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말씀은 주일학교 시절부터 많이 들어 온 다니엘의 일화입니다.
다니엘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노아, 욥과 함께 세 명의 의인으로 인정했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믿음을 보인 사람들은 보통 사람 같이 보이질 않죠.
또 우리와는 너무 먼 이야기 같아 현실감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읽을 사람들이 우리 같은 평범한 성도들일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보통의 믿음을 갖고 하루하루 애쓰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이 말씀을 기록해주셨다는 것이죠.
성공한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는 꼭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어도 우리가 이 땅에서 영육간의 성공적인 삶을 사는 방식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각 자에게 믿음의 삶을 성공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깨닫게 해주시고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먼저 오늘 주인공인 다니엘과 본문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이기에 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적 사실로 성경을 이해해야 성경의 기적들이 신화처럼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시대는 예수님 탄생 전 약 5백년 전이고 지금으로부터는 2천5백년 전이죠.
현재 시리아와 이라크에 위치했던 바벨론 제국이 중동지역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이스라엘도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예루살렘성은 철저히 파괴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고 포로로 끌려갈 때 다니엘이 함께 바벨론에 붙잡혀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엄청난 출애굽의 기적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한지 천 년을 채우지 못하고 몰락한 것이죠.
이유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종교들을 따르며 영적 도덕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탄하셨겠습니까?
예레미야 5장1절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개인이나 국가나 영적, 도덕적으로 심하게 타락하면 결국 끝이 좋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배신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영원히 망하게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벌을 받는 이스라엘과 함께 바벨론으로 가셨습니다.
어린 자녀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치려고 혼내서 밖에 쫓아냈다면 부모의 귀는 온통 문 밖에 집중되지 않습니까?
징징 우는 아이소리가 안 들리면 부모마음이 더 조리게 마련이죠.
바벨론은 자신이 세상의 주역인 줄 알았지만 초라하게 포로로 끌려 온 하나님의 백성이 여전히 역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젠 바벨론이 그들의 주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이셨던 것이죠.
하나님은 한 번 정한 주님의 자녀들을 끝까지 놓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고치고 달래서 결국 다시 축복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게 바벨론 포로기에 활약한 선지자들의 주요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기적들은 노예생활과 같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자에겐 반드시 도움의 손길을 보내신다는 약속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끌려가는지 모릅니다.
여지없이 우리 영혼은 메마르고 육신은 곤고해 지게 되죠.
때로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 갇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에 빠지게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이고 우리를 사자 굴 같은 환경에서 끌어 올려주실 유일한 도움이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구하는 우리를 반드시 축복의 자리로 이끌어 주실 줄을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오늘 다니엘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바벨론제국의 느브갓네살왕은 포로들 중 출중한 청년들을 골라 바벨론 학문을 가르쳐 관료로 등용하는 식민정책을 썼습니다.
다니엘이 이 중에 발탁되어 왕궁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비록 부모들은 믿음을 저버리고 포로로 끌려왔지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왕궁에서 결사각오로 하나님만을 믿고 섬깁니다.
어린 나이의 청년들이 위기와 시험의 순간마다 목숨을 내놓고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하니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축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왕궁에서 높은 관직에 올려 주십니다.
우리 청년들 세상 풍습을 즐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얼마나 귀하고 축복 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청년들 반드시 멋진 미래가 있고 주님 안에서 훌륭하게 꿈을 이루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제 왕조는 바뀌고 다니엘은 70세가 넘은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새 왕조에서도 높은 관직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되기만 하면 쏟아 부어주시고 흔들어서 넘치게 주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본장의 1절을 보면 새 권력자인 다리오왕은 바벨론 제국을 120지역으로 나누어 관료를 세우고 그 위에 또 세 명의 총리를 세웁니다.
그 중에 다니엘의 지혜와 탁월한 능력을 보고 그를 최고 총리로 임명할 생각을 하죠.
본국인을 젖히고 포로 출신의 다니엘을 최고총리로 발탁하려는 데 당연히 반발과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아직 이주민 출신 장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시기가 도를 넘어 아예 다니엘을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아무리 다니엘의 신상을 털어도 고발거리를 찾지 못한 그들은 다니엘의 아킬레스건이 그의 믿음이란 걸 생각해내고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그들이 왕에게 제안한 법령은 누구든 정해진 한 달 간 왕이 아닌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굴에 던져 넣자는 것입니다.
새로운 권력자를 신격화하는 정책은 고대 정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죠.
대적들의 속셈을 눈치 채지 못한 다리오왕은 그들이 제안한 법령에 도장을 찍어 법제화 시킵니다.
이 상황에서 오늘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충정을 발휘하고 상황을 역전시킨 다니엘의 신앙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세 가지로 우리가 교훈을 받길 원합니다.
첫 째는 따르고 싶은 다니엘의 이 용기 있고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본문 10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니엘에게서 어떤 고뇌와 망설임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는 왕의 도장이 찍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거역하면 죽음인 것이죠.
그것을 알고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 전에 하던 대로 기도를 드립니다.
점심시간 집으로 향하는 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덫을 놓고 뒤를 쫓는 적들의 굶주린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약속 된 기도의 장소를 향해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폐허가 된 성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활짝 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기록합니다.
말씀을 읽는 우리 심장이 다 쫄깃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좀 문이라도 닫고 남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도 기도할 수 있을 텐데 다니엘의 대범한 정면 돌파에 적들이 더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오히려 적들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긍지에 가득 찬 것처럼 보입니다.
다니엘이 정해진 기도시간 확고한 걸음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향해 창문을 열었을 때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이 촉촉이 젖으셨을 것 같습니다.
오, 다니엘이 나를 높이려 목숨을 걸고 내 앞으로 나오는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목전에서 이방의 우상들을 숭배하기로 선택했을 때 아담 이후 또 한번의 배신을 겪으셨습니다.
열국 중에서 자기백성에게 버림받은 부끄러운 신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 말고 고대 어느 나라가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을 다른 신으로 바꾼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때 마음을 에스겔36장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하나님은 분명히 인격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의 인격이 곧 하나님의 인격이십니다.
우리의 죄로 안타까워하시고 배신을 고통스러워하시고 우리 믿음을 기뻐하시고 우리 고통을 긍휼히 여기시는 감정과 인격성이 하나님께 있으십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높여드리려는 다니엘이 하나님께 얼마나 대견하고 위안이 되었을까요?
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나를 생각해 줄 때 힘든 인생길에서 가장 큰 위안을 느끼는 것이죠.
제가 아파 누워있을 때 가스 불도 못 켜던 초등학교1학년인 우리 딸이 계란후라이를 해 주겠다던 말에 와락 감동이 왔던 그런 마음이 아니셨을까요?
교직에 있다 보면 문제아로 낙인찍힌 아이들과 매일 실랑이를 하게 됩니다.
한창 엇나갈 땐 광기로 꽉 차 교칙, 처벌, 도덕적인 얘긴 먹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너 때문에 그렇게 식당에서 늦게까지 힘들게 고생하시는 데 이런 거 알면 얼마나 속상하시겠니? 하며 마음을 다독이면 순간 아이들의 반항기어린 눈빛이 풀리는 걸 볼 때가 많았습니다.
혹시 말 잘못해서 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어? 라고 했다간 왜 우리 엄마 욕하냐고 눈을 부릅뜨고 대들어 봉변을 당하는 교사들도 간혹 있습니다.
엄마 말은 지겹게도 안 들으면서 누가 부모님 모욕하면 울컥 올라오는 게 그래도 내 속으로 난 자식들인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할 때 분노가 치미는 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란 증거인 것입니다.
다니엘 같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 할 수준은 안됐어도 하나님께는 그래도 우리가 내 자식인 것입니다.
다니엘은 벼랑 끝에 선 순간에 그의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오늘 당당하게 행동으로 입증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주인이 있는 사람의 고결한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결코 초라하지도 비굴하지도 옹색하지도 않습니다.
우주의 주인이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존귀하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이 얼마나 고결합니까?
악의 화신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욕망과 죄악에 끌려 격동하는 본문의 대적들과 다니엘이 얼마나 다른지가 한 눈에 느껴지지 않습니까?
브리튼이란 화가가 사자굴 속에 갇힌 다니엘을 그렸습니다.
어두운 굴 속에 서서 고요히 창 위를 응시하는 늙고 주름진 다니엘의 모습에선 고귀한 기품과 카리스마가 흘러나옵니다.
그의 뒤로 사자 6마리가 우리 집 강아지 초코처럼 아주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믿음의 담대함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되었는지 정말 깊은 감동을 주는 그림입니다.
믿음이란 참 얼마나 진실이 있고 아름다운지요?
나를 창조하시고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음을 당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끝까지 믿어드리고 의리 있게 주님 편에 서는 거라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마음으로 매일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범사에 굳게 의지하면 우리 신앙도 어린아이에서 점점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할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시험을 이길 때 우리의 영과 육에 얼마나 유익한지 모릅니다.
다니엘이 타협했다면 당장 목숨은 부지했겠지만 그의 영적능력은 크게 훼손되었을 것입니다.
대적들은 더 집요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그를 침몰시키려 괴롭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하지 못하고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도 못했을 테죠.
우리 앞에 크고 작은 시련들 앞에서 믿음을 증명할 수 있을 때 용기를 내시길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만 우리에게 허락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의지를 다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슬플 때 기뻐하란 말씀대로 믿고 털고 일어나는 것이죠.
우리의 감정이 아닌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며 언제나 주님 편에 서서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자녀들이 다 되기를 원합니다.
또 작은 일 하나만 생겨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심약한 우리 모습도 든든한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다니엘과 같은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로 우리가 주목하고 배워야 할 것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그가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능력 있게 살아가는 가장 소중한 방편입니다.
이 땅에서 하루하루를 힘있게 살고 내 죄성과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방법은 오직 기도입니다.
물론 우리 하루가 얼마나 바쁘고 피곤합니까?
직장생활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읽을 시간 내기가 힘들죠.
그러나 다니엘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본문에서 적들이 그의 실책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한 가지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일에 대한 그의 철저함과 정직함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주목하고 노력해야 할 점입니다.
본문에서 다니엘에 대한 다리오왕의 신뢰를 보면 얼마나 그가 신임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죠.
그런 신임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일입니까?
왕에 대한 인간적인 순종과 업무에 대한 철저한 책임감과 남들보다 더 시간과 노력을 들인 성실함이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가 결코 시간이 많고 한가해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도들 중 구원을 받은 뒤 기도하지 않고 세상사람들과 비슷하게 사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건 기도의 신비가 무엇인지 그 놀라운 열쇠를 사용할 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기도로 아버지 앞에 나가서 우리의 모든 문제와 고통을 아뢰고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도의 특권인 것이죠.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어떻게 달라고 기도만 하냐고 말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우리의 말로 엄청난 일이 벌어지냐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쏟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20절은 그 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아버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그 육체의 죽음을 통해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살아서, 오래 기도했다고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와 열심과 공력도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그 값을 치루셨다는 것 만이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조건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기도를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둘 수 밖에 없죠.
기도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고 하나님이 듣고 계신지 잘 모르겠다고 기도를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신 것이 감정으로 절대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화를 할 때도 상대방이 가만히 있으면 내 말을 듣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들죠.
지금 내 말 듣고 있냐고 확인해야하지 않습니까?
자연세계에서도 상대방이 보이지 않을 때는 내 말을 듣고 있는지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듣고 계신 것은 느껴지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영역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19장22절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느낌에 의지하지 말고 우리는 은혜를 얻기 위해 매일 아버지 보좌 앞으로 예수님이 댓가를 치르고 열어 놓으신 길로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믿음으로 순종해야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지 않은 나태한 마음을 이기고 바쁜 시간을 쪼개고 기도를 시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하면 성령께서 우리 환경과 영과 육체의 영역에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수많은 크고 작은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오랜 세월 믿음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응답됩니다.
안산제0교회 고0목사님이 교회를 건축하실 때 하필 건축위원장 장로님의 아들 다섯 살 된 아들의 눈이 멀어버린 큰 시험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입원 해 3일이 지나도 원인도 병명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성도들과 같이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베드로전서5장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전하고 간절한 기도를 하고 기도회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아이 말이 여전히 앞이 안보인다고 했을 때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새도록 교회에서 아이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아이가 갑자기 시력을 회복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대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고 인내하며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이 넘치는 응답을 이뤄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가 결코 짐이 아니라 성도들에겐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사자의 입도 틀어막으십니다.
우리 삶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들이 피할 수 없이 일어납니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업의 실패와 병마와 인간관계의 어려움 등 남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도들에게 발생하는 모든 상황들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것을 기뻐하시며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내 삶이 사자굴에 갇힌 것 같을 때도 이 상황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관리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어떤 고난은 무엇을 동원해도 해결되지 않고 우리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죠.다니엘의 경우 심지어 왕이 나서서 그의 위기를 도와주려 하지만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되는 일을 푸는 것이 하나님의 전공이십니다.
그가 사자굴에 던져졌을 때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손쓸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을 시작하시는 걸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이제 모든 일은 다 틀렸다고 생각할 때도 하나님께는 보내실 천사들이 있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절대 우리의 절박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경상남도 경산 압량면에는 압량동0교회라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장로님이 젊은 시절에 고향마을에 예배당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을 어른들이 조상신을 끔찍이 섬기고 있으니 턱도 없는 일이었죠.
장로님은 예수님을 믿는 몇 사람과 함께 사당이 헐리고 그 자리에 예배당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상의 신주를 모셔놓은 사당에서 무슨 무서운 것을 보았는 지 사당집에 살던 사람이 무서워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 없다며 예배당 자리를 구하고 있던 장로님께 집을 팔고 이사를 했습니다.
장로님은 마을 어른들께 제가 이 집을 샀으니 조상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지만 마을 어른들은 꿈쩍도 안했습니다.
할 수 없이 시한을 정해주고 치우지 않으면 뜯어내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정한 날이 되어도 조상의 위패를 치우지 않자 장로님은 몇 몇 성도들과 함께 그것을 뜯어내고 불에 태웠습니다.
그 일로 마을은 발칵 뒤집혔죠.
며칠 뒤 마을 어른들의 호출을 받고 가보니 어른들은 두 방에 가득 앉아 있었고 청년들은 몽둥이를 들고 마당에 둘러 서 있었습니다.
방에 들어서자 60여명의 어른들이 한 마디씩 하는 데 장로님은 가운데 엎드려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니 하나님 살아계신 것을 보여주옵소서.
그런데, 사방이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 졌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60여명의 어른들의 입이 일제히 붙어서 한 말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어른들은 재판을 끝내고 '저 놈을 쳐라!' 해야 하는데 입이 붙어서 말을 못하고 이 희한한 일에 놀라 떨고만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압량 동0교회라고 합니다.
오늘 사자들의 입을 봉하신 것이 실감나시죠?
때로 근심과 걱정하는 일이 당장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손이 정확한 때 우리를 구하실 줄 믿습니다.
사자굴 밖에서 우리를 돕지 않으셨다면 사자굴 속에서 역사하실 더 놀라운 계획이 있으신 것이죠.
분명 부들부들 떨며 사자굴로 들어갔는 데 사자의 입을 막아 놓으신 걸 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 결코 늦지 않게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매일의 기도로 다니엘과 같은 아름다운 믿음으로 성장하고 영육간의 축복을 받으시길 축원드립니다.
기도할 줄 모를 때 종이에 하나님께 구하고 싶은 내용을 기도문으로 써가지고 시간 날 때 마다 읽는 것도 좋습니다.
김동0목사님도 자녀들을 위한 기도나 중요한 기도제목은 써가지고 다니며 반복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있고 놀라운 응답을 경험하신다고 합니다.
시간이 바빠 기도할 틈을 못 낼 때는 버스 안이건 사무실이건 어디서든 잠깐씩 눈을 감고 짧은 문장으로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기도를 들으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더 선하신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낙망하지 않고 언제나 기도의 풍성한 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을 축복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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