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주제를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이삭 장가보내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창세기에서 가장 긴 장이 바로 24장입니다.
이삭 장가보내는 이야기가 이렇게 길고 상세하게 기록된 것을 보면 단지 결혼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본문의 등장인물은 아브라함과 충직한 종 엘리에셀, 신부 리브가입니다.
24장엔 이 세 사람이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며 마치 짜맞춘 듯이 이삭의 결혼이 성사되는 과정이 한편의 아름다운 드라마처럼 전개됩니다.
이들의 믿음과 인격과 지혜와 용기가 서로 화합하여 하모니를 이루는 모습은 경건하면서도 따뜻한 성도들의 삶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신앙 안에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관점에서 주로 설교되는 데, 오늘은 각 등장인물을 통해 믿음의 삶에 대한 더 풍성한 진리들을 찾아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아브라함에 대해서 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나이가 많아 늙었다고 하죠.
이삭의 지금 나이가 마흔이니 아브라함의 나이는 백사십살 정도입니다.
이젠 인생을 마감할 나이인데 본문은 하나님께서 범사에 그에게 복을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었고 주변 부족들이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복도 주셨습니다.
본문 바로 앞 장에 보면 아내 사라가 자신의 수를 다 향유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본문 바로 뒷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재혼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40살이 넘어서 재혼을 했다는 뜻이죠?
축복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다 다음 장 1,2절을 보면 여섯명의 자녀들을 더 주셨다고 합니다.
아브라함 노년에 늦둥이 여섯의 재롱을 보며 여전히 황금 같은 말년을 보내고 이들에게도 죽기 전에 다 큰 재산을 나눠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령한 축복만 갖고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자연적인 몸이 누릴 좋은 것들을 이렇게 많이 창조해주셨는데 왜 굳이 금욕적으로 살겠어요?
아브라함처럼 거부가 되게 하시면 그 또한 얼마나 축복입니까?
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실 땐, 잉여 된 부분은 없는 이들과 나누라는 게 원칙이십니다.
나만 호의호식하고 산다면 내세의 결산에서는 물론이고 현세에서 재물의 이면에 있는 더 큰 보람과 기쁨을 모르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는 것일까요?
물론 아브라함의 복에는 현생에서 누릴 물질적인 복을 뛰어넘는 영적유산이 더 많은 의미가 있다는 것은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이라는 히브리단어가 가진 뜻에 주목해봅니다.
이 ‘복’이라는 단어는 ‘무릎을 꿇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아브라함이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하게 된 데서 그런 복을 받았다는 것이죠.
누군가는 이 장면에서 ‘아브라함이 이제 철이 들었다’ 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긴 기다림과 타향살이 반평생의 숱한 시련과 연단을 통해 아브라함이 드디어 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도 철이 드는 데 칠십년이 걸렸습니다.
아직도 철이 안 든 나와 우리 자식들, 배우자, 성도들, 이웃들에 대해 좀 느긋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죠?
자식들이 철이 들면 더 이상 부모와 싸우지 않고 부모 말에 토를 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성도가 철이 들면 하나님 뜻에 토를 달지 않습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자기도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일치가 되거든요.
그 전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원수처럼 대치했었는데, 그 둘이 갈등없이 점점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과거엔 하나님만 내 죄를 미워하셨지만 이젠 나도 내 죄가 밉습니다.
우리의 옛성품과 인격이 점점 하나님의 뜻에 맞춰져 가는 것이죠.
그러니 범사가 잘 될 수밖에요.
인간사의 모든 어려움은 다 인간의 못된 천성이 만들어낸 결과잖습니까?
환경도 날 괴롭게 하지만 내가 날 괴롭히는 것이 실은 더 많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생애가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문제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신앙이 철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같이 그 인격이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되고 일치되어 범사에 복을 받는 신앙은 그냥 이를 악물고 견딘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시련 중에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내 잘못이 있는 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나를 하나님께 맞춰가려는 노력이 없다면 고생은 그냥 헛고생으로 끝납니다.
대개 고생은 오히려 사람을 더 완강하고 고집스럽게 만듭니다.
이번에 정옥금집사님이 무릎 수술을 받고 아직 회복 중에 계신데 병상에서 단 며칠 사이에 창세기부터 레위기까지 읽으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말씀이 달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고 하시는데 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시련의 때에 이렇게 더 하나님을 의지해 마음을 굳세게 하고 이겨나갈 때, 하나님도 복을 주시고 우리 신앙이 점점 철이 들어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신앙이 철이 들어갈수록 삶이 안정되고 복이 임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하나님에 대해 체험적으로 잘 모르는 시기에는 하나님을 따돌리고 재미 보며 살려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철이 들어가면 하나님을 보호자로 동반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점점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좀 멀어진 것 같으면 그게 가장 두렵고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온 인격으로 주님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믿음으로 점점 성숙해 가기를 축복드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아직 남아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너의 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빨리 응답되는 것도 있고 시간이 좀 걸리는 응답도 있죠.
가나안 땅에 온지 칠십여년이 되었지만 지금 아브라함이 얻은 땅이라고는 고작 아내 사라를 매장하기 위해 산 밭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돈이 그렇게 많은 아브라함이 왜 가나안에 땅을 안사고 나그네처럼 살았을까요?
아브라함의 재력으로라면 한 부족국가를 세울 땅 정도는 넉넉히 살 수 있었을텐데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아브라함이 천 평, 이 천 평 사 모으는 게 아닙니다.
땅이 더럽혀질 만큼 부패 된 가나안 부족을 때가 되면 심판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째로 주시겠다고 하셨거든요.
늙은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켜 가나안땅을 차지할 자손들을 이어가게 할 중대한 임무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감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3,4절에 보면 지금 살고 있는 가나안 땅 부족의 딸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에 많은 왕과 부족장들을 상대하던 사람입니다.
그 중에 예쁘고 심성 고운 공주 신부감이 없어서 그랬겠습니까?
그렇게 정략결혼이라도 시킨다면 타국에서 사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그런데 굳이 자기의 고향 땅에 가서 찾으려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이 땅을 장차 네 씨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가나안 여자와 결혼해서 자손들이 가나안 혈통이 되면 가나안땅이 다시 가나안 사람 손에 넘어가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안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이스라엘역사를 보면 일관되게 이방인과 통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우상신을 섬기는 백성들과 섞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축복받을 자들이 아니라 진노의 대상입니다.
그들이 넘어 오면야 좋지만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로 넘어가잖아요?
실제로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본토 사람들과 통혼하고 혈연으로 얽혀 살다 똑같이 타락하고 결국 가나안 땅에서 망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신약시대에도 사도들의 명령을 통해 그대로 이어집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려는 두 소가 한 멍에를 메니 어떻게 밭을 잘 갈아 풍성한 결실을 누리겠습니까?
결국 한 쪽은 축복을 한 쪽은 저주를 유산으로 받을 운명이니 그 갈등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과 직원들과 이웃들과 함께 사는 삶이 얼마나 신자들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끌어 내리는지 겪어본 사람들은 다 압니다.
배우자나 직장이나 미래를 선택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내 믿음에 줄 영향과 하나님의 나라에 공헌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이것을 명령하지 다른 융통성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눈에 보기 좋은 숱한 가나안 며느리감을 포기하고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러 충직한 늙은 종을 자기 고향 하란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리 충직한 엘리에셀이라도 난감한 임무였습니다.
어떤 처녀가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의 말을 듣고 팔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머나먼 외국 땅으로 모르는 남자와 결혼 하겠다고 따라오겠습니까?
낙타를 타고도 한 달은 걸릴 머나먼 이국입니다.
엘리에셀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믿고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만일 좋은 신부감을 골랐지만 따라 오지 않겠다고 할 경우엔, 이삭을 거기로 데려가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십중팔구 따라 올 여자는 없을 거라는 말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삭을 거기로 데려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삭은 이 가나안땅의 상속자니 여기를 떠나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신부감을 미리 준비해 두셨을테니 가서 데려오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도 믿음의 배우자에 대해 확신을 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자가 거절하면 차라리 그냥 돌아올지언정 이삭은 절대로 가나안을 떠날 수 없다고 합니다.
과거 아브라함과 달라진 면을 보시나요?
그는 가뭄만 들면 가나안 땅을 벗어났던 사람입니다.
그 결과는 참담한 수치였다는 것을 그는 몸소 체험한 사람입니다.
인생에 어떤 가뭄이 들 때라도, 시급한 배우자문제일지라도 축복이 약속된 믿음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터득했듯이 우리도 그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보장 된 유일한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안입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정도 하나님을 오래 믿고, 헌신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복받을만한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기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축복의 땅을 떠나지 않은 것처럼 우리와 자녀들이 예수님 안에 굳게 머물러 천국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다음은 충성된 종 엘리에셀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깨닫고 아브라함의 명령을 신속하고 완벽하게 완수하는 엘리에셀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된 성도의 위엄과 영광을 봅니다.
이 정도면 종도 위엄이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의 지위와 생활정도가 우리를 미천하게 하지 않습니다.
충성된 종에게 주인은 자기의 영광을 나누어줍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거부의 재산을 다 맡기며 그를 신임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아브라함이 상속자로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12절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신부감을 만나게 해 달라는 그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이 느껴집니다.
평생 아브라함 곁에서 모든 것을 보았던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확신 있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이 기도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에 당도한 엘리에셀은 먼저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친척집을 찾아가 마땅한 신부감을 추천받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그 여자가 하나님이 보내주신 신부감인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엘리에셀은 이 일이 단지 한 사람 주인아들의 혼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미칠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해했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신부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에셀의 기도는 다소 엉뚱합니다.
그 성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오는 시각에 우물 곁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죠?
그리고 한 소녀에게 물동이의 물을 내게 좀 마시게 달라 해서 그 소녀가 흔쾌히 물을 줄 뿐 아니라 낙타 열 마리에게도 물을 길어 준다면 그가 바로 이삭의 신부감으로 알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엉뚱한 기도입니까?
그런데 엘리에셀이 이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거기 나타난 것입니다.
자기의 기도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 리브가를 보며 엘리에셀이 소름이 돋았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종종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로 그린 듯이 정확하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지 경험하며 온 몸이 찌릿해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깊숙이 체험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엘리에셀의 기도할 내용을 아시고 리브가를 준비시켜 그 시간에 우물가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기도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왜 엘리에셀의 이 타협되지도 않은 엉뚱한 기도에 즉시 응답을 해주셨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도 아무거나 정해 놓고 그렇게 기도해도 되는 것일까요?
여기는 두 가지 신앙의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먼저는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원칙 안에 있냐는 것입니다.
이삭에게 리브가를 아내로 주고 하나님의 백성을 조성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 원칙을 벗어나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작정하신 뜻을 누구를 통해서 이루시냐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바쁜 일과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일일이 다 체크하고 가부를 판단하겠습니까?
우리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고, 이미 성경을 통해 알려주신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를 분명한 의사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그대로 맞춰서 리브가를 데려다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건, 어떤 순서로 일을 추진해 나가건, 믿음의 동기가 순전하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결과를 거기에다 맞춰주십니다.
매순간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 볼 때, 혹시 잘못된 결정으로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신뢰하고 바르게 행하고 있으면 기도하고 내린 어떤 결정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대로 보장해주셨잖습니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믿음의 삶은 깊어질수록 단순해집니다.
복잡하게 꾀를 내고 머리를 교묘하게 굴리며 상황을 조작하지 않게 됩니다.
나보다 더 나으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루하루 말씀대로 살면 내 생각이 곧 하나님 생각이고 내 소원이 곧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성령께서 가책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상식적인 결정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일 그래도 우리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막으실 것입니다.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탁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고, 상식에 맞게 최선을 다해 담대하게 삶을 진행하면 됩니다.
지혜로운 늙은 종 엘리에셀은 자신의 생각대로 담대하게 기도할 뿐 아니라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작전을 짜서 합리적으로 처신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신부라면 당연히 자신을 따라 올 것이니 빈손으로 가서 더 확실히 시험해보자라는 무모한 계획을 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의 불가능한 일을 성사시키려면 적어도 열 마리 낙타에 가장 좋은 보물을 가득 싣고 가야 한다는 상식 안에서 행동합니다.
당시 낙타는 운송수단으로 값이 비쌌고, 오늘로 말하자면 승용차입니다.
열 대의 승용차에 선물을 가득 싣고 떠난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공세로 신부를 데려오려는 게 아닙니다.
신부를 데려올 때 선물을 주는 풍습을 따를 뿐 아니라 리브가의 가족들이 마음 놓고 보내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한 것입니다.
리브가의 오빠가 누구입니까?
나중에 리브가의 아들인 야곱을 이십년씩이나 무임금으로 부려 먹었던 탐욕스런 라반입니다.
본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라반이 리브가를 보내기로 결정하는 데 엘리에셀이 준비한 낙타와 엄청난 선물이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일이 성사되도록 현재 의무를 상식과 지혜안에서 다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 중에 하나님은 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도 제시해주십니다.
성도들의 이 땅의 삶은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믿고 우리의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맞추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리브가의 믿음에 대해서입니다.
본문에서 단연코 돋보이는 것은 선량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리브가입니다.
나그네에게 한 바가지의 물을 떠 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엘리에셀에게 물을 대접하는 리브가의 공손한 태도도 아름답죠.
그런데 열 마리의 낙타에게 다 물을 길어 마시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나설 일이 아닙니다.
낙타는 한번 물을 먹으면 보통 70리터 이상을 마신다고 합니다.
자그마치 열 마리에게 물을 먹이려면 칠백리터가 넘는 물을 길어대야 한다는 것이죠.
리브가가 그것을 자청한 것은 긴 여행길에 사람도 지쳤지만, 짐을 싣고 사람을 태우고 사막을 건넌 낙타의 지친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천성적인 이기심을 따라 살지 않고 항상 다른 이의 필요와 자신이 속한 가정과 공동체의 필요에 봉사하도록 가르치고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따뜻하고 희생적인 마음이 준비 된 만큼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엘리에셀은 이렇게 리브가의 인도를 받아 그 가족을 만나 자초지종을 세세하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리브가에게 하나님이 깊이 역사하십니다.
거룩한 사람 엘리에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충직과 신실함에서 순진한 어린 소녀 리브가의 마음에 신뢰감과 신앙에 대한 모험심이 솟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리브가가 낙타 열 마리에 싣고 온 금은 보물과 선물들을 보고 부잣집 며느리가 될 생각에 따라 나섰겠습니까?
리브가의 집도 부자였습니다.
리브가가 엘리에셀을 따라 나선 것은 그를 통해 들은 대로 하나님께서 어떤 위대한 계획에 자기를 부르고 계시다는 믿음이 싹텄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시면 누구도 약속의 땅을 향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싫어하며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그 죄의 힘이 지옥을 향해서 갈만큼 거대하고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움직였고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강한 본성의 힘을 저지하고 방향을 전환시킬만한 엄청난 하나님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없이는 아무도 가던 길에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지난 한 주도 믿음 안에서 살려고 노력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조금이라도 시도하며 살았던 그 별 것 아닌 것 같은 신앙행위들이 결코 미약한 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지원해 주시지 않으면 다 나가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한 성도들과 함께 할 때 우리는 믿음에 대한 흥미와 스릴을 맛보며 함께 천국의 영광을 향해 힘차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신앙을 보며 또 다른 리브가가 천국을 향한 여정에 함께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했던 것처럼 리브가 역시 믿음으로 그 길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를 여자 아브라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오직 믿음으로 천국의 여정을 떠난 성도들의 표상입니다.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 가나안땅과 신랑 이삭을 향해 간 리브가는 자연적 삶을 떠나 신랑 되신 예수님과 천국의 여정을 향해가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어린 소녀 리브가의 믿음의 결단은 아직도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주저하는 이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지 않습니까?
이직도 천국의 여정을 주저하고 계시다면 지금 당장 따르십시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은 단지 이스라엘의 조상인 이삭의 결혼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한 민족을 성실하게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60절에 보면 리브가의 오빠인 라반이 이렇게 말합니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네 씨가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이 말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죠?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이기실 것을 예표하는 대표적인 구절이잖아요?
그리고 그 일이 신실한 성도들의 아름다운 순종과 축복받은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엘리에셀, 리브가, 이 세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계획에 발을 맞추는 모습은 얼마나 훈훈하고 따뜻합니까?
하나님을 함께 섬기며 그 뜻을 이뤄가는 성도들의 모습인 것이죠.
우리의 마음 중심을 흔들리지 않게 예수님께 향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지혜롭게 하루하루 행하며 나날이 더 많은 은혜와 복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6년10월9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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