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DsAXsozCW0s&t=2243s
<가정의 달 설교 영상>
코로나 상황에서도 어김없이 5월 가정의 달이 돌아왔습니다.
우리 가정들이 다 주님이 축복하시는 행복한 가정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인생을 가정과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1/3이 행복의 조건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돈과 명성을 얻는 것이라고 답한 사람은 1/10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가정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상처와 아픔의 진원지가 가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여러 모양으로 가정의 불행을 경험했기에 가정 문제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직 고통의 상처들이 남아 있을지라도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의 우리와 자녀들의 가정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부, 청년부도 성경에서 가정을 잘 배워야 합니다.
가정의 유래를 모르고 가정생활을 하면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인류 최초의 가정을 통해 배우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 성도님들과 자녀들의 가정이 점점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세워져 가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1. 본문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임하게 될 가정생활에 대한 예고입니다.
이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꼭 부모님 세대를 보는 것 같죠.
애들을 줄줄이 낳아 키우느라 허리 한번 못 펴고, 마음 편할 날 하루 없던 고단한 여자의 일생, 어머니 얼굴들이 생각납니다.
그 때 아버지들은 종종 한 눈을 팔기도 했습니다.
낡은 이부자리에 아이들을 한 줄로 쭉 재워 놓고 어두운 전등불 아래서 옷가지를 꿰매던 어머니들은 분명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들은 돈을 벌러 나가지만 식구들 생계를 풍족히 마련하기엔 역부족이었죠.
나중엔 자포자기로 술에 빠져 사는 아버지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사시던 우리 부모세대는 벌써 한 줌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우리가 이렇게 사는 걸 바라셨을까요?
물론 오늘날 젊은 가정들은 많이 다르죠.
우리 때와 또 다르게 풍요를 누리며 사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가정생활은 과연 겉모습처럼 안녕한 것일까요?
2년 전 서울시에서 조사한 가정생활의 스트레스 정도 통계를 보면 남자들의 40% 정도가 스트레스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여자들은 절반이 스트레스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젊은 가정도 불행의 불씨를 안고 산다는 것이죠.
요즘 시청률이 아주 높은 드라마가 ‘부부의 세계’라고 합니다.
저도 인터넷에서 짧은 영상을 몇 개 봐서 대강 어떤 드라마인지 압니다.
부부사이에 배신과 살벌한 쌍방 복수 이야기입니다.
불륜을 저지른 남편도 적반하장으로 복수극을 펼치더군요.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뒤통수를 치는 게 점입가경입니다.
이런 드라마에 사람들 관심이 폭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부부관계가 불완전하고 가정이 불안하다는 걸 느낀다는 것이죠.
어쩌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그리고 세상의 가정이 이렇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3장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안에 분명히 우리 가정의 해답이 있습니다.
2. 먼저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가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가정을 꿈꾸듯, 하나님께서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본문 앞부분에는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담을 먼저 만드시고 그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시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각각 창조하시지 않고 아담에게서 하와를 만드신 것은 우리의 구원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래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에베소서는 알려줍니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오듯이 그리스도께로부터 교회가 나옴을 보여주시려는 것이죠.
또 아담을 인간의 대표자로 만드시고 모든 인류가 아담에게서 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하면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예수님이 각각 죄와 구원을 가져오는 대표자가 되는 것이죠.
인간 쪽에서 대표자가 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자를 먼저 만드신 것에 대해 여성들은 차별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만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천국에선 남자도 여자도 구분 없이 모두가 똑같이 기쁘게 삽니다.
아담은 이렇게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어진 하와를 기뻐하며 사랑했습니다.
하와를 본 순간 아담은 헌정시를 바치잖아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어떻게 내게서 이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가 태어났냐는 감탄입니다.
엄마들은 자식을 볼 때 가끔 그런 마음 들잖아요?
이렇게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행복한 가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가 본래 한 몸이니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죠.
사람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은 그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 자유에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자유까지 주어진 것입니다.
에덴 가정의 행복은 이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그리고, 배우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의무를 잘 선택해 가는 한도에서 유지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유의지란 말 자체가 뭔가 정해지고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진다는 의미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나쁜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도 그것을 받아 먹은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가장 큰 배려로 가장 아름답게 창조된 사람과 천사의 배신이 에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만큼 뼈아픈 배신을 당하신 분이 있으실까요?
지금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마치 모르신다는 양 크고 작은 일에 주님을 배신하잖아요?
내게 조금이라도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도 그렇게는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에덴의 뱀은 물론 인격체인 천사로서 사람처럼 자유의지를 받았지만 하나님을 배신한 사탄을 말합니다.
뱀에게 은닉한 것이죠.
사탄은 이미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꾀하고 있었고 거기에 이용하려고 아담과 하와를 범죄에 끌어 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상속자 인간을 방패막이로 쓰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배반을 심판하지 못하시는 한 자신의 반역도 안전하다는 계산인 것이죠.
그렇다면 하와는 단지 억울하게 뱀의 유혹을 받고 넘어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와는 가장 신뢰할만한 하나님보다 저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하와가 뱀의 말을 더 믿은 것은 이미 하나님 같은 신의 자리를 갈망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말을 믿으려고 하잖아요?
언제부터인가, 이미 아담과 하와는 자유의지를 바르게 다루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유의지처럼 남을 존중하고 남을 유익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이루려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죠.
지금도 우리가 자유의지를 쓸 때 타인의 자유와 행복을 침해하지 않게 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유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면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결국 선악을 알고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뱀의 말은 거짓이었고 그들은 높은 곳에서 추락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부부 관계도 끝장이 납니다.
타락한 둘은 이제 서로를 탓하며 원망하는 사이가 되죠.
사랑도, 신뢰도, 행복한 가정도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타락한 부부에게 오늘 본문의 형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벌이 아니라 조치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계약하실 때 불순종할시 영원한 영적 사망만을 명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형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히 끊어졌고, 에덴의 가정은 판이 깨져버렸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하나님이 뭐하러 벌을 더 추가하시겠어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조치는 오히려 인간에겐 반드시 필요한 가정을 유지하도록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에게 조처해 놓으신 안전장치인 것입니다.
이 조치가 없었다면 이 땅의 가정은 지금처럼이나마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범죄 이후 아담과 하와를 보면 그들은 더 이상 가정을 꾸리지 않았을 게 분명합니다.
오늘 내리신 이 형벌로 가정에 불행이 온 것 같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선악과 사건으로 저주를 받은 것은 뱀과 땅이지 아담과 하와를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1) 먼저 하와에게 내리신 조치는 여성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했던 두 가지입니다.
임신의 고통을 더하시고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출산할 때의 고통에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여성들에게 극한 고통과 수고가 될지를 암시하는 말씀인 것이죠.
그런데 이런 고통을 더하신다면 여자들이 뭐하러 그 질고를 스스로 짊어지겠습니까, 안하면 그만이지.
자녀 양육의 고통을 가중시키셨다는 것은 반대로 모성애를 더 주셨다는 뜻도 됩니다.
모성애는 여자들에게 행복이기에 그 고통도 지고 가는 것이죠.
자식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고 자식 때문에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자식을 키워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조치를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어머니들이 우리를 이렇게 키워 놓으셨을 것 같습니까?
저희 어머니도 보따리를 몇 번 쌌다가 문 앞까지 따라 나온 우리를 보고 포기했다고 그러셨어요.
또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란 조치가 내려집니다.
여성들이 제일 싫어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죠.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다양하게 해석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이것은 여성 안에 존재하는 하와가 질주하는 것을 막는 조치입니다.
선악과 사건에서 드러나는 게 무엇입니까?
하와가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로 아담의 불완전함을 도와주고 함께 가정을 이뤄야 하는 하와가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추진했던 것입니다.
그 질주는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그걸 막기 위해 남편에게 어느 정도 예속되는 조치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억울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남자들에게 내려진 조치들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남자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밤낮 일하러 다니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맛집으로 소문난 음식점을 가보면 거의 여자들로 가득합니다.
남자들은 주로 구내식당 식판에다 두세 가지 반찬을 얹어 점심을 먹죠.
기껏해야 회사 주변 식당에서 부대찌개나 국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만족합니다.
그렇게 평생 눈치 보며 회사 다니고 돈을 벌어다 아내에게 바칩니다.
왜 그런지도 모르면서 거의 그렇게 합니다.
미우새란 프로에 나오는 연예인 부부를 보니까 남편이 버는 건 다 아내에게 갖다 주고 하루에 만원씩 용돈을 타서 쓰더군요.
하나님이 그렇게 조치하셨기 때문이죠.
양심이 있는 남자라면 어쨌든 가족을 위해 일하고 의무감으로 가장 역할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양심을 내다 버린 남자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으신 것이죠.
게다가 남자들의 노동의 수고를 고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마음껏 땅을 정복하고 다녀야 하는 데 그걸 막아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땅은 노력하는 대로 풍성한 수확을 주지 않습니다.
남편들이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인지 모릅니다.
만일 손대는 대로 남편들이 성공했다면 더 많은 것을 정복하러 떠돌아 다녔겠죠.
겨우 삶의 반경 안에서 먹을 것만 얻을 수 있게 하셨기에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족을 위해 가시덤불을 헤치다 돌아온 남편, 아빠들, 다 따듯하게 맞아 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형벌로 느껴지십니까?
비록 가끔 다툴지언정 한편이 되어 서로 의지하며 살아보라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전도서에서 그렇다고 하잖아요?
전도서 5장 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이것이 일반적인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인애하신 뜻입니다.
아쉽게도 사람의 죄와 나쁜 양심과 복잡한 사정이 얽혀 이 행복도 누리지 못하는 가정들이 점점 많아져 가고 있는 것이죠.
4. 그러나 성도들의 가정은 이 정도 수준에 머무는 게 아니라 범죄 이전의 가정,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가정까지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본문 21절에서 의미심장한 내용이 추가되죠.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죄의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뭇잎으로 엮은 옷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꼬마 벤틀리도 보니까 죄를 지으면 어디로 숨더군요.
부모 눈에 화가 나지만 한편 그게 얼마나 측은합니까?
하나님은 거친 삶에 내몰린 이들이 측은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십니다.
가죽옷은 죄 없는 동물이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죄를 가리기 위한 동물의 제사가 시작되고, 그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속죄를 암시하시는 것이죠.
본문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에서 ‘입히다’란 히브리 단어는 성경에서 단 두 가지 경우에만 사용합니다.
하나는 왕이 신하들에게 영광스러운 옷을 수여할 때 이 말을 씁니다.
또 하나는 제사장에게 거룩한 옷을 입힐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냥 동정해서 그 옷을 던져 주신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범죄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의 영예를 회복시키실 결연한 마음을 표현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그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
이젠 죄가 가려졌고 죽었던 영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기에 우리 가정도 다시 회복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할 일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다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죠.
성령께서 순종하는 우리를 반드시 도와주실 것입니다.
에베소서5장에서는 부부관계가 곧 예수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와 같아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내 아내가 내게 복종하는 시늉만 해도 내가 업고 다니겠다, 남편이 나를 목숨을 걸고 사랑한다면 내가 왜 복종을 안 하겠냐’
서로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 명령에 대한 순종은 서로에 대해서이기에 앞서 예수님 앞에서 행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5장21절에서 명시하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서로 순종하면 가정은 더 빨리 살아납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면 우리 자녀세대들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배우자를 만나셔야 합니다.
이미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산다 해도 먼저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구원은 곧 회복입니다.
여성에게 주신 모성과 양육에 있어서도 그 방식은 달라집니다.
모성애도 죄성에 오염되었기에 본능적 사랑에 의존해 키우면 안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들도 거룩한 성도로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말씀과 기도와 교회생활을 통해 거룩한 삶을 훈련받지 못하면 타고난 본성과 개성대로 큽니다.
사람마다 다른 개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다양성이고 다 좋은 것입니다.
자식을 꼭 나처럼 키우려는 것도 잘못 된 생각입니다.
이 개별적인 성품이 거룩하게 다듬어지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더 다양한 분야에서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식의 다듬어지지 않은 개성을 무조건 나무라지 말고 잘 다듬어 지도록 기도하며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람의 개성은 자기 힘만으로 고치고 다루기가 힘이 들기에 자녀들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들도 성경적인 좋은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식들도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가정은 사랑으로 서로를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에서 벗어난 성도들에겐 일터도 더 이상 저주받은 땅이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다니는 일터가 아니라 하나님이 축복하신 일터가 되고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일터가 된 것이죠.
그 터전에서 하나님은 가시와 엉겅퀴를 거두시고 아름다운 열매들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은 가정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가정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가정들이 사랑하고 복되길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족 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 땅의 가정엔 가시와 눈물이 있을지라도 천국에선 영원히 우리를 돌보실 아버지와 우리를 신부로 얻으실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직 완전치 못한 죄인들이 모여 사는 우리 가정은 여전히 우리를 힘들게 하고 때로 가족이 짐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서 죽으셨잖아요?
그리고 너희도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의의 옷이 우리를 영화롭게 해주셨듯이 우리의 사랑과 지지에 내 가족들은 자신감을 얻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지원하고 응원해 주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우리의 힘든 가정이라도, 있어야 하기에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입니다.
이 가정을 허무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세우고 행복하게 가꿔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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