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가정의 달 설교 (아브라함과 사라, 창세기16장10절-20절)

남수연 2021. 5. 4. 17:17

www.youtube.com/watch?v=FjDSdIG_zYo

가정의 달 5월입니다.

우리에게 혈육의 가족과 믿음의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나 혼자가 아니라 가족 전체를 들어 일하십니다.

가족과 공동체는 서로가 하나님의 자녀로의 성장을 돕는 동반자입니다.

사랑과 격려를 통해서이기도 하지만 상처와 아픔을 통해서도 역시 성장이라는 목적을 이루게 하십니다.

밝기만 하면 형체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죠.

어두움이 있을 때 오히려 명암이 생기며 형체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가정에도 명과 암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지내는 다른 사람들 마음은 속속들이 알 수 없죠.

성경은 믿음의 모델이 되는 분들을 세워서 사정없이 그 속을 파헤쳐 보여주십니다.

그들의 모습은 내 모습이고, 내 부모의 모습이고, 배우자의 모습이고,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아브라함 가정에 깊은 상처를 낸 위기를 통해 우리 가정에 대해 배우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을 더 잘 들여다보고, 가족들을 더 잘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가정들이 더 따뜻한 사랑 안에 살게 되길 소망합니다.

 

1. 약속의 땅에서 아브라함의 가정은 큰 기근을 만났습니다.

지난 주 아브라함은 갈대아우르라는 문명사회를 떠나 하나님이 부르신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이주합니다.

지금도 낯선 나라에 이민을 간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안정된 생활 기반을 다 내려놓고 낯선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죠.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 와서 분명 우리보다 더 고생하지만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잖아요?아브라함은 이민의 현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복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믿어지는 건 대단한 것이죠.

우리가 모두 그렇게 보이지 않는 복된 구원을 믿는 것이니 놀라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하란으로부터 480킬로미터나 떨어진 가나안땅으로 이주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생존이 걸린 큰 기근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땅에 왔더니 난생 처음 기근을 만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지난 주 설교에서 들으셨듯이 두 강 사이의 비옥한 곳에 위치한 대도시였습니다.

큰 강 주변에는 가뭄이 좀 들어도 농사를 아주 망칠 일은 없죠.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데려오신 가나안 땅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의 특징은 산과 골짜기와 광야고 큰 강이 없습니다.

신명기11장에서 말씀하길 너희가 들어갈 땅은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가나안땅은 풍부한 강에서 마음껏 물을 대서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시길 바라며 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살아가고 있죠.

믿음의 길로 들어선 이상 내가 스스로 농사계획을 세우고 소출을 비축할 창고를 짓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로만 농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만일 이 약속의 땅에 살고 계시다면 아무리 내가 혼자 계획하고 노력한다 해도 내 뜻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셔야 농사가 되고 소출이 생기기 때문이죠.

또 약속의 땅을 살 때는 계획이 안 서고 계산이 안 나와도 하나님만 바라면 살아집니다.

물론 하나님을 바라며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손에 아무 것도 쥐어지는 게 없는 시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근에서 굶어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까마귀를 통해서라도 하루의 떡을 날라다 주시고, 결국은 모든 필요를 풍족히 채워주심을 다 경험하셨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의 땅을 경영하십니까?

죄의 본성에 천국 같은 환경은 복이 아니라 가장 무서운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근과 풍요를 하나님 손에서 조정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십니다.

 

2. 이 기근을 버티지 못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행을 결정합니다.

아브라함이 먹고 살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잘한 것입니까, 잘못한 것입니까?

성경은 잘잘못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직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단계입니다.

훗날 믿음의 절정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시죠.

그리고 순종하려는 아브라함에게 이삭 대신 잡을 양을 보여주시잖아요?아마도 그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과 대속의 계획을 털어 놓으시기 위해서였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하셨잖아요?

하나님도 이 비밀을 누군가 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 한 사람에겐 털어 놓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결국 하나님을 그만큼 이해할 믿음이 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날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기 전까지 하나님은 나를 위해 희생하시는 아버지가 아닌 위대한 신일뿐입니다.

눈앞에 타들어 가는 땅을 볼 때 함께 타들어가는 마음을 아시는 분이 우리 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뿐 아니라 조카 롯과 많은 식솔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곡식이 떨어져 갈 때 가장의 마음이 타들어갈 수밖에요.

아직 그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아브라함은 당장 식량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길 결정한 것입니다.

직장을 잃고 먹을 것이 떨어지면 우리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약속을 막연히 기다리기보다 눈앞에 해결책이 있다면 그걸 선택할 수 밖에요.

다만 성경은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넌지시 실마리를 던져주죠.

처음에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의 중심부에 머물며 세겜과 벧엘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서 남방으로 점점 내려왔다고 합니다.

8절,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남방은 네게브 지역을 말합니다.

중심부에 비해 강수량이 적은 아주 메마른 지형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이런 남쪽으로 옮겨왔을까요?6절을 보면 중심부엔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가나안 사람들 틈에서 사는 게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떠나왔지만 당장은 땅도 없고 자식도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은 점점 사라져 갔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곧 하늘에 닿을 듯하다 얼마나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집니까?

어떤 환경일지라도 나를 먹이고 입히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그 다음은 뻔합니다.

아브라함은 스스로 살 궁리를 시작한 것입니다.

점점 사람이 밀집 된 중심부를 떠나 좀 더 안전하다 생각되는 곳을 찾아 움직인 것이죠.

아브라함의 이동 경로는 낯선 이방 땅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치열했던 흔적입니다.

우리 믿음의 길에 깊이 박힌 아픈 발자국들도 그런 흔적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남쪽 변방까지 왔을 때 큰 기근이 찾아 온 것이죠.

사막지대는 기근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의 위기에 대해 성경이 단서를 주시는 것입니다.

경제적 기근 이전에 영적 기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먼저 기근이 들었으니 어떻게 경제적 기근을 이겨내겠습니까?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은 우리 삶의 중심부에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믿음의 중심부에서 점점 멀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죠.

지금 같은 코로나상황도 예배로부터 멀어지고 그로 인해 점점 믿음이 약해지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가정문제나 직장문제로, 진학문제나 병으로, 여러 요인으로 교회가 멀어지고 믿음이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내 마음과 행위의 중심에 굳게 자리 잡지 못하면 당연히 생활의 위기를 이겨내기가 힘듭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위대한 결단 한번으로 믿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긴 인생 여정의 동행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한순간의 세뇌가 아니라 인격과 인격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선택한 애굽행에는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세상 애굽이 원래 그런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떠나 약속도 믿음도 없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갈대아 우르가 메소포타미아문명의 중심지였다면 애굽은 나일강을 끼고 이집트문명이 한창 꽃을 피울 때였습니다.

어쩌면 도시문명에 익숙한 아브라함이 농사와 목축이 아닌 도시문명을 다시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애굽에 가까울수록 아브라함에게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아내가 너무 예쁜 거예요.

고대에 낯선 외국인 이주민에게 인격적인 대우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예쁜 아내를 데리고 살러 들어온 나그네가 당할 운명은 뻔합니다.

남편을 죽이고 아내와 재산을 뺏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사실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라고 사라가 안 예뻤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으로 갈 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지만 약속이 없는 애굽에서는 상황이 달라진 것입니다.

살기 위해 애굽으로 가는 중인데 그 마음엔 점점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믿음이 굳건하고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절대 죽을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 성령의 충만하심, 예수님의 생생한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환경과 상관없이 강합니다.

그런 믿음이 없을 때 모든 것이 갖춰져도 불안하고 심약해집니다.

지금 처지가 불안하고 두렵다면 믿음의 중심을 떠났고 하나님께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해도 여전히 불안하다면 쉬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고 있으면 됩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환경에서 평소와 달리 계속되는 우울감과 염려와 불쾌감이 있다면 거기엔 마귀의 개입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도 하나님께 기도로 믿음과 힘을 구하면 항상 해결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브라함은 기도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기도했다면 이런 자충수를 내놓았을 리 없습니다.

13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부부가 아니라 오누이 행세를 하자는 것이죠.

결국 이런 말을 꺼내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아브라함은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잖아요?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끌고 갈 애굽인들이라면 남편도 없는 여인이 당할 일은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렇게 가벼운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 장에 조카 롯을 떠나보낼 때나 가나안땅 부족들과의 전쟁을 보면 아브라함이 우리와 상대가 안 되는 인격자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아브라함의 자존심은 산산히 부서졌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사라의 모든 세계는 송두리째 무너져 버렸습니다.

사라는 믿고 따라왔던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가장 큰 위기가 닥쳐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비열하고 무능하고 파렴치한 인간입니까?

내 남편은 이럴 때 어떨 것 같으십니까?

내 남편도 내 아내도 이런 상황이라면 아브라함과 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본성대로라면, 남편이나 아내보다 내 생명을 더 아끼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죠.

이것은 사악한 죄가 아니라 인간의 약함에서 오는 불쌍한 행동입니다.

95억 보험금을 노리고 만삭 아내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였다는 의심을 받는 남편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금의 아브라함처럼 사람이라는 한계에서 오는 약점을 나도, 내 남편과 내 아내도, 내 부모와 내 자식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다고 모든 약점과 죄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 가족의 연약함들은 믿음과 사랑으로 그냥 껴안아야 합니다.

내 약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약점은 사회생활이나 신앙생활이나 인간관계를 힘들게 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내 자신이 나도 밉고 싫습니다.

약점을 지고 사는 것은 괴로운 짐입니다.

영민하지 못하고, 말을 잘 못하고, 행동이 굼뜨고, 끈기가 없고, 정직보다 임기응변이 빠르고, 소극적이고, 매력이 없고.

내가 생각하는 약점들이 많이 있잖아요?그것으로 문제가 생기고 상처를 받게 되면 나 자신에 대해 실망감에 빠지고 좌절하게 됩니다.

약점은 타고난 기질과 관련 되어서 고치기가 참 힘듭니다.

나의 약점을 인정하고 너무 혹독하게 다루지 말고 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약점에 자꾸 실망하면 장점도 살려 쓸 수가 없게 됩니다.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죠.

그걸 고쳐주려고 실랑이를 하다보면 나중엔 약점이 자식의 인격 전체로 보여 미워하게 됩니다.

무쇠 솥 같은 사람관계는 없습니다.

사람관계는 유리그릇 같아서 몇 번 약점과 상처를 건드리면 깨집니다.

영적인 기근은 삶의 기근으로, 그리고 결국 가장 친밀해야 할 가족의 관계적 기근으로 침투해 가는 것을 오늘 아브라함의 가정을 통해 배우시기 바랍니다.

 

4. 애굽행의 결과는 참담했고 결국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중년이 넘은 나이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사라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결국 바로의 궁전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는 사라를 궁으로 데려 와 아내를 삼으려 합니다.

아브라함은 미모의 아내 덕택에 많은 가축과 노비까지 얻게 됩니다.

이제 일은 바로잡지 못할 만큼 커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통해 민족을 이루고 구주 예수님을 보내모든 사람들의 복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바로왕의 아내가 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침묵으로 개입하시던 하나님이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며 개입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제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침묵으로 개입하시지만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지켜보고 계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실 수가 있겠어요?

하나님은 사라가 최악의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개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재앙에 놀란 바로왕은 아브라함을 나무라며 사라와 자기가 준 선물까지 들려 애굽에서 추방합니다.

다음 장을 보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아브라함에게 가축과 은금이 풍부했다고 합니다.

가장 큰 아픔을 당한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상처만 안고 빈 손으로 돌아가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족에게 상처받은 과거에 대해 하나님은 물질과 명예로 보상하시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지만 요셉이 그 형제들을 거두잖아요?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게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이죠.

사라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곧 이어서 나타납니다.

16장에 보면 사라가 애굽에서 얻은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이스마엘을 낳게 되잖아요?

사라가 하나님의 계획을 서둘러 앞당기려고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그런 치욕을 겪지 않으려면 얼른 아기를 안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후 부부사이의 문제를 사라가 거의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던 아브라함이 무슨 가장으로의 리더십을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새사람을 입은 우리는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를 잊고 그들의 약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죄짐을 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불쌍한 것이잖아요?

대신 단 한번도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섭섭하게 하거나 배신하지 않고 목숨을 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구주 예수님이 한결 같은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애굽에서 있었던 이 수치스러운 경험은 아브라함에게 무의미한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먹고 사는 데 위협을 느끼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만큼 하나님을 신뢰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시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라를 버리지 않았고 다른 여자를 통해 자식을 얻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기 전에는 사라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이 걸리자 아내보다 자기를 더 걱정하는 이기적인 실체를 본 것이죠.

인생의 기반이 흔들리고 지축이 무너지는 것 같은 위기를 하나님은 왜 허용하십니까?

그걸 통해 내 안에 있는 모든 죄와 나쁜 동기들이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육체의 고통이나 생활의 빈곤이 단지 고생시키는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빚에 쪼들리고 당장 쓸 돈이 없어 쩔쩔 매 보아야 내가 얼마나 돈에 범죄하기 쉬운 사람인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자신의 실체를 보고 경악한 사람만이 황급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손을 내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의 기근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죄성으로 충만한 인간에게 천국 같은 환경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갈등이 생기고 고민이 되고 근심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그런 상태가 사실 우리 죄인들에겐 더 나은 상태입니다.

저도 여러 가지 채워지길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됨으로써 매순간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지 않게 된다면 차라리 좀 부족한 지금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결핍은 자기 내면에 있는 걸 보게 되고, 탄식하며 하나님을 바라게 되고, 차라리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게 낫겠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죠.

그걸 여러 가지 기근이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나와 함께 부름 받은 우리 가족들, 관계하는 사람들, 믿음의 공동체, 이런 사람들이 그 악역을 해 주기도 합니다.

왜 저 사람의 악행으로 내가 고생해야하느냐고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고했던 다윗이 십여년 간 복수에 눈 먼 사울에게 쫒긴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울을 다루시는 게 아니라 다윗을 다루어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 왕으로 만드시려는 것이었잖아요?

다윗은 그걸 알았기에 사울과 싸우려하지 않았습니다.

저 악역을 감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은 나와 상대하고 계심을 알면 그런 관계를 괴로워하며 집착하는 데서도 자유하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이 우리를 항상 붙잡고 계심을 더욱 확신하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을 다시 가나안에 데려다 놓으시듯, 어떻게 살아도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버티지 못해도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느냐는 이 땅의 가정과 교회와 내 인생의 집이 천국이냐 지옥 같을 것이냐의 결과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우리 자식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쳐 천국 같은 인생이 되게 해야 합니다.

기근을 만나면 도망치지 말고 믿음의 땅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도망치면 그 시험은 얼마 뒤 다시 찾아옵니다.

이 시험에서 실패한 아브라함은 뒤에 똑같은 시험을 다시 치르게 되죠.

그런데 거기서도 똑같이 실패합니다.

또 사라에게 오누이 행세를 하자고 합니다.

세 번째에 가서야 그 시험을 통과하죠.

바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셨던 때입니다.

그때는 자기의 죽음 정도가 아니라, 자식의 죽음일지라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 된 것입니다.

믿음의 땅에 기근을 주신다면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를 성실하게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배우며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얼마큼 하나님을 경험하느냐가 얼만한 믿음이 되느냐와 같습니다.

가정의 달, 5월에 우리 가족들의 약점을 더 이해하고 그것마저 껴안아 준다면 하나님이 기쁘게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