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6장11절-16절 (기드온1- 큰 용사여)

남수연 2019. 6. 19. 16:55

어제 늦게 까지 캠프가 진행되어서 오늘 많이 피곤하실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오늘 말씀을 통해 축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사시대 중 기드온 사사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워지게 된 내용입니다.

구약성경은 등장인물에만 주목하면 기록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의 큰 줄기는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죄에 처한 사람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이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약성경도 바로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됨을 깨닫고 억지 적용이 아닌 말씀에 근거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런 관점으로 말씀을 전해 드릴 것입니다.

오늘도 성경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될 것입니다.

구원이 어떻게 역사를 타고 내게 까지 이뤄졌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또 기드온이란 사람을 통해 믿음의 나를 더 강하게 하는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먼저 본문이 속한 사사기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실패라는 암초를 넘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구원의 물줄기를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영도로 가나안에 입국한 후로부터 초대왕인 사울왕이 세워지기까지의 삼백오십여년을 말합니다.

이 때는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특별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신앙을 부모가 자식에게 전수하고 제사장들을 통해 율법을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식들에게 그렇듯이 그들도 잘 지키지 못했습니다.

신앙을 전수받지 못한 이스라엘의 후대는 결국 하나님을 멀리하고 가나안 땅의 종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전수하지 못하면 그 아이들은 결국 세속의 각종 우상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지금 기드온시대 까지 이백여년 만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완전히 변질되고 우상종교와 혼합되게 됩니다.

본문 뒤에 보면 기드온의 아버지 집에도 바알신 제단과 아스다롯 신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상종교 안에는 인간의 탐욕만 있지 인간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이나 윤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상종교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죄악이 성행하고 도덕적 타락이 뒤따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얼마나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인격을 바르게 잡아주는지 모릅니다.

바른 신앙생활은 사람을 순하게 하고 품격 있는 사람으로 바뀌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따른다면 어떻게 고결하게 바뀌지를 않겠습니까?

그렇게 바뀌어가야 하고 앞으로도 계속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 내내 이스라엘은 이 우상종교의 덫에 걸려 헤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미디안이나 아말렉 같은 이웃나라들의 압제를 통해 이런 이스라엘을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이들이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도록 기드온과 같은 구원자를 세워 이스라엘을 건져 내시죠.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민족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범죄와 악행 중에도 그들만은 징계하시되 다시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때 이미 구약성경 이스라엘 주변국들은 다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오늘 포악하게 이스라엘을 짓밟던 미디안, 아말렉은 물론이고 나중에 등장한 앗수르, 바벨론 이런 나라들은 몇 백 년 만에 다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그들이 섬기던 신, 바알, 아스다롯, 몰렉, 마르둑, 그런 것들도 예수님 당시에 벌써 다 사라져 없었습니다.

만들어진 신은 국가가 사라지면 같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세 전 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까지 계십니다.

그리고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의 실패를 넘어 찾아 오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이번에도 범죄하고 미디안 족속에게 진탕 두들겨 맞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오십니다.

11, 여호와의 사자가 상수리 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기드온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우리 말 사자로 번역 된 성경원어는 메신저, 대리인 이란 의미입니다.

메시지를 전달하고 공식적으로 그를 보낸 사람을 대표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본문을 한번 읽어서는 잘 찾아내지 못했겠지만 이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과의 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의아하게 점점 여호와로 바뀝니다.

여호와의 사자였다 여호와였다 그게 번갈아 쓰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사자이면서 동시에 여호와시라는 것이죠.

구약성경에 이런 예가 종종 등장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밤새 씨름해 놓고 뭐라고 합니까?

내가 여호와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잖아요?

여기서도 여호와의 사자와 기드온이 대화하는 걸로 시작하지만 뒤로 가면 여호와와 대화하는 걸로 바뀝니다.

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16절도 여호와께서

그렇다면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가 누구인지 짐작이 가시죠?
성육신하기 전 제2위이신 성자하나님이십니다.

그때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중재자가 되셨던 예수님이시죠.

인간에 의해 발생한 모든 종교는 창시자를 신격화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이전부터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창세기부터 일관되게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계속해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1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상수리 나무 아래 앉으셨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오신 것이죠.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성 우물 곁에 앉으셨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왜 거기 앉아서 물 길러 오는 사마리아여인을 기다리셨습니까?

예수님이 약속된 구원을 주실 메시야임을 알리고 구원하기 위해서잖아요?

오늘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서 기드온을 기다리시는 것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마침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로 다가왔듯이, 오늘 기드온이 몰래 탈곡을 하려고 포도주 틀로 나왔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내가 스스로 교회에 나온 것 같지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내 이름을 부르셨기에 우리가 주님을 향해 고개를 돌린 것입니다.

그때는 사마리아여인이나 기드온이 그랬듯이 남의 눈을 피하고 싶을 정도의 구차함이나 절망 속에서 살았을 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오셔서 그를 부르십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다는 이 말씀을 삼백여년 후에 이사야선지자가 다시 언급합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서 임마누엘이란 단어가 오늘 본문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지금 기드온에게 오신 여호와의 사자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이죠.

이 여호와의 사자가 바로 메시야로 오신다는 것을 임마누엘이란 단어를 통해 절묘하게 엮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고,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셨고, 우리와 함께 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러면 세상이 끝난 뒤에는 어떻게 하십니까?
데살로니가전서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지금도 이 시간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오신 기드온은 어떤 사람일까요?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은 큰 용사였을까요?

 

 

지금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서 언덕 위 넓은 탈곡마당이 아닌 움푹 파 놓은 포도주틀 안에서 몰래 곡식을 털고 있는 데 큰 용사인가요?

뒤에서 계속 나오는 기드온의 행동을 보면 그는 오히려 의심이 많고 소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셨을까요?
하나님이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신 것은 그 다음 말에서 이해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것보다 원문 성경 순서대로 배열하면 그 뜻이 명확해 집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강한 용사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강한 용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강한 용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기드온처럼 본래 가진 능력 이상의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 봤자 무슨 지금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겠나 싶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가진 뒤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이 다 내 능력 이상이었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일을 우리가 해 온 것입니다.

앞으로도 크고 강한 하나님의 용사로 큰 일을 해내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렇게 기드온에게 주어진 큰 능력을 보장했지만 기드온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먼저 13절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다고 부정합니다.

13,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신 것은 사실이죠.

1절에서도 사사기 저자가 그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미디안에 넘겨주신 것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뜻인가요?
그건 아니죠.

이스라엘은 버려진 게 아니라 징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버렸다면 징계가 필요 없죠.

우리도 살다보면 기드온처럼 환경이 옥죄어 오고, 배신에 치를 떨고, 지갑의 돈을 탈탈 털어서 쓸 만큼 궁핍한 때가 있습니다.

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데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

하나님이 나를 버려두시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하리라 그러셨다면 절대로 떠나지 않으십니다.

무엇이 문제이든, 그것이 징계이든, 아니면 성숙을 위한 시련이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기드온은 애써 농사한 수확을 칠년 동안이나 탈탈 털리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더 빨리 구한다면 구원은 더 빨리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지속된 어려움과 거듭되는 실망 속에서 깊이 낙담한 영혼은 희망의 메시지에도 쉽게 반응하지 못합니다.

14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말씀합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여호와의 사자가 거듭 큰 힘과 구원을 보장해도 기드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15,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이것은 기드온이 현실을 제대로 보고 한 말입니다.

, 현실은 항상 이렇습니다.

게다가 우리 안엔 근본 부정적인 성향에다 실패와 상처의 경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엔 인생에서 당한 아픔과 슬픔의 곳간이 있습니다.

지난 주 운동도 할 겸 말씀도 묵상할 겸 올림픽 공원에 나갔습니다.

오늘 말씀이 정말 제게 힘이 되더군요.

그래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잘 해나갈 수 있을거야. 큰 용사가 되어야지이렇게 말씀이 막 힘을 불어 넣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잔디광장을 지나다 보니 서울파크페스티벌 준비가 한창이었고 출연 가수들이 리허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에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가수는 마이크를 잡고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모든 슬픔과 허무를 끌어 올려 노래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슬픈 노래를 듣는 사람들도 그 노래를 들으며 깊이 묻어 놓았던 아픔과 슬픈 상처를 끌어내서 슬픔에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뭘 듣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죠.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고 힘이 솟던 마음이 슬그머니 사그라지고 다시 풀이 죽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기드온처럼 오래 되어 낙망한 문제가 있습니다.

걸핏하면 과거의 상처가 되살아나 우리를 불안하고 두렵게 합니다.

마음이 다 무너졌던 모세에게 그러셨듯이, 오늘 기드온에게도 여호와의 사자는 말씀으로 용기를 주고 그를 설득해 강한 용사로 세우십니다.

우리도 매일 하나님께 용기를 얻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니라, 용기를 내라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이렇게 다시 말씀으로 새롭게 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세상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는 것이죠.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따르기로 결심한 기드온처럼 우리도 해야 합니다.

기드온은 그의 일상이 되고, 살가죽처럼 붙어 있는 우상숭배의 자취를 걷어 냅니다.

우리도 세상과 본능에서 얻은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본문 다음에 기드온은 아버지 집의 바알제단과 아세라 신상을 파괴합니다.

물론 아직 용기가 없어 낮에 못하고 밤에 해치웁니다.

참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우리 믿음이 하루 아침에 강한 용사가 되어 버리면 그건 내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는 것은 서서이긴 해도 분명하게 과거와 선을 긋는 것입니다.

기드온처럼 우상을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종교의 경을 읽어 주듯이 들으면 안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민족적으로 독경소리를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몰라도 마음이 편해진다고들 하잖아요?

말씀이 우리의 살갗처럼 되어버린 세상방식과 본성대로 살아온 삶을 양날의 검이 되어 베어내게 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인격에 새로운 피부가 되도록 그렇게 말씀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복되게 변화시켜 가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야구선수 강정0 선수를 다 아실 것입니다.

한국에서 강정0 선수에 대한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전에 우리나라에서 음주운전 뒤 도주했던 경력도 있었죠.

결국 강선수가 세 번의 음주운전으로 2년전 미국취업비자발급이 불허되었습니다.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만난 것이죠.

미국에 머물 수가 없게 되자 도미니카공화국에 임시로 머물게 됩니다.

거기서 음식이 너무 맞지 않아서 한국인 선교사 집에서 두 달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당시 강선수가 스포츠잡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합니다. 미국에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괜찮습니다. 야구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저는 증명하며 살길 원합니다.’

물론 강선수가 당장 자신의 모든 약점을 다 이겨낼 수 없을지는 모릅니다.

그후 강선수는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팀에 복귀했고 지난 4월 보스톤의 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누군가의 인스타그램에 친구들과 파티하는 강선수의 사진이 올라왔는데 손에 술잔 대신 음료수 캔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변화가 일어났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작이란 과거의 포기 없이는 시작될 수가 없습니다.

기드온은 바울제단을 쳐부순 뒤 여룹바알이란 새 이름으로 불리워집니다.

바알과 다투었다는 뜻이죠.

이름이 바뀐 것은 정체성이 바뀐 걸 말합니다.

기드온이 여전히 바알문화를 버리지 못했다면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절망과 한숨과 허무한 인생을 바꿔주셨다면 우리도 생활과 인격이 바뀌어 가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듣는 대로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꿔나가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럴 때 우리 각자에게 기드온에게처럼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매일 강한 용사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2019년6월16일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