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에 대해서는 그동안 아주 많은 설교를 충분히 들어왔습니다.
요셉을 상징하는, 우리가 좋아하는 수식어는 단연코 ‘형통한 자’일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에서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우리에겐 먼 얘기죠.
그러나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평범한 신자들도 다 기대하고 바라는 축복일 것입니다.
오늘 요셉을 통해 우리 모두가 형통한 삶의 비결을 발견하고 그렇게 살아감으로 형통한 자들이 다 되길 소망합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면 요셉이 그리 형통해 보이질 않습니다.
요셉의 전체 생애를 읽어보면 인간극장처럼 깊게 굴곡진 인간사가 보입니다.
우리 어머니도 살아온 얘기를 다하자면 책으로 써도 모자란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얼핏만 봐도 보통 사람 이상의 기막힌 삶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죽고, 세 명의 계모와 열 명의 이복형제 밑에서 자란 요셉은 모두가 아버지 야곱만 바라는 가정에서 혼자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항상 요셉의 채색옷에 나타난 아버지의 지독한 편애를 시샘했던 형들은 진짜 요셉을 죽이려 했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타국에 노예로 팔려가 10년간 종살이를 하죠.
게다가 요셉은 주인 마님의 추파를 거절한 댓가로 강간범으로 몰려 2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전과자입니다.
나를 조금만 오해하고 나쁘게 말해도 우리는 괘씸해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2년간 눈물을 삼키며 분을 삭여야 했던 젊은 청년 요셉의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그런데 본문2절에서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3절에도 형통하다는 말이 나오고 23절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도 요셉이 범사에 형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형통이라면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좀 당황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라면 처음부터 종이 되지 말아야 하고, 감옥에 갇히지 않아야 형통한 것 아닙니까?
흥미로운 것은 그 뒤 요셉이 바로에게 발탁되어 총리가 되는 승승장구하는 과정 중엔 형통이라는 단어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가장 형통한 때 성경은 형통하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땐 성경이 말해주지 않아도 다 형통하다고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갇힌 요셉을 보고 누가 형통하다는 말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까?
누구도 형통하다고 못할 그 순간에 유독 성경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요셉이 형통했다고 기록하며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이 요셉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고 귀중한 순간은 사실 총리가 되어 제국을 다스리던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지고, 타국에 노예로 끌려가고, 감옥에서 착고에 채워져 하나님만 바라보던 그 시절이 요셉의 생애의 클라이막스였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에서 이 시절이 빠졌다면 그가 총리가 된 것이 무슨 감동을 주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지만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견뎌냈던 그 때가 정말 주님이 나와 함께 했던 클라이막스였던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도 올림픽 공원을 걷다가 작년 이맘 때를 떠올렸습니다.
투병 중이던 어머니를 모시고 열발자국도 못 가 숨을 고르며 쉬엄쉬엄 장미광장을 걸어왔던 게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는 형제들이 조금이라도 엄마의 입맛을 돋굴만한 음식이 있으면 챙겨와 주일 저녁마다 주방에서 북새통을 떨었죠.
시한부 삶을 사는 분을 모시고 속초로 놀러가면서 뭐가 그리 좋아서 엄마 앞에서 웃고 떠들었던지요.
그런데 돌이켜 보니 그 때가 우리 가족사의 클라이막스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통 앞에서 가족이 힘이 되고, 정말 가족들이 다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의지했던 우리 가정사의 클라이막스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 요셉의 생애의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셔서 형통하게 해주셨다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실까요?
자식이 눈물을 흘리며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 부모라면 가장 가까이서 자식을 위로하고 돌봐주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가장 험악하고 눈물겨운 시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마음과 환경을 그 가운데서도 형통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요셉의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빛도 들지 않는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은 인자와 사랑으로 그를 둘러 비추셨기에 그의 절망스런 상황도 절망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돈과 건강과 환경에 묶여 옴짝 달싹하기도 힘들 때,
미래가 깜깜해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주옥같이 만드시고 연단하시고 앞으로 다가올 영광스런 미래를 준비시키십니다.
우리 앞의 현실이 아직 힘겹고 거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점점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뤄진 미래에 지금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함께 했기에 지금도 형통했던 시절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인정하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고, 요셉을 형통하게 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와도 함께 하시는 게 분명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당연히 우리는 형통합니다.
다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시냐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고 야곱을 찾아오셔서 축복하시고 함께 하시는 데 왜 그들을 찾아오셨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와 함께 하시는 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 57장 15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나올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고 말씀하시죠?
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을 때 주님께서 깨든지 자든지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것입니다.
이 두 말씀만 봐도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속죄된다는 것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듯이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나도 그것을 알게 되고 남들도 그걸 알아본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3절에 보면 보디발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합니다.
요셉의 일이 형통하게 잘 풀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3절은 분명히 보디발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고 또 요셉이 형통하게 됨을 보았다고 둘을 나누어 말씀합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보니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이 무언가 현실적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도 그것을 인식하게 되고 남들도 그것을 알아봅니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백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다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복을 주신다는 것을 인정받았습니다.
삼상18장28절에서 사울왕도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알았다고 기록합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 질 때도 그를 신임하던 다리오왕이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 주시리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영안이 열린 것도 아니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반응을 보면 누구의 지시를 받고 있는지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마마보이가 엄마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남들이 다 알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남들이 다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당연히 그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원칙과 삶의 방식이 그대로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요셉의 삶의 원칙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식을 점점 더 고수하게 됩니다.
요셉이 범사에 하나님을 믿는 원칙대로 사는 모습을 보며 보디발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가 아니고 중요한 사실이 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실이 요셉의 직무와 일상에서 충실과 정직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엮어지면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도 달라집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결정할 때, 하나님이 못 보시는 것 마냥 눈 질끈 감고 죄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아는 집사님이 심하게 다쳐서 병원에 오래 입원했는데 다행히 실손보험을 들어놔서 많은 치료비가 다 해결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떤 환자의 소개로 보험 브로커를 소개받았는데 다친 손가락이 불구가 되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하면 사후 치료비를 더 받아낼 수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중 일부를 커미션으로 받고 일을 추진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어떻게 구부려서 사진을 찍는지 이런 방법을 다 알려주고 서류를 접수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두 군데 보험회사에서 천오백만원 정도를 더 받았다고 좋아하시더군요.
이게 신자로서 옳은 일입니까?
당장 자기 이익이 관계되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는 듯 거짓말하고, 위장하고, 머리를 굴리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이 사실을 아시는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다 안다는 거예요.
요셉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그의 행동을 지켜보며 보디발이 판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8절에 보면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누군가에게 맡기려면 사람 됨됨이를 살펴보게 되어 있습니다.
자꾸 책임이 맡겨지고, 업무가 늘어나고, 사람들이 나를 붙잡으면 그건 내가 객관적으로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평가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바로왕의 친위대장 정도 되면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보디발이 요셉의 진실 된 신앙과 하나님을 의식한 정직한 삶을 보고 제대로 판단해서 자기 것을 맡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실과 정직이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 데서 나올 때만 하나님은 그 결과를 형통하게 책임지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남보다 인정받고 남보다 더 빨리 승진하고 성공하기 위해 죽도록 일합니다.
하나님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자연의 법칙에 맡기십니다.
잘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주변에 옳지 않은 사람들은 그걸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합니다.
매일 성실히 일해도 죄가 엮인 세상에선 일한 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직과 일의 성실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에 그렇게 따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어김없이 형통하게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모든 재산을 맡겼더니 이번엔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해서 보디발의 모든 소유에도 복을 주셨다고 하시죠?
함께 하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과 함께 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의 형통은 단지 이 땅에서 자기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개인을 형통하게 해주시는 데 무슨 제국의 총리까지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비효율적인 경영을 하지 않으십니다.
큰 자리와 큰 축복은 그만큼 큰 책임과 의무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에서 형통을 바라는 뜻이 단지 이 땅에서 남보다 좀 더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라면 본문이 전해주는 메시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요셉의 모든 고난 중에 함께 하셔서 형통하게 하신 것은 요셉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큰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마지막장에서 요셉이 그들의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하게 하신 이유는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 대한 목적을 갖고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평안히 살며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한 유익한 삶이 되도록 우리의 그릇에 맞게 인도하십니다.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큰 일을 맡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단계씩 소망을 갖게 하시고 거기에 노력한 결과에 따라 점점 다음 단계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사람들은 보통 성공한 요셉을 말할 때, 그가 처음 하나님이 주신 원대한 꿈을 잃지 않았기에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셉이 구덩이에 갇혔을 때, 손발이 묶여 노예로 팔려졌을 때 무슨 원대한 꿈이 기억인들 났겠습니까?
당장 거기서 살아남는 게 문제였고,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어가는 게 바램이 아니었겠습니까?
요셉은 그냥 생존을 위해 매순간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과 주인의 눈에 들도록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꿈을 이루어 가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거창한 총리의 꿈 같은 것 안가지셔도 됩니다.
또 제 나이만 되도 인생이 꿈 꾼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우리가 꿈꾸고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해 가신다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열망해서 부와 명예를 따라간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최장 재위한 영국군주가 된 엘리자베스여왕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권위는 내가 열망해온 게 아니다’
본래 왕위를 이을 장남인 에드워드왕이 심슨부인과의 사랑에 빠져 왕위를 포기함으로 엘리자베스여왕의 아버지가 왕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 뒤를 이어 엘리자베스여왕이 군주가 된 것입니다.
지금의 여왕의 자리가 열망해서 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단한 자리를 꿈꾸지 못한다고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어려서부터 꾼 꿈대로 이룬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무언가를 이루게 하셔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에게 준비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옷도 다 벗겨져 벌거숭이로 끌려왔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본문6절에 보면 요셉이 가진 것이 있었는데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히려 이로 인해 요셉이 크나큰 덫에 걸릴 것을 암시하는 복선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처구니없이 세상살이를 망치는 도구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왜 있겠습니까?
하나님께로 부터 연단되지 않은 자연적인 장점과 타고난 조건들은 세상적으로나 영적으로 오히려 삶을 궁지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번뜩이는 영특함을 타고 났어도 사람들에게 좋게만 보여지지 않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가 요셉을 총리에 올린 것은 애굽에 그만큼 똑똑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우리가 능력이 많던 적던, 태어난 조건이 어떻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남들이 알 정도로 신실하고 성실하게 매일에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우리 생애가 빛나고 보람 있는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항상 눈물 골짜기가 있고 감옥같은 암흑 속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들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시련의 시기는 우리의 신앙을 주옥같이 빚어내는 삶의 클라이막스이고 하나님의 형통입니다.
고통이 고통으로 끝난다면 클라이막스가 아니죠.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고, 천국의 완전한 영광이 있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당하는 모든 시련들은 우리 생애를 극적으로 빛내 줄 클라이막스라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바라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5년9월27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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