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나 지역의 이름이 정해진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동네이름이 특별난 사건으로 해서 바뀌기도 합니다.
우리교회가 속한 오금동은 이 마을에 오동나무가 많고 가야금을 만드는 사람이 살고 있어 오금동이라고 불리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일어난 한 사건이 오금동과 또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갑니다.
패전을 감지한 신하들은 다 도망가고 얼어붙은 땅을 힘겹게 달리던 말들도 멈춰 서자 인조임금은 걸어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건너 백토고개까지 온 인조임금이 주저앉으며 ‘아이구 오금이야’라고 말했다고 해서 오금골이라고 불리게 되었답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인조임금이 백토고개에 주저앉아 청나라 왕 앞에 무릎을 꿇을 생각을 하니 오금이 저린다고 말한데서 붙여졌다고 합니다.
결국 남한산성에 피신한 뒤 두 달이 안되어 인조임금은 청나라 태종 앞에 항복을 합니다.
지금의 석촌호수 근방으로 끌려가 청태종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부딪쳐 절하는 굴욕을 당하죠.
이런 치욕의 원인은 당시 잘못된 외교정책과 이권을 챙기려고 살벌하게 서로 물어뜯던 당파싸움으로 정작 나라를 지킬 힘을 길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가야금을 튕기며 삶의 즐거움을 누려야 할 오금동이 오금이 저릴만큼 괴롭고 쓰라린 역사를 대변하는 이름이 된 것이죠.
요즘 우리민족이 그런 역사를 다시 새겨봐야 될 것 같고, 우리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도 교훈을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보김’이라는 지명도 본래는 벧엘에 속한 곳이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었던지 동네 이름이 보김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보김의 뜻은 ‘우는 자들’입니다.
이 보김의 큰 울음은 앞으로 벌어질 삼백년 사사시대의 불길한 징조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의 서막을 올리고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가나안정복을 지휘했던 여호수아가 죽은 뒤부터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등장하고 사울왕이 세워지기까지 삼백년 정도의 시대를 말합니다.
이 시대에는 특출 난 한 지도자를 세우신게 아니라 위기 때 마다 하나님께서 백성 가운데 사사를 세우셔서 나라를 구하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의 땅에서 행복한 웃음소리가 나야지 어쩌다 큰 울음소리가 나게 된 것일까요?
구원의 복된 삶을 사는 우리에게서 한숨과 탄식이 사라지고 항상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기를 축복드립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서글피 울게 된 내용을 잘 살펴보고 우리에게도 잘 적용해야 될 줄 믿습니다.
우선 본문은 여호와의 사자와 이스라엘백성들과의 대화가 중심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오셔서 가나안땅에 살림을 시작한 이스라엘의 잘못을 엄히 책망하고 계십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단순히 천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성자하나님을 지칭합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읽어보면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 속에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독특한 표현들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했고, 내가 앞으로도 너희와 맺은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않겠다’고 말씀하죠.
구약성경시대에 성자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라는 명칭으로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행하시며 그 때 역시 중재자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렇게 백성들을 책망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 원주민들과 동맹을 맺지 말고 그 종교를 따르지 말라고 했건만, 어째서 너희가 약속을 어겼느냐’
‘그러니 나도 이제 너희를 위해 그들을 쫒아내지 않을 것이니 이제 너희가 이웃으로 삼은 가나안민족이 너희를 찌를 것이고 너희가 선택한 그 신들이 너희 목에 올가미를 씌울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이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의 삶은 구원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삶의 교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고, 한편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고,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나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힘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발견해낸 게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내셔서 교회로 인도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변덕스런 우리가 선택한 믿음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하셨기에 우리의 믿음이 반석과 같이 안전한 것입니다.
만일 믿음이 우리의 선택이었다면 우리는 올 한해도 장담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언약한 백성들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을 헐라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에 살고 있는 부족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가나안 문명의 자취를 다 헐어내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가나안 땅의 문명과 섞이지 말고 배우지도 말라는 것이죠.
이것은 인종청소를 하신 게 아닙니다.
가나안부족들을 멸망시키고 대신 이스라엘을 심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부족들의 죄악이 가장 패륜적이고 심판의 수위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은 분명하게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죄를 쌓으며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심판의 예고편이죠.
그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심은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길러 장차 그 후손인 예수님을 통해 만방이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한 완전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 각자를 불러내신 이유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뿐 아니라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도대체 어쩌려고 심판을 당할 그 중에 섞여 있냐는 것입니다.
2절에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라는 음성은 이미 성경에서 우리가 듣던 그 목소리입니다.
아담을 찾아오셔서 ‘네가 먹지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느냐?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아우를 죽였느냐,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나님은 마땅히 행할 길을 벗어나 잘못 가는 성도들에게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사느냐?’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끝까지 찾아오셔서 악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러나 잘못 산 결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담당해야 합니다.
오늘 명령을 어기고 가나안의 문명과 신을 받아들인 댓가를 이스라엘이 스스로 지고 삼백년 사사시대를 혼돈 가운데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약속을 어겼으니 나 여호와도 다시는 네 대적들과 싸워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심판받아야 할 가나안과 한 패가 되어, 싸울 생각을 안하니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의 전쟁을 도와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너희가 좋아서 버리지 못하고 움켜 쥔 것들과 함께 너희도 같이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오늘 여호와의 사자이신 주님께서 그들과 우리에게 동시에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망합니다.
가나안땅에는 여전히 남겨진 대적들이 있었듯이, 이 땅에도 우리의 원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겨우 눈에 보이는 싸움만을 할 뿐입니다.
그것도 힘에 부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 세계의 이면에 실제로 존재하는 영적인 활동들에 대해선 거의 무지합니다.
악의 세력들은 아주 능숙하게 인간을 다룰 줄 알지만 우리는 거의 그 존재조차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악에게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들을 보고 계시고 그 계략을 무력화시키고 우리를 안전하게 구원해 줄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이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모르고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에 들러붙어 뭔가를 얻어내려는 신자들은 곧 사탄의 올가미에 걸린 발이 끌려갈 일만 남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4절에서 세상과 짝꿍이 된 성도들을 경고합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성도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정해주셨잖습니까?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몸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세상과 더불어 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의 풍요한 문화와 세상이 주는 재미를 외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의 입장도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광야에서 돌산만 바라보고 살던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보니 그들의 문명이 장난이 아닌 것입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사십년 동안 문명이 없이 살았던 이들이 가나안의 화려한 문명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하나님은 다 부수고 다시 시작하라고 하셨는데 아까워서 부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보니 거기 사람들이 뿔난 사람들도 아니고, 다 사람 사는 동네지 않습니까?
가나안의 풍요로운 농사의 소출을 다 바알신이 준다니 이젠 농사의 신을 믿어야 옳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바알신은 쫀쫀하게 양심과 도덕심을 따지지 않을 뿐 아니라, 제사 뒤에 그 재미와 여흥이란 게 구미가 당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한 세대가 가기도 전에 이들이 앞을 다퉈 바알신앙으로 갈아탄 것이죠.
사람들이 아무거나 믿으면 되지, 뭘 깐깐하게 예수만 믿어야 되냐, 종교가 다 똑같다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도 때로 세상을 보면 다들 착하고 재미나게 사는 데, 왜 심판하신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로 보십시오.
죽은 자기 자식을 훼손해서 냉동실에 집어 넣는 기괴한 세상입니다.
가나안부족들이 그랬습니다.
자기 아이들을 몰록신에게 불살라 바치며 복을 빌었습니다.
세상은 고통당하는 사람으로 점점 가득하고, 어차피 인류는 자폭합니다.
하나님이 보존해주셔서 그렇지 인류는 벌써 삼차, 사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때 역사를 종결하시고 모든 사람을 불러내어 선악간에 심판하십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심판 받을 세상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세속적인 가나안과 구별되어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을 떠나 은둔하라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죄의 사상과는 분리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잔치집에도 가셨고, 명절을 즐기셨고, 먹고 마시는 자리에 즐겨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에 고정되셨고 세상 죄와 구별된 거룩함을 유지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죄를 조장하는 세상의 원리를 버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나안을 몰아내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나의 구원자시라는 것을 믿는 것 뿐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든 모든 죄를 끊는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아는 분이 약간의 편법을 쓰며, 믿는 사람도 요령껏 살아야지 원칙대로 살면 답답해서 어떻게 하냐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건 세상에 속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과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지 않습니까?
바른 길은 그렇게 애매하지 않습니다.
아주 사소하게 양심을 묵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곧 내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사소한 것이 오히려 우리 자신을 그대로 내 비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좀 챙겨보려고 양심도 속이고 치졸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사는데 크게 지장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선택하면 하나님이 결국 더 좋은 것을 챙겨 주십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사도가 성도들의 삶의 해답을 말해줍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에 빌붙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불의를 여유있게 싸워 이기는 것이 성도들의 권세임을 알고 날마다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다음은 오늘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백성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이들이 울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들은 진정 회개했을까요?
겉으로 보기엔 그랬지만 나중에 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물이 꼭 회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개 혼날 때 우는 아이들은 자기 연민이나 억울한 생각 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잘못을 깨닫고 인정할 땐 눈물이 아니라, 자기 머리를 쥐어박고 싶죠.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완전히 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무엇이 완전한 회개인지를 보여주는 암시는 ‘보김’이 아니라 ‘길갈’입니다.
우리는 ‘길갈’이라는 곳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냥 오셨다도 아니고, 하늘에서부터 오셨다도 아니고, 꼭 집어서 ‘길갈’에서 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길갈이라는 데가 벌써 굉장히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길갈은 가나안입국에 있어서 아주 큰 사건들이 있었던 곳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가르고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입국시킨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애굽에서 탈출시켰다면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가른 것이죠.
요단강을 건넌 뒤에 여호수아가 요단강 속에 있던 돌을 가져다가 그 사건을 잊지 않도록 기념비를 세운 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그 길갈에서 앞으로 있을 가나안의 대전투를 앞두고 여호수아가 단체로 할례수술을 받게 한 일입니다.
광야에서 태어나 사십년을 떠도느라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단체로 할례수술을 한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내일 전쟁을 위해 체력을 보강해도 시원찮을텐데 돌칼로 할례를 하고 아파서 다 드러누워있다니요.
어차피 사십년을 안 하고 살았는데, 꼭 이 시점에서 해야만 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단체로 할례를 시킨 다음에 아주 흐뭇하게 말씀했습니다.
‘이제 너희에게서 애굽의 수치는 굴러갔다.’
굴러갔다는 뜻이 길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 할례를 받은 자손들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이들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이곳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는 지키지 못했던 첫 유월절을 지킨 것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을 심판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건너 뛰었던 출애굽의 열재앙 중 마지막 재앙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요단강, 할례, 유월절, 이 단어들의 의미가 다 무엇과 관련된 것인줄 아시겠죠?
다 구원을 상징하는 단어들입니다.
자연적인 죄태생으로 살던 우리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아 죽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체험과 영적진리가 충만한 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장소의 중요성을 알고 가나안정복 전쟁 중 이 곳에 본부를 차렸습니다.
가나안의 중심부에 본부를 세워야 사방으로 작전을 펴기에 좋을텐데 가장 동쪽 끝인 이 길갈에 본부를 세운 것입니다.
아무리 멀리 가서 싸워도 다시 이 길갈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에게 길갈이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성경의 진리를 우리가 믿고 구원받은 그곳이 우리의 영적 길갈입니다.
여호수아가 세상의 전쟁을 마치고 다시 길갈로 돌아왔듯이 세상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매일 우리는 영적 길갈로 돌아와야 합니다.
‘보김’이 아니라 ‘길갈’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각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장소입니다.
보김, 즉 벧엘은 조상인 아브라함과 야곱의 하나님의 장소이지 자신들과 하나님이 관계한 곳이 아닙니다.
사사시대가 막을 내릴 때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이렇게 말하죠.
사무엘상 11장14절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우리의 신앙에는 확실하게 구원받고 하나님을 목격한 믿음의 길갈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하나님과 멀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한 그 길갈로 가서 우리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를 분주하게 몰고 다니는 매일의 삶을 마치면 다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앉아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기고, 가나안땅에서 지은 죄를 주님의 보혈로 씻고, 다시 하나님의 지원을 받을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 다시 세상을 향한 복의 근원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보김에서 눈물바람을 한 이들은 결국 길갈의 하나님께로 완전하게 돌이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일후 삼백년 동안 이스라엘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암울한 사사시대를 겪게 됩니다.
이 삼백년 동안 가나안을 동경했던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혹독하게 당하고, 울며 회개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사를 통해 구원을 받고, 다시 가나안을 따르다, 당하고 회개하고, 구원받고, 이 싸이클을 열두번을 질리게 반복하며 헛되게 보냅니다.
사사시대에는 정말 이스라엘이 이룬 것 하나 없이 모든 복을 탈탈 털어냈습니다.
사사시대를 지내고 왕정시대가 와서 사울이 왕에 오를 때 남은 것이 뭐가 있는 줄 아십니까?
전쟁을 하러 가야 하는데 당시 이스라엘에 전쟁용 칼이라고는 사울왕과 아들 요나단에게 겨우 두 개가 있었다고 사무엘상1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영적으로 사사시대와 같이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영적, 육적인 자산이 결코 남아나는 게 없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가나안 생활은 그 근거지를 하나님을 체험한 길갈에 두고 매일 거기서 복을 받고 유혹과 시험을 이기며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보김에서 우는 자들이 아니라 매일 길갈의 하나님께 돌아가 말씀을 되새기고 기도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6년1월17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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