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2성탄절 설교-여호와이레와 임마누엘 (창세기22장1절-14절)

남수연 2013. 1. 23. 17:00

  

성탄절의 아침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어제 늦게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 모두의 믿음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셨기에 어제 우리 마음에도 큰 기쁨이 있었던 것인 줄 믿습니다.

우리 청년부는 교회에서 자느라 많이 불편하셨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탄 전야 행사로 밤을 꼬박 지새고 새벽에는 또 새벽송을 돌았습니다.

교회로 돌아와 떡국을 먹고 성탄절 감사예배를 드릴 때면 거의 다 수면상태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참 즐거웠던 추억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오늘 설교는 짧게 준비했지만 큰 성탄의 축복과 은혜를 부어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번 성탄절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고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부하나님과 가장 완벽한 사랑과 기쁨을 누리던 성자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는 아버지의 마음, 그것도 인류의 속죄의 제물로 보내신 성부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예수님이 탄생하신 밤에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나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찬송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늘을 가득채운 하나님의 영광은 다름 아닌 가장 귀한 아들을 땅에 보내시는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만물의 지배자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가장 소중한 아들을 내어주실 때 고귀하고 거룩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성부하나님의 사랑은 자식을 사랑하는 우리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 안에 심어주신 자녀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의 본성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우리를 또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어제 밤 우리 자녀들이 열심히 찬양하고 준비한 것들을 발표할 때 우리 부모님들 어떠셨나요?

오사장님 보니 우리 다혜자매 찬양하는 데 눈을 떼지 못하시는 걸 보았습니다.

청년들이 6명이나 나왔는 데 다들 자기 자식 얼굴만 바라보고들 계시더군요.

참 부모들 자식을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모하는 마음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사랑하는 외동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것을 수행했던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삭은 죽지 않고 결과는 해피엔딩으로 끝이났지만요.

우리는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여서 바쳐야하는 마음이 어떤지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통해 독생자를 오늘 이 땅에 희생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느껴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아버지의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을 묵상할 때 도대체 왜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 왜 그런 큰 자비를 베푸셨나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은 나 자신이 얼마나 큰 아버지의 기대를 받는 자식인지를 깨닫고 어깨 피고 담대하게 살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먼저 이삭을 바치게 된 아브라함의 마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게 된 참혹한 곤경에 빠진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끔찍하고 혹독한 시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그는 생명에 대한 집착이 컸던 사람입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 속이면서 위기를 넘긴 좀 치졸한 모습이 창세기에 두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쳐야 할 엄청난 시험 앞에 아들의 목숨을 대신할 대안은 없었습니다.

차라리 이삭을 위해 자신을 번제로 바치라면 순종이 더 쉬웠을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 백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란 게 바로 이삭을 두고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그렇게 귀하게 얻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때로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상하다고 생각할 일이 아닌 것은 그 속에 우리 짧은 식견으로 이해할 수 없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끄셔서 우리를 당혹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을 머잖은 미래에 혹은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려서야 이삭을 주셨던 하나님의 방식을 학습했기에 오늘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시지? 하는 생각이 들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순종하면 반드시 우리 예상을 뛰어넘는 복 된 결말을 주실 줄 믿습니다.

믿음이야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얼마나 눈 앞이 캄캄해졌겠습니까?

우리가 아끼는 것을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어땠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 곁에서 어린아이를 놓쳐버려 식은 땀이 났던 순간, 피땀이 묻은 돈을 허망하게 날려버린 순간, 자신했던 건강이 이젠 내 것이 아니라는 선고를 받은 순간.

어느 것 하나 끔찍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7절에 나타난 부자간의 대화를 보면 그 애정의 친밀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아들이 부르면 언제든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는 아브라함이 느껴집니다.

저도 아이를 키울 때 잠이 깊이 들었는 데도 옆에 방에서 딸이 아주 작은 소리로라도 부르면 언제 자고있었냐는 듯이 정신이 버쩍 나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다 팔아 이삭을 살릴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바칠 장소로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을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의 의도가 서서히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까지는 90K정도의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정도 될 거리이고 걸어서 사흘길 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굳이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산이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 산이 몇 번 등장하는 데 그 중 하나는 다윗 왕 때입니다.

사무엘하 2418절부터 25절 까지 기록 된 내용으로

다윗왕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인구조사를 시켜 그 일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온역으로 이스라엘을 7만명을 죽이시는 사건입니다.

그 심판의 천사가 드디어 여부스 사람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까지 와서 섰는 데 하나님이 갑자기 진노를 돌이키고 칼을 거두십니다.

왜 그러셨을 것 같습니까?

그 장소가 하나님께 의미심장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 곳은 바로 오늘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지시받은 모리아산과 같은 곳입니다.

다윗시대의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이 곧 아브라함 시대에 모리아산이 었습니다.

이 곳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곳입니까?

여기가 바로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곳입니다.

역대하 31절의 기록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그리고 그 곳은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갈보리 언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장차 주님이 달려 죽으실 그 장소에 오시면 언제나 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리아산에서 죽어야 할 이삭에 대한 심판이 그친 것도, 다윗의 실책으로 백성이 받던 심판이 멈춘 것도 다 갈보리 언덕의 주님 때문인 줄 믿습니다.

지나친 비약이 아닙니다.

이삭을 오늘 번제로 바치라는 데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뜻도 있지만 또 다른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언약을 맺고 그를 축복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본질상 이삭 역시 진노의 대상이고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약속을 받고 태어난 이삭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본래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할 자들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뒤에는 이삭의 씨로 태어날 모든 자들이 다 심판의 대상임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줄 압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은 대로 이삭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 대신 죽임을 당한 번제물이 따로 있었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여호와 이레로 예비 되어 이삭 대신 번제로 바쳐진 그 양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은 인류의 구속자가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14절에 이삭 대신 준비 된 숫양을 보고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 불렀는 데 그것은 준비되어 있다 봐두셨다 라는 뜻으로 제물을 하나님께서 지정해 두셨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속죄할 제물이 준비되어있다는 메시야 신앙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26절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가 막힌 수렁에서 아들과 함께 구원을 받고 돌아옵니다.

바로 그 여호와이레의 양이 오늘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여야만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어쩌면 오늘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스스로 심판해야 하는 아버지의 그 비통한 마음을 친구 아브라함에게 말하고 싶으셨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마음엔 아담의 범죄 이후 줄곧 인류의 구속을 위한 십자가가가 있었습니다.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할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마음. 아들의 대속을 수없이 예언할 때 마다 그리고 이 성탄절 동정녀의 몸을 예비하고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오늘 본문에서 양 손에 불과 칼을 들고 번제로 바칠 이삭에게 나뭇단을 지우고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모리아산을 올라갈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자식을 죽여야만 하는 아비의 마음 이제 알 수 있겠니?

그러나 너는 네 아들을 죽일 필요가 없다. 내가 대신 내 아들을 제물로 쓰겠다. 너는 아들을 죽여야 하는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면 족하다

하나님은 수천년 후에 그 분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오늘 이삭이 올라갔던 그 모리아산 갈보리 언덕을 오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은 우리에겐 죽음에서의 구원이고 흑암에서 빛으로 나온 기사회생입니다.

그러나 한번쯤 그 아들을 보내시고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감정 없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는 지금도 그 십자가를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시기에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꼼짝을 못하십니다.

얼마 전 한 선교사님이 필리핀 선교지에서 있었던 사역을 간증하는 데 정말 대단한 분이시더군요.

여자 혼자 몸으로 돈 한푼 없이 50억이 넘는 선교센터를 세우고 큰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딸이 학교에서 남학생들에게 집단으로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죽을 힘을 다해 주님의 일을 하는 데 내 자식은 책임지셔야지 뭐하시는 거냐고, 선교고 뭐고 다 집어치우겠다고 하나님께 소리소리 지르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 게 꽤 오래 전 이야기인데 그 말을 하며 그 눈에 주루룩 눈물이 흐르는 걸 보았습니다.

자식의 아픔은 과거의 것이라도 부모에겐 언제나 현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아끼는 내 아들을 주면서 까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증하신 것이 바로 성탄절에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삶에 아브라함 같은 시험이 오고 고난이 오는 것은 그걸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더 체험하고 깨닫길 원하시는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고난이 힘들면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 주님은 어떻게 그걸 견디셨나 그 깊은 사랑을 생각하게 되고 내 고난 정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죠.

지난 주에 상담했던 집사님이 결론을 그렇게 지으시더라구요.

너무 힘들고 너무 막막한 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생각하면 어쩐지 지금의 고난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 용기가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용기를 내고 스스로 추스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제고 은혜를 주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들의 십자가의 고난을 인정하고 십자가의 의를 붙들고 나오는 데 어떻게 그 소원을 이루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축복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번 성탄절은 어느 해보다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서로 사랑으로 연합되어 참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성탄의 진정한 축복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와 선물이 예수님 안에 숨겨져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여 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생각 할 때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소원하는 모든 것과 형통한 인생으로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