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일본 동북부에 19,000명의 엄청난 인명피해가 난 지진과 해일이 발생했었죠.
당시 영상으로 본 장면들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양철조각 처럼 구겨진 대형 선박과 자동차들이 쓰나미에 밀려다니던 장면들이 도저히 실재라고 믿어지지 않았었습니다.
그 때 침수되었던 한 자동차에서 꺼낸 블랙박스에 찍힌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운전자는 이미 숨을 거둔 것 같고 자동차가 물 위로 휩쓸려 다닐 때 블랙박스 카메라가 생생하게 쓰나미 장면을 촬영했더군요.
눈 깜짝할 사이에 물이 밀려들고 괴물처럼 슬그머니 모든 것을 삼키고 파괴 된 구조물이 물에 떠다니는 모습들이 그대로 찍혀있었습니다.
블랙박스 촬영이 끝난 마지막 장면은 물이 바로 차 앞 유리창에 출렁거리더니 순간 차가 꼬르륵 물 속에 잠기며 깜깜한 화면으로 끝이 났습니다.
마치 내가 물 속에라도 잠기는 듯 순간 숨이 답답하더군요.
제가 폐쇄공포증이 약간 있거든요.
어렸을 때 홍수로 방이 침수됐던 기억나는 데 그 때 생긴 것 같습니다.
물 속에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1년 동안 수영레슨을 받았는 데 결국 자유형을 다 배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물이 무섭습니다.
물이 도시를 침몰하는 광경이 다시 보아도 두렵고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위력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자연과 생명체를 다스릴 권세를 사람에게 주셨기에 자연이 인간에 순복하는 것이지 실상 인간의 힘과 문명이 자연 앞에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자연을 잘 다스릴 사명을 망각하고 만용을 부린 죄로 이제 자연은 점점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20년 안에 온실가스 배출을 80% 줄이지 않으면 지구의 평균온도가 2,3도 상승하며 자연의 역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대기 순환 유형이 바뀌고 가뭄과 폭염으로 수많은 국가들이 사막화가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 나라들이 식량부족으로 대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죠.
중국의 경우 티베트의 만년설이 녹아내리며 기상재해로 농경을 할 수 없게 되고 상하이 일대가 침수될 것이라고 합니다.
월드뱅크의 비공개 조사 결과 식량생산이 38%나 줄어들 것으로 예측합니다.
이 정도면 정권도 나라도 유지될 수 없는 것이죠.
국제지정학자인 귄 다이어의 기후대전이란 책을 보면 이미 5년 전부터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러시아등의 군사 전문가들이 이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무지한 관리로 지구는 더 이상 우리의 안전한 거처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일본 쓰나미의 영상을 보며 오늘 본문인 노아시대에 전 지구를 뒤 덮은 거대한 홍수가 얼마나 끔찍한 재앙이었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또 앞으로 있을 지구의 기상이변과 환경 파괴로 고통을 겪을 우리 미래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인류의 종말을 기록한 요한사도의 계시록을 보면 대 흉년에 하루 품삯으로 겨우 보리 한 되를 살 수 있는 극심한 인플레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언제까지 한가하게 문화를 즐기고 문명을 구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전망인 것입니다.
핵안보 정상회의가 다음 주에 열리게 되죠.
인류의 안전이 도처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감을 누구나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구는 영원히 존재하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만물의 마지막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노아시대의 홍수를 기록한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큰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하나는 심판이고 또 하나는 구원입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축복을 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먼저 노아의 방주와 대 홍수가 역사적인 사실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구상의 각 나라에는 대홍수에 대한 전설이 33개나 됩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도 그런 설화 중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많은 홍수에 대한 설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홍수를 겪은 누군가에 의해 자손들과 민족들에 전해졌다는 것이죠.
그 가운데 창세기의 대홍수 사건 만큼 정확하고 세밀하게 홍수의 과정을 기록한 책은 없습니다.
노아홍수가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홍수 설화를 따랐다는 설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대홍수와 방주가 역사적인 사실이란 과학적 증거만도 상당한 분량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것을 다 살펴볼 수는 없습니다.
방주의 실체를 발견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방주의 크기가 워낙 크기 때문에 방주가 실제 있었다면 지구 어딘가에 그 흔적이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볼 수 가 있는 것이죠.
창세기8장4절을 보면 홍수 후에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라랏산은 터키에 있습니다.
일년 내내 만년설로 뒤 덮힌 이곳에서 지진으로 눈이 무너져 내렸을 때 노아의 방주 일부를 보았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작년에 시드니오페라하우스에서 국제노아의방주사역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중국인과 터키인 15명으로 구성된 탐사대가 7년간 터키 동부 아라랏산을 탐사한 끝에 발견한 방주에 대한 내용이죠.
탐험대가 계곡에 깊이 묻혀 있는 방주 안에 들어가 내부를 촬영하고 목재의 일부를 가져와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목재는 아라랏산에 서식하는 나무가 아님이 밝혀졌고 연대는 노아의 홍수 연대와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대 홍수와 노아의 방주가 역사적 사실임이 확인 된 것이죠.
진위 논란도 있지만 유인원의 이빨 하나라도 발견했다면 진화론의 증거라고 떠들어 댈 세상이 이 대 발견 앞에서 너무나 조용하죠?
물론 우리는 증거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완전함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류의 종말의 때 세상이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홍수사건의 역사성을 인정하셨습니다.
노아시대 홍수 심판은 역사적인 사실이었고 인류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도 역사적인 사실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토록 아름답게 창조하고 보시기에 좋았던 만물을 홍수로 심판해야 하셨을까요
지난 주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선악과 범죄 이후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쫒겨 났고 자손을 낳고 온 지면에 흩어져 살게 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사람에게 죄가 들어오게 된 이후 인간은 급속하게 타락하죠.
그의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장면이 곧바로 다음 장에 이어져 나옵니다.
그리고 라멕이란 작자는 자기가 입은 상처로 인해 사람들을 죽인 것을 마치 무용담 처럼 자랑하는 것을 봅니다.
당시 법과 도덕이 없는 사회에서 사람을 서로 죽이고 살생을 일삼는 무참한 참극들이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놀랄 일은 아니죠.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와 폭동을 보면 인간 속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지 무섭습니다.
아담이 범죄 이후 본문에 이르기 까지 땅은 인간의 포악함으로 얼룩집니다.
인간이 무고한 피를 흘리면 땅도 저주를 받는 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아름답던 땅이 가시와 엉컹퀴를 냈다고 기록되었죠.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이 마주 보고 있는 지역에서는 꽃과 식물들이 다 북한 쪽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중국 쪽을 향해 핀다고 합니다.
북한 땅에 옥수수를 재배해도 소출이 안 나고 땅이 척박하고 황무한 것도 이 같은 영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원리로 우리가 나쁜 마음을 심고 죄악 된 행동을 계속해서 심는 다면 우리의 가정이나 일터 역시 기름진 축복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6장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경계로 삼아야 할 줄 믿습니다.
12절을 보면 인간의 행위가 부패하여 결국 땅도 저주를 받아 흉하게 변질되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인간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였으므로 그 끝 날이 왔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5절에 보면 이 모든 상황을 보고 하나님이 한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원문대로 해석하면 슬퍼하셨다 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타락 한 기록 사이사이 마다 하나님의 근심어린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세계에서 잠시도 하나님의 시선이 떠나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춘기 아들이 점점 사납고 난폭해져 갈 때 방안을 들여다보며 부모의 애가 끊어지고 걱정으로 땅이 꺼지는 딱 그 모습이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과 생물을 긍휼과 자비도 없이 가차 없이 쓸어버렸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사람과 생명체를 지면에서 씻어버리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까지 하나님의 고뇌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죄악으로 포악해진 인간을 사탄이 마음대로 지배하는 상황에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창조주의 엄단을 내릴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존엄성이 다 파괴 되어버린 인간들이 이 땅에 가득 번성하고 피차 고통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도 내전과 질병과 기근으로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30초의 한 명의 어린이가 죽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결심하셨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류가 죄악과 부패 속에서 어우러져 죄악 천지가 되지 못하도록 죄의 고리를 끊고 거룩한 자손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돌보시고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만물이 죄로 변질되었을 때 하나님은 마땅히 심판하실 권한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티끌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늘 부당하다고 말하죠.
욥기40장8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하나님의 심판은 당위성과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운다고 증언합니다.
일본의 경우도 동북부 지진 이후 1%였던 기독교인 수가 2%대로 늘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지역적인 심판의 이면엔 구원의 역사가 함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한 사람의 인생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다스리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구원 받았다 해서 우리의 죄와 악을 못 본 척 방임하지 않으십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믿고 세상과 똑같이 방종하게 살아간다면 아직 십자가의 구속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죄악으로 안팍이 포위 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심판은 노아의 홍수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주는 교훈은 이미 홍수로 죽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있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인류를 향해 죄악에서 돌이키라는 경고의 말씀으로 기록된 줄 믿습니다.
심판이 없다면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베드로사도는 베드로후서3장5절에 기록합니다.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이 앞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십자가의 의로 구원받은 우리는 죄를 버리고 구원에 감사하며 축복과 희락과 평강을 누리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9절에 보면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들 중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법도 없고 양심도 버리고 선악을 분별할 능력도 다 던져 버린 사람들 중에서 경건하게 하나님을 믿은 노아였습니다.
그가 빈틈 없이 죄로 채워진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다 그렇게 택함을 입고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가 탔던 방주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의 방주가 되십니다.
오늘 본문14절에 보면 방주의 안팎에 역청을 칠하라고 하시죠.
이 역청은 히브리어로 코페르라고 하는 데 역청이란 뜻 외에 몸값, 속죄금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칠하다란 동사는 덮다 속죄하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이 코페르를 안팎에 칠한 노아의 방주는 심판의 홍수에서 안전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구속의 신비한 비밀로 가득 차 있는 보물지도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말씀을 읽다 성령께서 그 보석을 비춰주실 때 기쁨은 돈다발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읽으며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시기 위해 한 가문을 계속해서 선택해 나가시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에서 그의 아들 셋으로 또 에녹으로 노아로 그 다음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과 야곱과 그의 아들 유다로 이어지고 다윗으로 이어지며 그 후손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치밀하게 포기하지 않는 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실행해 나가시는 것을 성경말씀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시려고 이 땅의 유일한 방주인 예수님께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노아의 방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봅니다.
14절부터 16절 까지 하나님이 주신 방주의 설계가 나와 있습니다.
방주의 크기를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길이가 135미터, 폭 23미터, 높이 14미터의 거대하고 길다란 직육면체 상자 모양입니다.
축구 경기장 보다 좀 더 길고 아파트 5층 높이 쯤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비율이 선박 건조에 있어서 황금비율이라고 합니다.
미 해군에서는 가장 견고한 군함이라고 하는 오레곤 호가 바로 이 방주의 비율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해사기술연구소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더군요.
노아방주와 동일한 부피를 가지면서 길이와 폭과 높이의 비율을 다르게 한 13척의 배를 선정해서 안정성 검사를 한 것입니다.
그 결과 노아방주의 비율이 최고의 복원안정성을 갖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높은 파고에서 가장 안정되게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완벽한 지혜를 검증해 보나마나죠.
이 하나님의 완벽한 지혜를 구하는 모든 자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지혜가 필요한 우리 모두 특히 우리 학생과 청년들 믿음으로 이 지혜를 구하고 받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방주의 구조를 보면 특이한 게 일반적인 배가 갖추어야 할 닻이나 돛이나 운전대나 나침반이나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가면 사람의 힘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닻을 내리고 할 수 없다는 뜻이죠.
백퍼센트 하나님의 뜻대로 떠다니게 되어 있는 것이 방주입니다.
심판과 구원의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홍수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비가 40일간 내렸고 물이 물러가고 땅이 마르기까지 다 합쳐서 총 1년10일이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긴 시간이죠.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 밖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홍수의 진행을 보면 대 지각 변동이 있어 땅이 솟아오르고 지하수가 터져 나오고 지구의 지각 전체가 들었다 놨다 한 걸 알 수 있습니다.
요동하는 배 속에서 정처 없이 요동하며 밀려다닐 때 그들의 간이 콩알 만해 졌을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이 의지하고 붙잡을 것은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방주에 올랐지만 우리를 뒤흔들어 요동케 하는 환경에 때로 두렵고 낙심해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앞 날을 알 수 없는 캄캄한 방주 안에 갇힌 것 같은 힘든 상황 속에서 밖으로 뛰쳐 나가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구원의 여정은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에 달린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노아에게 운전대를 맡겼다한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 지 그 험한 물 가운데서 얼마나 막막했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키를 예수님께 맡기면 마른 땅을 밟을 곳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방주의 창은 하늘을 향해 나 있었습니다.
홍수가 범람하는 인생 속에서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암흑 같은 위기도 벗어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신실하게 우리 구원의 여정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늘 하늘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향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2절에 보면 노아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다 준행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의 순종이 어떤 것이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볼까요?
하나님은 심판을 결정하시고 사람들의 날이 12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은 시간은 120년 안 쪽이었고 그 기간은 패역한 인간이 회개할 기회의 시간이었다는 말씀이죠.
그 긴 세월 동안 노아가 배를 건조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해가 쨍쨍 내리쬐는 육지에서 홍수 심판에 살기 위해 배를 만든다고 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했겠습니까?
믿음의 전당인 히브리서11장은 이런 노아를 믿음의 인물로 등극시킵니다.
120년간 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의 믿음도 이렇게 행함으로 증명이 되는 것이죠.
야고보서1장22절은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이 방주를 너를 위하여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긴 세월 대 역사로 배를 만들었지만 그것은 사실 노아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죠.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를 희생하는 작은 봉사를 하고 헌신을 했다면 그것이 결국은 나를 위해서란 것입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써서 하나님께 드린다 해도 결국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우리의 공로도 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떠다 준 냉수 한잔도 잊지 않고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셨죠.
믿음으로 철저히 내 인생을 바꿔서 살려 할 때 쉽지만은 않습니다.
노아가 배를 만드는 작업 처럼 하루 하루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착한 일을 누가 알아줄까 실망도 되지만 그것이 결국 험한 세상에서 내 믿음을 지켜주는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새노0교회의 이동0목사님의 전도사시절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60만원의 사례비를 받았는 데 첫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똑같은 돈으로 분유를 사고 생활비와 신학교 책 값을 대며 한 달을 살아야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면 돈은 다 떨어져 버렸지만 신기하게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부족한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생활비도 다 떨어지고 아기 기저귀도 다 떨어진 어느 날 성도님 한 분이 10만원 상품권을 한 장 주셨습니다.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가다 명동의 롯데마트에서 아기 기저귀를 사고 나머지를 상품권으로 받았습니다.
백화점에 가서 그걸로 생필품을 사려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매서운 날 인데 지하도 입구에서 한 할머니가 뻥튀기를 놓고 추위에 떨면서 쪼그리고 앉아 계셨습니다.
가진 것 다 팔아봐야 2,3만원 될 것 같은 데 그 추위에 아무도 뻥튀기를 사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할머니에게 남은 상품권을 다 드리며 추운 데 이걸로 필요한 거 모두 사가지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말했습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할머니 곁에서 돌아서려는 데 할머니가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는 분이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몇 걸음을 걷지 않아 갑자기 성령의 은혜가 그의 마음에 주체할 수 없이 밀려 왔습니다.
갑자기 길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폭포와 같이 부어졌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가난한 중에도 사랑으로 베푸는 그를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 날 명동 한 복판에서 그 은혜가 감사해 또 그렇게 울었다고 합니다.
인생에서 가난한 때를 믿음으로 아름답게 보내는 것은 결국 우리의 남은 인생을 축복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에 은혜가 메마른 것은 순종과 희생이 없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인생이 얼마나 곤고한지 모릅니다.
삶이 각박하고 물질이 부족하고 넘어야 할 산이 험해서가 아닙니다.
심령의 평안과 영혼에 생수의 강이 넘치길 바라시면 조금만 더 믿음으로 헌신하고 조금만 더 말씀대로 순종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반드시 우리 심령이 살고 우리 영혼이 능히 곤고한 인생을 이길 기쁨과 능력으로 새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하는 삶에 하나님은 물질의 풍성한 복도 자녀의 축복도 명예도 필요에 따라 공급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노아가 단지 배를 만들기만 한 게 아니고 의를 전파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의 배에 올랐던 사람은 단 8명 그의 식구들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배에 사람들이 탑승하기를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주님은 120년을 기다리셨고 단 한명의 회심자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내 가족과 이웃을 기다리고 계신 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걸어 갈 때 반드시 그들도 함께 구원하라고 주님은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방주에 오르기 까지 그들의 구원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입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시죠.
아담과 맺었던 선악과 언약이 이미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노아에게 언약을 맺자고 하십니다.
성경의 기록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향해 약속하자, 언약 맺자며 손을 내밀며 다가오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도 말씀하시길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모든 계약들이 인간의 죄로 인해 속절없이 깨어지고 난 뒤 하나님은 마지막 그 아들을 통해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십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은 결국 죄값을 대신 갚아 줄 독생자를 걸고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4장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새 언약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영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십시오.
사탄의 계략에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은 지금 흘러가는 죄악의 물결에 몸을 잠근 채 죽음을 향해 떠내려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방주에 탑승하셨습니까?
우리가 심판에서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고 감사할 때 죄악이 창일한 세상에서 구별 된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게 되리라 믿습니다.
사탄의 세력이 음험하게 세상을 휘감고 있을 때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고 가족과 이웃을 모두 구원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곱의 위기와 브니엘의 하나님 (창세기32장) (0) | 2012.05.23 |
---|---|
이삭의 하나님(창세기26장1절-16절) (0) | 2012.05.02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창세기3장1절-13절) (0) | 2012.03.30 |
요셉의 꿈과 고난 (창세기39장19절-40장8절) (0) | 2012.03.02 |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창세기12장1절-9절) (0) | 2011.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