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도 녹록치 않은 생활 현장에서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어떤 문제들로 씨름하다 오셨는지 모르겠네요.
때로 뒤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파 할 수도 없는 상황을 만날 때가 있죠.
오늘 야곱이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바울의 생애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친숙하고 공감이 갑니다.
야곱의 인생에서 우리의 인생을 보고 야곱에게서 우리 안의 야곱기질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속이고 뺏는 자였습니다.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근성이죠.
악착같이 살았지만 야곱의 인생에서 행복한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 자신의 말대로 험악한 세월을 보낸 사람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아브라함과 다윗만큼 의미 있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오늘 절박했던 순간에 야곱이 하나님과 싸워 이스라엘이 된 내막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결론에 반전이 있습니다.
야곱의 삶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큰 깨달음과 은혜를 주시길 소망합니다.
먼저 이런 일이 생긴 배후와 야곱의 문제적 성격에 대해 보겠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은 쌍둥이 형제인 야곱과 에서간의 갈등에서 촉발되었습니다.
이 형제의 난은 장자에게 돌아올 축복에 대한 야곱의 집착에서 시작됩니다.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동생으로 태어난 야곱은 에서가 부러웠습니다.
에서는 사냥도 잘하고, 남자답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
결국 아버지 이삭의 모든 복은 에서에게 돌아갈 것이 뻔했습니다.
질투와 시기심이 얼마나 사람에게 비참한 울분을 일으키는지 아십니까?
형제들이 많은 집에선 이런 비교의식과 부모의 편애로 인해 상처받는 자식들이 많죠.
하나님은 사실 그리스도의 족보를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서 잇기로 이미 정하셨습니다.
모친인 리브가에게 큰 자가 작은자를 섬기리라고 하셨고 리브가가 사랑했던 야곱은 그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가 앞서 꾀를 내 형의 장자권을 뺏었습니다.
사냥하고 돌아와 허기져 죽을 지경이 된 에서와 팥죽 한 그릇을 놓고 장자권을 거래하죠.
삶이 자신만만했던 에서는 장자의 축복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팥죽 한 그릇을 받고 장자권을 넘겨 줍니다.
그리고 야곱이 20년 타향살이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이삭은 죽기 전 에서에게 안수하고 장자의 축복을 주려고 합니다.
고령의 아버지가 눈이 안 보이는 걸 이용해 야곱은 에서로 변장하고 들어가 장자의 축복을 가로챕니다.
분노한 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야곱을 없애버리겠다고 마음먹죠.
결국 야곱은 에서의 분노가 수그러들 때까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을 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외삼촌 집에 얹혀 살면서도 야곱은 여전히 야곱이었습니다.
라반에게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딸이 있었죠.
야곱은 아리따운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7년을 무보수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야곱만큼 약삭빠른 라반은 첫날밤에 라헬대신 큰 딸 레아를 들여 보냅니다.
속이고 속는 게 세상이죠.
나만 속이는 게 아니라 남도 나를 속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 사실에 분노한 야곱에게 라반은 7년을 더 일해주면 라헬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야곱은 이번에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꼭 가져야 했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여 라헬도 아내로 얻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보면 자매를 동시에 아내로 얻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집에서 자매가 한 남편과 산다는 것을.
지난 주 할아버지가 죽은 뒤 한 집에 살고 있던 할아버지의 아내였던 두 할머니 중 사람이 한 사람을 흉기로 때려서 죽인 사건이 있었잖아요?
평생 둘이 당했을 고통이 어땠는지 알만하죠.
야곱의 집에선 자매간의 그런 가슴 아픈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자식 낳기 경쟁을 벌여 두 여종까지 동원하는 바람에 야곱에겐 네 아내가 생깁니다.
네 아내와 배 다른 자식들이 한 집에 살았으니 집안에 무슨 웃음소리가 들렸겠어요.
야곱이 인륜을 버리고 원하는 대로 가진 결과입니다.
아무리 막 나가는 성경인물 중에도 자매를 아내로 취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계보도 레아가 낳은 유다로 이어지잖아요.
야곱은 라헬을 포기하고 멈췄어야 했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끊이지 않는 탐욕의 사람이었는지 그의 후손 모세는 창세기에 이렇게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이십년을 보내고 야곱은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서가 아직 야곱에 대한 원한을 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에서는 장정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향해 마주 오고 있었습니다.
환영하겠다는 것은 아닌 게 분명하죠.
야곱은 생사의 기로에서 위기를 모면할 모든 꾀를 동원합니다.
에서에게 상납할 막대한 가축을 종들에게 맡겨 앞세웁니다.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데 선물만한 것은 없잖아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도 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의 관문인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샛강인 얍복강 앞에 당도했습니다.
가족들을 앞세워 얍복강을 건너게 한 뒤 야곱은 혼자 남았습니다.
혼자 있고 싶을 때, 그 심정 다 아시죠?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일을 상상하며 야곱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 야곱을 상대로 몸싸움을 벌입니다.
그럼 한 밤중에 일어난 이 이상한 씨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런 특이한 사건일수록 그 속에 담긴 의미는 크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죠.
24절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마치 한밤중에 도깨비가 나타나 씨름하자고 덤비는 그런 전래동화가 떠오르죠?
먼저 야곱에게 씨름을 건 사람이 누구냐입니다.
30절 보면 야곱이 아침에 이 장소를 브니엘이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그러니까 야곱과 밤새 씨름한 이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뜻이죠.
구약성경 시대에도 사람들을 찾아오신 분은 성자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 혹은 여호와의 천사, 그리고 본문처럼 그냥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 밤에 하나님께서 내려와 야곱과 씨름을 한 것일까요?
때로 하나님은 우리와 담판을 지으실 순간을 포착하십니다.
우리는 거의 그런 시기에 방향을 틀어 하나님께 나오게 됩니다.
사람이 갖고 있는 세속적인 생각과 세계관이 영원한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땅에서 태어나 세상을 살면서 습득한 세상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갖게 된 나름의 인생관, 세계관이 있잖아요?
그것을 송두리째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나마 안전하게 여겼던 인생이 큰 위기 앞에서 흔들릴 때 하나님을 받아들이기가 좀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 야곱을 다루시기 위해 작정하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야곱에게 오신 여호와의 사자는 밤새 야곱을 붙들고 씨름하십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이 씨름하시는 거예요.
우리도 고집 센 자식들과 매일 씨름하잖아요?
하나님이 야곱만 붙들고 씨름 하시겠습니까?
우리를 붙들고도 매일 씨름하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믿음을 주고 자녀를 삼으신 이상 반드시 붙들고 씨름하십니다.
당연히 우리를 복되게 변화시키고 아름답게 성장시켜 가시려는 것이죠.
부모라면 당연히 그렇잖아요?
우리는 부모라도 자식들을 내 생각대로 훌륭하게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식들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상 야곱처럼 변하지 않고 버틸수록 인생이 험악해집니다.
야곱은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다고 라반에게 말했었죠.
아마 제대로 먹지도 않고 악착같이 재산을 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모은 가축을 550마리나 에서에게 상납하게 되잖아요?
악착같이 모아도 남의 것이 되는 것이죠.
사람들 중에 보면 꼭 끝이 안 좋게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야곱이 그랬습니다.
형 에서와 그랬고, 아버지 이삭과도 그랬습니다.
또 외삼촌 라반과도 그랬습니다.
그 눈총이 불편해서 결국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야반도주해 나온 상황입니다.
그의 수중에 움켜 쥔 것은 점점 사라지고 그의 곁의 사람들은 떠납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욕되게 살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반드시 신자들을 다루십니다.
불신자들을 다루시는 게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세상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게 두십니다.
서로 속고 속이며 요행이 잘되기도 하고 때로 재앙을 만나 망하기도 합니다.
불신자들은 마지막 날까지 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지막 날에 가서야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것이죠.
그렇기에 안 믿는 사람이 왜 저렇게 잘 되냐고 불평할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또 남보다 열심히 노력했다면 잘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내 맘대로 살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세상조건을 다 갖췄다 해도 안됩니다.
에서는 제 맘대로 살아도 잘 나가잖아요?
야곱이 들에서 새우잠을 잘 때 에서는 아버지 집에서 호의호식합니다.
창세기를 36장을 보면 에서의 장모가 온천을 발견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처가복도 있잖아요?
또 오늘 장정4백명을 동원할 만큼 재력과 영향력이 컸습니다.
힘세고, 사냥감도 척척 잡아오는 실력자입니다.
나중에 보면 재산이 하도 많아 야곱과 함께 살 수 없게 되자 쿨하게 세일 땅으로 이사를 갑니다.
무얼 해도 잘되니까 겁 없이 사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떻게 살아보려고 꾀를 낼 때마다 일이 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고쳐 가시는 데 먼저 환경과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야곱에겐 그 사람이 외삼촌 라반이었고, 형 에서였습니다.
문제는 험난한 이십년 타향살이에도 야곱이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젠 하나님이 직접 나서셔야 했습니다.
야곱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출몰한 사람이 에서가 보낸 자객이라고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사람의 신비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브니엘이라고 부른 것이잖아요?
그런데도 야곱은 하나님 앞에 그 강한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씨름을 한다면 단지 몸싸움만 했겠습니까?
기도의 씨름을 하다보면 하나님이 별 걸 다 생각나게 하시잖아요?
야곱의 속이는 못된 기질과 지독한 자기본위의 삶, 인간적 꾀로 살아 온 일을 주마등처럼 보여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야곱의 의지를 꺾지 못하십니다.
사람들이 끝까지 하나님께 안 굽히잖아요?
그러자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뻗대다 결국 하나님께 직접 맞아 본 사람들의 간증 많이 들으셨죠?
우리도 그런 체험들 좀 있잖아요?
처음엔 작은 것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더 아끼는 것을 치십니다.
이기적인 야곱의 최후의 보루는 자기 자신입니다.
최악의 순간엔 건강한 두 다리로 도망가서 다시 시작할 만큼 독하고 깡이 있잖아요?
다리를 못 쓰게 하셨으니 하나님을 이겨먹고 결과는 최악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임의로 인구조사를 하는 죄를 지었었죠.
선지자 갓이 와서 그 잘못에 대해 받을 징벌을 고르라고 말할 때 다윗은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니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직접 벌을 받는다며 전염병 쪽을 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보고 식겁해서 철회시켜 달라고 빌잖아요?
하나님의 공의의 손이 우리를 다루실 때는 죄만큼 그대로 하십니다.
가장 의지하고 아끼던 것, 자랑하던 것이 위태롭게 될 때까지 가면 안됩니다.
뭔가 자꾸 작은 손해를 보고, 불편한 일들이 생기고 마음이 평안치 않을 때 멈추고 하나님께 묻고 돌이켜야 합니다.
아직 별일이 없지만 왠지 마음이 불안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다만 이제까지 인생에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는 말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모든 결정에 삶의 방식에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아직까지 야곱의 삶에는 본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절망의 순간이 되서야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여기서 이 싸움의 모든 의미가 밝혀집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다음 울면서 하나님께 간구했다고 호세아서는 기록하죠.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는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해 줍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리고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에 새 이름을 줍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제까지 야곱은 그 이름의 뜻대로 약탈자, 속이는 자로 사람을 수단방법 안 가리고 이겨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도 이겨먹었다는 말이 이스라엘입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이겨먹잖아요?
그러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좋은 뜻입니까, 나쁜 뜻입니까?
하나님과 사람을 이겨먹는 지독한 독종이라는 뜻입니다.
너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축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주권으로 야곱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로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할 수 없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것이죠.
단 이 야곱의 족보 속에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입은 야곱들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그럴 여지가 있고 구원받을만한 선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야곱아’라고 부르실 때가 많았습니다.
정말 이스라엘민족들은 조상 야곱의 기질대로 야곱처럼 굴었습니다.
이사야 41장14절에서 이렇게 부르잖아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그런데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야곱처럼 연약한 우리를 언제나 도와주신다는 놀라운 보증입니다.
‘구속자’라는 말은 말 그대로 너와 상관없이 속죄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두려워말라는 말씀 속엔 지렁이 같은 야곱처럼 사는 한 항상 두렵고 험난한 일들을 만날거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야곱 같은 자식들입니다.
오늘 야곱의 생애에서 배울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한 야곱처럼 삶이 험난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 이웃에게 무익하고 초라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결국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축복을 간구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은 네 힘과 수단으로 잘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복을 빌려면 내게 와서 빌라고 하셨잖아요?
하나님께 나가서 구하는 것은 성도들의 삶의 바탕입니다.
야곱이 자기 힘으로 해 나온 모든 것이 얼마나 인생을 그르치는지를 성경은 보여주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로 가장 좋은 길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도 생활 속에서 많은 문제들을 만납니다.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갑니다.
이런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야 하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실생활의 문제들을 언제든지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잘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게 아닙니다.
먹고 사는 문제, 생활의 필요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오늘 야곱의 간절한 기도는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에서의 손에서 구해 주시고 가나안땅의 축복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삶을 위한 간절한 기도에도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다음 장에 보면 야곱과 에서의 재회 장면이 나오죠.
1절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4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에서의 마음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간절하게 씨름하고 기도한 만큼 삶은 수월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매일 씨름하듯 기도한다면 사람과 일로 인해 괜한 진을 빼며 씨름할 일들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은퇴하시는 자리에서 이런 회고사를 했다고 합니다.
“평생 목회하면서 집 팔아 바친 교인도 보았고 땅 팔아 바친 교인도 보았고 피 뽑아 헌금한 교인도 보았지만 성질 뽑아 바친 교인은 보지 못했다”
야곱이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 삶에서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살았더니 이런 험악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웃음이 사라지고,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고, 사람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것은 왜 일까요?
야곱 같은 본성과 나만 옳다는 아집과 세상에서 배운 수법과 내 머리만 굴려서 살아가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나님께 기도하여 구하면 더 나은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야곱의 노년을 보면 그가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을 지키는 족장으로, 이스라엘의 국부로,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를 믿음의 인물로 변합니다.
결론입니다.
변해야 삽니다.
내가 변하고 있는지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좀 물어 보십시오.
우리도 점점 믿음의 사람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가족과 주변에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정받도록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말씀대로 우리를 변화시켜 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018년 9월9일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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