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정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혹시 치킨지수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치킨이라는 말이 많이 언급되는 날일수록 사람들의 행복감이 크다는 것을 연구한 빅데이터 업체에서 만든 말입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치킨을 시켜먹지 않는다 해도 ‘치킨’이란 말이 생각나고 ‘치킨’이란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별 걱정 없이 행복한 상태라는 것이죠.
실제 야구경기가 있는 날이나 날씨가 좋은 날 같은 때는 치킨지수가 높게 나오는 반면 주가가 떨어진 날이나 불쾌지수가 높은 날은 치킨지수가 낮게 나온다고 합니다.
요즘 얼마나 치킨 얘기 자주 하며 사십니까?
올해 우리나라 행복지수가 세계157개국 중 58위라는 데, 47위였던 작년에 비해 더 불행해진 셈입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 아빠들이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하루 평균 6분으로 OECD 중 꼴찌라고 합니다.
이런 통계들을 보면 우리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의 가정이 좀 더 행복하고 평안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오늘은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를 중심으로 가정에 대한 교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단지 이스라엘의 국조가 아니라 우리에게 깊이 관련이 있는 인물입니다.
지구의 역사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간 자녀들을 찾아 가족을 이뤄 가시는 대 장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일을 이루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한 길을 내는 과정 속에 선택 된 사람들이 성경 역사 인물입니다.
노아라거나, 다윗 같은 사람들, 또 오늘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오실 길을 위해 뽑힌 사람입니다.
뽑힌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사실들을 은은히 암시하고 구원의 큰 그림을 맞출 한 조각 퍼즐 역할을 하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보여줘야 할 역할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우상숭배의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고국을 떠났습니다.
말하자면 먼 타국으로 이민을 간 것인데 그때는 지금처럼 해외 이민자들이 안전하게 남의 나라에 정착할 수 있던 때가 아닙니다.
부족이나 씨족 중심으로 나라를 이루었던 당시에 자기 나라를 떠나 남의 나라로 간다는 것은 거의 죽거나 붙잡혀 종이 되기가 십상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동해온 거리는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만 해도 480킬로입니다.
서울서 부산 정도 보다 좀 먼 거리죠.
나귀에 가재도구들을 바리바리 싣고, 식솔을 거느리고, 난생 처음 가보는 험난하고 위험한 길을 여러 달 걸려 가나안에 이주한 것입니다.
목숨을 건 여정이었다고 봐도 좋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실제적인 사실이 없었다면 이 여행은 절대로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나안을 향해 떠났다고 신약성경은 기록합니다.
성도들 역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처럼 보이지 않는 약속의 땅 천국을 향해 믿음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그림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단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드디어 가나안에 도착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수고했다, 잘 왔다. 여기가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가나안 땅이다’ 라고 말씀하시죠?
물론 당시에는 온갖 죄로 땅을 더럽히고 인간의 존엄성이 다 파괴 된 가나안 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땅에 대한 약속은 일차적으로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번성해서 그들을 심판하고 차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수아에 의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졌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가리키는 또 하나의 의미는 장차 아브라함의 족보를 통해 오실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본문에서도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고 하시죠?
우리 말로는 차이가 분명하지 않지만 원어로는 확연히 구분됩니다.
‘자손들’에게가 아니라 ‘자손’이라고 딱 한 명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광대한 땅을 자손 한 사람에게 주신다는 게 좀 이상하죠?
영생하는 천국의 기업은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예수님 한 사람에게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그 기업의 상속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가나안에 갔더니 약속대로 그 땅의 주인이 된 역사적 인물로서 우리 신앙의 장래 결과를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또 아브라함의 전 생애를 드라마와 같이 볼 수 있는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아브라함의 신앙여정의 단편을 통해 우리 가정에 주시는 교훈을 살펴볼까요?
드디어 가나안 땅에서의 아브라함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7절,8절에 거기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당장 그 땅이 주어졌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가나안땅을 주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거기 말뚝을 박고 줄쳐 놓고 여기가 네 땅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 땅을 완전히 소유하기 까지는 자손이 번성해야 하고, 모든 여건이 조성되야 되는 것이죠.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완전한 구원을 누리기 까지 성도들의 신앙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후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았다고 9절은 밝힙니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났고 예배를 드렸던 가나안의 중심부인 벧엘을 떠나 왜 남방으로 점점 내려갔는지 이유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추측하건대, 가나안 중심부에 살고 있는 호전적인 원주민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남방으로 내려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방은 네게브라는 사막지대가 광활하게 펼쳐진 곳입니다.
눈치 안보고 좀 편하게 살 곳을 찾았던 것이겠죠.
가나안 땅에서 아직은 불안정한 아브라함의 입지 조건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온 땅의 소유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그 땅을 증여받았지만 아직 그의 시대가 오지 않았습니다.
성도들도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죽음 다음의 영원한 세상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서도 이미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몸담은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을 반대하는 문명이 치밀하게 지배하고 있는 곳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빠집니다.
아브라함이 남방으로 옮겨 간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보여주고 확신시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의 땅에 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당장은 어려움이 좀 있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보호를 확신하며 가나안 땅에 버티고 살아가야 옳았습니다.
10절에 보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간 다음 가나안 지역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물론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있고 어려움이 닥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닥치는 기근은 대개, 거기 함께 사는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이거나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때로 이런 기근과 같은 어려움에 밀어 넣으십니다.
거센 바람을 맞는 나무들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뿌리를 깊이 내린다고 하죠.
알맞은 시련은 성도들의 신앙인격을 강인하고 성숙하게 해준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성도님들 가정에 어려움이 있고, 시험이 오면 혹시라도 믿음에서 미끄러질까봐 그전엔 제가 몸이 달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목회 경력 7년차가 되니 기도는 하되 몸이 달을 필요까지는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시험도 주고 견딜 힘도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도님들이 이런 고난을 통해 세상에 대한 구구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진짜 복된 믿음의 세상으로 점점 발을 옮겨지는 모습을 보면 놀라울 뿐입니다.
다만 오늘 아브라함처럼 약속의 중심부를 벗어나 외곽지대를 도는 신앙은 기근에 직격탄을 맞을 수 있습니다.
남방 네게브는 사막지형이다 보니 기근이 들면 동산을 끼고 저수지까지 갖췄던 벧엘에 비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은혜와 축복의 근원이신 예수그리스도께로 깊이 뿌리를 내리면 가뭄에도 잘 견디며 늘 물댄 동산 같은 촉촉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가 틈나는 대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내 모든 판단과 행동의 근거로 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줄을 놓게 되면 조금씩 세상 쪽으로 뒷걸음질 치다 기근이 닥치고 시련이 오면 바로 옆에 있는 애굽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애굽은 성경에서 세속과 하나님 없는 삶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이 성경 전체에 여러 번 나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에게 당대 최고의 문명을 이루었던 이집트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머물며 축복을 받고 거기서 번성해가야 하는데, 점점 남방으로 내려간 아브라함은 결국 기근이란 극한 상황이 되자 애굽의 식량을 의지하러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애굽의 삶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오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에서 받는 위기는 약속의 땅에서 받는 시련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입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를 보면 이집트 입국을 앞둔 아브라함에게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애굽인들이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보고 남편인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사라가 오늘만 이뻤던 게 아닙니다.
그게 두려움의 원인이라면 가나안 사람들인들 애굽인보다 별 달랐겠습니까?
갑자기 예쁜 아내로 인한 두려움이 생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애굽엔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기에 두려웠던 것입니다.
가나안땅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지만 애굽에 내려올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선택과 결정으로 온 것입니다.
우리 삶을 매일 하나님과 결부시키고, 주님께 주파수를 맞추고 우리 형편을 계속 예수님께 기도로 타전하며 살지 않는다면 나홀로 세상은 두렵습니다.
하나님께 오늘을 맡기고, 자녀들의 안전을 맡기고, 장래를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를 확신하지 않기에 두려운 것입니다.
애굽에선 모든 약속에 대한 확신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식 없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게 안개 속 같이 뿌옇게 되며 막막한 두려움과 허탈감이 엄습하는 이유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아직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이 죽을 리가 없습니다.
약속의 땅을 벗어나니 하나님의 약속도 어렴풋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주신다면 당연히 생명도 보장해 주시는 것 아닙니까?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선 당연히 자손을 부성케 하시고 가나안 땅의 패권을 쥘만한 최강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이 무엇인지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면 누가 봐도 복받았다고 생각할만한 알찬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매일 여기저기 사고가 터지고,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해야 할 문제들 틈바구니에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살아간다면 그게 어디 복의 근원이 되는 삶입니까?
혹시 어려움을 당해 잠시 힘든 시기를 보낼 때에도 주님 안에 있으면 오히려 고난 중에 더 빛나는 놀라운 위엄을 보여주게 됩니다.
지난주 김연자권찰님이 넘어지셔서 얼굴을 좀 많이 다치셨습니다.
가게에 갔다가 소식을 듣고 제가 너무 놀라서 집으로 찾아갔는데, 얼굴은 많이 상했지만 권찰님이 그렇게 편하고 밝아 보이실 수가 없는 거예요.
본래 잘 웃으시지만 그런 상황에서 편한 마음으로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에 하나님의 자녀의 위엄이 오히려 느껴져서 제가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시련을 견디고 이겨내는 성도들을 보면 얼굴이 훈장 같이 빛나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가나안 생활에 기근이 있다면 땅만 바라보며 땅만 파지 말고 하늘에서 주시는 단비를 기대하라는 뜻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과 가족들의 심령에 사랑이 메말라 삭막함을 느낀다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와 사랑의 단비로 물댄 동산 같은 가정이 되게 해주시길 꾸준히 기도하고 받으시길 축복드립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비굴한 제안을 합니다.
애굽에 들어가면 오누이 행세를 하자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사래를 남의 아내로 내줘서라도 자기 목숨은 구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이 순간 사라의 마음이 무너지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을 것입니다.
아내를 버린 것입니다.
아내들은 믿고 싶지 않겠지만 궁지에 몰리고 죽음 앞에 까지 가면 남편들은 아내를 버립니다.
아내도 마찬가지겠죠.
빗발치는 총탄을 몸으로 막고 대신 죽는 남자의 모습은 영화 속에나 있고, 태양의 후예들이나 하는 것이지 아담의 후예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는 거래입니다.
가족도 부부간도 어쩔 수 없이 계산이 들어갑니다.
밀당은 연애시절에나 하는 것이고 가족이 되면 철저히 주고 받는 관계라고 보면 됩니다.
결혼 생활에선 밀당 잘못하면 큰 싸움 납니다.
남편들이 잘해주면 밥상에 좋아하는 반찬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못마땅하게 하면 일주일 곰국만 먹습니다.
연애시절엔 도파민 부작용으로 본성을 잠시 잊고 애인을 보호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용맹도 보이지만 제정신 돌아오면 그럴 사람 없습니다.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한번 맞춰 보십시오.
일번, 얼굴이 예쁜 여자. 이번, 몸매가 좋은 여자. 삼번, 성격이 좋은 여자. 사번, 처음 보는 여자.
정답은 처음 보는 여자입니다.
아내들이 얼마나 불리한지 아시겠죠?
성경에서 최초로 아내를 버린 사람이 아담입니다.
하나님이 금기하신 선악과를 먹고 나서 아담이 죄를 묻는 하나님께 자기 방어적으로 한 말이 ‘당신이 내게 준 저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 였습니다.
아내들은 목숨을 건 남편의 사랑을 원할지 모르지만 아담의 후예인 남편들은 죽음 앞에선 아내보다 자기의 목숨을 택합니다.
아브라함이 남보다 비겁자라서가 아닙니다.
가족을 이끌고 6백킬로를 이동해 타국에 온 것은 결코 아브라함이 용기 없는 비겁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뒤에 보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집에서 훈련시킨 삼백여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가나안 연합군과 싸워 승리하고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순간 죽음 앞에 떨어야 하는 게 인간입니다.
자기의 안전과 아내의 깨질 운명을 놓고 갈등했을 아브라함의 마음의 고통도 분명히 죽음직전까지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안전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게 사람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서로 배우자를 원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두렵고 불안해서 그런 것이잖아요.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이용해 자기가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가족이라면 꼭 지켜야 할 것이 자기를 위해 가족을 희생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밖에서 힘들고 마음이 괴롭고 불행하면 집에 와서 아내와 자식들을 희생양으로 잡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보면 아버지들이 밖에서는 호인 소리를 듣고 남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듯 그렇게 잘하면서,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들에게는 참 야박하게 대했습니다.
자식들에겐 따뜻한 말 한마디 잘 건네지 않았죠.
밖에서 힘들고 세상만사가 마음대로 안되는 불편한 자기 감정을 가족들에게 분풀이처럼 쏟아 놓기가 일쑤였습니다.
우리 세대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숨죽이고 살았던 어린 시절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 소망도 없고, 기댈 데도 없이 가장의 짐만 무겁게 진 아버지들의 애환인지도 모르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도 가족들을 희생하고 아픔을 준다면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자기 아들에게 상처 준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린이 날이라 선물을 준비했는데 나눠주다 보니 하나가 모자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받고 좋아라하는 자기 아들 것을 뺏어서 남은 아이에게 줬다는 것입니다.
아들 얼굴이 울상이 되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마음이 아팠다고 하더군요.
교회 봉사할 음식 만들다 남편들이 집어 드시면 째려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죽음 앞에서 떨고 있는 아브라함의 생에 대한 애착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게 인간이란 것을, 하나님을 만났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어도 눈에 보이는 현실에 무너지고 마는 것이 인간이란 것을 긍휼의 눈으로 끝까지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궁전으로 끌려간 위기의 사래를 구해내시고 이 믿음의 가정을 지켜주셔서 약속대로 가나안의 기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연약함과 실패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받기까지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보시고 이해하신다 해도 나로 인해 인간사에 얽힌 문제들을 내가 당하고, 내가 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가정을 대표하는 권위를 위임받은 가장은 가족을 보살피고 돌봐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리더가 되는 것엔 팀을 책임지는 것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면 겉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가족들은 가장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위기의 순간 가족을 버린 가장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가족은 없습니다.
이 사건이 있고 난 뒤 아브라함의 리더십이 급격하게 손상된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아브라함과 함께 했던 조카 롯이 분가하는 일이 바로 이어서 발생합니다.
롯의 눈에도 비열하게 숙모를 바로의 궁전으로 들여보내고 댓가로 재물을 챙기기까지 한 삼촌이 더 이상 자신을 의탁할 대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겉으로야 한 동네 살기엔 양떼가 너무 많고, 그로 인해 목자이 다퉜기 때문이라지만 분가하라는 아브라함의 말에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소돔 땅을 선택한 롯의 심중엔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사라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다음 장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전에 없던 강경한 자세로 자기 여종을 취해 자식을 낳으라는 비도덕적인 일을 강요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배운 것입니다.
약속을 받은 지 십년이 되었지만 아기가 생기지 않자 여종을 통해서라도 아기를 안아 보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생긴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아브라함의 실수 이후 가정이 급속하게 무너지고 불안정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무너진 것입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이용만 한다면 신뢰와 사랑은 깨지고 상처만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어이없게도 동일한 실패를 14장에서 똑같이 저지릅니다.
우리 마음 깊숙이 자리잡은 두려움과 죄의 존재가 얼마나 집요하고 뿌리 깊은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결국 아브라함은 점점 연단을 통해 성숙으로 나가 이 두려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합니다.
그가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아브라함이 순종하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떠났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백세에 낳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 그 아들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활의 믿음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고 온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기에 이삭이 죽을 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거장, 명실공히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이 아니면 누구도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또 창세기 26장에서 사라의 죽음 앞에서 애곡하는 노년의 아브라함에게서 과거에 아내에게 깊은 상처를 준 회한과 미안함이 애절하게 느껴집니다.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은 대부호로 살았지만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평생 장막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매장지를 위해서 유일하게 가나안에다 값비싼 땅을 사서 사라를 매장합니다.
사라가 가나안의 여주인이라는 것을 천하에 인정하는 것이죠.
그러나 늦기 전에 소중히 대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엔 가정을 만들기는 어렵지만 깨지기는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지켜 안전하고 복되게 하시길 원하시고 그렇게 인도해주십니다.
우리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고 복된 가나안이 되게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리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곁에 있는 아내와 남편, 가족들을 사랑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부부에게 원하시는 것은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되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목숨을 주신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아내로서는 죽음과 다름없는 상황에 넘겨주었지만 교회의 남편 되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가정이 채워지도록 매일 기도하며 가정을 아름답게 세우시고, 청년들은 그런 가정을 위해 많이 기도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내가 울 때 등을 토닥거려 줄 사람은 가족 밖에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어색하면 대신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시기 바랍니다.
견실하고 장수하는 결혼관계를 조사해본 결과 고맙다는 말을 자주하는 부부라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가정을 축복해주시길 기도합니다.
206년5월15일 부부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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