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아브라함의 순종과 여호와 이레(창세기22장1절-14절)

남수연 2010. 7. 17. 17:10

 

우리에게 뭔가 마음에 꼭 들고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생기면 그것이 크던 적든 왠지 그것을 잃게 될까봐 은근히 걱정하는 마음이 생기는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욥도 그의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게 된 후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욥기3장25절에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게 미쳤구나 라고 평소에 자신이 누리던 그 좋은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했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게 된 참혹한 곤경에 빠진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끔찍하고 혹독한 시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시험이 오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면서 위기를 모면 했던 그였지만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을 바쳐야만 하는 이 엄청난 시험 앞에서 위기를 모면 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그의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귀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우리에게 자녀가 얼마나 귀합니까?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은 정말 귀한 자식이었습니다.

우상숭배의 땅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무작정 그 고향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선택하였을 때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은 자식입니다.

게다가 그 약속을 받고 25년의 긴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려 얻은 자식이니 그 소중함은 이루 말할 수 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그렇게 귀하게 얻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온 몸이 덜덜 떨리고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겠죠. 우리에게 그런 시험이 주어졌다면 어땠겠습니까

정말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그 명령을 들은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에 엄청난 갈등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주셔 놓고 이제 와서 바치라고 하시다니요

그것도 하나님이 끔찍이도 싫어하시던 우상에게 사람을 불살라 바치는 인신제사를요.

게다가 이삭의 씨를 통해 만국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은 또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은 분명 혼란스럽고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 엄청난 갈등과 고통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번민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에서 첫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고 연단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시험을 통과하여 우리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후에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한 부족의 족장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12장3절에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는 약속을 받았으나 그의 믿음에 대해 인정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야고보서2장 21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냐 라고 말씀하셨고

창세기12장 26절에서도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 하였음이니라 라고 하시며 이제야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을 맹세까지 하시며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의 행동을 통해 아브라함은 비로서 그를 통해 태어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만국이 구원을 얻게 될 메시야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다고 그것이 무조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축복과 은혜를 약속받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하시며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옳다 인정 하셨을 때에 약속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잘 모르셔서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과연 모르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고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까지 다 아시는 분입니다.

오히려 이 시험의 목적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욱 온전케 하고 그 믿음을 객관적으로 확증해주시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로 나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과 시련을 만나면 그 때 우리의 믿음의 현 주소가 어디인지 알게 되죠.

우리가 나름대로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때때로 자기의 믿음의 정도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을 항상 빼앗고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생겼다면 하나님과의 우선 순위를 비교해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 도 있고, 귀한 물건일 수 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과거에 대한 집착일 수 도 있고, 자기가 옳다 생각하는 어떤 편견일 수 도 있고, 끊임없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어떤 문제일 수 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 시키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빼앗는다면 그 어떤 것이든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 하용조목사님은 자기에게 너무 맘에 드는 것이 생기면 얼른 남에게 주어버린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너무 맘에 들어하면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 같아 그렇게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삭의 성장을 바라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독자 이삭에 대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조건적인 사랑과 집착이 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7절에 나타난 부자간의 대화를 보면 그 애정의 친밀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그는 이삭을 향하는 이 무조건적 사랑을 느끼며 어쩌면 하나님보다 더 이 아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근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혹시 그것을 눈치 채시고 이삭을 거두어 가지 않을까 두려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순간 그의 마음에 어쩌면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고 있던 것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셨던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과 기쁨을 누구보다도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마치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것을 빼앗는 분이라고 왜곡되게 우리를 미혹하여 욥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이유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피조물에 더 마음을 빼앗겨 결국엔 그것이 우상처럼 되어 우리를 지배하게 되고 결국 우리의 믿음을 잃게 될 것을 염려하셔서 우리를 시험하시고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강한 자들이 아닙니다.

사소한 것에도 늘 실패하고 쓰러지는 우리라는 것을 자기 자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했던 죄도, 집착하는 대상도 언제든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기에 하나님은 가벼이 생각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근실하게 시험하시고 연단하십니다.

결국 어떤 시험이든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고 옳은 길로 인도하셔서 마침내 우리를 복주시려는 것이므로 절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말씀하시길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는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 중에 고통하며 순종하려고 눈물을 흘리며 감당할 때 팔장을 끼고 호령하는 교관이 아니십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다급하게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의 순간을 통과하기 까지 우리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조마조마 한 마음으로 바라보시다 통과한 즉시 우리의 고통을 없애 주시려고 달려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시련과 시험이 닥쳐올 때 우리가 해야 할 반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장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하더라도 아브라함은 그의 평생에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순종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종은 즉각적인 것이 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순종을 놓고 이것 저것 결과를 생각하고 인정을 생각하고 손익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결정은 점점 부정적인 곳으로 가게 될 확률이 높아질 것입니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묘비에는 이런 자조적인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물쭈물하다 나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정말 허무한 묘비명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순종을 미루며 우물 쭈물하다 보면 결국 아무런 기적도, 축복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후회하며 죽음을 맞이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헌신과 순종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즉시 순종하시길 권합니다.

왜냐하면 순종 후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영적 육적 축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순종의 시험을 승리한 후 2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그뿐입니까? 25장 11절에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라고 기록되어 순종 후에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를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로 이끌어 오신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닥치는 크고 작은 시험에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이겨내게 하시고 지금보다 더 나은 복 된 삶으로 인도해주시리가 믿습니다.

 

둘째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시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바칠 장소로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을 지시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까지는 90K정도의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정도 될 거리이고 걸어서 사흘길 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굳이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산이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 산이 몇 번 등장하는 데 그 중 하나는 다윗 왕 때입니다.

사무엘하 24장 18절부터 25절 까지 기록 된 내용으로

다윗왕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인구조사를 시켜 그 일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온역으로 이스라엘을 7만명을 죽이시는 사건입니다.

그 심판의 천사가 드디어 여부스 사람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까지 와서 섰는 데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셨고 다윗은 바로 그 곳에 단을 쌓고 소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모리아 산이 바로 이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과 같은 곳입니다.

그 다음은 역대하 3장 1절의 기록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다윗은 성전을 건축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바로 이삭을 바쳐야 했던 모리아 산이었고 자신의 죄로 인한 하나님이 진노가 그치셨던 아리우나의 타자 마당이었던 곳이었으며 그 곳은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갈보리 언덕인 것입니다.

바로 이 곳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사건은 영적으로 어떤 뜻이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창세기 17장 19절에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은 이삭과 언약을 맺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약속을 받고 태어난 이삭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할 자들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뒤에는 이삭의 씨로 태어날 모든 자들이 다 심판의 대상임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줄 압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은 대로 이삭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 대신 죽임을 당한 번제물이 따로 있었으니까요.

여호와 이레로 예비 되어 이삭 대신 번제로 바쳐진 그 양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은 인류의 구속자가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14절에 이삭 대신 준비 된 숫양을 보고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 불렀는 데 그 것은 준비되어 있다 봐두셨다 라는 뜻으로 제물을 하나님께서 지정해 두셨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메시야 신앙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8장26절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시험과 환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어령 전 장관도 손주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왔고 탤런트 김자옥도 언니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이는 죽음의 질병을 통해, 어떤 이는 사고로 모든 것을 잃은 후에 고통하다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고통 가운데서 비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시험은 이렇게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여야만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본문에서 깨닫게 되길 바랍니다.

어쩌면 오늘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스스로 심판해야 하는 아버지의 그 비통한 마음을 친구 아브라함에게 말하고 싶으셨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마음엔 아담의 범죄 이후 줄 곧 인류의 구속을 위한 십자가가가 있었습니다.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할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마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간경화로 죽어가는 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어린 동생의 간을 들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그런 진퇴양난의 고통이 늘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양 손에 불과 칼을 들고 번제로 바칠 이삭에게 나뭇단을 지우고 모리아산을 올라갈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자식을 죽여야만 하는 아비의 마음 이제 알 수 있겠니?

그러나 너는 네 아들을 죽일 필요가 없다. 내가 대신 내 아들을 제물로 쓰겠다’

하나님은 수 천년 후에 그 분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오늘 이삭이 올라갔던 그 모리아산 갈보리 언덕을 오르게 하십니다.

진노의 칼과 불을 들고 인류의 죄악을 짊어진 희생양 예수님에게 처절한 심판을 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감정 없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는 지금도 그 십자가를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셔서 우십니다.

저는 기독교방송에서 가끔 선교사들이 대담 프로에 나오는 것을 봅니다.

굶주림과 핍박과 두려움을 이겨내며 오지에서 사역하신 선교사님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의연한지 그 믿음과 헌신이 경이로울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의연하던 선교사님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그 선교지에서 함께 당한 고통을 이야기 할 때 보면 한결 같이 그들에 눈에 눈물이 고이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저는 종종 보았습니다.

자녀의 고통은 그것이 비록 과거의 것이라 할지라도 부모에게는 현재 일어난 것과 똑같은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느날 저는 특별난 체험을 했습니다.

고난 주간을 맞아 TV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의 영상이 나오고 있었는 데 그 걸 본 순간 제가 갑자기 목 놓아 엉엉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울면서도 깜작 놀랐습니다. 그 울음은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볼 때 터져나오는 통제할 수 없는 눈물이었습니다.

저의 감정은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는 데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은 제가 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안의 성령님께서 그 순간을 보시며 정말 지금 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 처럼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이 우시는 것이라고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저랑 같이 근무하던 교사가 정말 사랑하던 다섯 살 짜리 아들을 사고로 잃게 되었습니다.

키가 작은 아이가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주우려고 앉았는 데 후진하던 덤프트럭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아이를 밟고 지나쳐 버린겁니다.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 갔는 데 할머니는 아이를 안고 있던 피 묻은 상의를 그대로 입은 채 정신이 나간 상태였고 그 엄마는 실신하여 응급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무슨 말로 그 엄마를 위로할 수 있었겠어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완전한 사랑을 나누던 예수님을 은혜도 모르는 우리, 죄를 벗삼아 살던 우리, 하나님을 대적하던 나를 위하여 대신 죽이신 것입니다. 영원히 심판 당할 나를 차마 외면 할 수 없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내가 내 아들을 주면서 까지 이렇게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불같은 고통의 시험을 통과하고 계십니까?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것 , 순종하지 못한 것 있으십니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신 주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고하며 순종하는 믿음을 달라고 나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모든 시험을 넉넉히 이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