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삭의 생애는 야곱이나 요셉과 같은 신앙 인물들에 비해 비교적 순탄한 삶이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그의 인생은 몇 장 안에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삭은 족장 아버지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늦둥이 아들로 부모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자랍니다.
아브라함은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거부였고 그 시대에 이미 가나안 부족 왕들과 동등한 지위로 외교 관계를 가졌던 걸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왕자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의 평생이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그는 청소년기에 아버지에 의해 죽어서 번제로 바쳐질 뻔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 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셨죠.
히브리서11장 19절에 이 명령에 순종했던 아브라함에 대해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그를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힘이 펄펄한 청소년의 나이에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 결박된 채 나뭇단에 누워있던 이삭은 진정 순종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던 아버지가 날 선 칼을 자신의 목에 들이댈 때 이삭이 받은 충격과 공포가 어땠을까요?
이 세상에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해주리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신뢰의 대상이 부모님 아닙니까?
어느 날 우리 부모님이 내게 칼을 겨누고 죽이려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가 받을 엄청난 충격은 평생 잊지 못할 상처일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는 평생 사람을 괴롭힙니다.
대구지하철참사 생존자37명 중 21명이 트라우마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십년이 지난 지금도 부모의 손을 잡아야 잠이 들 수 있다는 한 여성은 지하철에 내려가면 온몸이 마비되고 공포가 밀려와 울음을 터뜨린다고 합니다.
대부분 우울증, 공황장애, 불면증에 시달리고 계속 자살을 시도하는 심각한 환자도 6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깊은 고통을 응시하고 계셨습니다.
그에게서 2천년 뒤 십자가 형틀에서 아버지의 심판을 당할 예수님의 마음의 고통을 함께 느끼셨던 것이죠.
그러기에 하나님은 씻기지 않는 깊은 트라우마를 가진 이삭을 자상하게 살피시고 비교적 평탄한 인생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아픔과 상처를 일일이 기억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삶에 상처받고 힘들어 홀로 눈물 흘릴 때 우리를 위로하고 붙들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예레미야30장 17절에서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아버지께 독생자와 맞바꾼 귀한 아들 딸입니다.
오늘 이삭의 삶의 일부분을 살펴보며 그의 삶에 동행하시며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곧 우리 삶에도 함께 하심을 확신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먼저 아브라함과 이삭 같은 다른 나라 족장들의 이야기에 왜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에덴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죄가 세상에 들어와 인간이 사망에 이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 문제까지 스스로 책임지시기를 작정하십니다.
자녀가 죄를 지어 형벌을 받을 때 부모들은 할 수만 있다면 자기가 그 벌을 대신 받으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인간의 형벌을 대신하게 할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족보를 만들어 가시는 중입니다.
구약성경의 긴 이야기는 남의 나라 이스라엘의 역사와 족보가 아닙니다.
바로 나를 찾아오시기 위해 먼 나라 먼 역사를 걸어오신 우리 주님의 발자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마음을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핵심이 오늘 본문 4절에 들어 있습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유대인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신다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 인구는 서울인구보다도 적은 7백만 명이 조금 넘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구원받을 전 인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에 복음에 핵심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장16절에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즉 그의 후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약속대로 예수님을 통해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멘.
오늘 이삭의 생애를 통해 연약한 인간을 선택하셔서 친히 믿음을 붙들어 주시고 예수님을 보내실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살펴봅니다.
먼저 하나님은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말합니다.
약속의 땅에도 흉년이 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우리 삶에도 때때로 흉년이 옵니다.
물질이 떨어지고 인간 관계에 메마름이 오고 미래에 대한 소망도 믿음도 떨어지고 심령에도 은혜가 떨어지고 수시로 기근이 찾아오죠.
본문에서도 약속의 땅에 생계를 위협하는 큰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흉년은 곧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신실하게 돌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티카페를 만들어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에게도 신선한 공기를 숨쉬게 하시고 아름다운 자연을 눈으로 보고 기뻐하게 허락하신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악이 극도에 달하고 그 행위가 패역하면 자연을 통해 심판하심으로 죄를 그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 때 첫 흉년이 들고 이삭 때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가나안에 큰 흉년이 드는 빈도수가 잦아지는 것은 가나안 부족들의 부패와 타락이 점점 심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아브라함 때 소돔과 고모라의 악덕은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과 덕을 다 내다버리고 하늘에 달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레이디가가라는 미국 가수의 내한공연이 있었죠.
기독교와 보수단체에서 우려했던 대로 많은 젊은이들이 무분별하게 그의 해괴한 행동을 따라 엽기적인 복장을 입고 공연장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인육을 먹는 끔찍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자살을 부추기는 해괴하고 섬뜩한 행위를 서슴치 않습니다.
작년에는 목사안수를 받아 동성애자들의 결혼에 주례를 서겠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심판을 받은 극악한 죄가 공공연하게 문화라는 이름으로 요 옆 잠실에서 행해졌습니다.
그의 공연 동영상을 보면 철저한 인간성 파괴와 음란과 충격적인 사탄숭배로 구역질이 납니다.
야고보서5장9절은 경고합니다.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스스로 파괴하고 사탄의 문화를 따라 소돔으로 가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문화를 분별해서 받아들이고 오히려 선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이 두 차례의 기근에 회개치 않은 가나안 부족은 야곱세대에는 무려 7년간이나 흉년을 당합니다.
아마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굶주려 죽고 천하가 말라서 죽어갔을 것입니다.
얼마 전 아프리카봉사를 다녀온 탤런트 0은경씨의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곳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고 말합니다.
직접 가본 기아의 현장은 알고 있는 것의 백만분의 일도 안되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물만 흘리며 하나님만 찾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3일이 3년처럼 느껴지고 잠시도 있기가 힘들었다며 기근의 처참함에 눈물을 쏟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류의 마지막에 있을 처처의 기근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 모릅니다.
7년의 기근에도 가나안 부족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여호수아가 이끈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철저히 심판하시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넘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악한 가나안 민족 가운데 거하던 이삭도 자연히 극심한 흉년에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축복 받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죄가 행해지는 곳엔 가까이 해서 좋을 일이 없습니다.
결국 이삭은 가족과 종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기근이 없는 애굽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랄 지방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약속의 땅에 거주하라
아무리 먹을 게 떨어지고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멀게 느껴지더라도 우리를 부르신 곳에서 믿음으로 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방법 중에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이끄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문이 닫힌 것 같고 길이 막힌다고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때로는 믿음과 신뢰로 그 것을 돌파하고 나가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는 풍부한 나일강 유역을 중심으로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비해 가뭄의 위협이 적었던 애굽은 아브라함에게도 이삭에게도 흉년의 위기를 넘길 수 있는 피안의 땅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가나안에 기근이 생기면 아브라함도 북쪽으로 올라가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은 이미 각종 우상숭배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탈출해야 할 죄의 상징적인 땅입니다.
나중에 모세가 애굽에 종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출애굽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비록 흉년으로 인해 먹을 것이 없고 굶어죽을 위협이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뜻과 전혀 다른 이런 말씀을 들으면 참 난감하죠.
당장 식량이 궁한 데 먼 미래의 넓은 땅과 축복이 문제의 해결책이 되겠습니까?
이삭이 하나님의 음성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눈 앞에 있는 문제가 답답해 죽을 지경일 때 먼 훗날 천국의 소망도 큰 힘이 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좀 확실한 것을 보면서 믿고 싶고 즉각적인 응답도 좀 받고 싶은 게 우리 작은 바램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현실이 당장 달라지지 않는다면 언제까지 기도하며 기다려야 하는지 가마득한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욥도 이렇게 탄식한 것을 봅니다.
욥기21장15 전능자가 누구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그러나 고난을 인내한 뒤 하나님을 직접 본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기42장2절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하나님이 안계시고 하나님의 손이 짧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현실이 여전히 답답하고 매일이 똑같고 나아지는 게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앞을 보면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볼 때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신실하게 도와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의 문제와 앞날이 막연하다고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하고 낙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부르신 그 자리에 결핍이 있다 해도 믿음을 견고하게 갖고 주님의 축복과 인도를 기다리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6절을 보니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지경 내에 있는 그랄 땅에 거주합니다.
그는 풍부하게 넘실대는 애굽의 나일강과 평야를 포기하고 타들어 가는 가나안에 머물렀습니다.
참 잘했죠?
3절에 하나님은 이 땅에 있을 때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도 인생의 매 순간 선택을 통해 증명되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일들을 믿음 안에서 선택하고 행동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를 보게 될 줄 믿습니다.
이삭이 약속을 믿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먼 장래 뿐 아니라 코 앞의 인생도 축복해 주시는 걸 봅니다.
이삭은 가나안에 거류하였으나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12절에 그 땅에서 지은 농사로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므로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13절에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이 없어 물을 찾아 떠나려 했던 그에게 파는 곳 마다 우물이 터지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시험이 오고 낙심으로 믿음에 위기가 와도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인줄 믿습니다.
그리고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며 인내할 때 우리 삶에도 반드시 이삭에게 주신 풍성한 기쁨과 축복을 주신다는 걸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로 하나님은 이삭에게 거류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거류한다는 것은 나그네 처럼 머문다는 뜻입니다.
아직 가나안은 이삭에게 주어진 축복의 땅이 아닙니다.
4백년 후에 그의 후손들이 들어가 차지할 땅이고 영적으로 장차 받을 하늘에 있는 영원한 도성이라고 히브리서는 해석합니다.
이 땅에 우리를 괴롭히는 환란이 오고 좌절이 있고 시험이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 축복의 땅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예수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기까지 이 땅에서는 이방인과 나그네 같은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땅에서 땅을 사고 집을 사고 하지 말고 곧 짐을 싸서 이사 갈 사람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삭도 가나안의 도시에 들어가 집을 짓지 않고 들에서 장막을 치고 거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겐 상징적인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이 도성 밖에서 나그네처럼 살 것을 요구하셨습니까?
가나안 부족들의 성 안에는 부패하고 타락한 죄와 사탄의 문화와 생활양식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좋고 편리하다 해도 세속에 파묻혀 살다 보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결한 삶을 살기가 힘듭니다.
넉넉하고 풍요로워 보인 소돔 성을 선택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심판의 불이 타는 도성을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타락한 도시 밖에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도시 속에 몸담고 있지만 항상 깨어서 멸망당할 사탄의 문화를 분별하고 죄에서 구별 되는 삶을 선택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요한 사도는 계시록18장에서 자기가 들은 음성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악한 세상은 심판당하고 무너질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우리의 시민권은 저 천국에 있음을 항상 상기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고 죄와 구별 된 도성 밖의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이 땅에서도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구별되게 살아도 이 땅에서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지키며 죄와 타협하지 않고 사업을 하고 일을 해나갈 때 이삭에게 하신 것 처럼 오히려 백 배의 소득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성도들의 자녀들을 잘되게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을 통해 가족과 이웃이 함께 구원 받는 축복의 통로,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으시고 세상 속에서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세 번 째로 이삭의 삶을 살펴봅니다.
그는 믿음으로 순종했고 또 의심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약속의 자손으로 가나안에 거해야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을 약속받았지만 결혼한 지 20년이 되도록 그의 품에 자식 하나가 없을 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본문의 바로 앞장에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가 나오죠.
시간적으로 볼 때는 오늘 본문의 뒤로 보내야 맞습니다.
이삭의 뒤를 이을 약속의 자손이 야곱이 되는 과정을 먼저 기록한 것입니다.
현재 이삭에겐 아직 자식이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 수는 있겠지만 딸린 자식은 어떻게 합니까?
엄마를 고모라고 부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을 약속 받은 이삭의 가계치곤 너무나 초라합니다.
오히려 아무 약속도 받지 않은 이복 형 이스마엘은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사방으로 번성해 갑니다.
이방 땅에서 부족들의 보호도 없이 떠도는 데 자손의 축복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참 야속하신 하나님이시죠.
게다가 약속의 땅에는 흉년까지 들었을 때 그는 또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붙들어 주시려고 오셔서 언약을 상기시켜 주실 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랄 땅에서 아내로 인한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때 즉시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한다는 말을 결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우리도 매 순간 믿음과 의심 사이를 오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존 오트버그 목사의 ‘하나님, 당신을 의심해도 될까요?’ 란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가슴에 확 와 닿지 않습니까?
책 중에서 저자는 의심이 찾아오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공부를 한다 해도 인생과 죽음의 문제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믿음과 의심은 끝까지 우리 속에 공존하지만 결국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의심이 많은 사람들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이라 불리 우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의심한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한 믿음과 의심하는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갈대와 같이 흔들리며 의심하며 두려워 할 때 우리 심령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보혜사 성령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삭의 거짓 행각은 아비멜렉의 눈에 발각되었습니다.
이삭이 두려워했던 대로 리브가가 아내인 것이 들통 났고 아비멜렉을 속인 것 까지 밝혀졌으니 상황은 두 배로 나빠진 것입니다.
잠언29장25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올무에 걸린 이삭을 책망하시기보다 보호하시고 아비멜렉의 마음을 감동해 관대한 대우를 받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티끌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큰 소리도 치고 자신감을 보이고 대단한 일을 이룰 것 같다가도 두려운 감정 앞에 곧 꼬리를 내리고 은둔하고만 싶은 우리 본성을 창조주는 아십니다.하나님이 의심스러울 때 실패하고 낙심한 우리 모습 그대로 성령님을 의지해 아버지 앞에 나가시길 바랍니다.
솔직하게 우리 마음의 의심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에게 새 믿음을 주시고 이길 힘도 주시는 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삭의 문제가 해결 되고 축복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14절에서 그의 앞에 또 다른 역경이 찾아옵니다.
문제가 해결되어 기쁨이 있는 것도 잠시 이 땅에서는 이렇게 쉴새 없이 고난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아직 온전히 마음을 수습도 못했는 데 또 다른 시련을 맞을 때 참 힘이 빠지죠.
축복의 사람 이삭이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우물을 막아 농사도 목축도 방해를 하고 결국 16절에 이삭은 아비멜렉에 의해 강제 추방됩니다.
그동안 비옥하게 갈아놓은 소출이 풍성한 땅을 두고 나가야 했습니다.
양 떼를 먹일 우물도 잃어버리고 추방자 신세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육적인 축복을 뺏으려는 마귀는 공격을 멈추지 않습니다.
특히 영적생활에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마귀의 세력을 대적해야 합니다.
영적생활에서 싸움을 빼면 영적이지 않은 생활만 남게 된다고 워치만 니는말합니다.
때로 간신히 이루어 놓은 일들이 갑작스레 흔들리며 위기를 맞을 때 배후의 세력 마귀의 존재를 인식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깨어서 악한 마귀가 망쳐 놓은 상황들을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원수의 세력을 누르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에 이런 역경을 통해 믿음을 시험하시고 견고하게 연단하십니다.
모든 위대한 자를 내가 만들었다.
누구의 말인 줄 아십니까? 역경이 한 말입니다.
모든 실패한 자도 내가 만들었다. 누구의 말입니까?
역시 역경이 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역경을 통해 우리를 반드시 이기는 자들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편안하지 않은 환경과 사방에서 우겨 싸임을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훈련하듯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허락 된 시험은 결코 성도들을 넘어지게 만들지 않습니다.
본문 이후에 그랄 땅을 떠난 이삭은 본래 거하던 브엘세바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하나님께 인생의 첫 번째 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고난의 길을 걷는 동안 그는 비로서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닌 이삭 자신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세하게 알고계시듯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이 귀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기서 자기의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돌아온 이삭을 축복하시고 많은 우물을 찾게 하십니다.
광야의 우물은 생명줄입니다.
깊은 곳에 감춰진 물의 근원을 발견하는 눈을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경을 당하는 우리에게 마른 광야 속에 생수를 터치시고 반드시 우리의 삶과 심령을 소성시키시는 줄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배들의 인생을 통해 우리 삶에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삭의 삶에 닥친 기근 처럼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고갈되고 있습니까?
물질도, 기쁨도, 소망도, 믿음까지도 바닥나고 있다고 있다면 두려워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애굽으로 다시 내려가지 말고 약속의 땅에 머물라.
믿음을 잃지 않고 굳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약속한 모든 것을 마침내 너에게 줄 것이다.
지치고 낙심한 우리에게 주님은 시시때때로 생수의 우물을 터쳐 주시고 믿음으로 나가는 우리에게 결국 생업에 백배의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우리의 자녀들을 향해서도 네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신다는 축복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줄 확신하며 힘차게 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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