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야곱의 얍복강기도 (창세기32장24절-31절)

남수연 2011. 1. 10. 15:50

 

 

새해 둘 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오늘도 고난 중에 위로와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죽을 힘을 다해 겨루고 있는 한 남자의 끈질긴 기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내일 날이 새면 닥쳐 올 죽음과 같은 두려움을 앞에 두고 밤을 지새우신 적이 있으신지요?

어찌 보면 우리 인생이 피해가고 싶은 일들을 앞두고 매일 밤 불안한 잠자리에 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야곱이란 한 남자는 온 가족이 내일 몰살당할지 모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밤은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밤이 지나자 그의 인생에 힘차게 해가 솟아 오릅니다.

성령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은혜와 깨달음을 주시고 새해 하나님 만을 믿고 힘차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믿음을 부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야곱이라는 사람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인류를 구원할 예수님을 보낼 민족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시며 모든 민족이 네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셨고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 아들을 주셨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건 집안에서 장자는 가문의 명맥을 잇는 자식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죠.

그렇다면 두 아들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축복의 조상이 되겠습니까?

누구나 하나님의 축복의 대물림이 장자에게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출생의 비밀은 창세기25장24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에 눈독을 드립니다.

결국 들에 나갔다 허기져 돌아온 형 에서에게 자기가 만든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사고야 맙니다.

그의 형 에서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에서는 불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장자권을 산 후에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형을 축복하려는 것을 어머니 리브가를 통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 형처럼 꾸미고 들어가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 장자를 위한 축복 기도를 자기가 몽땅 받아버립니다.

축복을 빼앗긴 에서는 분통이 터져 아버지가 죽고 나면 야곱을 죽이겠다고

벼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떠나 외삼촌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이란 곳으로 도망 가 20년을 외로운 객지 생활을 하게 됩니다.

거기서 야곱은 속고 속이며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 아내와 자식을 얻고 부를 이룹니다.

그의 소유가 점점 불어나자 외삼촌 라반과 그 아들들이 야곱을 대하는 게 전과 같지 않게 됩니다.

위기를 느낀 야곱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31장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그는 그 말씀을 듣고 모은 재산과 가족을 이끌고 지금 고향 가나안땅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과거의 모든 허물을 용서했으리라 믿었던 형 에서가 야곱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4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마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야곱을 환영하러 오는 게 아닌 것이 분명하죠.

야곱은 돌이켜 뒤로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야곱은 위기상황이 벌어지자 항상 해 오던 대로 머리를 쓰며 살 길을 모색합니다.

형에게 선물로 줄 엄청난 양의 가축들을 종들에게 붙여 두 떼로 나누어 자기 보다 앞서 보냅니다.

선물로 형의 마음을 좀 풀어 놓고 그 다음에 만나려는 속셈이죠.

그리고 그는 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얍복강 나루에서 밤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야곱이 한 밤중에 일어나 아내와 자식들을 깨워 야밤에 위험한 얍복강을 건너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만 홀로 얍복나루에 남아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상황입니다.

인생에는 홀로 남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 못할 것 같은 절대 절명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결국 혼자라는 걸 알게 됩니다.

결국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나를 지켜줄 것 같던 모든 것이 나를 도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게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작년에 마창대교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투신해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살 길이 막막해진 아버지가 11살짜리 아들을 다리에서 밀어뜨리고 자신도 떨어져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그대로 찍힌 cc tv에 다리 난간을 한 손으로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들의 모습이 공개되며 보는 사람들에게 큰 아픔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아들이 혹시 없었다면 그는 노숙이라도 하며 생을 연명했을지도 모릅니다.

돌봐야 할 아들이란 짐의 무게까지 그를 짓누르며 두렵게 할 때 그는 불행한 선택을 하고 만 것입니다.

야곱의 처절한 고민이 바로 그의 처자식까지 죽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형의 손을 피해 혼자 도망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우리를 도와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인생의 위기에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회사의 파산 앞에서, 암 선고 앞에서, 자식의 미래에 대한 절망 앞에서, 가정이 깨질 위기 앞에서 우리는 홀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술대에 누워보셨습니까?

복도를 따라오며 손을 잡아주던 가족도 모두 손을 놓고 멀어져갈 때 나 홀로 수술실 문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상황이 올지 모른 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오늘 야곱은 감당 못할 이 문제를 자기 혼자 해결해야 하는 두려움 속에 고독하게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가 왜 한 밤중에 불현 듯 일어나 가족을 앞서 보냈을까요?

그것은 지금이 바로 하나님을 대면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과 맞닥드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할 수 만 있으면 인간은 하나님과의 대면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말도 않되는 진화론을 믿으면서 인간은 짐짓 하나님을 외면하고 모른척하려고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멀찍이 하나님을 따르고 싶어 하는 것을 봅니다.

내 방식 내 삶의 모습이 이렇게 편하고 내 스타일에 딱 맞는 데 하나님 눈에 띄었다가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인간 내면에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과 마귀의 합작품인 두려움이죠.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두렵고 부담스런 것으로 날조한 마귀의 계략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우리를 따뜻하게 위로하시고 용기를 줍니까?

매일 그 사랑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 의문입니다.

평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히 위안을 받으며 하나님을 믿어도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야곱과 같은 순간을 맞을 때 비로서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가에 대한 질문에 당장 답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칩니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명제 앞이기도 합니다.

소망했던 모든 것이 끊어지고 절망이라는 낭떠러지에 홀로 섰을 때 오기도 합니다.

오늘밤 야곱은 온 가족이 형의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르는 절박함 속에서 하나님이 과연 나를 도와주실지 당장 답을 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문제들을 안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같은 집념과 끈기가 부족한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누구나 힘든 상황에서 혹시 들어줄지 모르는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해도 하나님의 응답과 사인이 없으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 야곱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목숨을 건 사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야곱을 향해 주님이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

그는 자신의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사람들과 겨루며 자수성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기도의 격투장에서 하나님을 이겨먹은 사람이 됩니다.

야곱이 그 밤에 갈구한 것은 그의 안전과 축복을 향한 끈질긴 매달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그렇게 나쁘게만 보지는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상대로 모든 축복을 받아내려는 그의 행동을 괜찮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유다왕 아하스 때 아람이라는 나라와 북쪽 형제나라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유다를 치러 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아하스왕에게 전합니다.

그들이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패망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믿지 않으면 너희가 굳게 서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진짜 이루어질 것인지 하나님께 징표를 구해라.

그 때 아하스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7장 12절입니다.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아니 징표를 구하라는 데 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을 말합니까?

그럴 듯하게 말했지만 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의 불신앙적인 답변이 하나님을 괴롭게 했다고 책망합니다.

하나님은 차라리 믿음으로 야곱 같이 말도 안된는 것을 구하는 것을 오히려 낫다고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믿지 않고 구하지 않는 것을 더 괴로워 하십니다.

끈질기게 구해서 받아내지 못하고 감당 못할 문제를 놓고 우리 힘으로 끙끙대는 것을 보는 게 더 괴로우시답니다.

세상을 향해 징징대지 말고 차라리 야곱처럼 아버지 앞에 달라 들어 끝장을 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들에게 왜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어린 것이 아버지와 팔씨름을 하자고 겁 없이 덤벼 온 힘을 다해 낑낑거리면 고것이 근성을 부리는 게 은근히 기특하게 느껴지는거요.

새해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오늘 말씀을 통해 도전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에 모든 사건들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나와서 그 일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라 붙어 싸워야 할 것은 그 문제와 그 사업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 와서 이 문제를 놓고 믿음이 생길 때 까지 치열하게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응답을 확인하고 최선을 다해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당장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일을 맡으셨으니 그것은 우리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한국도0기를 창업한 김0호회장의 이야기 중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 소개합니다.

한국도0기는 대표적인 크리스천기업인 걸 아실 겁니다.

김회장은 참 특이하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그가 워낙 술을 좋아하는 걸 알고 이웃집 박집사가 교회에 나오면 술을 사주겠다고 해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돌아갈 때 술집에 들려 술을 대접받는 재미에 교회를 다녔는 데 어느날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그의 아내가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너의 기도를 내가 들었노라’라는 응답을 받고 기적적으로 병이 낫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걸 알고 진심으로 주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매일 새벽 저수지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 당시 다니던 교회가 불타 교회를 새로 건축을 한다고 어려운 때였지만 모두들 정성껏 헌금을 하는 데 돈이 있어야죠.

그래서 매일 마음껏 헌금할 돈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어느날 기도를 하고 뚝을 내려와보니 타고 다니던 유일한 재산인 자전거가 없어졌더라는 거예요.

황당했습니다.

아니 달라는 돈은 안주시고 자전거 마저 가져가시면 어쩌십니까 자전거가 있어야 헌금 할 돈을 벌지 하나님 너무하신거 아닙니까하고 울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집에 와보니 주제소로 나오라는 연락이 와 있었습니다.

과거에 일본 순사를 때린 것도 있고 해서 겁을 집어먹고 주제소에 갔더니 잃어버린 자전거가 거기 있었습니다.

빈들에 세워져있어 누가 훔친 줄 알고 자전거를 끌고 왔는 데 ‘동명표구사’라고 자건거 뒤에 붙여놓은 상호를 보고 연락을 해온 것입니다.

그러더니 순경이 ‘당신 표구일 할 수 있냐’고 묻더라는 겁니다.

‘자신있게 한다’고 했더니 마침 자기에게 표구 맡길 그림이 하나 있으니 가져가서 해보라고 하더랍니다.

그게 표구사 차리고 처음 맡은 일감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그림을 표구해서 갖다 주니까 마음에 쏙 든다고 좋아하더랍니다.

그러더니 40채의 관사를 짓는 일을 모두 김회장에게 맡기는 상상도 못할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게 어디 인간의 힘이나 우연으로 된 일입니까?

그의 한국도0기는 이런 셀 수 없는 절묘한 기도와 응답으로 세워진 기업입니다.

쓸모없는 술주정군으로 인생을 마칠 수도 있는 사람을 구해주시고 사업파트너가 되주시고 축복해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려서 끈질기게 구하는 야곱 같은 기도가 늘 있었다는 것입니다.

새해 우리에게 간절하고 절박한 문제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 문제들을 들고 졸라댈 때 절대로 귀찮아하시지 않으십니다.

귀찮아하시다니요, 하나님은 근성을 갖고 하나님께 모든 해답이 있음을 믿고 나오는 자녀들의 기도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모든 능력과 도움을 예비하고 계신 아버지를 시종일관 무시하고 제 힘으로 일을 꾸리다 망가뜨리는 믿음 없는 자녀들을 하나님은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모든 문제를 들고 담대하게 하나님과 대면하십시오.

요한일서 5장 14절에 말씀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올 해에는 작성하신 기도제목을 들고 야곱과 같이 끈질기게 기도하여 응답받으시길 축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반드시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서 참 특이한 것은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을 했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몸을 취하여 내려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성육신하시기 전 성자 예수님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홀로 있는 야곱에게 이 어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누가 사람을 돕겠다고 찾아옵니까?

혹시 나에게 손이라도 벌릴까봐 사람들은 곤경에 처한 사람 곁을 슬그머니 벗어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하고 고통으로 신음하며 전전긍긍할 때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 곁에 찾아오십니다.

아니 오히려 주님은 야곱의 주변을 서성이고 계셨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드디어 야곱이 홀로 남게 될 때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다가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 밀고 땡기는 몸 싸움이 시작됩니다.

좀 희한한 광경이 벌어지죠?

하나님이 직접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서 옥신 각신 몸 싸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싸움이란게 그렇지 않습니까?

서로 상대방을 제압해서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는 것이죠.

주님은 막다른 길에 내몰린 야곱을 이번 기회에 제압하여 변화시키려 합니다.

옛사람을 버리고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고 주님은 지치도록 야곱과 밤새 씨름을 계속하십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의 옛사람, 고집과 죄를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만을 얻기 위해 주님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싸움의 결과는 야곱의 승리입니다.

인간의 죄성과 교만이 얼마나 질긴지 하나님을 이겨먹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마음 먹으면 왜 인간 야곱을 이기지 못하셨겠습니까?

오늘 밤 야곱을 상대하시는 주님을 신학자 칼빈이 이렇게 통찰력 있게 표현합니다.

주님은 좌측 손으로 우리를 상대하시고 우측 손으로는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항해서 싸우시는 동시에 우리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를 위해 져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천하장사도 세 살짜리 아들하고 씨름하면 진다고 하더군요.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 눈으로 봐도 저 사람 저러다 크게 한 대 맞겠는 데 싶으나 주님이 그를 살살 다루시는 걸 봅니다.

곁에 있는 우리가 울화가 치밀 때가 있습니다.

조금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우습게 여기고 얕잡아 보는 우리 인간과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주님은 오히려 믿음이 약한 사람을 더 도와주시고 편애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 다 거기가 거깁니다.

매일 실패하고 넘어지는 우리가 주님보시기에 어떤 자인지가 이사야41장14에 나타납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창조주 하나님 보시기에 지렁이와 다름없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 약하고 보잘 것없은 우리를 주님은 사랑하시고 구원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지렁이 같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주님은 목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우리 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이 우리를 파괴해 가는 것을 볼 때 우리의 환도뼈를 치시는 게 주님이십니다.

환도뼈는 엉덩이와 허벅지가 연결 된 부분의 뼈입니다.

야곱은 이제 도망가지도 못할 처지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붙잡아야 할 손으로 이 세상을 끝까지 붙들고 있을 때 하나님은 때가 되면 그것을 단호하게 끊어버리십니다.

욥기 8장 14말씀대로 우리가 믿는 것이 다 끊어질 것이고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 사실 거미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26절에 환도뼈가 위골 된 채로 주님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호세아 12장 4절에 보면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믿고 의지하던 것이 끊어지자 비로서 울며 간구하는 자가 됩니다.

그 때 주님은 야곱의 이름을 묻습니다.

주님이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으셨겠습니까?

이름은 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죠

야곱이란 이름의 뜻이 ‘속이는 자’, ‘발꿈치를 잡는 자’란 뜻입니다.

아무리 야곱이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에서 나왔다고 해도 좀 심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이름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형의 것을 탐내고 계략을 꾸며 빼앗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재산을 불릴 때도 자기 소유가 될 가축은 튼튼한 것만 골라서 새끼를 배게 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물으실 때 그는 자기의 인생이 자기 이름과 꼭 같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승리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잡혀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주님은 새 이름을 주시는 걸 봅니다.

시몬에게도 예수님은 베드로, 게바, 반석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죠.

우리도 때로 내 이름이 싫어집니다.

우리 인생 또한 야곱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수고와 갖은 노력에도 우리가 바라던 행복과 풍요가 아닌 절망의 나락 위에 서 있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더 가지기 위해 쉼 없이 머리를 쓰고 때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의 상속자임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에게 학대당하고 이용당하던 종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반드시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 신분은 남을 약탈하고 뺏지 않아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2장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 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인간적인 죄성을 버리지 않고 복을 받아보려고 주님과 씨름했습니다.

주님은 야곱이 끝까지 붙들고 의지하려 하는 인간적인 힘과 수단을 꺽어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버릴 수 있도록 단 칼에 도와주십니다.

야곱은 얍복강의 밤을 보내고 비로서 인간적인 의지와 죄성으로 뭉쳐졌던 자신에게서 돌이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는 그 기도의 격투 장소를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

30절에 보면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이제 야곱은 바로 자신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올 해 브니엘의 축복이 임하시길 원합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만난 하나님, 믿음의 선배들이 만난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하나님과 우리는 일생을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위기의 순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안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31절을 봅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브니엘을 지난 사람에게 소망과 축복의 해가 떠오릅니다.

축복의 땅을 향해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야곱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천국을 향해 걸어 가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 비슷하지 않습니까?

천국을 향해 성큼 성큼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야곱과 같이 연약함으로 인해 절뚝거리며 가는 것이 우리의 천국 길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는 해가 돋았습니다.

야곱을 축복하시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예수님의 민족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면하길 바라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올해 우리 앞에 있는 모든 문제를 축복으로 바꿔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