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가인과 아벨의 제사(창세기4장1절-7절)

남수연 2010. 12. 6. 17:2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칫하면 오해의 소지가 되기 쉬운 내용입니다.

같은 제사를 드렸는 데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을 까.

하나님이 사람을 편애하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정하신 하나님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이 사건을 남기신 이유가 무엇인지는 다른 성경 속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온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 이 말씀을 나누며 성령님이 우리 교회에 맞게 주시는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길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분명히 있다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리의 심령에 잔잔한 평안과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점 중 하나로 하나님과 예배자의 영적 만남이 없는 예배를 듭니다.

습관에 의해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과의 교제나 관계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부족한 영적 갈증을 채우려고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과 분위기로 유사 은혜를 대신 주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배입니다.

우리가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반드시 스스로를 계시해 보여주시며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에 대해 오늘 살펴보며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고 새롭게 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피조물인 인간과 친밀함을 나누며 영원히 함께 살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이 되기 위한 시험에 실패합니다.

금지된 열매 선악과에 손을 대고 만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참 이해가 안 갑니다.

어쩌자고 아담은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겁도 없이 열매에 손을 댄 것일까요?

그걸 보며 저는 하나님이 정말 완전한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인간을 단지 피조물이 아닌 사랑의 상대로 창조했다는 걸 알게 합니다.

아담을 대하는 모습에서 피조물로부터 당연히 받아야할 사랑과 존경을 그에게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봅니다.

어쨌든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막대한 타격과 상처를 주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대상으로 부터의 배신을 맛보셨을 뿐 아니라 인간을 사망에서 건질 희생 제물을 스스로 준비하셔야 했습니다.

아담은 상속이 예정 된 모든 축복과 하나님의 가족으로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영적 육적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되었던 에덴에서 추방 되어 인간으로의 고된 힘든 삶을 살게 된 때의 일입니다.

세월은 흘렀고 이미 씨족사회의 모습이 갖추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의 등장인물은 네 명이지만 땅에는 이미 아담의 자손들이 주변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아담의 두뇌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고 짧은 시간에 놀라운 문명을 이루는 것을 봅니다.

한 세대 만에 벌써 농사와 목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본장의 21절과 22절에 보면 가인의 후손 6대 만에 악기와 금속기구들을 발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로 인해 두려움과 절망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짓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획득, 얻었다 라는 뜻입니다.

하와가 아들을 낳고 상당히 감격을 한 것 같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높이 쳐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얻었도다

아마도 하나님이 주신 이 아들을 창세기3장15절에 예언 된 그 아들로 착각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녀는 에덴에서의 행복한 삶을 회복시켜 줄 약속의 자손을 고대했을 것입니다.

에덴에서의 범죄로 추방당하기 전 하나님은 죄를 가져온 사탄을 멸망시킬 한 아들을 인류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창세기 3장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와는 자기를 꾀어 범죄케 할 옛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후손이 태어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모든 것은 회복되고 복귀될 것으로 믿었죠.

그리고 아들이 태어나자 그가 바로 예언 된 후손이라 생각하여 감격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태어난 아들 가인은 죄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지라 영락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자랍니다.

그는 절망했습니다.

아기를 키우다 보면 그 성향이 어려서부터 이미 나타나 싹수가 보이죠.

아담과 하와의 실망이 어찌나 컸던지 아우를 낳았는 데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허무라는 뜻입니다.

누가 자식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주겠습니까?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체념한 아버지가 지은 이름입니다.

그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자식을 낳으면 아롱이 다롱이라고 성격도 생김새도 각 각이죠.

오늘 주인공 가인과 아벨이 그랬습니다.

결국 한 사람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유리하고 방황하는 세속문화의 조상이 되었고 한사람 아벨은 의로운 자라 확증을 받고 믿는 자의 표상이 됩니다.

오늘 이 두 사람의 제사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첫째로 살펴볼 것은 두 사람이 바친 제물의 내용입니다.

에덴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제물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어 관계가 끊어진 지금 인간은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 제물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제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에덴에서의 축복된 삶을 못 잊어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들도 에덴의 회복을 고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이 예배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만족시킬 제물만 있으면 언제든지 인간과의 만남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사망을 뚫고 하나님 앞에 나오려면 자신의 죽을 죄를 대신 해 줄 무언가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아무 희생도 없는 제물은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구해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최초의 제사로 기록 된 오늘 그들이 드린 제물은 단순한 감사의 제물이 아닙니다.

이 제물은 사망의 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러 나가는 제사였습니다.

이미 이들은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란 하나님의 선언대로 그들에게 죽음이 왔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자신의 죄를 대신할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아벨은 왜 양을 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는 아직 육식이 허용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인간에게 육식이 주어졌습니다.

창세기9장3절 방주에서 내린 노아에게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양을 친 목적이 식용도 아니었고 의복과 침구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열대성 기후의 지구 환경에서 두꺼운 모피 코트가 뭐가 필요했겠습니까?

그가 양을 친 이유는 창세기3장에 하나님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데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히신 가죽 옷은 인간의 죄를 가리기 위해 죽어야 할 한 마리의 죄 없는 짐승으로 바쳐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 살기 위해서는 내 죄를 대신할 죄없는 짐승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키운 가장 사랑스런 양의 첫 새끼를 들고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부분의 원문을 직역하면 하나님이 아벨과 아벨의 제물에 주목하셨다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에서 역사의 끝자락에 이 세상에 보내져 십자가에 달릴 예수님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창세부터 아들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아버지의 고통스런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전국노래00을 진행하는 국민 MC 송0씨는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었다고 합니다.

가로수를 누비며 라는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도중에 서울 예전에 다니는 아들의 오토바이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아들은 이미 수술실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닫혀가고 있는 수술실 문 틈 사이로 아들이 '아버지, 살려줘요'라는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는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고 송해씨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지키지 못 했다며 마치 눈 앞에서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는 듯한 고통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6시간의 수술을 감행했으나 아들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질 못했습니다.

삼일 만에 사망 판정을 받고 호흡기를 떼도 좋다는 각서를 쓰고 아들을 떠나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들의 죽음 이후 그는 라디오 진행을 하며 도저히 '안전 운전 하세요'라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17년간 진행해 온 라디오 교통프로그램에서 도중 하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결혼식에 가면 신랑 신부가 입장하는 것 까지 만 보고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없어 일어난다고 합니다.

아들이 죽어 삼 십년이 지나도 아버지의 마음은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다시 그 고통으로 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대신해 죽어야 할 어린 양을 이끌고 나온 아벨과 그의 제물을 보며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을 떠올리십니다.

장차 자신을 위해 죽을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오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히브리서 11장4절은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아벨은 죄인으로 태어났는 데 어떻게 의로운 자가 되었겠습니까?

그가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인류를 구할 메시야가 예언되고 있지 않습니까?

구약의 모든 의인들도 역시 신약시대에 오실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에녹이라는 사람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으로 죽음을 보지 않은 채 하나님 앞에 옮겨진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도 역시 메시야를 대망했던 사람입니다.

유다서 1장 14절에 보면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기 위함이라하였습니다.

그에게도 메시야를 믿는 믿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고 받아들여진 것은 바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대속자인 메시야를 믿는 믿음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심판 받을 죄인임을 고백하고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으며 나갈 때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가인의 제사에는 희생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의 제사도 자신의 수고한 땅의 소출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대속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먹었던 것 처럼 그도 또한 자신의 죄로 인해 올 사망과

심판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이 쳐다보지도 않으셨다고 원문은 말합니다.

아무리 겉모양이 예배의 모양을 갖추었어도 중심을 보시고 폐부를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가인의 마음 속에 죄에 대한 자각이 없음을 아셨고 그에게 대속자도 필요치 않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오늘 아벨과 가인의 두 예배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 임을 깨닫고 대속물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진정한 예배와 신의 마음을 자기 의도 대로 달래보려는 자기 중심적이고 교만한 인간의 종교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우리의 예배는 자녀로서의 거룩한 삶에 어림도 없이 부족한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나오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은혜와 복을 주실 줄을 확신합니다. 아멘.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4절에 보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물 속에 담긴 예배자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입니다.

아벨의 마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은 그의 예배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성령으 도움과 자신의 진정한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원하며 나오는 사람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교회는 정말 하나님만을 높이고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러 오는 곳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뭐 하러 교회까지 나와 위선을 보이고 서로에게 영광을 구하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수많은 교회 중에 무엇을 원하시기에 이 곳에 우리교회를 세우셨나 기도하다 성령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고 경배하기 위해 앞을 다투어 교회로 몰려 나와 쓰러지듯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광경이 느껴져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사랑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수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열정과 감사와 사랑이 뜨겁게 타오르는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도 이런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며 이 아름다운 예배의 주역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 아닌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잠시 내려 놓으십시오.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문제도 내려 놓으십시오.

환경을 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일주일간 우리는 시간에 쫒기고 업무에 시달리고 크고 작은 문제들로 몸과 마음은 상처로 가득차 교회에 나오는 줄 압니다.

이제 예배의 자리로 나왔으니 주님만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상한 마음을 받으시고 치료하시고 새롭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시편51편17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 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우리의 약함을 멸시하고 우리의 가난함을 무시하고 우리의 괴로움을 귀찮게 여깁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약함을 감싸주시고 위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 기도와 예배를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을 사탄은 제일 싫어합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도 봉사와 헌금과 교제와 성경공부를 얼마든지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고 축복이 임하는 진정한 예배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훼방하는 것이 마귀의 간악한 술수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는 것을 시기하고 그 자리에 자기가 앉으려고 범죄한 몰염치한 자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기쁨과 축복을 악한 자에게 빼앗기지 않으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우리의 영이 살려면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잠언 8장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 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라고 축복하십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 들여졌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거부하셨습니다.

열납되지 못한 예배를 드린 사람에게는 하나님과의 화해도 사람과의 화합도 실패합니다.

오늘 가인의 예배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부 당하고 결국 사람과의 관계도 깨져 버립니다.

5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합니다.

예배에 실패한 사람은 하나님께 분노를 표출하고 얼굴 색을 바꿔 하나님께 등을 돌립니다.

자신의 부족한 예배를 생각지 않고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선을 행하지 않는 그의 마음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담이 따먹은 선악과로 인해 인간은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세기3장 22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하나님은 아담이 악을 알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가 악과 사귀는 걸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불순종으로 인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하더라도 너는 선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고 악을 제어할 수 있는 길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비록 우리 속에 죄의 유전자가 끊임없이 불순종과 거역을 원하나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합니다.

집의 대문을 막고 웅크리고 있는 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집은 죄로 점령당한 것입니다.

모든 축복을 가로막고 우리 마음 문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봉쇄시키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잠언 11장 27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지적하신 가인의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형제를 사랑하지도 않은 죄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없었기에 그의 제물을 하나님이 쳐다보지도 않으신 것입니다.

선물의 내용과 준비하는 마음을 보면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이 드러납니다.

선물의 외형이 아니라 선물에 담긴 의미와 내용에 더 감동합니다.

영국황실의 2인자인 윌리엄 왕자가 8년 동안 만나던 연인에게 프로포즈를 했다고 합니다.

그가 연인에게 끼워 준 반지는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가 박힌 것으로 5천만원 상당입니다.

황실의 약혼 반지치고는 좀 검소한 편이죠.

그러나 이 반지는 그의 어머니 다이애너 왕비가 끼었던 약혼식 반지였습니다.

다이애너 왕비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후 13년 동안을 소중하게 간직했던 반지를 약혼자에게 끼워준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를 잊지 않고, 자신의 약혼녀를 결코 어머니 같은 고독 속에 두지 않겠다는 의미로 이 약혼반지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예물에는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마움도 죄사함에 대한 간절함도 없는 형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은 결과 그의 앞에 죄가 웅크리고 결국 죄가 가인의 마음을 장악합니다.

여기서 죄가 인격으로 표현된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결국 죄는 가인을 충동질 해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린 친 동생 아벨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귀는 가인을 부추겨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한 아벨을 살해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에 실패한 가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비록 그의 예배가 그릇되었으나 회개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리길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그 이하에서 실패한 가인을 여전히 상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놀라운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아무 것도 아닌 우리들을 이렇게 하나 하나 상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기회마저 잃어버립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아벨은 의로운 제사를 드림으로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죽음으로써 오히려 말한다고 그의 죽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범죄한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아벨의 죽음에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영원한 죽음에 더 가슴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까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표를 주시고 가인을 죽이는 사람을 벌하시겠다고 생명을 약속 합니다.

영원한 사망에 이를 가인에게 이 땅에서의 삶이나마 살아가도록 보장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회개를 거부하고 온전한 예배로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나 여기까지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우리는 나머지 모든 삶을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단 한번의 예배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뒤집어지기도 합니다.

열정과 간절함이 없는 무미건조한 예배는 하나님께도 예배자에게도 고통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고 축복하시길 원하십니다.

출애굽기20장24절에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교회에 임하셔서 오늘도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의 예배가 받으시는 예배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전인격을 다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높이고 구하는 예배를 드릴 때 받으시는 예배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남은 생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로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이런 예배의 단을 쌓고 또 쌓을 때 마침내 교회와 우리 심령에 찾아오셔서 하늘의 감격과 은혜를 주체할 수 없이 부어주실 줄 확신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