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순절 절기를 보내며 성찬 예배를 드립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내 죄 때문이라는 믿음이 정립되지 않으면 성찬식이 내게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 올린 질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는 데, 왜 나를 죄인이라고 하는거죠?
나는 아담이란 사람을 본 적도 없는 데 왜 그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내가죄인이 되야 하나요?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죄를 짓게 하셨나요?
이런 의문을 누구나 가져보셨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 넘으셨습니까?
오늘 짧은 시간이지만 이 문제들의 해답을 창세기를 통해 살펴보려 합니다.
인간의 죄의 기원에 대해 알아야만 십자가의 구속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창세기의 천지창조와 죄의 기원이 자칫 신화나 우화처럼 느껴지기가 쉽습니다.
흙으로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꺼내 하와를 만들었다?
신화에나 나옴직한 이야기죠.
말하는 뱀이 등장해 하와를 유인해 선악과를 따먹게 만들었다?
동화에나 나올만한 유치하게 지어낸 이야기 같습니다.
우리에게 창세기나 구약성경을 대할 때 잘못 된 선입견이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원시적이고 우매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자들이 무식해서 비과학적인 황당한 이야기를 지어낼 사람들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모세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모세는 당시 고대 이집트문명에서 40년간 왕자로 교육받았던 사람입니다.
뱀이 말을 못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게 기록했겠습니까?
성경기록자들은 특별히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고 하나님의 엄위하고 두려우신 현현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상상력을 가미해서 성경을 기록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이 말미에 이렇게 못을 박지 않습니까?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이것이 성경기록자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심과 진정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구약 성경이 모두 일관되게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지지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구속사가 전개됩니다.
창세기를 부정하면 모든 성경에 다 오류가 있다고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창세기의 내용을 기정사실로 인정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것은 창조기사가 사실이라는 확증인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역사를 잘 알고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믿음의 기초가 부실해 언제고 흔들리게 됩니다.
다만 죄의 기원 같은 초자연적인 영적지식은 우리 머리로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검증할 수 없는 성경말씀은 믿어야 하고 믿어져야 합니다.
이 창조의 기원이나 죄의 시작과 같은 엄청난 주제를 단 석 장에 기록하고 끝났다는 것은 어차피 이해될 내용이 아니라 믿어야 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난주도 사는 게 다들 피곤하고 어려운 형편과 씨름하다 오셨을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에 대한 말씀보다는 위로의 말씀을 원하실 수도 있습니다.
힘든 현실을 해결할 방법을 말씀 속에서 발견하길 원하실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먹고사는 문제, 급하지만 어쨌든 태어난 이상 먹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짧은 이 삶을 마친 다음 영원히 살게 될 진정한 나의 영생에 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평생을 교회 잘 다니고 봉사도 했지만 죽음을 앞두고 천국의 확신이 없고 영생에 대해 모르겠다면 어떻하겠습니까?
일주일 내내 세상 속에서 땅의 일만 보고 듣고 살았으니 주일에는 우리 영혼을 복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믿음을 공고히 해야 할 줄 믿습니다.
또 우리가 고민하는 세상 문제들도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땅의 문제는 절대 땅의 것으로 풀리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우리 능력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골치 아픈 땅의 문제는 하늘의 것으로 풀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에 문제가 생겼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랑으론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랑으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헤어날 수 없는 환경과 꽉 닫힌 미래의 문 앞에 서있습니까?
이 땅의 것과 내 능력으로 된다면 벌써 되었지요.
이젠 하나님께로 부터 공급되는 지혜와 하나님의 간섭으로만 돌파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문제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특히 내가 어떻게 해서 생겼고 어쩌다 죄인이 되었고 하나님은 내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이 창세기를 통해서 깨닫게 되면 우리 시야가 엄청나게 넓어집니다.
땅만 보이던 눈이 열리고 창조부터 나의 현재, 그리고 내세까지 파노라마사진처럼 시야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내 모든 인생사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확실히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확신할 때 역경도 극복할 강력한 힘이 생깁니다.
오늘 그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 만나시길 축원드립니다.
이미 이런 견고한 믿음이 있는 성도님들은 창조와 죄에 대해 오늘 논리적으로 잘 정리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기초가 더 튼튼해지고 우리 삶이 더 풍성해 질 줄 믿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도대체 왜 죄인인지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라는 것을 사회에서 인식하는 범죄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크게 범죄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인식이 별로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과히 나쁜 축에 끼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니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성경의 주장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성경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죄는 그게 아닙니다.
그런 도덕적 윤리적인 죄는 본질적인 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고 본질적인 죄는 따로 있습니다.
그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내가 왜 죄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 지가 나오죠.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닷새 동안 완벽하게 창조하시고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점입니다.
한갓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넣어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특별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숭이에게서 진화 된 좀 더 나은 고등동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능과 지혜를 쏟아 부어 만드신 아름다운 지구에 에덴동산을 가꾸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분신과도 같은 사랑하는 존재인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그곳에 살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할 권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빼다 박은 인간에게 양도하십니다.
네가 한번 마음껏 잘 해봐라.
마치 기업을 일군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업을 맡기며 능력을 발휘해서 잘 해나갈 것을 기대하는 그런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빠지는 게 하나도 없이 완전하고 충만하고 선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함께 친밀하게 교제하셨고 아담은 모든 것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금지 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습니다.
17절에 있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일부러 그 곳에 놓아두고 먹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아담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뜻은 무엇입니까?
노골적으로 테스트를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순종할 것인지 거역할 것인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로 부터 모든 좋은 것을 물려받은 아들이 아버지의 존재를 공경할 것인지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할 것인지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부친목사님 밑에서 부목사로 함께 교회를 섬길 때 사사건건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그 목사님이 계속 바꾸자고 주장했던 것이 오래 되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강대상이었습니다.
옥신각신하다 항상 아버지의 한마디면 언쟁은 끝이 났다고 합니다.
‘내가 담임이야’
그러다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교회를 물려받아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강대상을 바꾼 것입니다.
아버지가 강대상에 대해 뭐라 말하려는 순간 아들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담임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너무나 통쾌했는 데 아버지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더랍니다.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생각하니 그 때 뭐가 그렇게 급해서 아버지 를 거역하고 강대상을 바꿨나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죠.
재산 때문에 부모도 죽이는 자식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까지도 거역할 수 있는 강력한 자유의지라는 권력을 인간이 어떻게 휘두르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아담이 거쳐야 할 관문은, 하나님의 속성을 부여 받았지만 어떻게 사랑의 책무를 위해 자유의지를 조절하냐는 것었습니다.
좀 어렵습니까?
쉽게 말하면 인간의 잘난 척에는 하나님의 잘나신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성을 하나님처럼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하기 위해 선하게 조절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게 천국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며 영원히 행복한 가족으로 살 수 있을지를 아담이 증명해 보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표로 보여주신 것이 에녹의 경우입니다.
에녹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죽음을 보지 않고 바로 데려가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을 위해 계획되었던 시나리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인책에 걸려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자리를 동경하는 본심이 드러난 것입니다.
뱀의 유혹에 대해서는 오늘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뱀의 배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데로 사탄이 있었습니다.
사탄의 유인책에 걸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속마음이 드러났고 자유의지로 반역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인간의 죄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죄의 실체입니다.
‘내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
‘아무도 나를 다스리고 명령할 수 없다.’
이게 실낙원에 나온 사탄의 말과 같지 않습니까?
‘천국에서 섬기느니 차라리 지옥에서 다스리겠다.’
얼토당토 않은 얘기지만요.
지옥은 거룩한 천사가 지키고 있다고 요한 계시록에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사탄은 영원히 심판받고 멸망당할 존재입니다.
이렇게 아담의 반역으로 시작 된 창조주 하나님을 벗어나 자존하려는 교만을 바로 본질적인 인간의 죄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범죄할 줄 알면서도 자유의지를 주셨냐, 죄를 조장하신 것이 하나님이 아니냐고 물을 수가 있겠죠.
사실 이런 건 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주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자유의지를 주지 않고 선택의 권리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갖겠다는 뜻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지 않으셨다면 지금 우리는 오직 복종 DNA만 갖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그게 좋으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자유가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인간을 인간답게 합니까?
그래도 하나님께 순종만 하도록 창조되었으면 좋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순종하고 사랑하는 가치를 거기에 비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진짜 사랑하셨기에 가장 위험한 딜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실패할 경우 하나님 자신이 죽어 바로 잡을 것을 이미 담보하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죠.
지금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가 매 순간 자유롭게 선택하고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로 그 후손들이 모두 범죄자가 되어야 합니까?
성경이 역시 이 문제를 해석해 줍니다.
로마서5장12절을 보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은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과 선악과 언약을 맺은 것이라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담이 대표 선수로 나가서 실격했다면 우리 중 어느 누가 나가도 실격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아담과 대표 언약을 맺으신 것은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만이 내실 수 있는 기가 막힌 비책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5장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대표끼리 싸우는 것 아시죠?
아담이 대표주자가 아니었으면 속죄하실 예수님도 대표주자가 되실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 대표가 되지 않았어도 어차피 모든 인간은 각각 죄를 짓고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속죄할 때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의 자격이 아니라 인간의 자격이셨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대표가 아니었다면 예수님도 대표가 되실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인류를 속죄할 수가 없고 단 한 인간만 속죄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납니다.
우리 모두를 속죄할 수 없고 우리 중에서 단 한명만 속죄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이치를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 5장은 계속해서 한 사람 아담,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 즉 대표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모두가 죄인의 줄에 섰으니 또 다른 한 사람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로 의인에 줄에 서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이 대표로 죄를 지어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이 절대 내게 불리한부당 계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대 억울한 것이 아니라 은혜가 넘친 것이라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 줄서서 영생을 얻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두번째는 아담과 하와의 죄의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무섭기에 우리에겐 주님의 속죄가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언약조건 대로 당장 영적인 죽음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언약은 파기하는 순간 즉시 영적인 죽음은 실행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3장에서 모든 인간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이 지금 그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죽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선과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에서 영원히 격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함께 살 수 없이 이미 깨진 관계라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도 친구관계도 깨지면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하고 싫어집니다.
창세기3장을 잘 읽어보면 아담와 하와가 범죄한 다음 하나님을 피해서 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미 관계는 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로부터 독립한 인간들이 절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날카로운 배신의 비수를 꽂은 순간 이 관계는 끝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고 거역하는 이 인간의 죄성이 어디까지 가냐 하면 지옥까지 갑니다.
심판을 받고도 회개하고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갈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슬피 울며 하나님을 향해 이를 간다고 예수님께서 한탄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회개하고 십자가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화평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영적인 영원한 죽음 뿐 아니라 육체적인 형벌을 추가하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각각 형벌을, 그리고 모든 육체에 죽음을 선고하십니다.
이 형벌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인간이든 육체의 죽음을 통과하게 함으로 고통과 한계를 느끼고 하나님께 향한 영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 죽음 아닙니까?
영생하게 창조 된 인간은 죽음에서 가장 큰 고통을 느낍니다.
동물들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인간은 분명히 영생하는 존재인 데 죽음이라는 절벽과 절망을 경험할 때 엄청난 두려움과 좌절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 한계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16절에 여자에게 더한 형벌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모성본능으로 자식을 낳아야 하는 데 거기 해산의 고통이라는 두려움을 주셨다는 거예요.
또 남편을 도울 수 있는 조력자로 지음 받은 아내의 지위에서 이젠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쓰라린 지위로 전락하고 고통이 시작된 것이죠.
남자들에게 주어진 고통은 무엇입니까?
본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능력을 보이고 보람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데 더 이상 땅이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땀 흘리고 힘들여 땅을 갈아도 이젠 환경이 순순히 내 힘으로 다스려지지 않게 된 것이죠.
왜 직장생활하고 가장 노릇하는 게 힘드신 지 아시겠죠?
똑같은 의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심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심판은 이미 불순종의 순간 확정되었고 효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께 떨어져 영원토록 죄의 댓가를 치르며 살아야 하는 데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뭐 하러 이중적인 고통을 주시겠습니까?
이 형벌은 인간이 한계 상황을 느끼고 고통을 통해 겸비하게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통해 전능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이 땅의 모든 형편이 에덴동산 같다면 아무도 장차 받을 영벌을 의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찾아 안식을 얻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가정이 왜 에덴동산 같지 않은지 이유를 아시겠죠?
삶에 고통이 있는 것은 무조건 해악이고 헛된 수고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반역에 저주를 퍼붓고 잔인한 형벌로 분을 삭이는 인간이 만들어 낸 신들과 같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기에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반역하며 사는 영혼들 까지 책임을 지십니다.
거룩한 천사들을 통해 지옥을 지키게 하시고 그 영혼이 고통 속에서 계속 사악한 죄성을 다스리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얼만큼 지옥에서 살게 하실 것 같습니까?
회개할 때 까지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영원토록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끔찍한 죄의 결과입니다.
이 세상에서 서로가 지은 죄로 뒤얽혀 괴로운 삶을 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 영원히 격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죄가 생각보다 너무 크고 악하다는 것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난 단지 직장에서 날 괴롭히는 사람을 싫어하고 밉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살인의 동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때가면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게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바보같은 놈이라고 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했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섰을 때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 형벌을 받으시고 죄값은 완료됐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의 그 감격을 이 땅에서도 매일 조금씩 맛보며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간에게 맡기시며 너무나 기뻐하셨던 하나님의 기쁨은 너무나 짧게 끝이 났습니다.
본장을 읽어보면 뜻밖에 하나님의 진노가 보이질 않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다보면 한번 씩은 절망할 정도의 배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 부모마음에는 분노가 솟구쳐 오르죠.
자식에 대한 실망감과 자식에 대한 걱정과 감히 부모를 능멸하는 자식에 대한 분노에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창조주를 거역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인간적으로 표현한다면 쓸쓸함과 비통함, 그리고 비장함, 이런 것이 더 느껴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아담과 함께 영원히 사망한 인간의 미래를 구해 낼 계획을 꺼내십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사악한 계략을 부린 사탄의 존재를 영원히 심판하고 모든 것을 본래대로 회복하실거라는 공표입니다.
누가 그 일을 합니까?
‘여자의 후손’입니다.
인간 역사에 여자의 후손은 오직 한 분,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한 예수그리스도뿐이십니다.
인간과 하나님을 고통당하게 한 원흉인 사탄을 예수님께서 멸절시키고 모든 것을 회복하실 것을 보여주시는 최초의 복음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21절에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이 왜 인간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겠습니까?
아담이 옷 못해 입겠습니까?
아담이 얼마나 지력이 뛰어난 인간인데요.
목화에서 면 옷 지어입고, 양털 뽑아 모직 옷 만들어 입을 수 있습니다.
에덴에서 추방당할 때 지어 입히신 이 가죽옷의 의미는 반역의 수치를 하나님 께서 직접 가려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미 사망의 판결을 돌릴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수치심을 가려주기 위해 죽은 죄 없는 동물은 바로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암호인 것입니다.
이미 창세기3장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영원히 멸망당할 위기를 자신의 외아들을 내주심으로 반전시키셨습니다.
만일 범죄가 없었다면 어쩌면 인간은 죽기까지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을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그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시골에서 살던 시절, 참 아버지는 무능하고 무뚝뚝하고 술타령이나 하는 부끄러운 존재였습니다.
청년이 되어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할 수 없이 시골집에 돌아가 은신하던 때였습니다.
아버지하고는 얼굴도 맞대기가 싫었고 말도 섞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연탄가스를 맡고 이 집사님이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 때 늙은 아버지가 이 집사님을 발견하고 무거운 장정 아들을 업고 무조건 읍내 병원을 향해 달려가신 것이었습니다.
찬 기운에 정신을 차린 아들이 보니 아버지가 자기를 업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싫어하는 아버지에게 업혔다는 사실이 너무 싫어서 소리를 지르고 뛰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바라본 순간 그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내복 위에 스웨터하나 걸친 아버지가 머리와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다리가 굳어버린 아버지는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업었던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 서 계셨습니다.
그 젖은 몸에서 김이 무럭무럭 오르고 있는 이 광경을 보는 순간 집사님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이제 제가 효도하고 잘 모시겠습니다.
우리는 언제가 되어야 목숨을 내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사랑을 다 깨달을 수 있을까요?
오늘 성찬식을 통해 우리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아래 무릎을 꿇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요즘 긴박한 기도제목도 많고 힘든 일도 많으신 데 제가 기도를 하다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 기도대로 응답되지 않는 형편들 때문에 답답하고 근심에 잠겨 하나님 앞에 앉았는데,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시는 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 각자를 자녀로 받으시고 품에 안으시고 최선을 다해 양육하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자녀들을 낳아 금지옥엽으로 키우듯이,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최선을 다하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최선도 대단한 것인 데 하나님이 최선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돌보고 키워주시니 된 것 아닙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당장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으시고, 분명히 지금 당장 이뤄지는 것 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과 맞바꿀 정도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듯이 꼬이고 괴롭히는 우리의 환경을 통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조금씩 더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매일 기억하고 선하고 좋은 것을 우리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담대히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2014.3.23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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