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참 다양한 인간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사기 친 게 들통 나 야반도주한 사람의 이야기죠.
그것도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이란 사람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벌어지는 삶의 애환들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언뜻 우리의 모습을 보기도 하죠.
그래서 때로는 성경이 마치 KBS인간극장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평범하고 망가진 인생을 찾아오셔서 영원한 나라의 상속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지요.
오늘 본문을 통해 야곱의 고난 인생을 살펴보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음성을 들려주시고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키워드를 갖고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돌베개, 사닥다리, 돌기둥입니다.
이 단어에서 그 의미와 연관성을 눈치채셨다면 오늘 설교는 다 들으신 것입니다.
첫 째는 야곱의 돌베개입니다.
저는 나이가 들수록 잠잘 때 베개가 편치 않으면 잠이 잘 안 옵니다.
자고 나면 어깨 근육이 뭉치고 담이 결리고 그래서 꼭 전용베개를 베고 잡니다.
어린아이들은 아무렇게다 구그려 붙이고도 참 잘 자죠.
야곱의 나이를 창세기의 여러 구절을 근거로 계산해 보면 이미 칠십이 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풋풋한 청년이 아닙니다.
형 에서는 40살에 결혼을 시작해 이미 세 명의 아내가 있었고 야곱은 아직 미혼입니다.
노총각 치곤 좀 많이 먹었죠.
당시에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좀 더 살았던 것을 감안할 때 아직 결혼 적령기입니다.
옛날 아버지들 보면 가끔 목침이라는 딱딱한 베개들을 베셨습니다.
그것도 불편한 데 젊지 않은 나이에 돌베개를 베었으니 그 잠이 얼마나 밤새 고생스러웠겠습니까?
야곱이 베었던 돌베개는 죄로 인해 고난과 한숨으로 가득 찬 인생 자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쩌다 밤이슬을 맞으며 차갑고 딱딱한 돌을 베고 누워 잠을 청하는 신세가 되었는지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 이삭이 죽음을 앞두고 장남인 에서에게 축복을 물려주려는 것을 알게 된 야곱과 어머니 리브가는 속임수를 써서 축복을 가로챕니다.
늙은 아버지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해 형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머리를 들이밀고 축복기도를 대신 받아 낸 것이죠.
당시 축복기도는 요즘 유언장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좀 있는 집에선 이 유언장 문제로 형제 간 분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삭의 축복기도 내용을 보면 당시에도 옛날 우리나라처럼 맏아들에게 거의 모든 재산이 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을 통해 이어지는 축복의 족보를 잇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잘 모르고 그 축복을 탐냈지만 알고 보니 예수님의 족보 저 꼭대기에 들어가게 된 놀라운 복이었던 것이죠.
축복기도를 동생이 가로챈 것을 알게 된 에서가 분개하여 죽이려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겨 팥죽 한 그릇에 이미 장자권을 동생에게 팔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막상 재산 상속의 문제와 축복이 걸리니 생각이 달라진 것이죠.
복을 차지하려고 아버지를 속이는 야곱이나 그렇다고 아우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에서나 참 비인격적으로 보입니다.
이게 구약시대 도덕심이 부족하고 법의 제약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고 죄에 끌려 다니는 인간의 비극이 인간의 유일한 은신처인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죄의 모습이 인간 속에 여전히 흐르는 것이죠.
영화 에덴의 동쪽이 바로 형제간의 갈등을 그린 영화 아닙니까?
가인이 살던 곳이 창세기에 보면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했다고 되어있거든요.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하죠.
조조는 둘째 아들에게 왕 위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결국 형이 왕 위를 잇게 됩니다.
자기 자리를 넘본 동생을 죽이려고 형은 일곱 발자국을 다 딛기 전에 시를 짓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합니다.
사색이 된 동생은 형이 일곱 걸음을 걷기 전에 이 시를 지어 죽음을 모면했다고 하죠.
콩 깍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콩이 솥 안에서 눈물을 흘리네
본래가 한 뿌리에서 낳거늘 어찌 이리 심하게 들볶는가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형제라도 죽일 수 있는 인간의 죄성이 참 무섭습니다.
유명한 아디다스와 퓨마도 형제의 싸움으로 갈라진 브랜드입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형이 나치친위대로 활동했다고 동생이 형을 밀고하는 바람에 함께 경영하던 운동화 회사가 둘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살인의 동기는 죄의 깊은 뿌리가 원인이고 미움에서 시작됩니다.
자기가 온전히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죠.
에서의 불같은 분노는 야곱에 대해서지만 동생을 도와서 자기 축복을 뺏어가게 한 어머니 리브가에 대한 원망도 원인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가축고기보다 야생동물 요리를 별미로 즐겼던 아버지는 그래서 사냥군 아들 에서를 사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조용한 성격으로 장막 안 자기 곁에 붙어있는 야곱을 사랑했다고 기록합니다.
부모들조차도 자기에게 기쁨을 주고 맘에 드는 자식만 끼고 도는 것이 가장위대해야 할 부모의 사랑에 까지 들어온 죄의 모습입니다.
형만 사랑하는 아버지의 편애로 야곱이 병들었듯이 동생만 사랑하는 어머니의 편애로 에서도 실은 병든 사람인 것이죠.
이런 편애가 얼마나 어린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는 지는 차별을 느끼며 자란 사람들은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얘기하다보면 다들 자기가 편애 속에서 자라 애정결핍이라고 하더군요.
심리학적 연구에서 결핍이 애착과 욕망을 낳는다고 하죠.
유아기 때 9개월까지 극단적인 애정결핍을 경험한 사람이 정신병에 걸릴 확률이 높고 두 살까지 빈곤한 사랑을 받은 아기들은 성격장애자가 되기 쉽다고 합니다.
알콜중독도 어릴 때 애정결핍에서 발생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인간 속에 들어 온 죄는 모두의 인격을 병들게 하고 삶의 둥지인 가정마저고통의 장소가 되게 한 것입니다.
때로 가족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고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에 가둡니다.
우리가 불행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문제의 많은 부분이 가족에게서 오는 게 서글픈 현실이죠.
최근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의 대부분이 심각하게 파괴 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하지 않습니까?
가정에서 우리는 사랑받고 인정받고 세상을 향해 살아 갈 힘을 얻고 쉼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와 이기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온전한 가정을 꾸려나갈 능력이 없습니다.
가정과 가족사랑의 진정한 회복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목숨을 주기 까지 사랑하셨다는 십자가의 사랑의 실체를 깨달을 때 애정결핍 속에 성장한 우리 자신이 먼저 치유를 받는 것이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만족하게 누릴 때 비로서 가족과의 미움과 갈등을 풀어 낼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 가족을 힘들게 하는 나의 잘못 된 성품을 고쳐가며 우리의 가정들이 아름답게 세워지는 줄 믿습니다.
청년들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은 절대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본능인 이기적인 죄성을 처리하고 서로를 위해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짜 아는 사람만이 나를 진정한 사랑으로 사랑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식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믿음이 만사 형통입니다.
우리의 성도님들의 가정이 믿음 안에서 회복되고 기쁨과 축복이 넘치기를 제가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형의 살해 위협을 느낀 야곱은 옷가지 하나 변변히 챙기지 못하고 도망 나온 신세가 되었습니다.
왠만한 길손이라면 괴나리 봇짐 정도는 둘러메고 다닙니다.
한 데 잠을 잘 때도 봇짐을 베고 자는 게 보통인 데 야곱은 그것도 없어 돌을 베개 삼았던 것이죠.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가 8백킬로 정도입니다.
부자집 아들의 여행에 나귀와 생필품이라도 챙겼을 만한데 사기행각을 벌인 야곱의 죄를 물어 빈 몸으로 집을 쫒겨 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32장에서 야곱은 내가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요단을 건너왔었다고 회고하죠.
야곱의 힘든 삶의 원인은 역기능 가정문제에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기질적인 약점과 죄가 결국 그의 인생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죠.
야곱은 이 땅에서 복을 얻으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지금 가졌던 것 마저 모두 잃어버리고 노숙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닌 줄 믿습니다.
돈을 아무리 쫒아 간다고 어디 손에 잡혀 주던가요?
아무리 아등바등 애쓴다고 윤택한 복이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무엘상 2장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 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우리가 성실하게 일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인생을 착실히 경영하면 적당한 부를 왜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가난하게 될까 봐 걱정하지 마시길 축원드립니다.
다만 우리가 야곱과 같은 물질의 축복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야곱은 이미 어머니 리브가의 예언을 통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축복의 때를 기다렸다면 돌베개를 베고 누운 이 밤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회상대로 눈 한번 편히 붙이지 못했던 삼촌 집에서의 20년 고생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자기의 꾀를 믿었던 야곱을 다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긴 연단의 시간을 허락하신 것이죠.
잠언 23장 4절은 야곱과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우리의 많은 고통들이 야곱과 같은 욕심과 우리 성격과 기질을 다스리지 못해서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만 우리 삶이 정상적으로 작동됩니다.
하나님을 모를 때는 자연적인 우리 성품대로 죄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아버지는 자녀인 우리에게는 죄의 본성을 따르지 말고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지었을 때 나단 선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우리가 영적인 경각심이 없이 죄가 분명한 일을 끊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반드시 마귀의 훼방거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이 자기 꾀를 믿고 술수를 부리는 죄를 다스리지 못했기에 그의 인생이 복잡하게 꼬인 것을 우리가 그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악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해 스스로를 고쳐 나갈 때 마귀의 훼방도, 그리고 야곱과 같은 혹독한 시련도 피해갈 줄 믿습니다.
잠언 13장 13은 말씀합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자는 상을 얻느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상을 얻는 행복한 삶을 위해 가정을 믿음 위에 세우고 우리의 행실을 말씀대로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아멘.
둘 째는 야곱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다리입니다.
딱딱한 돌베개 위에 머리를 뉘인 야곱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돌을 적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다보면 고통 가운데 있는 자식의 눈물이 얼마나 우리 마음을 후벼 파는 줄 알게 됩니다.
사실 부모들 눈엔 뭐를 해도 자식이 안쓰러워 보이죠.
피곤한 자식들 얼굴을 보면 어느새 어깨를 토닥이며 사느라고 참 애쓴다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니 자식이 돌아누워 눈물 흘리는 것만큼 부모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야곱이 돌을 베개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누워 소리 없이 흐느낄 때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이 그를 조용히 보고만 있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일으키시기 위해 하늘의 휘장을 걷으시고 모습을 보이십니다.
야곱의 일생에서 위기마다 나타나서 길을 지시하고 약속을 상기시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창세기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커튼 뒤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절박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오셔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잠든 야곱의 꿈에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사다리가 보이고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서서 계셨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절망 속에 낙담해 우리가 누워있을 때 주님은 앉아 계시지 못하고 서서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말없이 탄식하는 성도님이 계시다면 우리가 가장 힘들 때 서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고 용기를 내시길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의 사다리는 죄인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열려진 길을 말합니다.
뜬금없이 나타난 이 사다리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요한복음1장51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야곱의 환상을 그대로 말씀하지죠?
사다리란 말을 빼고 그 자리에 예수님 자신을 가르치는 인자란 단어를 집어 넣으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기 원하시지만 죄인에게는 반드시 속죄할 중보자가 계셔야만 하나님께 나갈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아버지께 올라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 이 사다리가 상징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도움을 들고 천사가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왕래하는 것도예수님을 통해서 인 줄 믿습니다.
히브리서1장14은 천사의 존재를 설명합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사들이 금대접에 담긴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아름다운 모습이 나옵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얼마나 귀하면 금대접에 담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까?
얼마나 기도를 안 하면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이 세상엔 마귀의 세력만 득실거리는 게 아닙니다.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성도를 보호하기 위한 천사도 무장시켜 놓으셨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천사들이 날마다 하나님 앞을 왕래하며 우리를 보호할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온누리교회 이재0훈 목사님은 천사의 도움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한번은 강남대로를 급하게 달리고 있는데 옆 차선의 차가 순식간에 앞으로 끼어든 것입니다.
급제동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속도와 차간 거리를 보면 분명히 부딪혔어야 했는데 신비스러운 힘이 목사님을 꽉 붙잡고 순간 차가 공중으로 살짝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적같이 사고를 피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은 겪은 사람만 하는 것이죠.
사람이 손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천사가 이렇게 우리를 돕기도 합니다.
13절에서 사다리 위에 서 계신 하나님은 야곱을 향해 나는 여호와니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야곱 앞에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십니다.
난생 처음 하나님을 대면하는 야곱에게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소개하시며 친밀하게 다가오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그토록 사모했던 축복을 약속해 주십니다.
네가 누워있는 땅을 너에게 주고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
이 예언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지금 세계 여러나라가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해 복을 받고 있나요?
오히려 중동의 화약고가 되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죠.
이 축복의 말씀도 역시 야곱의 먼 후손으로 태어나실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족속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인 것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 예언이 성취되어 야곱의 후손으로 예수님께서 오셨고 땅의 모든 족속과 함께 우리들이 영원한 복을 받게 된 줄 믿습니다.
고아처럼 방황하는 영혼이 영의 아버지를 찾아 축복받을 유일한 길은 유일한 중보자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늘과 땅을 받치고 우뚝 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만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길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 축복의 자녀가 다 되신 줄 믿습니다.
셋째는 돌베개로 기둥을 세운 야곱입니다.
야곱은 잠이 깨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고 두려워합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이삭의 하나님과는 영원히 멀어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이제 아버지의 집에서 쫒겨 났으니 영원히 하나님 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시편33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도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 계시고 우리의 모든 상황 속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시니 그가 고통 속에서 누웠던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지금 예배하는 이 곳도 하나님을 향해 열려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주실 때 이 자연세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재림의 때에는 이 자연세계가 본래의 무의 상태로 돌아가고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완벽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두 세계를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바울사도도 에베소성도들에게 편지할 때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성도의 소망과 영광의 풍성함과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하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비추시면 말씀이 깨달아지고 영적인 세계가 점점 현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있다고 말하며 내 믿음을 다른 사람 앞에서 시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선수들의 영광의 순간 그들이 어떻게 수많은 군중 앞에서 기도할 용기를 내겠습니까?
가수 박정0씨가 목사님 딸이라죠.
무릎팍 도사에 출현해서 찬송가305장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는 자신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 쟈니 카슨 쇼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가 우승했을 때 허샤이저라는 선수가 초대손님으로 나왔습니다.
노래를 하나 불러달라는 사회자의 요청에 그가 일어나서 부른 노래가 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 예배 시작할 때 피아노가 반주하는 것처럼 미국에서도 예배 시작 때 다 함께 일어나서 부르는 찬송입니다.
그가 다소 외설스럽기도 한 이 쇼에서 갑자기 찬송가를 부르자 얼떨결에 청중들이 다 일어섰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실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믿음을 이렇게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 주일에는 안 돼, 교회 가야 해’
이렇게 말하는 게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을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축복하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밝혀주신다는 증거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의 삶과 하나님을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막연하게나마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나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성령께서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야곱은 이미 하나님의 축복이 뭔가 실제적이고 진짜라는 것을 감지했던 사람입니다.
그 축복이 실제로 자기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믿었기에 형이 허기져 들어 올 시간에 맞춰 팥죽을 쑤고 장자의 축복을 사려고 했던 것이죠.
오늘 그가 차가운 돌베개를 베게 된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 장자에게 임하는 것을 정말 믿었기에 사고 친 결과 아닙니까?
그걸 믿지 못한다면 뭐 하러 그런 터무니없는 계략을 꾸며 화를 자초했겠습니까?
영적인 세계가 실체로 느껴지게 되면 그 나라를 위해 무언가 우리의 몸이 점점 그것을 따라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경건생활도 하고 자기의 죄를 끊으려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면 그래서 남들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어떤 다른 세계나 다른 인격이라는 것을 희미하게 보게 되는 것이죠.
꿈에서 엉겁결에 실존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 야곱은 깨어나자 하나님을 만난 성경 속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것은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은혜로우시나 만 가지 죄로 가득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될 때 죄가 드러나며 스스로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거나 찬양이나 기도 중에 성령님의 역사가 임하면 죄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며 회개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죄로 인한 부담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면 너무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광채 속에 영원히 그 안에 거하고 싶은 경외감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본질적인 마음입니다.
18절에 보니 야곱이 일어나서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념하여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시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보따리 하나 제대로 싸지 못하고 뛰쳐나온 야곱에게 한 병 기름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앞으로 남은 7백킬로를 갈 때 상처라도 나면 그에게 유일한 약품이고 굶주렸을 때 식량하고 바꿀 수 있는 비상 물품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이 점점 성숙해지고 하나님을 알아 가면 보잘 것 없는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송구하고 감사해 늘 예배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러나 야곱과 같은 단순한 믿음만 있어도 예배가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배를 통해서 축복이 부어지는 줄 깨닫게 됩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복 받으실 줄 알고 모두 예배의 자리로 나오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야곱의 돌베개는 죄악으로 고생하는 우리 모두의 인생을 말해줍니다.
인터넷에 올라 온 근로자의 점심이란 사진을 보았습니다.
공사장에서 청년이 먹고 있는 점심밥을 우연히 보았다는 네티즌이 찍어 올린 사진에는 접시에 담긴 맨 밥과 삶은 계란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 청년 또한 돌베개 같은 삶을 살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짠했습니다.
간 밤에 혹시 차가운 돌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까?
그러나 돌베개 같은 거친 우리의 인생에 언제나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돌베개를 베었던 그 곳은 곧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축복의 사다리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눈물의 밤에 하나님을 만났던 야곱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고 말씀합니다.
죽음의 두려움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 속에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던 야곱은 그 밤 하나님을 만난 뒤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펼쳐진 인생을 향해 두려움 없이 나갑니다.
그에겐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 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축복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는 영광을 누린 야곱은 다시 일어나 7백킬로를 더 걸어서 지친 몸으로 외삼촌의 집을 향합니다.
그러나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 받은 그의 앞엔 20년 타향살이에 가축을 치는 더럽고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한편으로 이렇게 뜨겁게 받으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와 질병을 여전히 끼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삶이고 인생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아돌프 알렉산더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무거운 짐이 나를 지고 간다.
우리를 짓누르고 괴롭게 하는 그 짐이 알고 보면 우리가 늘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도록 우리를 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이런 매일의 삶 속에 소소한 기쁨과 작은 기적을 베풀어 주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감당할 시험만을 허락하시고 나머지 어려움은 다 막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시험당할 즈음엔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한번 정리하면 죄인들의 돌베개 같은 삶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중보의 사다리가 되시고 비로서 우리 삶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영광스런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함께 하시며 살피시는 하나님께 매일을 예배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험악한 세상 속에도 안전히 지켜주시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 감사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우리 성도님들도 매일 소망 속에 일어나 기쁨으로 인생길을 걸어가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2.9.28. 주는나의산성교회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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