납작해지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돈에게 지시고, 시시한 오락에 밀려 기도소리 한번 못 들으시고, 하나님이 개입하면 해결 될 문제로 근심하며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을 때, 의문의 일패를 당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원칙이고 최고의 목적임을 보여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더욱이 감사할 상황이 아닌데서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 때 더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통해 높임받기를 기뻐하십니다.
받으실 영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런 사랑을 원하시는 것이죠.
우리도 부모와 자식간의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항상 하나님을 선택하고 높여 드리는 복받을 자녀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4. 하나님은 이런 자녀들을 신실하게 보호하십니다.
오늘 같이 읽지는 않았지만 이 이야기의 결말이 뒤에 이어집니다.
왕의 불같은 진노는 풀무불을 일곱배나 더 뜨겁게 하라는 명과 함께 세 사람을 용광로 속에 집어 던져 넣으라고 합니다.
용광로가 얼마나 달아 올랐는지 세사람을 포박해서 끌고 간 군인들이 먼저 타 죽었습니다.
지난 여름 더위가 맹렬했죠.
한번은 예배가 끝나고 뒤 주차장에 있는 차 안에 올라 탔는데, 얼마나 뜨겁던지 화형이라는 게 어떤 기분인지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온도가 너무 높으니까 그냥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더군요.
용광로에 던져진 세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순식간에 불살라 사라질 세 사람의 모습을 기대했던 왕은 두려움에 질려 소리 지릅니다.
‘우리가 결박해서 불 속에 던진 사람은 세 사람이지 않았느냐! 그런데 불 속에선 네 사람이 결박이 풀린 채 불 가운데 다니지 않느냐 그 네 번째는 신들의 아들 같도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용광로 어귀에서 이들을 다시 불러 냅니다.
하나님은 우상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긴 종들이 불에 던져졌을 때 지체 없이 뛰어 내려 오셨습니다.
왕이 본 신들의 아들 같은 네 번째 사람은 성육신으로 이 땅에 태어나시기 전에 일하셨던 제2위 하나님인 예수님이십니다.사랑하는 자녀의 생명이 분초를 다툴 때 대리인을 보낼 부모가 있을까요?
구약성경에서 자기 백성을 구하는 긴급한 순간엔 항상 하나님의 사자가 친히 내려오셔서 구해 주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에게도 불 가운데를 걸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불같은 고난 중에서 즉시 우리를 건져주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용광로 같던 그 모진 순간을 어떻게 지나왔을까요?
예수님께서 그 안에서 우리를 보호하셔서 불에 그을리지도 않고 타지도 않게 지켜주셨기 때문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안전장치 없이 오직 하나님만 유일한 보호자로 믿는 자녀들을 절대적으로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들은 세상이 주는 돈과 권력과 명예를 죽자고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절대로 세상에 뒤지지 않고 시시한 인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하나님만 믿고 따를 뿐인데 신기하게도 삶은 날로 번창하고 보람되고 복되게 이뤄져 갈 것입니다.
물론 그리하셔도 좋고, 그리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평생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구주로 따를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너무 믿음이 좋으면 오늘같이 큰 시험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분들도 다 큰 시험 당하며 삽니다.
믿음이 허약하면 일상의 사소한 시험도 힘겹고 작은 짐도 버겁습니다.
작은 일에 짜증이 나고, 염려에 사로잡히고, 예민해지고 쫒기듯 삽니다.
반면 죽음조차도 이겨낼 수 있는 게 큰 믿음입니다.
강한 믿음이 이 바벨론세상의 각종 우상들을 이기며 담대히 사는 힘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1장을 보면 이들이 왕이 하사한 고기를 안 먹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작은 것들을 꾸준히 하는 것이 큰 믿음의 시작입니다.
연초에 작정하신 대로 매일 정해진 기도와 성경읽기, 예배의 삶을 꾸준히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이 우상에 굴복하지 않으며 주의 나라를 위한 귀한 사명을 감당하시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2019년1월20일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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