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바벨론제국입니다.
현재의 지명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북쪽의 이라크 지역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은 바벨론제국의 느브갓네살왕에게 패망해 이곳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늘밤이 이 바벨론제국 최후의 날이고 마지막 왕인 벨사살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중동아시아를 제패했던 대제국이 멸망하던 그 밤에 성 안에서 있었던 묘하고 이상스러운 일을 다니엘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기묘함과 두려움이 본문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느껴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얼마나 많은 성경의 예언들과 연관되어져 있는지를 알고 오늘 좀 놀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짓밟히고, 도성에 피가 낭자하고, 남은 자들은 포로로 질질 끌려갔을 때 모든 것은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활약했던 다니엘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역사의 주역은 바벨론제국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역사의 주역으로 세우셨습니다.
별것 아닌 모습으로 우리가 사는 것 같지만 우리는 우주보다 중요합니다.
내가 우주의 주인공이기에 내가 고통당하면 하늘이 무너진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공인 우리가 어떻게 잘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지를 깨닫게 해주시길 소망합니다.
본문이 좀 길었는데 본문 내용을 잘 모르면 설교의 요점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전체 내용을 좀 훑어보고 자세한 내용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벨사살왕은 바벨론제국의 마지막 왕이라고 말씀드렸죠.
2절에 그의 부친이 느부갓네살왕으로 표현되었지만 이것은 아버지란 뜻이 아니라 조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정확하게는 느브갓네살의 외손자가 바로 벨사상왕입니다.
바벨론의 영광이 불과 몇 대 만에 파국을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오늘 벨사살왕이 귀족 천 명을 불러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취중에 그는 조부인 느브갓네살왕이 탈취해 온 예루살렘 성전의 금잔을 가져다 거기다 술을 부어 마십니다.
그리고 금, 은, 구리, 등으로 만든 바벨론의 신들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취중에 바벨론의 우상들을 찬양했다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종교의 얄팍한 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상은 만들었지만 경외심은 스스로 지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때 느닷없이 공중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왕궁 촛대 맞은 편 석회벽에 이상한 글자를 쓱쓱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름끼치도록 공포스러운 광경에 방탕했던 잔치자리는 비명과 고함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6절을 보면 이것을 본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무릎이 부딪칠 만큼 무서워 보셨습니까?
단지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지워지지 않는 글자를 남기고 사라졌다는 기괴한 일로만 두려운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두려움이 그곳에 임한 것입니다.
손가락이 사라진 뒤에도 왕은 자신을 가눌 수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글을 읽고 해석해주는 사람에게 나라의 세 번째 권력을 주겠다는 과도한 약속을 합니다.
이 글자를 읽고 해석하려고 왕의 모든 지혜자들이 다 불려왔지만 아무도 그 글자를 읽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벨사살왕 시절에는 현직에서 물러났던 다니엘선지자가 그 앞에 불려오게 된 것입니다.
5장 전체를 보면 다니엘선지자가 글자를 해석하기 전에 일이 이렇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선왕인 느브갓네살왕이 자기가 체험했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조서를 내려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했던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걸 다 알면서 하나님 성전의 금잔으로 술을 먹는 벨사살의 극악한 교만을 질책합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해줍니다.
그 글을 읽으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인데 그 뜻은 26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미 왕의 시대를 세어서 끝나게 하셨다.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모자랐다.
바벨론은 나뉘어져 메대와 페르시아 두 나라에게 넘겨질 것이다.
이 해석을 듣고 벨사살왕은 다니엘을 높여 나라의 세 번째 자리를 줍니다.
하나님의 두려움에 압도되어 감히 다니엘을 반박할 생각도 못한 것이죠.
그리고 바로 그날 밤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진두지휘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이 성벽의 두께가 7미터에 달하던 난공불락의 바벨론궁에 진입합니다.
벨사살왕은 거기서 죽었고 메대의 다리오왕이 나라를 차지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은 벽에 기록된 메네 메네 데겔우바르신 이란 글씨의 내용을 중심으로 본문의 교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 메네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벽에 씌여진 수상한 글자가 어느 나라 말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람어로 보는 견해가 있는 데 아람어라면 지혜자들이 읽지 못했다는 것에 좀 맞지 않습니다.
그냥 알 수 없는 문자였기에 다니엘이 읽고 해독해 준 것이라고 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끝나게 했다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나라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분명히 계시해줍니다.
정확히 바벨론의 시대를 칠십년으로 세어서 정해 놓으셨다는 것은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언되어진 것입니다.
예레미야25장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하나님이 예언하시고 작정하신 뜻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강력한 대제국 바벨론이 하루 밤에 멸망한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미스테리입니다.
그 밤에 벨사살왕의 행동은 공중에 나타난 손가락만큼이나 이상합니다.
거나한 술판을 벌이고 흥청망청 잔치하고 있는 바벨론은 지금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잔치와 술판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잔치의 분위기를 보아선 오늘 밤 죽을테니 마음껏 먹고 마시자는 것은 아닌게 분명합니다.
무슨 이유인지 이들이 이성을 잃은 잔치를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벨론제국의 멸망한 날 있었던 이 기묘한 사건에 대해 세상 역사가들의 진술도 성경과 일치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그의 역사서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벨론이 함락될 때에 어떤 축제가 바벨론 도성 안에서 베풀어지고 있었으며 그 기간에 모든 바벨론이 술을 마시고 밤새 흥청거렸다.’
역사가 헤로토투스 역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벨사살의 잔치에 모든 자들이 취중에 있었기에 메대 군사들의 기습이 용이했다.’
그러니까 다니엘의 해독에 의하면 이미 하나님이 바벨론의 시대를 세어서 끝내기로 하셨기에 이들이 거기에 맞춰 패망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벨론의 이 마지막 잔치의 모습이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51장39절은 이렇게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열정이 일어날 때에 내가 연회를 베풀고 그들이 취하여 기뻐하다가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또 57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봅니다.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지방장관들과 지도자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무오한지 너무 두렵지 않습니까?바벨론제국에게 주신 날은 칠십년으로 이미 세어졌고 그 멸망의 모습까지도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제국의 느브갓네살왕을 들어서 가나안의 불신한 나라들과 이스라엘의 배반을 징계하셨지만 바벨론의 죄악 또한 메대와 바사를 통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45장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세상의 권력과 영광의 자리에 누굴 앉히실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끌어 내리는 것도 하나님의 소관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으로 그렇게 세상나라를 통치해 가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역사를 그렇게 움직이고 계십니다.
또 23장에서 다니엘은 벨사살왕의 모든 길을 하나님이 작정하신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인생사도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것입니다.
벨사살의 길을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도 작정하십니다.
시편 37장에서도 말씀하시죠.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우리의 걸음도 하나님이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는 그 노상에 놓여있는 줄 믿습니다.
때로 아픔이 있고 비바람도 있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에 왜 이런 일이 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작정하신 길은 분명히 우리에게 선하십니다.
바벨론제국의 시대가 계산되고 끝이 났다는 것은 반대로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의 시대가 계산되어 끝이 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벨론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다시 세워졌듯이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를 짓누르는 장애물이 반드시 무너지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우리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 때를 하나님이 세고 계십니다.
우리 생각엔 지금이 때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때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더 정확하고 하나님의 계산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더 확실합니다.
우리를 작정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생에서 풍성하게 맛보게 되리라 믿습니다.
두번째 데겔,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달아 보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3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우리가 항상 자식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애들의 상태를 가늠해보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특히 우리의 어떤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우리의 속셈을 딱 그러내게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순간을 정확하게 달아보십니다.
사람은 얼렁뚱땅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지식의 하나님의 오차 없는 저울에 우리의 행동이 정확하게 달아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 선과 악을 달아보는 저울이 우리 자신을 달아본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벨사살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모자랐다고 합니다.
벨사살의 모자람이 오늘 밤 교만하고 발칙한 행동으로 정확하게 측정된 순간, 그는 제국의 왕에서도, 이 땅의 인생에서도 아웃됩니다.
벨사살이 하나님의 저울에 체크 된 죄악을 교만이라고 다니엘은 지목합니다.
22절과 23절을 보면 그가 마음을 낮추지 않았고, 자신을 하늘의 주제보다 더 높였다고 합니다.
벨사살이 하나님의 전에서 탈취해온 금잔에 술을 부어 마신 것은 하나님과 한번 해보자는 도발입니다.
모든 인간의 교만의 진수는 하나님과 자신을 견줄만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을 맞수로 보냐고 생각하십니까?
이번에 동작구에서 있었던 주차시비 문제 아시죠?교회장로님이 주일에 근처 거주자우선주차구역에 주차를 해놓고 예배를 드리다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번번이 그 교회 교인들의 무단주차로 신경이 예민했던 주차구획 사용자가 그 장로님의 차를 견인조치 했다고 합니다.
차가 견인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이 장로님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이 분에게 전화를 해서 구청에 손을 써서 주차구획선을 아주 없애 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SNS를 통해 알려지고, 결국 인터넷에 기사화되자 수백건의 악플이 달렸는데, 정말 굉장합니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홍혜0 전도사가 12월에 전쟁이 있을 것을 예언했다 불발된 사건을 다룬다고 하는 데 걱정입니다.
갤럽에서 이번에 발표한 한국종교에 대한 통계를 보면 불신자들 중 종교에 대한 호감도는 불교, 천주교, 그 다음이 기독교인 것이 현 사회가 우리를 바라보는 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조롱하는 세력들에게 홍전도사 헤프닝이 또 반가운 먹이감을 던져 줄 것입니다.
오늘 밤 벨사살의 무리들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멸하는 것을 잔치의 절정이고 최고의 쾌락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도발하는 것에 스릴을 느끼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최악의 본성을 추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여지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 사탄의 음흉한 눈빛이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죄도 역시 교만입니다.
사탄의 범죄와 아담의 범죄가 다 하나님과 비기려는 교만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하나님과 한번 해보려는 무서운 교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못난 사람도 내가 남보다 낫다는 오만과 교만을 갖고 삽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진실은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심령의 상태는 하나님도 겨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뭐 대단히 하나님 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나를 불편하게 하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에이 그만 둘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 잘되는 자리에 있다면 순간적으로 내가 인정받으려고 하나님을 밟고 내 얼굴을 내밉니다.
잠언 11장2절에서 교만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베드로전서5장5절에서 베드로사도를 통해 또 말씀합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우리 인생이 맞고 터지고 꿰맨 자국이 자자한 것은 의를 위해서 핍박받은 게 아니라 단연코 교만한 마음 때문에 받은 징계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바울사도에게서 나타나는 겸손에 대해 이런 공식을 발견했더군요.
바울사도가 겸손하게 자기가 못났다는 것을 서신서에서 여러 번 고백했습니다.
그 첫번째가 고린도전서 15장9절의 고백입니다.
‘나는 모든 사도 중 가장 작은 자’라고 합니다.
12명의 사도 다음, 즉 열세번 째 꼴찌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한 십여년 뒤 기록된 에베소서3장8절의 고백입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라고 합니다.
당시 성도가 십만명이었다면 그 중 꼴찌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몇 년 뒤 기록한 디모데전서1장15절의 고백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사도가 점점 더 자기가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제일 큰 죄인이라는 것을 자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의아한 부분이 있죠.
바울은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거의 흠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서신서에서 항상 내가 행한 것을 본받으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우리 중 누가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 중의 괴수’란 말은 바울사도가 그냥 겸손해서 한 말은 분명히 아닙니다.
무엇이 바울사도에게 그렇게 절절히 죄의 본성을 깨닫게 했을까요?
물론 그의 내면에 죽을 날이 가까워 온 그 시점까지 사라지지 않는 죄의 근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깊은 뿌리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무리 신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옛 버릇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우리 옛버릇을 마귀가 충동질하면 에덴 동산의 그 버릇이 순식간에 나오는 겁니다.
그걸 아직 모르신다면 죄의 뿌리에 대해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속죄하게 하신 것은 그냥 거짓말이나 좀 하고, 좀 음탕하고, 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그 엄청난 교만을 벗겨낼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 죄를 다 대신 짊어지고 심판을 대신 당해주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까?
정말 그렇게 솔직히 삶속에서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정직하게 말해서 하나님이 중요합니까, 내가 더 중요합니까?
그 용서받지 못할 죄, 천형을 면치 못할 죄를 바울사도가 깨달을 때마다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죄인 중에 괴수인데 누구 앞에서 잘난 척을 하겠습니까?
그런 나를 위해 아들을 대신 죽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할 말을 잃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이나라 저나라를 심판하시는 구약성경에 시험이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교만한 죄인의 패망을 막으시려 하는 지 구약성경에 절절히 나타난 것을 모르고 하는 말들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이사야선지자에게 하나님이 삼년 동안을 벌거벗고 예언을 하라는 기상천외한 주문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선지자가 그렇게 삼년을 벌거벗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 예언이 어느 나라의 멸망에 대한 것인 줄 아십니까?
이스라엘도 아니고 애굽과 구스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하며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로 여겨지는 그 애굽을 위해서 선지자를 벌거벗겨서 그들의 심판을 예고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좀 충격 받고 회개하고 다들 돌아오라고요.
때가 되면 예언되어진 죄의 심판이 정확하게 내려진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한번의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요한사도를 통해 예언하신 바벨론의 멸망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마귀에 속했던 세속의 나라를 영적 바벨론이라고 말씀합니다.
인류 역사 최후의 날, 이 영적 바벨론은 무너진다고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오늘 본문의 바벨론이 예언대로 무너졌듯이 영적 바벨론인 세상나라는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세상나라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나라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벨사살 왕 앞에 선 다니엘을 생각해보십시오.
바벨론제국의 한 가운데 왕궁, 그리고 그 제왕 앞에서 아무런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이 하늘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높이고 당당하게 진실을 증언합니다.
다니엘의 해석은 벨사살의 눈 앞에서 단 칼에 목이 베일 이야기 아닙니까?
바벨론을 두려워 하지 않는 다니엘의 용기가 무엇을 말해줍니까?
세상역사를 세시고, 벨사살의 운명을 작정하시는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잔을 들고 술을 마신 벨사살의 허세와 교만은 하나님의 심판이 올 때 후둘거리는 두 다리를 가누지도 못하게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교만하게 그 음성을 거절한 이스라엘의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의 금잔이었던 그들은 이방인의 술잔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던 다니엘은 바벨론의 왕조 뿐 아니라 페르시아의 왕조에서도 최고의 영예와 권세를 누리며 그 가운데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선지자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영적 바벨론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당당히 믿음에 서는 다니엘 같은 성도들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바르신, 이 단어는 베레스라고 번역하고 있죠.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에게 준 바 되었다 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대로 이 밤에 바벨론제국은 메대와 페르시아 연합군에 넘어갑니다.
메대의 다리왕이 나라를 얻었다고 31절에서 말씀합니다.
오전 기도회에서 이사야서를 읽다가 제가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스레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읽고 감동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사야 13장에 메대에 의해 바벨론이 멸망당한다는 예언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멸망 2백여년전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보라 은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금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메대 사람을 내가 충동하여 그들을 치리니..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을 것이라.
메대 사람에게 나라가 넘어갈 것이 이렇게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사로잡고 하나님의 성전 그릇으로 술을 마시며 하나님을 도발했던 바벨론이 오늘 밤 이 모든 예언이 성취되며 무너져 역사 속에 사라졌습니다.
오늘 여러 주제의 말씀을 나누었는 데,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 지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으리라 믿습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면 이렇게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통치를 더 배워야 합니다.
아직도 영원한 심판만이 영적 교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내게 작정된 미래라는 것을 인정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성령님의 조명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교만한 자리는 심판이 작정된 위험한 자리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교회에는 잘난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 못나도 아무 문제가 없는 곳이 교회입니다.
나의 쌓을 곳 없이 높이 채워진 수많은 죄를 예수님의 피로 속죄했다는 것만 자랑으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진정한 주님의 교회이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4년2월1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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