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그리고 신에 대해 사실을 말해주는 유일한 책입니다.
이런 인생에 대한 답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근원적인 불안과 초조함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답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나이와 신분과 형편에 상관없이 견고한 터전에 자리 잡은 집처럼 뭔가 다릅니다.
기독교 신앙이 아니면 사실 인간과 이 세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잖아요?이 고통이 가득 찬 세상을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답을 애써서 찾고자 합니다.
며칠 전 우연히 불교방송에서 한 스님이 강의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공부를 많이 하고 삶의 도에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것 같았습니다.
그 날 강의의 요점을 한마디로 하자면 인간의 마음에는 누구나 복전이 있다는 거예요.
그 복된 밭에다 복된 것을 심기만 하면 복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느 집에서 액자에 걸린 글을 보았는데 ‘천재설소 만복운흥’이라고 써있더랍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천 가지 재앙은 눈 녹 듯 사라지고 만 가지 복은 구름처럼 일어난다’입니다.
이 정도면 우리가 좋아하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정도는 상대도 안되죠?
그러면서 이 분이 하시는 말이 이런 글을 써 놓고 그 밑에 이름을 보니 00스님이라고 했더라며 혀를 끌끌 차더군요.
마음 밭에 심은 데로 나는 거지 이런 복이 저절로 오냐는 것입니다.
이미 좋은 마음 밭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좋은 것만 계속 심으라는 거예요.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인간사를 깊이 생각하고 사물을 연구해서 나름대로 이치를 깨달은 것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 밭은 복된 밭이 아니라 나쁜 밭입니다.
그 밭에선 끊임없이 나쁜 것들이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옛날에는 왜 좋은 마음이 없고 자꾸 거짓말을 하고, 진실한 행동이 안될까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성경을 펴니 그 안에 답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단지 가인이라는 이름도 낯선 고대인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름 자리에 우리를 대신 놓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의 근원과 영원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아야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을 쫒으며 바쁘게 살지만 자주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죠.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에덴동산과 선악과 같은 이야기는 얼핏 보면 고대의 신화같이 보입니다.
이런 내용이 꾸며낸 이야기였다면 우리 같은 정상인이 그게 믿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들 아닙니다.
성경 안에 충분한 진실이 확신되기에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 안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과 우리의 근원과 영원한 구원에 대해 확신하는 시간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짧게 읽었지만 내용은 1절부터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인간 역사의 시초, 아주 고대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앞의 3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왜 이렇게 끊임없이 악을 분출하는 존재가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는 특별히 신비로운 열매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의 수많은 과실나무 중 하나입니다.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와 신적인 능력을 선하게 사용할지를 테스트하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부모라면 당연히 자식을 테스트합니다.
우리도 아이들 키울 때 은밀하게 이런 장치를 두고 아이들이 말을 잘 듣나, 심성이 어떤가 떠보고 그랬잖아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시시각각 테스트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선악과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아담과 하와는 말 그대로 악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가장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면 그 다음은 다 악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세상살이가 아름다운 것 같지만 뜯어보면 다 악이 꽃피고 악취가 스물 스물 올라오고 고통스런 악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악은 선한 의지를 밟고 인간의 인격을 순식간에 장악합니다.
아담이 취득한 악한 본성은 줄줄이 태어나는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졌습니다.
본문에 이어서 바로 일부다처제가 나오고, 살인자가 나오고 불신 문명이 나옵니다.
우리 역시 아담의 후손으로 본성적으로 타고난 악이 나쁜 일을 하도록 우리를 유인합니다.
오늘 인간의 악한 본질을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가인입니다.
우리는 적당히 포장하고 위장하고 살기에 심지어 자기도 나중에 괜찮은 사람인 줄 헷갈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 그 속을 까뒤집어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땅에서 사람들이 번성하고 농경시대가 시작되고 아벨과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아담이 범죄 한 뒤에도 하나님은 관계를 끊은 게 아니고 항상 사람들의 주위를 맴돌고 계신 것이 본문에서도 느껴집니다.
이게 창조주의 사랑이예요.
자식을 키우다 보면 우리를 실망시킬 때도 있고, 큰 잘못을 저질러 매를 들기도 하지만 부모들은 혼나고 들어간 애들 방문에서 눈을 떼지를 못합니다.
아담의 죄가 단지 과일하나 따 먹은 게 아니잖아요?
아버지의 자리를 탐내서 비수를 꽂은 것입니다.
뱀이 말했습니다.
‘따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네 아버지 하나님 같이 되리라.’
이 말 대로 하나님 자리를 탐내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겁니다.
그리고 선악과의 독은 정녕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하나님이라는 착각을 하는 괴물이 되게 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고 하나님의 순리를 따라 아름답게 존재하잖아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거역한 인간만 괴물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괴물이지 다른 괴물은 없어요.
요즘 사회를 보면 정말 인간이 무섭습니다.
오늘 가인을 보면 하나님께 분노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동생을 들판에 불러내서 쳐 죽이고 암매장 하잖아요.
성경이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일어나는 현재의 이야기라니까요.
하나님이 아벨을 어떡했냐고 물으시자 가인은 비웃듯이 대답합니다.
‘왜 아벨을 내게 와서 찾으세요,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런 가인을 통해 적나라하게 인간의 두 가지 죄악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경과 타인에 대한 살인입니다.
가인이 살인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감히 자기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거예요.
5절에 보면 분해서 안색이 변했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랑하신 아벨을 죽여서 하나님과 아벨에게 다 보복한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지독히도 사랑하고, 거기에 도전하는 모든 것에 살의를 품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핑계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위장한 우리 마음을 엑스레이로 투시해 놓으셨잖아요?
‘형제를 미워하고 멸시했느냐? 이미 마음으로 살인했느니라.’
예수님이 이런 걸 자꾸 지적하시니까 유대인들이 미워서 예수님도 죽인겁니다.
자기 삶이 견딜 수 없이 괴롭고, 자존감이 계속 짓밟히면 자기 목숨도 죽여버리는 게 인간의 지독한 자기애입니다.
먹을 게 풍요롭고, 안전하다 느끼고, 삶에 고통이 없을 때 그게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생명과 안전이 위협당할 때, 인간의 진면목이 드러나죠.
베네수엘라를 보십시오.
어제의 선량했던 시민이 강도가 되고 폭도가 되어 가게를 부수고, 훔쳐가고, 사람을 때리고 그 손에 있는 것 까지 뺏어 갑니다.
강도에게 살해당하고 폭력에 신음하는 사람들은 그저 착해서 그렇습니까?
힘이 없어서 그렇지 힘만 있으면 강도라도 때려눕히죠.
전에 도망가는 50대 강도를 빨래건조대로 마구 때려서 뇌사상태에 빠트린 20대 청년이 실형을 선고받아 과잉방어 논란이 있었잖아요.
나중에 가인이 낳은 라멕이란 자가 하는 기가 막힌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23절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그냥 상처만 주어도 죽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런 본성의 악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 안에 본질인 죄에 대한 각성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에서 시작되면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맞아 떨어지질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사랑스런 존재가 아니예요.
우리 안에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공경과 사랑이 없고, 타인은 다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이기적 본성은 바로 우리가 모태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달라진 게 무엇입니까?내 힘으로 경작할 수 없는 이 나쁜 마음 밭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경작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라는 질긴 독초들을 걷어내고 선한 씨를 뿌리고 선한 열매들을 맺어 가는 것이죠.
본장7절에서 하나님께서 사고를 칠 것 같은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성경은 가인처럼 하나님과 타인에게 지은 죄에 대해서는 벌이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도, 통치자도, 하나님도 아닙니다.
내가 알아서 잘 산다고 끝이 아닙니다.
나를 감찰하시고 폐부를 꿰뚫어 보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이생을 살아갈 때 받게 될 엄중한 벌을 내리십니다.
12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다.’
이제 땅에서는 수고한대로 소출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도 손에 쥐는 게 왜 항상 부족한지 아시겠죠?
그리고 ‘또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이 말씀은 방랑자가 되어서 산다는 게 아니라 죄를 지은 죄책감으로 인해 항상 두렵고 불안한 마음으로 살게 될거라는 뜻입니다.
가인이 방랑하기는커녕 16절에 보면 하나님 앞을 떠나 철통같은 성읍을 건설하고 삽니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성을 쌓았다는 단어가 완료형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을 쌓았다는 진행형인 것입니다.
불안하고 두려워서 자꾸 자기를 보호할 무언가를 쌓고 또 쌓는 것입니다.
그게 돈이라고 생각하면 돈에 집착하고, 건강이라고 생각하면 건강에 집착하고, 자식이나 명예라고 생각하면 거기에 집착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진정 보호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고쳐지지 않은 한, 가인에게 주어진 이 형벌은 지금도 모두에게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가인은 굉장한 엄살을 부립니다.
13절에 보면 가인이 말하죠.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겁습니다.’
‘주께서 오늘 나를 쫒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겠나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못 봐서 슬프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나긋나긋하지 않습니다.
번역은 이런 것처럼 되어 있지만 원문으로 해석하면 이제 내가 꼭꼭 숨어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이젠 얼굴도 안 보여드리겠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살인자라고 죽일거라며 하나님을 압박합니다.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도 부모 앞에서 큰소리치는 철없는 자식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버지신게 분명하죠?
아저씨 같으면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반응하시는 모습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15절에 보면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일곱배나 받게 하겠다.
그러면서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만나는 사람이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가인의 생명을 하나님이 보장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용두사미가 어디 있어요?
이게 사람들 김빠지게 하는 집행유예나 다를 바가 없잖아요?
징역 삼년을 때려 놓고, 집행유예 1년, 이러면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사람들이 볼멘소리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처사가 마치 그렇게 보여집니다.
동생을 죽인 극악무도한 가인을 이렇게 표까지 줘서 보호해 주신다니요?
이런 이상한 계산 방법은 부모 자식 간에나 통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복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짓고도 생명을 보호받은 가인이 바로 나 자신이라니까요.
오늘 가인에게 주셔서 생명을 보존하게 하신 이 표는 죄에서 허우적거리며 악에게 고통당하며 사는 모든 사람을 향한 창조주의 긍휼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분명합니다.
에스겔18장23절에서 말씀하시죠.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다면 여기서 가인의 표가 대체 무엇이냐는 것에 의문이 생깁니다.
옛날부터 ‘가인의 표’는 왠지 비밀스럽고, 금지된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인의 표를 마치 악인의 카리스마 같이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반대로 악을 제압하는 신비스러운 능력을 가진 가인의 후예들이 있다고 해석한 데미안이라는 소설도 있습니다.
히틀러는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별 표식 달게 하죠.
이걸 저주받은 가인의 표라고 했습니다.
이 가인의 표에 대해 해석이 구구한 것은, 해석에 도움을 줄만한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을 다른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은 성경 자체 내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궁금증을 갖게 하는 내용이라면 거기엔 반드시 중요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이 가인의 표를 풀어 줄 상징들이 그 뒤의 성경들에서 간간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애굽을 탈출할 때 유월절 사건이 있었죠.
애굽에서 이스라엘노예들을 놓아주지 않자 하나님은 열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징벌하십니다.
마지막 재앙이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장자재앙입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 입구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간다고 했죠.
출애굽기12장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피가 너희를 위한 표적이 된다고 하시죠?이 표적이란 단어가 가인에게 준 ‘표’와 똑같은 ‘오트’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무지개 언약, 할례에서 이것이 ‘표적’이다 라고 할 때, 동일하게 씌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구원의 상징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한 분의 저자가 쓰셨습니다.
성령께서 여러 시대, 여러 사람을 감동하셔서 성령님의 의도대로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말씀하려는 일관 된 목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초두에서 부터 계속 무슨 얘기를 꺼내는 건지 알만 하십니까?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고 죄 중에서 다시 구원하시겠다는 뜻을 계속 흘리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빵을 조금씩 뜯어서 가는 길을 표시하는 것처럼요.
그걸 따라가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나옵니다.
창세기3장에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동물을 죽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
뱀에게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거라는 말씀,
오늘 가인을 죽음에서 면하게 해 줄 가인의 표,
이게 다 같은 사건을 상징하는 정보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마치고 나시니 비로서 그 상징들이 하나의 사건으로 꿰어지는 것이죠.
오늘 가인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표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받은 구원의 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받은 표는 그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은혜의 표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말하자면 그것은 가인이 살인자라는 표식이기도 합니다.
십자가가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총을 입어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된 표식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가 죽을 죄인이었었다는 표식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은총을 입은 자라는 증표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장본인인 죄인이라는 증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자각한 사람이라면 아무 것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 성숙했다, 믿음이 깊어졌다는 것은 이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남보다 믿음이 좋아지면 자신의 죄악이 더 생생하게 보이니 절대로 우월하게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뭐가 좀 나아 보인다면 그 사람이 제일 꼬래비인 것입니다.
좀 나은 죄인은 없어요.
내가 이런 면에서 저 사람보다 좀 나으면 다른 면에서는 그보다 못한 게 더 많습니다.
왜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벌을 일곱배 더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아무도 없는 다 똑같은 살인자요, 똑같이 하나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가인에게 돌을 던지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겠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잖아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아벨의 제사는 왜 하나님이 주목해서 보셨을까요?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다고 합니다.
아벨은 자기 안에 깊은 죄의 뿌리를 알았기에 속죄의 제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제사가 간단히 동물을 죽여서 제사상에 올린 게 아닙니다.
기름을 드리려면 양을 해체하고 피비린내를 맡으며 각을 떠야 해요.
사람들의 눈에 보기엔 가인의 제사가 더 점잖고, 더 동물보호적이고, 더 윤리적이고 더 편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주목해 보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쳐다보지도 않으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속죄의 보혈로 우리 손발에 가득한 악의 피를 씻지 않고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들을 희생양으로 내 주셨는데, 우리가 무슨 알량한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하나님 앞에 나오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가인을 통해 우리 본성의 죄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현대에는 교인들에게 죄를 지적하면 안되고, 그런 설교를 하는 교회는 부흥하지 않는다고 충고합니다.
위로하고 축복하는 ‘백운재설 만복운흥’ 같은 설교나 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죄를 깊이 깨달을수록 복있는 사람입니다.
죄에 대한 본질적인 이런 말씀을 들어야 성령께서도 깨닫게 하시죠.
가인은 은혜의 표를 받고도 하나님 앞을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진정 가인이 하나님 면전의 은혜를 떠나서 두려움 속에서 유리 방황 하길 바라셨겠습니까?
가인의 표가 왠지 부정적인 해석으로 느껴지는 것은 끝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 앞을 떠나 파멸의 아성을 쌓은 가인의 결말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표적인 십자가가 저렇게 높이, 누구나 볼 수 있게 걸려 있지만 그것이 가인의 표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께서 우리 내면의 깊은 죄악을 보게 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표가 저 가인의 결말 같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의 모든 약점과 죄와 허물을 긍휼히 여기고 무한히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음을 믿고 감사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2016년6월26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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