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iZq40PYco60
<2019년6월30일 설교영상>
사사 기드온에 대한 세 번째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이 갈라디아교인들에게 했던 책망이 생각이 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기드온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시작한 전쟁이 뒤로 갈수록 변질됩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성공했지만 기드온의 전쟁은 겉모습과는 달리 실패한 전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기드온의 본성적 한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똑같이 존재합니다.
속에서 뭉근히 끓고 있다 기회만 되면 분출되는 용암 같은 것이죠.
이걸 모르면 우리도 매일 실패한 기드온의 전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안식처가 아니라 싸움터입니다.
지난 한 주도 싸우다 오셨는지 안식하다 오셨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잖아요?
이런 싸움을 모른척한다고 안 싸우며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비무장상태로 더 거칠고 잔혹한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 땅에서는 지켜내지 못하면 뺏기는 것입니다.
인간 기드온의 전쟁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각자의 전쟁에서 이기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1. 이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으로 시작해 인간 기드온의 전쟁으로 변질되는 것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 기드온은 하나님의 전략으로 십삼만 오천명의 미디안연합군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기드온은 단 삼백명의 용사들과 함께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을 들고 기습공격을 감행했죠.
한 밤중에 항아리 깨지는 소리와 나팔소리에 혼비백산한 미디안은 서로를 적으로 오인해 자기들끼리 싸워 그 밤에 십이만 명이 전사합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만오천명은 요단강을 넘어 자기 나라로 도망칩니다.
딱 여기까지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신다는 궁극적인 메시지를 담아 놓은 것입니다.
단순한 나라간의 싸움이 아닙니다.
시편83편을 보면 이 미디안 전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에는 오늘 미디안과의 전쟁을 회상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
일개 부족인 미디안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도발하는 게 느껴지십니까?
이런 것은 사탄이라는 인격체가 배후에 있다는 암시입니다.
그렇기에 이 전쟁을 통해 하나님이 장차 사탄에 붙잡힌 인간을 구원하실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지난 주 기드온이 들었던 꿈 얘기처럼 보리떡 한 개로 사탄의 장막을 무너뜨리시겠다는 것이죠.
보리떡 한 개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겠어요?
이 구원의 전쟁에서 홀로 싸우고 이기실 예수님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이 전쟁이 구원을 상징하고,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메시야의 모형은 실은 기드온이 아니라 보리떡입니다.
메시야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아주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거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걸 위해 이 전쟁을 기획하셨는데, 기드온이 나서서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아마 이루는 것 보다 망치는 게 더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계획하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기에 인간의 생각과 육체가 개입할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악에 대한 심판도 하나님이 하시고 구원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죠.
그렇기에 기드온은 바로 어젯밤 싸움에서 멈췄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이 현실적인 전쟁인데, 도망가는 적들을 다 그냥 내버려 두어야 했을까요?
물론 도망가는 적들을 뒤쫒아 일망타진하는 것은 인간의 전쟁사에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뒤끝 없이 다 해치우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쫒아내지 못한 이웃나라들을 왜 그냥 남겨 놓으셨는지 사사기 2장에서 이미 밝히셨습니다.
그걸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나를 순종하는지 안하는지, 그리고 불순종으로 떠났을 때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도구로 쓰시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허리에 가시가 되는 사람들을 좀 남겨두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찌르는 사람들과 문제들이 있잖아요?우리는 모든 문제들이 뒤끝 안 남게 깨끗하게 처리되길 원하지만 그게 안되는 것입니다.
나를 제일 힘들게 하는 문제일수록 여러 가지가 얽혀 단칼에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늘 마음 한편에 남아서 신경이 쓰이고 기회를 틈타 괴롭히곤 하죠.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벗어나지 않게 두신 안전장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고질적인 문제들이 곁에 있다 해도 매일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기드온이 미디안을 일망타진했지만 기드온이 죽은 뒤에 또 다른 나라들이 계속 침략해 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가 무엇이든 그걸 해결하려고 물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문제만 해결하려 든다면 결국 또 다른 원수들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원수인지, 얼마큼 원수가 강하고 독한지가 중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고려해서 관리하고 계시다잖아요?
그러니 빨리 해결 안 된다고 조급해 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때로 육체의 병도 끼고 살면서 잘 다뤄야 하는 그런 종류의 것입니다.
지금의 문제들은 끼고 살만하기에 하나님이 두시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더 잘 이기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 그냥 둬야 할 것을 무 자르듯 잘라내는 게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다음 인간 기드온이 자기 힘으로 해나가는 전쟁에서 우리가 중요한 교훈들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 매일 내 힘으로 살 때가 많잖아요?기드온은 왜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지시도 받지 않고 신들린 듯 전쟁을 마무리하려 했을까요?
칼을 들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전쟁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싶어 하잖아요?
하나님의 뜻은 일단 우리 본성과 절대로 합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본성대로 사는 게 제일 육체와 합의가 잘 됩니다.
우선은 내 본성의 소리에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의 음성은 이미 어젯밤으로 완료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전쟁을 사람의 공으로 돌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 이겼다는 소리를 못하게 지원자들을 다 돌려보내시고 가장 최소 인원 삼백명만 남긴 것이잖아요?
칼로 싸우게 하지 않고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로 싸우게 하신 것이잖아요?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은 자기의 영광을 좇는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것이죠.
기드온은 하나님이 돌려 보냈던 군사들을 다시 다 불러 모읍니다.
도망치는 적병들을 죽이라고 사방팔방 전령을 보냅니다.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뒤집은 것입니다.
그리고 칼을 들고 미디안의 두 왕을 잡아다 이 전쟁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겠다는 것입니다.
칼을 들어야 싸우는 맛이 나지 항아리, 횃불 이런 건 아니잖아요?
8장을 읽어보면 기드온이 점점 전쟁 광기에 빠집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키려고 신경 써서 살지 않으면 본성에 좌우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기드온의 전쟁 과정에서 있었던 몇 가지 사건은 이렇게 성령이 아닌 육체로 살 때 벌어질 어두운 면을 보여줍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마찰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지파와의 갈등에 부딪칩니다.
에브라임지파는 기드온이 속한 므낫세 지파와 직계 형제 집안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요셉의 아들이잖아요?
그런데 에브라임이 므낫세보다 세력이 더 강했습니다.
세력이 강하면 인간은 횡포를 부리죠.
기드온이 싸우다 보니 에브라임을 안 부르면 나중에 또 시비를 걸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에브라임지파에 전령을 보내서 전쟁에 가담시킵니다.
에브라임은 열심히 싸워서 두 장수의 목을 기드온에게 가져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1절,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아무리 머리를 써서 대인관계를 잘 해나가려고 해 봤자 결과적으로 이런 갈등을 빚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도 죄인이고 상대도 죄인이잖아요?
사람 사는 게 늘 사람끼리 지지고 볶는 것 아닙니까?지난 주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을 때는 어땠습니까?사람들이 찾아와서 함께 하자, 동지가 되자고 모여들었잖아요.
잠언16장7절에서도 대인관계의 황금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사람 때문에 골치 아프면 내 모습에서 뭔가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지 않는 것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또 기드온과 에브라임과의 갈등에서 내 처세술로 하는 대인관계에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사람관계도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서 해결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숙곳과 브누엘사람들과의 마찰이 생깁니다.
기드온과 삼백명의 용사들은 요단강을 건너가서 두 왕을 추격했습니다.
그러던 중 군사들의 기력이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전쟁 중에 식량이 다 떨어지고 밥 먹을 겨를이 없었겠죠.
그래서 숙곳이라는 마을에 들어가 군사들이 먹을 음식을 좀 달라고 요청합니다.
자기 민족 일이니 웬만하면 도와 줄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정말 모욕적인 말로 기드온을 멸시합니다.
지금 당장 네 손에 두 왕의 목이 있지도 않은 데 뭘 보고 네게 음식을 주겠냐며 보기좋게 거절합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를 지지하고 대단히 여길 줄 알았는데, 뜻밖에 모욕을 당한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병사들 앞에서요.
모욕과 거절이 얼마나 사람을 창피하게 하고 낙담시키는지 당해보면 압니다.
살다보면 정말 기분 나쁘게 모욕당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무시당할 때 있잖아요?
기드온은 스스로가 점점 대단해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드온을 높여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원칙을 밝히셨잖아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여주시리라
남에게 무시당하는 말을 들었을 때 낙담하지도 말고 분노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내 잘잘못을 떠나서 성경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낮추시려고 그러시는구나.
내가 낮아진 다음엔 다시 높여 주시겠지.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과 나에게서 찾으면 사람과 갈등할 일이 줄어들겠죠.
그렇지 않으면 기드온처럼 자기를 거절한 두 마을에 복수하는 것입니다.
나를 모욕한 상대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것이죠.
기드온은 미디안왕을 사로잡고 돌아오다 두 마을을 다 파괴하고 사람들을 잡아 죽입니다.
강한 에브라임지파에는 비굴한 모습을 보였지만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작은 부락 사람들에겐 속에 있던 폭군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그렇잖아요?나보다 힘있고 무시하지 못할 사람은 비위 맞추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말하잖아요?
이러다 보니 사람관계가 늘 불편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기쁘지가 않은 것입니다.
나를 분노하게 하고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이 사람을 대할 때 이렇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하나님이 내가 남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시고 나도 그대로 대접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해서 함부로 대한 사람이 내게 똑같이 하는 걸 넘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 함부로 대하는 걸로 갚아주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게 되지 않겠습니까?
3. 결국 기드온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것은 누가 내 인생의 왕이냐입니다.
내 생각대로 계속 산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부정하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기드온의 맹활약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하나님이 우려하셨던 일, 기드온이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물론 기드온은 자기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치며 사양합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이 말을 잘 보면 자신이 마땅한 공로를 세웠지만 그러나 왕은 되지 않겠다고 합니다.
왕의 자리는 점잖게 하나님께 양보하겠다는 식이죠.
기드온에게 정말 왕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까요?
사람이 입으로 말한다고 속마음이 다 똑같지는 않잖아요?
이어서 나오는 기드온의 행동을 보면 기드온은 이미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듯이 행동합니다.
왕을 거절한 기드온은 24절에서 사람들에게 금을 요구합니다.
24절,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무슨 권리로 백성들에게 금을 요구합니까?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금을 요구했고 25절에 보면 이들은 신이 나서 탈취한 귀고리를 모으고 있죠?
이미 암묵적으로 기드온이 왕의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얼마나 백성들이 일심동체가 되었는지 모인 금 무게가 천칠백 세겔이라고 합니다.
현재 단위로 환산하면 20킬로가 넘고 요즘 시가로 10억이 넘습니다.
왕실의 재산을 모아준 겪입니다.
뒤에 보면 기드온 아들이 칠십명이었다고 하죠.
아들만 칠십명이라면 아내는 수십명이고 더 많은 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재산이 없고, 왕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어요?
기드온은 왕관만 쓰지 않았지 이미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것입니다.
사람들 속에는 다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내가 인생의 주인이라는 본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을 탐내는 창세기의 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거라는 말에 선악과에 손을 댄 그 태초의 죄가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죠.
27절에 보면 기드온이 이상한 일을 벌입니다.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금으로 에봇을 만들었다고 하죠.
에봇은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 입는 의복을 말합니다.
기드온이 이 에봇을 금으로 만들어서 자기 집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실로라는 곳에 성막과 법궤와 그곳을 지키는 대제사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이나 입는 에봇을 기드온이 만든 저의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사람의 본성에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 못지않게 영적인 야심이 있습니다.
돈이나 정치적 권력보다 종교의 영적 권력이 더 강력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신과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갖고 복종하잖아요?
‘집사님 제가 기도해 봤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좀 다르게 본다니까요.
기드온의 에봇이 그런 속셈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에봇에는 하나님께 물어볼 수 있는 우림과 둠밈이란 판단 도구가 있었잖아요?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 신탁을 받아서 사람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 탐욕의 끝은 스스로가 신이 되는 자리에 가서 멈추는 것입니다.
사이비 교주들이 그런 것이죠.
자기를 영적으로 우러러보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우월감과 쾌감은 인간 죄성의 극치입니다.
상대적으로 어떤 이들에겐 이런 영적교만으로, 어떤 이들에겐 거기에 머리 숙여 복을 얻으려는 우상숭배로 나타난다고 성경은 정확히 지적합니다.
백성들은 기드온이 만든 이 에봇을 음란히 섬겼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음란하게 섬겼다는 말은 우상숭배에 쓰이는 말입니다.
우상 숭배는 간단히 정의할 수 있습니다.
잘 되는 나를 위해 이용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번에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한 유명 연기자 부부가 이혼을 하려나 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올해 이혼할 거라고 사주를 봐준 사람에게 관심이 폭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에겐 미래의 내가 어떨지를 미리 알고 나를 위해 대비하려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게 기복과 무속이 존속하는 힘이죠.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원하는 걸 얻기 위해 기드온과 에봇에게 묻고 섬겼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보다 더 영적으로 강해 보이는 사람을 의존하는 것은 내가 얻고 싶은 것, 내가 가진 것을 지키겠다는 우상숭배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증거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데 그 이유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것도 엄밀하게 보면 아직 우상숭배의 단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더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미 독생자와 독생자를 통해서 모든 것을 주셨잖아요?이런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지금 당장 얻는 것, 지금 받아 누리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왕이시고 보호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모르고 계시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공원에 가면 가끔 아주 늙은 강아지를 데리고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도 한 아주머니가 아주 작고 늙은 강아지를 데리고 바깥 바람을 쐬주려고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보기에도 너무 기운이 없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데 아주머니는 강아지가 더위를 먹을까봐 연신 물휴지로 얼굴과 목을 닦아 주고 있었습니다.
늙은 강아지가 주인아주머니에겐 아직도 사랑스런 내 애기인 것 같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청년의 때 얼마나 사랑스럽고 하나님이 귀하게 인도해 주시겠습니까?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저 강아지처럼 늙고 다리에 힘이 다 빠질 때도 여전히 내 아가라고 사랑해 주실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나이 드신 우리 이안순집사님도 하나님아버지께는 사랑스런 아가인 것이죠.
이사야 46장 4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모든 걸 짊어지고 아등바등 얻어내려고 너무 힘들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나의 왕과 보호자로 모신 이상 이제까지도 다 하나님이 알아서 주시고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산 게 아닙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따라 살면 복이 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방해하는 두 주적이 있잖아요?
기드온에게서 보여 진 죄의 인격과 외부에서 나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영들입니다.
이것과 싸운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도하신 말씀이 내가 살 길임을 알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굳게 말씀대로 행하려고 씨름하는 걸 말합니다.
영적인 전투를 하라는 게 우리에게 퇴마사가 되라는 게 아닙니다.
내 힘으로 매일 살아가고 있다면 오늘 기드온의 전쟁에서 드러난 것처럼 본성이 저지른 곤혹스런 문제들이 늘 우리를 복잡하게 하고 괴롭게 할 것입니다.
내 본성이 부패해서 그렇게 산 결과가 심판임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루하루 말씀대로 살아가는 게 복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내가 원하고 기대했던 그 이상의 삶이 저절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어느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이 은혜를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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