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창세기12장1절-9절)

남수연 2011. 8. 8. 23:53

오늘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 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전도하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왜 우리가 상관도 없는 이스라엘의 종교를 믿어야 하냐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치 불교나 유교의 제사가 우리나라 전통 종교인 줄 착각을 합니다.

불교는 인도 종교이고 유교는 중국사상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온 인류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의 여정을 통해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을 돌이켜 보며 믿음의 허리띠를 다시 한번 단단히 묶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깨닫는 지혜를 부어 주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아멘.

우선 오늘 사건이 벌어진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머리 속에 성경의 이야기와 사건들이 뒤죽박죽 들어있지만 말씀을 역사 순으로 배열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성경의 말씀들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임을 믿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바벨탑 사건을 아시죠?

그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 이야기입니다.

중동의 시날 땅에 고대 인간이 세운 거대한 탑입니다.

하나님께 대항하여 인간의 콧대를 높이려고 세웠지만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갈라놓으시는 바람에 완공을 못보고 포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이 있은 뒤 약 2백년 뒤에 그 곳에서 바로 오늘 주인공인 아브라함이 태어납니다.

예수님 태어나시기 한 2천년 전입니다.

이곳은 갈대아 우르라고 하고 현재 이라크 땅입니다.

지금도 이라크에 가면 바벨 탑 모양으로 추정 되는 지구라트라는 신전 유적들이 25개나 남아있습니다.

가장 높은 것은 원래 20층 높이나 됐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벽돌을 구워 바벨탑을 만들었다고 기록된 대로 이 지구라트들이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난 갈대아 우르는 고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입니다.

문명만 발달 한 게 아니라 각종 우상 종교도 우후죽순 처럼 발달했습니다.

아브라함 고향인 메소포타미아에도 4천개의 우상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오만가지 자연과 물건과 인생을 관장하는 신들을 만들어 근원적인 불안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상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불행한 처지가 되버립니다.

매일 신전과 가정 제단에 음식을 차려 공양했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태국 같은 곳에서 가정 신당을 만들고 바나나며 떡을 갖다 바치는 모습과 마찬가지죠

무슨 귀신이 그런 걸 먹겠습니까?

우상을 숭배하는 문화가 참 너절하고 조잡한 것을 발견하게 되죠.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바로 이 우상을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아브라함이 내다 팔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통해 사탄이 장악한 인간의 역사 속에 오늘 한 사람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어떤 인생도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 찾아서 만나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없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일 뿐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도 찾아오신 것이 축복이고 은혜인 줄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은 인간역사의 가장 중대한 방문이십니다.

하나님은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시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겠고 너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인류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말씀이죠.

아브라함이 뭐 길래 그의 잘잘못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무조건 편을 들어주시고 인류의 운명을 그의 손에 쥐어주십니까?

그것은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시는 유일한 구원의 길 예수님을 선택해야 만하는 인간의 운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갈라디아서3장16절을 보면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즉 약속의 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이 축복과 저주로 갈라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의 살아온 행위의 악한 대로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양심의 호소대로 살지 않은 죄, 모든 세상 속에 하나님을 깨달아 알 만한 것을 두셨음에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산 죄 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심판을 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정확한 가 보십시오.

요한복음 3장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절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 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믿지 않는 자는 이미 그의 행위대로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입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으나 반드시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선악 간에 무슨 큰 차이가 있습니까?

다만 우리에겐 모든 죄 값을 치러주신 예수님이 계시는 게 다를 뿐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4천개 우상의 비위를 맞추며 종처럼 살고 있는 인간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한 인간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시기 위해 메시야의 조상을 선택하신 것이죠.

고린도후서11장 9절을 보면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아브라함에게 있던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요한복음8장56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정답이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바로 온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우리도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 모든 영적 이치를 잘 깨닫고 오직 주님을 믿고 축복의 자손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오늘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를 축복하기 위해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를 찾아오셔서 죄와 저주에서 건져주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방문을 받지 못한다면 인생은 소망이 없습니다.

복음성가 가수와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최0혁씨는 4대째 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반항아가 되어 믿음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꿈도 없는 자기가 싫어 자신의 인생도 포기했습니다.

막 사는 인생이었죠.

그러던 중 아버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골의 다 쓰러져가는 집을 구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군대에서 마지막 휴가를 나와 보니 사택을 겸한 교회의 어둡고 지저분한 뒷 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휴가 내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죽도록 방황을 했을 텐데 그날 따라 골방에 틀어박혀 소리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 모양 이 꼴로 내버려 두셨습니까?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런데 그렇게 빨리 그렇게 부드럽게 하나님이 찾아오실 줄 몰랐습니다.

인혁아 난 너를 아직 사랑한다. 네 죄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널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 음성을 들으니 정말 죽어도 원이 없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알고 있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 앞에서 감격하여 울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찬양사역자의 길이 열리고 많은 사람을 찬양으로 위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그날 그 방의 모습을 지울 수 없다고 합니다.

실밥이 터진 빨간 방석, 찌그러진 캐비닛, 색이 벗겨지고 떨어져 나간 서랍장, 뜯어진 장판.그 골방 속에서 절규하던 초라한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만 높이며 살겠다고 합니다.

이런 특별한 만남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신 줄 믿습니다.

우리 역시 골방과 다름 없는 절망 속에서 갇혀있었는지 모릅니다.

주님이 나를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이런 복 된 하나님의 방문을 날마다 소망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우리가 따라야 할 아브라함의 믿음을 몇 가지 살펴보려 합니다.

첫 째로 아브라함은 말씀을 좇아 떠났다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을 모르는 우상과 죄로 가득한 곳을 떠나는 것이 축복의 시작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악을 행하는 속에서 양심의 선한 소리와 믿음을 따라 살 만큼 인간이 의롭지 못합니다.

미국의 한 교도소에서 종신형을 받은 여인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는 교도소 안에서 자랐습니다.

아이가 성장해 세상 밖으로 보내졌는 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교도소로 돌아와 평생 교도소 안에서 살다 죽은 실화가 있습니다.

인간이 몸 담고 있던 환경이 그 만큼 인간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아브라함은 우상의 도시 고향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던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회개하고 예수님이 내 죄 값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주님을 영접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고 올바르게 사는 삶은 죽을 때 까지 지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너의 놀 던 물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악한 문화와 영향 속에선 우리 믿음이 온전하게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이라면 어느새 주변에 옛날 같이 놀던 술친구도 사라지고 세상적 즐거움을 나누던 친구들도 점차 끊어집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 곁에 누가 남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곁에는 가장 진정한 친구 되시는 예수님이 남으십니다.

이사야41장8절에 하나님께서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떠난 아브라함의 벗이 되 주셨듯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아브라함이 부족시대에 바람막이 될 친족을 떠나 낯 선 이방 땅으로 간다는 것은 오늘 날 이민과 비교할 수 없는 모험입니다.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죽음을 당하기 쉽상 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에서 가나안까지의 거리는 무려 1300킬로나 됩니다.

우리나라 남북 총길이가 1,100킬로라 하는 데 그 이상을 이동한 것입니다.

이삿짐을 꾸려 짐승에 실고 장막 텐트를 쳤다 접었다를 반복하며 처음 가는 낮선 길을 걸었습니다.

아마 여러 달을 시시각각으로 닥치는 여행의 고통과 공포를 이겨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갖고 있는 대단치 않은 습관 하나 버리고 좋아하는 취미하나 버리래도 펄쩍 뛰는 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무작정 고향을 떠났다는 것 정말 대단한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떠나는 것이 축복인 줄 믿습니다.

평신도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좇아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힘든 건 사실입니다.

사회생활에서 연대감도 있고 분위기도 맞춰 줘야 하는 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 의식 없이 그런 삶을 살다보면 우리 마음에 많은 영역을 악한 영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때로 우리 마음에 아예 집을 짓고 우리를 죄 가운데 끌어들이고 믿음에서 탈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과 성도는 짝하며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떠날 것은 떠나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평생 성읍 밖에서 살았습니다.

모래바람과 30도가 넘는 일교차와 전갈과 뱀의 위협이 있는 광야에서 집을 짓지 않고 평생 불편한 텐트생활을 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보냄 받은 가나안은 사실 또 다른 우상의 땅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나안 도성엔 각종 죄악과 우상숭배가 만연했죠.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죄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구별 된 생활을 요구하십니다.

히브리서11장9절에 보면 이런 아브라함의 태도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서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성읍이 아닌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그래서 그는 가나안에서 땅을 소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땅을 소유한 것은 4백년 후 그의 자손들이 모세에 의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입니다.

사도행전7장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에게 이 땅에서 발 붙일 만한 땅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도 이곳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근심이 있고 환난이 있고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온누리 교회의 하0조목사님이 얼마 전 소천하셨습니다.

갑작스런 뇌출혈로 신변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떠나셨습니다.

달리는 기관차 처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달려오셨던 분입니다.

아직 벌여놓은 많은 일도, 7만명의 성도도, 새 성전 건축을 위해 400억을 주고 구입한 땅도 뒤에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하관 예배를 TV에서 보는 데 이 땅에 그 분에게 필요한 것은 관이 놓여질 한 평 땅 뿐인 걸 보았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죽음이란 걸 실감했습니다.

다만 그의 평생 주 예수님을 위해 충성되게 달려오신 목사님께 하늘에 아름다운 처소가 예비 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거부였던 그는 단지 자신의 매장을 위해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을 매입했을 뿐이라고 기록합니다.

우리의 소망과 내세도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천국의 아름다운 집을 사모하며 천국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단을 쌓았다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그의 가나안의 여정이 창세기에 계속 이어지는 데 단을 쌓고 예배드렸다는 말이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특징은 예배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배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을 소홀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잘못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을 체험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경시할 수는 없습니다.

은혜를 체험한 모든 성도들의 공통적인 간증은 그래서 예배가 너무 소중하다는 고백입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세워진 곳입니다.

진심으로 예배하는 자리에 하나님은 오셔서 기뻐하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배드리는 일에 온 맘을 다해야 할 줄 믿습니다.

예배에 실패해서 큰 낭패를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잘나가는 중소기업 사장이었던 김기0집사님이 계십니다.

지금은 목사님이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교회를 드나들던 그에게 승승장구하는 사업은 하나님께 콧대를 높이기에 충분했습니다.

믿음이 좋았던 아내를 구슬려 주일아침 1부 예배를 드리고 스키장에 가기로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런데 김목사님은 아내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바로 고속도로로 들어섰습니다.

놀란 아내가 차를 돌리라고 계속 잔소리를 해댔으나 소용없었죠.

얼마 지나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하자 신이 났습니다.

봐라, 스키 잘 타라고 하나님이 눈 까지 내려주신다

아내가 속상해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는 데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하나님이 밥 먹여 주냐 차라리 나를 믿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주 오던 차가 중앙선을 넘어 뛰어들더니 목사님의 차와 정면충돌했습니다.

깜빡 잃었던 정신이 들자 고통이 몰려왔습니다.

앞을 보니 보닛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핸들이 벌써 녹아들고 있었습니다.

차가 폭발하려는 것을 직감하고 황급히 조수석을 보니 아내는 바닥에 엎드러져 정신을 잃고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차창에 얼굴을 찧어 온통 유리파편 투성이였고 2살된 아들은 보호시트에 앉혀진 상태로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두 아이들 차창밖에 던지고 아내를 구하려 했으나 오른 팔을 짓이겨진 아내를 끌어낼 수 없었습니다.

도와달라고 울부짖는 데 갑자기 퍽하고 불길이 꺼졌습니다.

마침 사람들이 모여들어 모래를 끼얹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 것입니다.

아내와 아이를 실고 응급실로 향하며 그는 계속 예배를 드리고 와야 했었는 데란 말만 되뇌였습니다.

의사로부터 가족들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단 말을 듣는 순간 목사님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와 딸아이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딸은 109바늘을 꿰매고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왼 팔만 빼고 온통 기부스 상태였습니다.

눈물이 쏟아지며 가족과 자기의 목숨을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교만하게 지내온 과거를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참 예배 한 번 안 드린 댓가 치고는 혹독한 것이었죠?

사실은 예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를 불신앙에서 구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줄 믿습니다.

잘못 된 믿음의 삶을 사는 데도 그냥 두시는 게 오히려 두려운 일입니다.

주일예배 한 두번 빼먹고 놀러 갔다 혼 줄이 난 경험이 우리도 한 번씩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게 있죠.

다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매를 드셨다고 기뻐하며 돌아온다는 겁니다.

김목사님 역시 한 대 맞고 겨우 생명을 건졌는 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하나가 모두 감사한 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와 예배하는 자가 되니 그다음엔 많은 사람이 그를 통해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됩니다.

한달 반을 병원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느날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중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고구마 밭이 있는 데 아주머니가 가마 솥에 고구마를 넣고 삶다가 익었는 지 젓가락으로 찔러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구체적인 전도의 전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전도란 고구마가 익듯이 하나님의 때에 결실하는 것이니 우리가 할 일은 그냥 한번 씩 찔러만 보면 된다는 것이죠.

너무나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는 데 작두도사란 간판이 걸려있었습니다.

저 양반도 고구마다라고 생각하고 한번 찔러보기로 했습니다.

안을 들여다보니 대감모자를 쓰고 작두도사가 앉아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예수믿으십니까?

그랬더니 삿대질을 하며 욕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김목사님은 음, 역시 생고구마군하고 돌아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날 때 마다 같은 말로 교회 다니면 정말 좋습니다.라며 일곱 번을 찔렀는 데 어느 날 그가 좀 들어오라고 하더랍니다.

음, 드디어 익었군 하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아들이 삼년 째 누워있는 데 살려주면 예수를 믿겠다하더랍니다.

김목사님이 그건 아버지가 직접 교회 나가 기도해야 된다고 하자 순순히 교회를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온 첫 날 성령의 은혜를 받아 주여 주여 주여를 외치며 그 분도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날 하나님 앞에 교만했던 그에게 일어난 교통사고를 통해 그는 진정한 예배자가 됐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과 함께 동행한 조카 롯의 일생도 성경 많은 부분 할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 예배드렸다는 기록은 한 군데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따라 나서 복을 받고 부를 누렸지만 결국 죄악의 도성 소돔성을 선택했다 소돔성이 멸망할 때 간신히 몸 만 빠져나오는 처지가 됩니다.

소돔에 화려한 삶에 미련을 가졌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겸손하게 예배했던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살며 하나님의 방백이란 존경을 받고 부와 번성을 누립니다.

창세기24장 35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종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손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께 인정받고 이 땅의 복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너를 통해 온 민족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라고 부르신 줄 확신합니다.

부르심에 감사하며 아브라함과 같은 예배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의 거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날마다 소망하며 우리의 죄와 악을 버리고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18장19절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를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사탄의 일을 따르며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 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괴롭고 힘든 일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져 낙심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우리 인생길을 걸어가면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거룩한 성에 이르게 될 줄 믿습니다.

인내하며 신앙의 경주를 잘 감당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