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큰 용사 기드온 (사사기6장11절-18절)

남수연 2011. 10. 18. 14:23

 

오늘 본문의 주인공 기드온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유명한 사사입니다.

사사란 왕이 통치하던 왕정국가 전에 하나님의 신탁을 받아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지도자를 말합니다

판관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실 목적으로 선택한 민족이므로 왕이 통치하던 가나안 국가들과 달리 왕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와 사사들이 민족을 다스렸죠.

삼손과 데릴라로 잘 알려진 삼손이나 입다 같은 사람들도 사사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 볼 기드온은 미디안 민족의 압제에 곤욕을 치르던 이스라엘의 사사로 부름을 받아 승리를 거두고 40년 간 평화롭게 다스렸던 사사입니다.

본문에 뒤 이어 나올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그는 엄선 한 300명을 데리고 대승을 거둡니다.

항아리 속에 횃불을 숨겨가지고 몰래 적진에 가까이 다가가서 신호에 맞춰 요란하게 항아리를 깨뜨리고 나팔을 불고 소리칩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란과 어둠 속에서 적군끼리 칼을 휘둘러 서로를 죽이게 하셔서 큰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이명0대통령이 취임하실 때 사용되었던 엠블럼을 불교계에서 큰 문제를 삼은 일이 있습니다.

문장 그림엔 둥근 원 모양과 나팔 모양과 불꽃의 형상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이 바로 기드온의 전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딴지를 걸고 나왔던 것이죠.

그렇게 보일 수 도 있습니다.

당시 취임준비위원장은 문장이 성경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태평성대를 바란다는 의미로 태평소와 북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설명하며 애를 먹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칠 때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을 병기로 사용한 것들 다 알고 계셨나요?

불교계가 이 정도로 성경지식이 해박한 줄 모르셨죠?

우리가 성경 너무 모르면 그것도 모른다고 무시당할지 모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찾아오셔서 사사의 직무를 맡기시는 본문을 통해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의 영적인 귀를 활짝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사사기는 여호수아에 이어집니다.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가나안 정벌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마치고 안착합니다.

그러나 문화와 종교 면에서 이스라엘은 오히려 가나안에 정복당하고 맙니다.

그들은 대부분 광야에서 태어나 40년을 만나 만 먹고 살았죠.

고기와 포도주를 마시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음식문화에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입니다.

사시사철 한 벌 옷으로 40년을 지냈던 그들이 가나안 여인들의 화려한 치장에 놀랍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란 기적적인 자연현상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40년을 보다보니 기적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면서 부터 눈 뜨면 구름기둥이 하늘을 덮고 있고 자다가 밖에 나가 보면 불기둥이 진영에 머물러 있는 것만 보고 살았던 것이죠.

아마 다른 곳도 다 그런 줄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기적이아니라 세상 어디나 만나가 내리는 줄 알았을지도 모르죠.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게 기적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가 우연히 된 것 같고 괜한 의미를 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우상 종교에 현혹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정신 차리도록 강대국에 고통당하게 버려두십니다.

오늘 본문의 미디안과 같은 존재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을 연단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을 수도 있지만 내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지 않나 또한 살펴 보아야할 줄 믿습니다.

미디안 같은 존재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약탈하고 있다면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인 것입니다.

언제 인간이 부요하고 행복 할 때 감사하며 하나님을 찾습니까?

좋을 땐 절대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인생이 꼬이고 헤어나기 힘든 고통이 닥치면 비로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시선을 하나님께 향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라도 돌아오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미디안을 우리 인생에 보내시는 것이지죠.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사모하며 기쁨으로 주님 안에 거하시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노예처럼 전락하고 나서야 이스라엘은 그 조상의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또 얼른 사사를 정하시고 그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십니다.

조금 맘이 편해지고 풍요를 누리면 어느새 가나안 우상에게 돌아가고, 하나님은 징계하시고, 부르짖으면 또 구원하시는 사이클이 반복 되는 340년간의 역사가 바로 사사기의 기록입니다.

연약한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나 바슷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인도하고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도 똑같이 인도하시고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입니다.

본문11절을 보면 미디안사람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양식이나 양이나 소나 남겨두지 않고 약탈하는 미디안을 피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산에 굴을 파고 숨어 살 지경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 장의 6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랬다면 이건 틀림없이 이스라엘이 또 못되게 굴었다는 뜻입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사회가 타락해서 하나님의 징계가 임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이 견디지 못하시는 소리가 있는 데 그게 자기 백성이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 밖에서 터진 울음소리가 우리 아이 소린지 금방 알아 채립니다.

지금도 가끔 자다가도 엄마! 라고 부르는 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잠이 확 깨는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잠결에 엄마!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나 왜! 하고 아이 방으로 급히 가보니 쿨쿨 잘 자고 있더군요.

잘못해서 벌을 세우는 중에라도 자식이 고통을 호소하면 마음이 동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부모의 오감은 자식들을 보호하려고 열려 있기 마련이죠.

하나님 아버지의 귀가 우리의 위험과 고통으로 부르짖는 외마디 소리에 항상 열려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어김없이 그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 기드온을 부르셔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그대들을 다스리시리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 만큼 귀한 축복은 없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실 때 미디안과 같은 악한 자가 우리 인생을 약탈해가지 못할 줄을 믿습니다.

오늘 미디안의 손에서 기드온의 인생과 이스라엘의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 주님을 향해 탄식할 때 응답하시길 원하십니다.

찾아오셔서 우리의 약해진 손을 강하게 하시고 꺽인 무릎을 일으켜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용기와 격려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기드온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미디안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이 닥쳐 보이는 대로 약탈해가니 눈에 띄게 탈곡을 할 수가 없습니다.

타작이란 게 넓은 들에 낫가리를 산처럼 쌓아 놓고 흥겨운 잔치 분위기에서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기드온이 포도주 틀 안에 숨어서 한 줌 씩 껍질을 벗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기막힌 현실이죠.

수확의 기쁨보다 불안과 원통한 생각이 더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풍성한 수확의 기쁨은 없습니다.

내 노력과 힘을 다 써가며 애를 써도 얻어지는 게 포도주 압착기로 쥐어 짜 똑똑 떨어지는 게 인생이 주는 인색한 기쁨입니다.

게다가 겨우 얻은 그것마저 뺏어 갈 미디안이 언제 우리를 습격해 올지 모릅니다.

저 미디안만 없었다면 행복할 텐테, 우리 옆구리를 찌르는 미디안 같은 존재로 있는 기쁨마저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것이 기드온과 같은 인생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만 섬기는 인생만이 기쁨도 참 기쁨이 되고 고통도 축복으로 변하는 삶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 이런 인생을 향해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요엘2장23잘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때 우리 삶에 기름진 복과 넘치는 복이 임하실 줄을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인생을 궁핍과 허기를 채우시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사실 강한용사 기드온아 라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 기드온 마음이 어땠을까요?

미디안 사람 몇 몇이 두려워 몰래 곡식을 떠는 그에게 강한 용사가 어디 어울리는 말입니까?

기드온은 그 말에 오히려 마음이 상해 뾰족한 말을 쏟아 놓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왜 하필 그런 호칭으로 그를 불렀을까요?

그것은 모든 자신감을 잃고 정체성을 잃은 기드온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현재의 그는 그렇지 않다할지라도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함께 계실 때 얼마든지 큰 용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죠.

우리가 큰 용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저 지질한 기드온과 다를 바 없는 형편없는 사람 같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겉으로 그럴 듯 해보여도 우리들 속 사정을 들여다 보면 다 기드온 같은 탄식이 있고 포도주 틀 속 같은 절망이 있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때론 실망하고 상처받고 자존심은 뭉개지고 기도도 안 나와 망연자실 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너는 큰 용사라고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용사답게 주님을 의지하고 실망과 낙심에 자리에서 일어서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코메디언 서0원씨의 아내 서정0씨가 참 야무진 모습 처럼 예수님도 잘 믿는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기 전 까지는 그는 정말 열등감에 사로잡혀 어두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가난한 환경을 탓하며 방황하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자퇴를 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미군부대 물건을 몰래 다리에 묶고 나와서 팔아서 먹고 살았는 데 그게 그렇게 싫었다고 합니다.

단칸 셋방에 복닥거리고 살면서 그 집 앞에 함석지붕을 가리고 라면과 국수를 팔았는 데 그것도 너무 창피해 뒷문으로 도망다녔다고 합니다.

자기 인생도 싫고 아무 걱정없이 잘 사는 사람도 싫었습니다.

그러던 중 길거리 캐스팅이 되어 모델이 되었는 데 연예인 활동 중 서세0씨를 만나 두달 만에 청혼을 받았습니다.

결혼하면 인기가 떨어질지 모른다는 남편의 말에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행복을 주리라 꿈꾸었던 결혼생활은 또 다른 암흑이고 고통이었습니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 다니며 세탁기도 없는 작은 집에서 살며 이번엔 남편과 시댁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시누이의 권유로 교회에 가기 시작했는 데 첫 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며 그동안의 모든 열등감과 상처를 위로하시는 사랑을 체험하며 그 동안의 모든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나니 원망만 하던 남편에 대해서도 축복의 기도를 하는 아내가 되었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늘 열등감이 있던 서정희씨가 어느날 아이를 유학보내기 위해 세인트 폴 입학설명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통역이 있었는 데도 어떤 학부모가 그냥 영어로 하자는 바람에 모두들 영어로 물어보고 대답하는 데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한 그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무식해서 아이 유학도 못보내는 바보 같은 엄마라는 생각에 울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럴수록 그가 한 일은 강대상 앞에 나가 무릎을 꿇고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자기가 미국 입학시험에 따라가 무슨 소용있나 생각하고 경비를 다 헌금하고 오직 기도만 했습니다.

결국 아이는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내고 입학허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두 자녀들의 학업을 축복해주심으로 자신의 열등감까지 다 씻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원래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서정0씨는 노래도 크게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기도가 쌓이며 얼마나 담력이 생기는 지 지금은 교회에서 제일 큰 목소리로 찬양을 한다고 합니다.

환경을 원망하고 열등감에 쌓여 불행하고 어두운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주님을 만나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기도의 용사로 다시 태어나 축복의 가정을 세운 것입니다.

아무리 연약한 자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 하시는 능력을 받으면 인생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모두 능력 있는 큰 용사가 되셔서 우리 대적 나쁜 마귀와 곤고한 환경을 이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그동안 미디안의 압제에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하나님의 말씀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13절에 보면 아니,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따지는 것을 봅니다.

기다리다 지치고 기대했다 실망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체념과 원망이 마음 깊은 곳에 두터워 집니다.

위로와 축복의 말씀도 때론 상처에 소금 치는 것 같이 오히려 우리를 아프게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기드온의 반응이 그렇습니다.

애굽에서 우리 민족을 이끌고 나왔다는 하나님의 기적은 다 어디 갔습니까?

왜 우리를 미디안 사람 손에 팔아 넘기고 방관하고 계십니까?

기도했는 데 왜 안 들어 주시는 겁니까?

헌금했는 데 왜 물질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십니까?

주일성수하는 우리 애는 왜 원하는 대학도 않 넣어주시고 믿지 않는 옆 집아이는 왜 대학도 저렇게 잘 들어갑니까?

이 환경을 바꿔달라고 기도한 게 언젠 데 도대체 듣고는 계신건가요?

이런 우리의 상처와 꼭 같은 말을 기드온이 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러나 우리의 푸념과 원망을 다 들어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14절에 기드온의 푸념을 다 들으신 하나님은 이유에 대한 설명은 안하시고 그냥 기드온의 어깨를 두드리십니다.

하나님 왜 그러셨어요? 왜 도와주지 않으셨어요? 하며 눈물을 쏟을 때 주님이 우리의 어깨들 두드리십니다.

그래, 내가 다 안다. 내가 도와줄 것이다.

비록 우리의 잘못과 불신앙으로 오는 고난 중에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 줄 믿습니다.

기드온을 향해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라.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이젠 네 힘으로도 하기만 하면 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네 힘만으로 해왔으니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보내시는 일만 하면 그게 바로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이루고 이기는 방법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할려고 애를 써도 안되는 것 경험하셨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얼마나 자기 힘으로 미디안을 막아보려고 애를 먹었겠습니까?

순순이 양식이고 말이고 포도주고 다 내 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애쓰는 만큼 되지 않는 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되게 하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사업도 하나님과 동업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우리교회와 협력하는 제이스키친도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이 많은 축복을 주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랐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성도님들의 생업과 인생의 모든 문제들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도록 날마다 기도로 인도받으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도 기드온의 부정적인 답변이 이어집니다.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이 말은 우리가 제일 많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아닌가요?

우리 맘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이런 생각입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하라구요!

제가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학벌도 안 좋고 약점도 많고 배경도 없고 가정에서조차 인정 못 받고 말 주변도 나쁘고...

이런 말들을 한없이 늘어 놓으며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 마음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핑계를 대며 하나님의 뜻대로 담대하게 하지 못함을 주절거려도 하나님은 여전히 들으시고 기드온을 격려하십니다.

16절에 보면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실제로 하나님은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약속하신 대로 스스로 싸워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하시고 네가 미디안을 이겼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좇아 하나님 백성으로의 정체성을 다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징계하여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우리를 추궁하며 잘못을 지적하고 심판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실패한 자식이 일어서도록 힘을 주시고 격려하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혹 우리가 마귀의 유혹에 지고 시험에 넘어지고 주님을 외면했다하더라도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갈 때 우리 대적 미디안을 이길 힘을 반드시 주시고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다음는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참 아름답고 은혜스런 장면이 보이는 듯 합니다.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이 땅에 내려오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는 천사를 말하는 게 아니고 성자 하나님을 지칭한다는 것이 맞습니다.

20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이 가져온 제물을 불로 태우시고 받으시는 것을 봅니다.

천사는 인간에게 예배를 받을 대상이 아니죠.

주님이 고난 중에 앉아 낙심하고 고통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직접 땅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상수리 나무 아래 털썩 앉아서 기드온을 기다리시는 것이죠.

18절에도 기드온이 예물을 가져올 때 까지 기다리려 달라는 말에 내가 너 돌아올 때 까지 기다리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한가하십니까?

기드온이 집에 돌아가 염소 한 마리를 잡아서 물에 삼고 밀가루를 반죽해서 떡을 굽고 그걸 가지고 돌아오는 데 꽤 시간이 흐르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드온이 그걸 가져 오기 기다리시며 상수리 나무 아래 앉아서 이제나 저제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신 모습이 그려집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런 것이죠.

혹시 기드온이 그새 마음이 바뀐 건 아닐까?

왜 이렇게 늦는 걸까?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우물 곁에 털썩 앉아 물 길러 나온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을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만납니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주님은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구약시대부터 아직 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읽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과 자비하신 성품과 오래 참으시는 온유하심을 구석 구석에서 발견합니다.

제대로 성경을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구약의 하나님을 단지 잔혹한 전쟁의 하나님이었다고 말하는 데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눈에 가리워져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고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이사야 58장 9절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우리가 마음을 열고 눈을 하나님께 마주치기만 하면 거기 계속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던 주님을 언제나 만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 기드온의 곤핍한 인생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그는 큰 용사로 바뀝니다.

지난 여름 최초로 시각장애인 앵커가 된 이창0씨가 있습니다.

523대1의 경쟁자 속으로 뛰어 든 그는 당락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에서 청년부 회장과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합니다.

찬양을 인도하고 피아노 반주도 하는 그가 1급 시각장애인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생후 7개월 된 그는 뇌수막염으로 시신경이 파괴 되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거란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는 눈 앞에서 인생의 무거운 철문이 철커덕 닫히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깜깜한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손전등을 들고 눈꺼풀을 비춰보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를 반복하며 실성한 사람처럼 눈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몰랐던 그가 절에 가 불공을 드려도 소용이 없었는 데 승려 한 사람이 이번에도 차도가 없으면 차라리 교회로 가보라더고 하는 겁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로 달려간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울며 매달리다 점차 자신의 영의 눈이 열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믿음으로 아들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네 살 때 앞이 보이지 않는 아들이 사라져 집안이 발칵 뒤짚혔는 데 교회 강단에서 목사님의 목소리를 흉내내 설교하고 있는 창훈씨를 발견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나운서가 될 재능을 교회에서 키웠고 이제 그의 꿈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났기에 암흑 같은 인생에서 새 빛을 찾은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막막한 환경과 인생에서 인도받고 축복받는 삶을 살게 됨을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 곁을 찾아오신 주님의 손을 꼭 붙드시고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