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삼손 2 (사사기16장1절-5절,25절-30절)

남수연 2016. 9. 21. 14:30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사사 삼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삼손1탄을 듣지 못한 성도님들은 오늘 2탄에 더 집중하셔야 할 것입니다.

드라마에서도 첫 회를 안보면 내용 따라잡기가 좀 어렵죠.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이 말은 과학적으로 확인 된 사실입니다.

영국의 한 대학교수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뇌를 촬영해서 연구했더니 비판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두뇌 활동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에 빠져 정말 눈이 먼 사사 삼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사기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역시 교양과 문화로 위장 한 영적 사사시대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 문명은 아무리 치장해도 그 내면은 야만과 무지와 어두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성도이지만 현재 우리 삶의 자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아니라 약탈과 전쟁과 가난과 죄악이 뒤엉킨 사사기의 땅입니다.

그 안에 살던 무지한 사람들과 그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사사 삼손의 약점이 우리 시대, 우리 안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속 누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윗과 비슷합니까, 사무엘과 비슷합니까, 다니엘과 비슷합니까?

우리는 삼손에 가깝습니다.

오체불만족이란 소설을 쓴 오토다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천성 사지절단증으로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지만 역경을 이긴 이 자서전적 소설에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큰 용기를 얻었다고 하죠.

그런데 이 분이 다섯명의 여자들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인정하고 결국 이혼했다는 기사가 났더군요.

불륜스캔들로 인해 자민당의 참의원 공천도 물거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사를 접한 네티즌들은 오체불만족이 아니라 오체불륜만족이라고 비아냥거리더군요.

이 기사를 보며 인간의 치명적인 죄질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지가 다 절단되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이 불멸의 죄성을 우리가 다 안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죄가 선을 이기던 암울한 사사시대는 현재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정황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일그러진 영웅 삼손은 우리 안의 일그러진 영혼을 위장 없이 순진무구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사사기를 통해, 삼손의 실패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여인과 결부 된 두 사건이 나옵니다.

먼저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1절을 보면 삼손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블레셋의 중심도시로 내려가 한 기생의 집에 들어갑니다.

삼손은 오늘도 사사에 대한 기대와 이미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죠.

하나님이 특별히 관여하신 인생이건만 삼손에게 남다른 점이라곤 헤라클레스 같은 괴력뿐인 것 같습니다.

블레셋 군사들은 삼손이 제 발로 호랑이굴에 들어왔으니 쾌재를 부르며 성문을 봉쇄하고 주위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성 문짝들과 문설주와 문빗장을 통째로 빼서 어깨에 메고 군대를 돌파해 유유히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유대땅 헤브론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성문짝을 거기다 꽂아 세웁니다.

거대한 성 문짝을 메고 달려가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엉뚱합니까?

가사에서 헤브론까지 무려 60킬로가 넘는 거리를 방문짝도 아닌 성 문짝과 문설주를 메고 갔다는 것은 삼손의 괴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줍니다.

삼손이 이런 기상천외한 행동은 주체할 수 없는 힘을 아무렇게나 과시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삼손이 들어간 가사는 블레셋에서 가장 큰 성이었습니다.

그 성문을 떼어다 이스라엘의 요충지 헤브론에 세웠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문을 얻었다는 것은 승리를 상징합니다.

눈을 멀겋게 뜨고 성문을 뺏긴 블레셋은 무력한 패배자가 된 것이죠.

백성들은 이런 큰 힘을 가진 사사 삼손 덕택의 블레셋의 침탈에서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을 다해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삶에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고 간섭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의 신자들이건 하나님의 정성스러운 뜻과 성도들에게 주신 가장 복된 삶의 매뉴얼을 온전히 따랐던 적은 없습니다.

뭔가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의 부흥과 개혁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아주 짧은 기간뿐이고 또 믿음은 후퇴하고 변질된다는 것이 교회사가 말해주는 진실입니다.

우리 신앙도 한결 같지 않고 오르내리잖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사사시대와 같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자기 소견대로 뒤죽박죽 살다 겨우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래 어떻게 살아야 하는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또 마음을 다잡고 돌아가지만 여전히 마음먹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죠.

그나마 우리가 믿음을 붙잡고 있는 것은 사사시대와 동일하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 후에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삼손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블레셋 군주들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삼손이 소렉골짜기에 사는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들릴라는 관능적이며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오죠.

성경을 보면 집요하고 영리하며 야망을 위해 연인을 죽음에 넘겨 줄 만큼 냉혈인간이라는 것을 추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의 연애소식을 들은 블레셋의 방백들이 들릴라를 찾아와 제안을 합니다.

삼손의 힘의 원천을 알아내서 그를 잡게 해주면 은 천백개씩을 주겠다고 하죠.

삼손 다음 이야기에 보면 미가라는 사람이 가문을 위해 제사장을 데려오는 데 연봉을 은 이십으로 책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백개의 은이면 무려 55년치 연봉입니다.

그것도 블레셋 방백들이 각각 그만큼을 주겠다니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였습니다.

삼손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얻으려는 값으로 본다면 그 정도는 제시해야 했겠죠.

블레셋이 들릴라를 협박하지 못하고 현상금을 제시한 것은 삼손의 여자였기에 함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손의 보호와 사랑을 받은 연인 들릴라는 삼손 대신 거액의 포상금을 선택합니다.

실제 이런 일확천금의 기회가 생긴다면 누구든 선택을 할지 모릅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배우자를 자기 손으로 독살하기도 하는 게 인간이잖아요.

들릴라는 삼손의 사랑을 이용해 그를 결박할 약점을 찾아내려 집요하게 공략을 합니다.

괴력의 비밀을 털어놓으라는 들릴라의 간청에 삼손은 처음 몇 번 엉터리 대답을 해줍니다.

삼손이 둘러 댈 때마다 들릴라는 그대로 시험한 뒤 가짜라는 것을 알고는 삼손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며 거세게 몰아 부칩니다.

더 이상 들릴라는 삼손 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신분상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세상은 결코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 사람들조차도 영적으로는 절대 중립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웃는 얼굴을 바꿔 우리를 대적하고, 번민하게 하고, 괴롭게 공격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6절에 보면 코너에 몰린 삼손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아무리 사랑에 눈이 먼 삼손이라 해도 들릴라의 속셈을 전혀 모를 만큼 어리석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노예가 된 삼손은 자신의 목숨과 백성들의 운명이 걸린 나실인의 비밀과 들릴라에 대한 사랑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도, 사명보다도, 육신의 사랑을 더 갈망했던 삼손은 결국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나실인으로 태어나 한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털에 비밀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그 비밀은 블레셋 군주들에게 전달되고 삼손은 잠든 중에 머리털을 밀립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삼손의 큰 힘은 사라집니다.

힘을 잃은 삼손은 블레셋 군사들에게 붙잡혀 두 눈이 뽑혀 장님이 된 채로 감옥에 갇혀 무거운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 두 여인의 사건이 묶여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넘나드는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의 호각을 부는 것입니다.

그 위험을 정확하게 아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사사기에 나온 그 어떤 사사들도 삼손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사람이 없습니다.

삼손만큼 자신의 힘을 믿고 세속적인 재미를 찾아 원수의 진영을 서슴없이 드나든 사람은 없었거든요.

죄의 본성이 만들어 낸 세상문명은 죄인들을 매력적으로 끌어들이고, 세상 것은 무엇이든 몸에 걸치면 다 잘 맞습니다.

세상은 우리 몸에 그냥 자연스럽게 착착 감깁니다.

신앙의 삶은 좋은 것은 알겠는데 뭔가 몸에 잘 안 맞고, 저절로 끌려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곁을 훌쩍 떠나지 않는 것은 그나마 나한테 좋다는 것은 알아서 그런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저급한 재미는 아주 쉽게 중독되고 영적인 긴장의 끈을 점점 풀게 만듭니다.

추석 연휴 끝에, 주말과 휴가를 즐긴 다음에, 믿음이 용솟음치고 힘차게 일상에 복귀하려는 마음은 절대로 안 생깁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오랜 휴식 뒤라면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영적 휴가가 길어질수록 복귀는 어렵습니다.

슬금슬금 세속을 따른 결과는 서서히 인생의 한 부분이 무너져 내리는 큰 댓가를 치르기도 합니다.

세속과 세상임금 사탄은 우리가 가지고 놀만큼 우리보다 결코 미련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여전히 즐기면서 줄타기 하듯 믿음으로 살다보면 반드시 밑에 있는 사자 우리 안으로 떨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처음에 이방인인 블레셋여인을 아내로 맞으려했던 삼손은 그 다음은 기생의 집을 드나들고, 그 다음은 비정상적인 동거를 합니다.

점점 깊이 욕망과 세속에 끌려 들어간 것입니다.

들릴라라는 이름의 뜻이 의미심장합니다.

그 뜻은 매달아 둔 먹이입니다.

왜 먹이를 매달아 두었겠습니까?

사람들을 유혹하여 점점 파멸로 이끄는 세속은 쾌락과 풍요를 줄 것처럼 사람을 유인하지만 그것은 매달아 둔 먹이일 뿐입니다.

러시아아 속담 중에 공짜 치즈는 쥐 덫에만 놓여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태하게 늘어져 세속이 주는 재미들을 받아먹다보면 삼손처럼 귀중한 것을 잃고 치욕을 당하는 처지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삼손은 결국 하나님과 무관한 육적인 삶을 살다 명예와 자유를 다 잃고 보기 좋은 대로 그 몸을 이끌고 다니던 두 눈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사사로서의 사명인 블레셋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 결국 목숨까지 희생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물정도 모르고 천진무구하게 욕망을 따라 가면 반드시 귀중한 것을 댓가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미국의 라스베가스에 가봤더니 온갖 화려함으로 치창한 대형 호텔들의 숙박료가 오만원 남짓밖에 되지 않더군요.

싼 값에 호사스런 숙박을 하며 카지노에 손을 댔다 숙박료의 몇 십 배, 몇 백배의 돈을 잃는 게 라스베가스의 덫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지만 하나님의 통치에 복속되는 동안만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천국의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적 생활에도 공짜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흘러나오는 희락과 의와 평강과 만족은 그 수여를 기대하고 사모하는 성도들에게만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비록 성도라 해도 세속을 좇는 순간 세상임금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 생각엔 아닌 것 같아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마귀를 세상임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고 뱀에 물린 독처럼 마귀의 독이 삶에 은밀히 스며들어 독소로 가득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 인격체인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살 때만이 성도로서의 승리와 풍성한 삶을 공여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발은 이 땅에 견고히 디디고 우리의 머리를 하나님께 향하고 이 땅의 생애를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견대로, 우리의 눈이 좋아하는 대로 행하는 게 아니라 이미 옳다 알고 있는 신앙의 길을 매일 꾸준히 따라가는 것임을 삼손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삼손의 생애에 숨겨져 있는 놀라운 비밀 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 말씀드렸듯이 삼손의 출생은 다른 사사들과 달리 특별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 출생에 관여하시고,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그 일을 부모들에게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과연 삼손이라는 사람이 그런 특별대우를 받을만한 사람이냐는 데 우리는 의혹을 갖게 되죠.

이런 출생들이 성경에 몇 번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실 때, 사무엘과 세례요한의 출생 등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 오실 구원자 그리스도와 관련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신비한 출생이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다면 우리에게 주목하라는 것이고, 그 안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구원을 예표하는 징표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삼손도 그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삼손과 같이 우발적이고 미성숙한 사람 안에 어디 그리스도의 형상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몇 장 되지 않는 삼손의 생애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의 예표가 들어있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가장 어두운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의 운명이 꺼져가는 심지처럼 사그러드는 절망의 때에 하나님은 가장 많은 예수님의 예표를 가장 연약한 사사 삼손 안에 감춰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갖 약점과 죄악으로 가득 찬 인간 안에 그리스도로 오셔서 친히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역설적으로 시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사기를 볼 때,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기억하며 우리 믿음을 더욱 더 견고히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원수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을 때 이스라엘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자신들을 종으로 부리던 잔혹한 지배자로부터 구원해 줄 유일한 희망인 삼손에게 이들이 어떻게 합니까?

밧줄로 묶어서 블레셋 손에 넘겨 줍니다.

이것이 무엇을 떠오르게 합니까?

사탄에 속박된 귀신 들린 자, 병든 자들을 고치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신 예수님을 동족 이스라엘이 결박해서 빌라도에게 넘겨 준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음은, 삼손이 블레셋의 성 문짝을 메고 헤브론 앞 산 꼭대기에 세운 것의 의미입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2217절에 나온 말씀과 관련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이삭대신 숫양을 준비해 놓으신 그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아브라함의 씨, 즉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오실 그리스도께서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과 예언이죠.

삼손이 원수 블레셋의 성문짝을 유다에 세운 것은 예수님께서 사탄의 나라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 들릴라가 삼손을 배신하고 은을 받고 팔아 넘겼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예수님께서 가룟유다가 은 삼십에 주님을 밀고 해서 결박되었다는 것을 떠올리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들릴라에 대한 삼손의 사랑입니다.

옛 복음성가 중에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나를 사랑해서입니다.

탐욕과 미혹에 빠져 하나님도 팔아 먹을 우리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잖아요?

본문에서 삼손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비밀을 가르쳐 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들릴라에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바로 삼손의 맹목적인 사랑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삼손은 들릴라에게 배신을 당해 눈이 뽑히고 감옥에 갇힌 수모를 당하면서도 들릴라에 대한 원한을 한번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들릴라에 대한 사랑이 배신의 아픔보다 더 컸기 때문이 아니였나 생각해봅니다.

그렇기 삼손의 사랑에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모든 배신자들을 위해 목숨을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찾아볼까요?

바로 삼손의 마지막 죽음의 장면입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살려내 천국으로 인도하신 것이죠.

 

말씀을 맺습니다.

힘은 세지만 평생 영적 사춘기 속에서 충동적인 생애를 살았던 삼손은 삶을 내 뜻대로 살아보겠다며 좌충우돌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차를 움직이려면 말을 마차 앞에 매야 합니다.

말을 마차 뒤에 매 달고 마차를 끌어 보려고 있는 힘을 다하는 모습이 하나님을 앞서 내 뜻대로 인생을 움직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이셔야 합니다.

나실인이 머리털을 자르지 않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머리털은 겉으로 드러나는 상징일 뿐이고, 그 의미는 자신의 전인격인 머리를 하나님께 복종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삼손은 머리털만 기른 채 그 머리로는 세상을 따르고, 죄의 본성대로 살고, 자기의 소견대로 살았기에 고통스런 종말을 맞았던 것입니다.

삼손이 죽을 때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지막이라도 장렬하게 내가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서 블레셋에 원수를 갚겠다가 아니라 나를 이렇게 만든 것들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잖아요?

죽는 순간에도 육적으로 살았던 인격은 안 바뀝니다.

믿음은 오히려 죽는 순간에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니까요.

신앙의 성숙하고 아름다운 인격은 살아서 노력하고 연단한 그 이상 얻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원수 블레셋을 크게 이긴 최후는 인간의 그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무 제약 없이 그 뜻을 이뤄나가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의 삶에 구석 구석 빛나는 그리스도의 단편을 숨겨놓으심으로서 구원의 모든 계획을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전인격체인 머리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지도를 받아야 인생의 마차가 올바른 방향으로 잘 굴러갑니다.

신앙의 어느 단계가 되면 바라는 기도가 잘 응답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시해서 기도하지 않던 다른 일들은 이상하게도 잘 되게 축복하십니다.

이것은 내 소견대로 하나님을 끌고 가려는 죄의 본성을 연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많은 것으로 우리 삶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축복의 땅 가나안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으면 그곳은 어느 순간 사사시대와 같은 혼란과 고통과 압박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모든 삶을 주님께 복속시켜 복된 가나안의 축복을 이 땅에서도 누리시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2016년9월18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