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창세기3장1절-13절)

남수연 2012. 3. 30. 07:50

오늘 본문은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인류가 죄인이 된 사건을 기록합니다.

만일 아담이 한국 사람이었다면 절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거라고 합니다.

뱀을 먼저 잡아먹었을 거라죠.

이 선악과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질문이 많습니다.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셨냐, 왜 따먹도록 자유의지를 주셨냐.

아담이 먹었는 데 왜 나까지 죄인이냐.

그런가 하면 사이비 종교에선 선악과를 제멋대로 해석해서 마치 큰 비밀이나 알고 있는 듯 미혹합니다.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이단에서도 동산의 생명나무를 하나님의 새 계시를 받은 자기들 교주라고 해석하고 그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현혹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일 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배우고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고 진리에 견고하게 서야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선악과와 죄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신비적인 방법과 깊은 감동과 행복을 느끼게 오기도 하지만 가장 안전하고 보편적인 은혜의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대할 때 항상 기억할 것은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논리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오류가 아니라 물질 세계 뿐 아니라 영적인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믿음으로 들을 때 성령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임하실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성령께서 오늘 듣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환히 비춰주셔서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지식을 더해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먼저 창세기의 배경을 잠시 살펴 보겠습니다.

성경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3300년 전 이스라엘 사람이죠.

그의 눈으로 본 적도 없었던 창조의 내용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었냐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은 일반 성경기록자들처럼 성령의 감동을 받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통해 창조의 순간을 보고 기록한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를 읽어보면 눈으로 그것을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았다면 그렇게 명료하고 장엄하게 천지창조의 순간을 기록할 순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요한이 지구의 마지막에 있을 멸망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으로보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듯이 모세도 상당 부분 천지창조의 순간을 보고 창세기를 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도 시내산에서 40일간 하나님과 대면 할 때 보여주신 양식대로 세웠다고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도 창세기의 내용들을 인용하고 설교를 하심으로 모세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셨습니다.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창조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 된 이유가 가장 정확하게 기록 된 것이 바로 창세기입니다.

사람들은 우주의 생성과 인간의 기원이 무엇인지 밝혀내려고 애를 쓰죠.

온갖 터무니 없는 가설을 다 만들어 인류의 기원을 더듬어 가면서도 성경이 밝히고 있는 창조의 진실만은 무조건 배격합니다.

왜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만 더듬어 창조의 기원을 찾으려는지 답답합니다.

분명히 영적인 세계가 있다고 하는데요.

단지 하나님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겠죠.

전 예수님을 믿고 보니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만물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게 그렇게 안심이 되고 좋더라구요.

하늘을 올려다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자체만으로도 그렇게 기쁘던 데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참 안타깝습니다.

성경은 가장 정확하고 명료하게 창조주 하나님이 이 모든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선언합니다.

오늘 선악과와 자유의지의 문제를 살펴보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인간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한갓 피조물을 존귀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예레미야3장19절에도 하나님께서 너희는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혈통을 따라 닮은 자식을 낳아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가족으로 지으신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게 뭐가 부족해서 뭔가를 채우시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과 신뢰 가운데 완벽하게 충족한 분이십니다.

단지 그 행복과 좋은 것을 함께 누리게 하려고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죠.

종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랬기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는 위험한 선택과 희생을 감수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을 따를 때 하나님이 강제 복종시키십니까?

아니예요. 언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까 말까는 완전히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창세기가 기록 될 당시 주변 국가들 속에도 창조설화가 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설화를 보면 수많은 신들이 경쟁적으로 싸우며 우주를 다스렸습니다.

인간은 그 중 제일 하찮은 킹구라는 신을 죽여서 나온 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인간을 만든 목적은 신을 섬기게 하고 힘든 노동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신화의 기원을 보아도 최고의 권력을 가지려고 끊임없이 전쟁을 하는 인간만큼이나 저속한 수많은 신들이 등장합니다.

인간을 만들어 자신을 숭배하게 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트집을 잡고 인간을 훼방하는 것이 신들의 모습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을 그들의 신화와 창세기의 하나님의 창조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우리를 신적인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주시는 게 맞는 것입니다.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냐고 대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남에게 명령받고 지배당하는 것은 더 싫어하더군요.

우주의 창조자인 전능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대등한 인격체로 대접하셨다는 것이 어디 예사로운 일입니까?

지금도 하나님이 한 영혼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인생일지라도 정말 오래 참으시며 인격적으로 사람을 위하시는 걸 봅니다.

저 광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꺼져가는 심지 같고 상한 갈대 같은 연약한 우리에게 오시려고 얼마나 기다리셨는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되길 초조하게 기다리시는 모습이 상상할 수 있는일입니까?

요한계시록 3장20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리오너라! 하며 우리를 강제 진압하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 문 밖에 서서 계속 두드리고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가 이런 의미입니다.

이제 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죄를 짓게 했냐 그런 소리 하시면 안됩니다.

인간에게 이렇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 일이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사랑과 행복을 나누기 위해 자기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에게 배척당하는 아픔을 겪으셔야 했던 것이죠.

그리고 더 큰 아픔은 그 시험에서 나쁜 결과를 선택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과 결별 된 어둠과 고통의 장소에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먹지 말라고 한 과일 하나 따 먹었다고 영원한 형벌은 너무 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을 만들었냐고 합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라고 하나님이 약간 뻥을 치셨다는 것이죠.

인간이 그렇다고 착하고 선하게 살아갑니까?

인간을 모르셔도 너무 모르십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내용을 읽을 때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슬피 울며 하나님께 대하여 이를 갈고 분을 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부당하다고 끝까지 목을 꼿꼿이 세우고 대적합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으면 영원한 세계에서도 똑 같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천국이라 해서 완전 다르게 변하지 않습니다.

노인들이 한결 같이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아무리 늙어도 마음은 여전히 이팔 청춘이라고 하시잖아요.

우리 영혼이 이렇게 늙지 않는다는 것은 불멸일 뿐 아니라 불변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천국에 간다 해도 전혀 딴 사람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연약한 성품들이 회복이 되겠지만 우리의 신앙이 다 똑같아 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믿음의 성숙과 연단이 천국에서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분명히 고린도전서15장41절에서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싫어하는 분들도 절대로 심판대 앞에서 그 마음 안 바뀝니다.

과일 하나 따먹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께 도전하고 싫어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으로부터 격리되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동안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렇게 예배하는 것이 감당치 못할 큰 축복임을 믿으시고 감사하는 성도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고 인간을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십니다.

에덴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특별한 두 나무가 있었는 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입니다.

그 중 단 한 개의 나무 선악과를 먹는 것을 금지하십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사용되는 지 심판대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결과는 죽음입니다.

당연히 명령을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이죠.

본래 인간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선악과 옆에 있던 생명나무가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에덴에서 인간이 자유의지의 시험을 통과하고 죽음 없이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악과가 없었다면 불순종도 없었을 거고 우리가 다 천국에서 잘 살았을 것란 것은 억지 소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면 당연히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도 주셔야 맞는 것입니다.

사용해 볼 기회도 주지 않는 자유의지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기만이죠.

불순종한 자유의지는 어디서든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바로 이 시험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의 자격에 부적합 판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가족이 된다는 것은 자기의 욕망을 다스리고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을 버리고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고 권위로 군림하는 게 아니라 겸손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제일 행복하고 보람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녀들이 우리의 사랑과 노고를 감사하고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아빠 엄마라고 말할 때 아닙니까?

이런 말 하는 자식들 옆에서 부모라면 눈물이 핑 돌고 마음이 뿌듯하게 벅차 오르지 않습니까?

지난 주 소천한 이어0씨의 딸 이민0 목사가 이런 간증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이어0씨가 딸이 실명 위기에 있을 때 눈이 보이게 해주시면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약속하며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뒤 늦게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읽으니 너무 기가 막힌 말씀들인 거예요.

민0씨를 만나면 자기가 그동안 깨달은 것이 대단한 것인 양 얘기를 꺼내시는 데 들어보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인거예요.

그거 벌써 다 알고 있었던 것라고 말하면 아주 실망하시는 빛이 역력하시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하다 성령께서 그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너에게 존경받기를 원하시는 거다.

자식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은 존경이다.

그 깐깐한 분이 자식에게 믿음을 인정받고 존경받으려고 눈물겹게 애를 쓰신 것이죠.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셨을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 해도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아담은 선악과 아래 설 때 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순종해야 할 피조물임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유의지는 자신도 하나님과 똑 같아 지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 조차도 내 인생을 간섭하지 못하고 명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죠.

우리 속에도 아담의 죄성이 살아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시면 그대로 순종할 의향이 있으십니까?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을 경영하고 하나님은 그냥 필요할 때 좀 도와주시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 아닌가요?

아담이 사과하나 따 먹은게 지옥에 갈 일이 아니라 그 배후에 하나님의 간섭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역적 행위가 죄였던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번 물음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입니다.

정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입니다.

이 말에 가슴에 뭔가 걸리는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담의 죄성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왜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거야? 그럼 난 뭐야?’

이런 마음인 것이죠.

저는 청년 때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 이전에 하나님을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도 않고 하나님을 적대시 했던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압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게 순종하며 따르려는 이 마음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스스로 갖은 착한 마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은혜를 주셨기에 아담의 죄성을 가진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된 줄 믿습니다. 아멘.

 

다음은 오늘 본문을 통해 아담이 범죄 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뱀이 먼저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를 부채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뱀이 어떻게 말을 하냐 이런 소리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뱀이 말을 못한다는 것은 이 글을 기록한 모세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80년을 광야에서 살았던 그는 뱀이 말을 못한다는 걸 우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기록하도록 하셨고 우리는 역시 성령의 뜻대로 은혜롭게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인간에게 있는 죄의 근본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죠.

먼저 뱀을 통해 다가온 사탄은 1절에서 교묘한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이 인색한 분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넣어 질문합니다.

우리에게 마귀가 다가올 때도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한다고 주실 리가 없어, 항상 내게는 원하는 것을 응답하신 적이 없잖아?기도할 때 이런 마음이 들고 문제 앞에서 이런 낙심이 들 때 말씀으로 물리쳐야 된다고 지난 주에 살펴보았죠.

로마서8장32절에 기록된 대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 하고 모든 시험을 이겨 좋은 것을 받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런데 2절에 보면 여자가 은근히 마귀의 생각에 동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무 열매들을 먹을 수는 있으나

어떤 의미인지 분위기가 느껴지시죠.

마지못해 주셨다는 것 처럼 말하는 데다 한 수 더 떠서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는 말을 붙여서 하나님을 지독히 인색하고 완고한 분으로 만듭니다.

어느 새 마귀와 한 통속이 되어 줄을 서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보이시죠?

우리도 지금 내가 서 있는 줄이 어느 쪽인지를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든 우리를 넘어지게 할 목적으로 마귀는 불신앙의 생각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고 내가 누구 편에 서 있는지 늘 분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결국 하와는 선악과를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는 다는 신용 할 가치도 없는 뱀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신뢰합니다.

왜요? 그 말이 자기의 속셈과 꼭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죠.

하와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령하고 금지한다는 것에 왠지 모를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인생을 그 누구도 간섭해선 안돼, 설사 하나님일지라도.

이것이 아담의 마음이고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6절을 보시면 하와가 그 나무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다고 합니다.

이미 판단력을 잃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를 다 먹기 좋고 보기에 아름답게 만드셨다고 분명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주관적인 생각이 더해 져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고 하죠?

주어지지 않은 것을 탐내는 욕심과 갈망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으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덥썩 세상 것에 손을 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내게 간절히 필요한 그 한 가지가 해결되면 행복하고 만족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모자란 돈이 채워진다면, 더 좋은 직장이 생긴다면, 이 병이 낫기만 한다면, 자녀 문제만 해결된다면 모든 불행이 끝나고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것 같죠.

그러나 그것은 에덴의 선악과나 마찬가지입니다.

간절히 바라던 걸 얻었다고 인간이 절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당장 기쁘고 좋았는 데 조금 지나면 또 다른 결핍이 다시 압박하고 불안하게 짓누르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 힘든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평안하고 만족하지 못하면 어떤 것이 주어져도 완전한 만족은 없습니다.

불안하고 두렵고 공허하다면 오직 하나님 앞에 나가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가운데도 자족하는 마음을 주시고 지혜롭고 명철한 마음으로 문제들을 해결하게 하시면 평안하게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결국 하나님 같이 되고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마귀의 말에 넘어 간 하와는 선악과를 따게 됩니다.

그리고 언약의 당사자인 아담도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남자들은 하나님이 괜히 하와를 만들어주셔서 얼떨결에 넘어갔다고 억울해하죠.

여자가 없었다면 지금도 에덴동산에서 딸기라도 따먹으며 유유자적하게 살 고 있을 줄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최고의 지력을 갖고 있던 아담이 선악과란 걸 몰랐고 그걸 판단하지 못했겠습니까?

그도 하나님의 간섭이 싫었고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앉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인 것이죠.

그러니 아담이 범죄 했는 데 왜 우리까지 죽어야 하냐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물론 아담은 인간의 대표자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을 때 인류는 모두 아담의 허리에 있었습니다.

대표자가 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결국은 아담과 같을 거라는 의미도 됩니다.

누가 아담의 자리에 있었어도 똑같았을 거라는 얘기죠.

그러나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하나님은 여전한 마음으로 대하시는 걸 보게 됩니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은 결국 스스로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 구원 할 것을 결정하십니다.

21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라고 하셨죠

영원한 속죄 제물로 오실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우리의 죄을 영원히 가려줄 것을 예표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나산교회 어록에 남은 호서래집사의 말이 있습니다.

호집사님이 처음 예수님을 믿고 저하고 성경공부를 할 때 이 부분을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왜 짐승을 잡아서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셨을까요?

그 때 호집사님 대답이 ‘죄를 지었으니 짐승처럼 살라고 그러신거 아닌가요?’

물론 아주 처음 믿을 때 얘기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온 인류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시므로 아담의 불순종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인간의 죽음을 대신하는 죄의 대속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서 아담의 범죄 이전으로 회복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이죠.

로마서5장10절의 말씀이 그 뜻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이제 우리가 아무 공로도 없이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시며 우리가 반역의 자리로 나가지 않도록 매 순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금지 된 것, 부족한 것, 아무리 애써도 주어지지 않는 것들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임을 인정하시고 겸손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지금 현재 결핍 된 상태에서 우리가 만족하고 평안하지 못하면 원하는 것을 얻었다 해도 똑 같습니다.

더 가져야 행복할 것 같고 더 높아지고 더 인정받고 명예로워야 행복할 거란 것은 단지 뱀의 유혹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가운데서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이유가 있어서 이 고단한 삶을 허락하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좋은 길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뢰할 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를 축복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