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모인 성도님들께 예배를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요즘은 뉴스를 보면 더 허탈해지고 맥이 빠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외신 중에 놀랄만한 소식은 뭐니 뭐니 해도 코로나맥주 회장이 죽으며 고향 동네 사람들에게 유산을 나눠줬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페르난데스회장은 가난한 이 마을에서 태어나 맥주공장 창고에서 일하다 최고 경영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죽으며 인구 팔십명이 전부인 고향동네 사람들에게 무려 29억4천만원씩 돈을 나눠줬다는 영화 같은 실화입니다.
페르난데스회장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재산을 그렇게 처분하고 떠났을까요?
작고 가난한 동네라 사람들이 돈독하게 지내기는 했겠지만 그 동네사람들은 정말 기여한 것 하나도 없이 백만장자가 된 것입니다.
어쩌면 페르난데스회장은 돈은 가질 자격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남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살다가 그런 일도 다 있을까 싶게 부럽지만 지난주에 나눈 말씀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기여한 것도 없이 상속받을 몫이 어마어마하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자들은 당장 세상에서 손에 쥔 것만 볼게 아니라 하늘의 상속받을 기업을 잘 계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따지며 살아야 구원의 결승점까지 믿음의 경주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영생의 원리와 값어치를 바로 알게 합니다.
큰 시험이 오면 믿는 줄 알았던 감정은 온데간데 없어지지만 성령께서 배운 말씀으로 우리를 붙드시면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오늘 창세기의 아브라함에 대한 기사는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강하게 내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천애고아라는 말이 있죠.
이 말은 하늘과 땅이 까마득히 먼 것처럼 아무런 인연이 없는 곳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에도 뿌리를 알고 뿌리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덤불처럼 정처 없는 믿음이 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뿌리로 시작해 내게 이어지는 신앙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 믿음에 있어서 아브라함은 어떤 성경인물보다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본격적인 일을 벌이시는데, 바로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약속을 아브라함과 맺으시는 것이 7절에 나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사람의 일차적인 조건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후에 모세를 통해 율법을 통해서 언약을 맺으시고, 그 율법을 지켜 행할 때 자격이 유지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민족이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까?
막연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만 우리 조상은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계약은 엄중해서 절대로 변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예가 성경에 몇 번 나오죠.
다윗과 맺은 언약의 경우는 다윗의 혈통에서 영원한 통치자를 보내신다는 것이고 그 약속대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노아와 무지개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은 다시는 죄를 져도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언약입니다.
이 땅의 생명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자기의 연한대로 살도록 보장해주신다는 언약이죠.
이 땅에서의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대로 하지 않고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역사 속에 맞추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인류역사에는 마지막 심판이 있고, 모든 인간은 이생을 마쳤을 때 하나님 앞에서 그 선악간에 심판을 받지만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은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렇게 캐면 캘수록 불법이 계속 나오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자기 명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심판은 사람의 손과 자연의 손에 돌리시는 것이죠.
인간사의 이치 안에 권선징악도 있고 인과응보도 있고, 자연에도 법칙이 있어 법칙을 파괴하면 자연의 역습을 당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발의하신 언약은 그만큼 절대적으로 준수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자손들이 될 수 있냐는 것이죠.
그것은 갈라디아서 3장6절에서 정확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언약의 조상이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믿을 때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대를 이은 것이죠.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믿음의 계보를 따라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면 왜 남의 나라 종교를 믿냐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죠.
다음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의로 여기신 아브라함의 믿음과 반대로 실패를 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대단하지만 우리와 같은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우리 같은 실수를 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또 교훈을 얻는 것이죠.
아브라함의 시대는 노아홍수 이후 급속히 사람들이 번성해 세계사에 남은 고대문명들을 건설한 때입니다.
노아로부터 전해들은 하나님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져갔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몇 달만 교회를 떠나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급속히 소멸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리엔 타락한 천사 사탄과 귀신이 우상종교를 조장해 신처럼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우리도 어려서부터 이 무속과 우상숭배 문화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우상의 도시인 갈대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기 위해 그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는 한 인간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스스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아 낸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고 찾아온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아시고 누군가를 통해, 혹은 어떤 일을 통해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하신 이 말씀을 믿고 우상의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합니다.
고대에 자기 부족을 떠나 다른 부족의 경내로 이주한다는 것은 생명을 건 결단이었습니다.
무려 1500킬로미터에 달하는 험난한 길을, 죽음을 무릎 쓰고 순종했기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우상의 고향을 떠날 때 아브라함은 75세였고, 아내 사라는 불임으로 자식이 없었습니다.
네게 가나안 땅과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나온 것이죠.
이 말은 실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도 일면 성취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 구원자 메시야를 통한 영생에 대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땅에서, 외국인의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번창해 덕망과 큰 부를 거머쥐게 됩니다.
그러나 십년이 지나도록 자식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죽음을 불사한 먼 길을 이주해 왔지만 십년 기다림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한계가 오고 맙니다.
십년이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의혹이 생기기에 충분한 시간 아닙니까?
우리가 한 달을 기다리고, 일 년을 기다리는 것도 정말 얼마나 애가 타고 의심이 듭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결국 믿음에 현실을 절충한 실리적인 방법을 찾아냅니다.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이게 대체적으로 우리가 쓰는 방법이죠.
말씀에 따라 백프로 순종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맞게 절충해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을 낳는 것이죠.
그러나 아브라함 가문에 있어서 이스마엘은 불화의 원인이 됩니다.
지금도 이삭의 혈통인 이스라엘과 죽어라고 싸우는 게 이스마엘의 혈통인 아랍인종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는 난생 처음 아이의 소리가 들렸지만 누구도 마음껏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귀한 자식이지만 아브라함이 사라 앞에서 이스마엘을 마음껏 예뻐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라는 여종의 몸을 통해 낳은 아들을 품었을 때 기쁘기만 했을까요?
하갈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여주인에게 안겨 줄 때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갈등이 집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그런 죄악의 불필요한 갈등 속으로 우리를 몰아넣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관심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식을 고려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저히 못참겠다고 저지르고, 인간적인 경험을 앞세워 당장 해치우려들다 우리 인생에 무수한 이스마엘을 낳고 갈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다리고 백프로 순종하는 게 가장 복된 이유입니다.
그로부터 십 삼년이 지난 후 오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드디어 아브라함에게 구십세 된 사라가 내년에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정하신 기한이 되면 반드시 오셔서 약속을 이뤄주시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성경의 소망과 약속들을 주셨다면 믿고 기다리면 반드시 기회가 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현현하신 이 긴장되고 위엄찬 순간에 터져 나온 아브라함의 웃음은 참 인간적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장면에서 왜 웃음을 터뜨린 것일까요?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 이미 너무 늦었지 않습니까?’ 라는 의미의 실소라고 보기도 합니다.
주시려면 진작 주셔야지 이미 생산 능력이 다 끊어진 다음에 오셔서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브라함이 그 정도로 하나님을 불신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웃음 속에는 이십오년간의 복잡한 심경이 서려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이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하는 소심함과 다시 기대감을 갖는 것조차 두려운 회의도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복잡한 존재라 웃음도 이렇게 복잡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좋아서 웃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희망적인 믿음과 예감을 주시면 왠지 재미가 있고 웃음이 나옵니다.
이스마엘은 웃음을 주는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하나님이 장차 그 아들을 통해 만민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그 씨라는 확신이 들었을까요, 안 들었을까요?
당연히 안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중에는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기고 마음에 껄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비껴가면 왠지 마음이 불편해지고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집니다.
하나님이 십삼년간 침묵하셨으니 아브라함이 불안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신자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본래 하나님이 침묵하시지 않냐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너무나 빈번하게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따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수많은 하나님의 음성들이 수시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을 볼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잖아요?
매일 진부한 생활 속에서도 한순간 심중을 파고드는 특이한 순간들이 유심히 보면 하루에도 여러 번 있습니다.
좋은 일이든 불안한 일이든 그 순간 우리는 현실의 몰입에서 잠깐 벗어나 하나님을 떠올리고 뭔가 영적인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성경말씀과 기도로만 우리에게 말씀하는 게 아니십니다.
이렇게 아주 평범한 일상 중에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시고 그것이 미처 인식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으로 우리가 믿음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들의 삶에는 불신자들과 뭔가 다른 옹달샘에서 솟아나오는 생수 같은 기쁨과 생명감이 항상 찰랑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 절충하는 삶으로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삶에는 어두움과 그늘이 덮힙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 아브라함의 십삼년은 아주 우울하고 답답하고 침울한 나날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결국 손을 내미시는 분은 항상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데, 기다리다 지쳐 상심이 되십니까?
삶이 얼마나 우리를 우롱하는 것 같습니까?
이젠 좋아질 것 같았는데, 다 된 것 같았는데 모든 상황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변화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낙망이 됩니다.
하나님이 오늘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기다림에 지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무능하신 것도, 무관심하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완전하게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이삭을 얻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낙심치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믿고 따르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다림에 큰 웃음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을 주시기까지 왜 이십오년의 세월이 필요했을까요?
자식 하나 얻는 데 이십오년이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죠?
이삭의 출생은 단지 혈통적인 것 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통해 장차 그 후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거라고 하신 약속은 자연적인 혈통을 따라 태어날 이스라엘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천국의 상속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의 자연적 출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연적인 출생의 방법으로 이삭이 태어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육으로 태어난 것은 육이니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또 요한복음에 기록되었잖습니까?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렇기에 아브라함과 사라의 자연적 생산능력이 완전히 끊어진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또 이것에 대한 철두철미한 증표가 바로 할례입니다.
할례는 남자아기가 태어나고 8일만에 생식기의 끝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할례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의료시설이 완벽하지 않던 고대사회입니다.
할례를 한다는 것은 심각한 경우 감염에 의한 죽음도 생각해야 하고, 불구가 되어 앞으로 영원히 자식을 낳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한 두려운 일입니다.
할례는 자연적인 생명이 끝났음을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실제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으면 그 위험한 할례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자연적 생산능력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런 기적적인 출생은 대개 구원에 관련되었다고 이미 배웠습니다.
성경에서 자연을 초월한 기적적인 출생은 거의 예수님의 구원에 대해 감추어 놓은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10절에 보면 할례를 명령하신 뒤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할례가 ‘내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22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신 하나님이 다시 올라가십니다.
이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성자하나님이십니다.
왜 할례가 예수님의 언약인지 아시겠습니까?
할례는 자연적 생명의 죽음을 말하며 영적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죽음, 그 죽음을 통해서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구원의 진리가 할례 안에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벌써 할례를 통해 피, 죽음, 생명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시라는 사건을 통해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그리고 레위기에서는 제물에 안수해서 자신의 죄를 전가하고 제물이 대신 죽는 이미지로 점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구원을 가시화시켜나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알아야 우리의 믿음이 역사와 진리에 뿌리를 내린 견실하고 실제적이고 진실 된 믿음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그날 당장 모든 식구들을 모아 할례를 행합니다.
신약성경시대에 할례는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할례는 육적으로 태어난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렇게 죄의 육적 본성을 죽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의 흔적을 새기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당장 행해야 할 마음의 할례입니다.
우리나라의 현 시국을 보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될지 모르겠다는 좌절감이 듭니다.
하나님이신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실지 막막하고 두렵습니다.
경제와 민생문제들이 벌써 출렁이고 곤두박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서 이뤄지길 기도하며 인간에게 주신 정의와 양심이 승리하길 소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식들에게 영적인 영원한 나라를 유산으로 받게 함과 동시에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이 땅의 나라도 물려주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6년11월27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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