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한계는 시야가 너무 좁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똑똑하다고 자처하면서도 생활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현시대 이상을 보려고 하질 않습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뻔 한 사실 조차 고려하지 않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지 않습니까?
신자들은 보는 것이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인류 역사 전체를 보고, 자연세계에서 영적 차원을 살아가기에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배우는 고대역사들은 현재 나의 삶을 비춰주는 영적 교과서입니다.
오늘 사사기 삼손의 이야기를 그런 마음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삼손의 생애를 통해 말씀하시는 의미를 분명히 알기 위해 본문보다 좀 넓게 사사기의 배경을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지휘한 가나안땅 정복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땅에 무사히 안착합니다.
이후 왕정이 세워지기까지를 사사시대라고 합니다.
사사기는 이 삼백여년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입니다.
사사기의 특징은 이스라엘 삶의 모습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어두움과 무지와 혼돈에 빠져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를 읽다보면 시대가 아브라함 이전의 야만시대로 거꾸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가나안 문명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문화와 교양으로 치장한다지만 깊은 내면은 다 야만과 영적 무지입니다.
우리 속에 다 거칠고 우악스런 야만이 들어 있습니다.
운전을 하다 뭔가 주행을 방해하는 차를 만나면 십중팔구 욱하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런 나 자신을 보면 ‘그래, 내가 이런 사람이지’하며 실체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죠.
빌립보서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예수님을 아는 믿음으로 살 때만이 내면의 야만이 주님의 고상하신 성품을 덧입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사회상의 영적 도덕적 무지와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사사기 마지막 사건인 열두토막 난 시신 훼손 사건입니다.
한 레위인이, 자기 첩을 농락하다 죽게 만든 베냐민지파 사람들을 이스라엘공동체에 고발하기 위해 시신을 열두조각으로 잘라 각 지파에 보낸 기괴한 사건입니다.
사건의 전모를 들은 열한 지파가 갑자기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겠다고 베냐민지파 전체를 거의 멸족시키는 내용이 사사기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이 사건 속에는 첩을 둔 제사장가문, 성폭력, 시신훼손, 동족전쟁, 인신매매 등의 야만적인 행위가 총망라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백성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정말 허를 찌르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암울한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가 본문의 주인공인 삼손입니다.
사사기에는 다른나라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열두 명의 사사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사회상이 점점 암흑 속으로 들어가듯이 사사들의 모습 역시 점점 기대치를 벗어납니다.
삼손에게서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들에게서 보여지는 어떤 위대한 모습을 기대한다면 이야기를 읽으며 점점 실망하고 기대는 무너질 것입니다.
오히려, ‘이건 도대체 뭐하자는 이야기지?’ 하는 의혹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삼손은 정말 아이러니한 인물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웬만하면 삼손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보다 더 유명한 인물일 것입니다.
우리가 삼손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가 무엇이죠?
헤라클레스 같이 힘만 장사인 코믹한 영웅의 모습입니다.
그는 나귀 턱뼈로 천명을 죽이고, 사자의 입을 맨 손으로 찢어서 죽일 만큼 괴력을 가졌지만 충동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삼손의 일생에서 뭔가 힘을 발휘했던 일들은 전부 여자들과 엮여 일어난 일들입니다.
삼손이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을 쳐부순 것도 내막을 보면 여자문제로 자기에게 악을 행한 자들을 응징한 개인적인 복수입니다.
더 이상한 것은 삼손의 탄생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삼손의 탄생을 여호와의 사자가 전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나와 있지만 내용을 좀 더 보면 단지 하나님의 전령인 천사가 아니라 구약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어냐고 마노아가 묻자,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기묘자니라 라고 대답하십니다.
기묘자는 경이롭고 놀랍다는 뜻으로 전형적인 하나님에 대한 표현입니다.
또 삼손의 아버지가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라고 말하죠.
불임 상황에서의 기적적인 잉태에다, 성자하나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알려주신 그 대단한 인물이 고작 이런 삼손이라는 것은 실망감과 함께 의혹을 갖게 합니다.
과연 삼손 같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직접 알려주실 만한 그런 중요성이 있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런 의문과 당시의 무지한 사회상에 대해 이해하고 삼손의 역사를 살펴볼 때 비로서 삼손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와 기묘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사 삼손의 시대적 배경을 1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니라.
사사기의 패턴이 대략 이스라엘의 배신,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의 회개, 사사를 통해 구원, 이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서 사사를 통해 구원받고 숨을 돌린 이스라엘이 또다시 역사를 원점으로 돌린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우상숭배, 사회적으로 문란하고 부패한 가나안 문화를 또 열심히 좇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 노예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한일서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려져있는 영적인 실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악한 마귀의 수하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멍에로 알고 뿌리칩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혹은 독재자처럼 자기 인생을 멋대로 살겠다는거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의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고 내게로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냥 친절을 베푸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살이에서 모든 사람의 목에는 죄와 사탄이 얹어 놓은 무거운 멍에가 지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진 멍에는 평생을 허덕이며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져 날라도 결코 끝이 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에 시험보고 나면 또 시험이 돌아오고, 직장인 되어 야근하며 겨우 프로젝트 하나 마치고나면 곧 다음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죠.
잠 잘 시간도 늘 부족하게 우리가 삽니다.
삶의 한고비 넘기면 또 가정을 뒤흔드는 고비가 닥쳐옵니다.
대기업총수라고 쉬는 때는 절대 오지 않습니다.
자리보전하고 눕거나, 휠체어에 의존할 상태가 되지 않는 한 기업의 생존을 위해 힘겹게 쳇바퀴를 돌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등 진 인간세상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이고 불행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도 젊어서는 자신의 인생이 희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은 힘들어도 퇴근 후에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맛이 있고, 아파트 평수는 늘어가고, 자식들은 잘 커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 될 것라고 믿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며칠 전 기사를 보니 일본의 경우 생활보호대상자의 절반이 노인세대라고 합니다.
노인세대의 17퍼센트가 남은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모아놓은 돈이 한푼도 없답니다.
은퇴 뒤의 긴 여생과, 병든 몸, 비정규직 자녀들은 혹처럼 붙어 늙어서까지 허덕이는 게 잘사는 나라 일본 노년의 현실입니다.
OECD국가 중 노인빈곤률 1위, 노인자살률 1위인 우리나라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재벌도 그 마지막은 마찬가지예요.
세계를 누비던 어느 기업인이라도 결국 침상 하나를 차지하고 수년을 누워있다 미지의 내세를 향해 공포 속에서 떠나는 게 인생 아닙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인생드라마는 희극이 아니라 비극입니다.
예수님은 이 죄악 세상의 무거운 짐을 벗으려면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멍에를 벗어버리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려 결심할 때, 신앙 안에서 우리가 져야 할 멍에가 있습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 좁은 길이 예수님을 따를 때 오는 멍에입니다.
남들이 보면 사는 것도 힘든 데 신앙생활까지 하는 신자들이 대단하다고도 하고, 대체적으로 좀 안됐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멍에는 무겁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이 멍에들을 지면 질수록, 우리 안에 기쁨이 있고, 삶에는 지혜가 생기고, 문제를 이길 만큼 강인해 집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멜 때 우리 어깨에 얹혀 있던 세상 짐이 툭 떨어지고 우리의 짐이 곧 주님의 짐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날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는 주님’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잖아요?
예수님의 멍에는 안식입니다.
예수님은 진정 안식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던진 이스라엘은 장장 사십년간 블레셋의 멍에를 메고 폭정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말이 사십년이지 우리나라 일제36년 역사에 남아난 게 뭐가 있습니까?
지금도 소나무 군락을 이룬 성주산에 가면 수천그루의 소나무가 움푹 움푹 패인 깊은 상채기를 보이며 흉측한 모습으로 서있습니다.
일본군이 항공기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송진까지 채취해간 흔적입니다.
사사시대 지배자들 역시 먹을 양식하나 남기지 않고 다 약탈해 갔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폭정에 사십년을 고통을 받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사사기의 특징대로 라면 이제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회개할 차례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사사를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삼손의 때, 이들에게서 그런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죽여 원수를 갚자 불안을 느낀 이스라엘사람들은 오히려 삼손을 결박해서 블레셋에 넘겨주는 희한한 상황까지 벌어집니다.
블레셋의 지배를 운명으로 알고 가난과 학대 속에서 살지언정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멀어질 때, 처음엔 약간의 우환이 닥쳐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이고 돌이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한번 두 번 사인을 무시하다 나중엔 아무리 힘들고 겁나는 일을 만나도 악으로 버티지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모습을 볼 때 안타깝습니다.
어떤 이들은 건강으로, 가정의 파탄으로, 자식의 탈선으로, 점점 총체적인 문제들이 파생되는데도 안 돌아옵니다.
과거 어느 때, 지금보다 훨씬 우리 믿음이 강했고, 하나님을 사랑했고, 헌신했던 때에 비해 우리 신앙이 약화되었다면 더 늦지 않게 돌이켜야 합니다.
이렇게 긴 세월을 수치와 고난을 당하지만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돌이킬 마음조차도 잃었습니다.
사사기의 룰 마저 깨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는 구원을 요청하지도 않는 무지한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 편에서 스스로 한 구원자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으니 그가 바로 삼손입니다.
왜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믿음직한 구원자가 아닌 하필 삼손입니까?
이 사실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니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삼손의 탄생스토리는 우리가 읽은 대로입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불임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불임보다 훨씬 비극이고 훨씬 불행을 예고합니다.
아이 없는 이 가정은 옆집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릴 때, 어두운 방안에서 깊은 한숨을 내쉽니다.
이런 마노아의 아내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오셔서 삼손의 탄생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의를 줍니다.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말라.
이 말씀을 1장에서 세 번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마노아의 아내에게, 마노아의 아내가 남편에게 그대로 전하고,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마노아에게 말씀하고, 똑같은 말씀이 세 번 나옵니다.
굉장히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이것은 삼손을 이렇게 키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누구에게 그렇게 하라는 지가 분명치 않지만 원어에는 정확하게 마노아의 아내, 삼손의 모친에게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삼손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부모들의 거룩한 삶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 신앙으로 거룩하게 살지 못하는데, 자식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성경은 누누이 강조해서 말씀합니다.
경건한 부모 밑에서 경건한 자녀가 나옵니다.
사무엘을 키워낸 한나가 그렇고, 세례요한의 부모들이 그렇고, 다윗의 가문은 경건한 재력가 보아스의 후손이었습니다.
자식을 하나님의 인재로 훌륭히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의 신앙이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삼손을 낳아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으로 잘 키워냈습니다.
그렇게 공들여 키운 게 고작 삼손이란 말씀이냐구요?
그게 바로 우리가 또 경고 받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고자 애를 쓴다 해도 환경과 시대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느 면에서는 시대의 아들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서신에도 노예제도에 순응하는 내용이나 여성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내용들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고 칼빈 역시 이단자의 화형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우리가 사는 사회상과 가정풍토와 종일 일하는 직장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 독보적인 믿음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삼손이 커서 블레셋여자를 아내로 맞겠다고 하는 것이나,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상태에서도 기생에게 드나든 것이나, 들릴라라는 여자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동거하는 모습들은 당시 사회풍토가 그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누구도 그런 걸 죄라고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죠.
아무리 나 혼자 신앙생활을 잘 해도, 식구들이 세속적이고, 직장이 불법을 행하고, 만나는 친구들이 불신자들이면 영적 판단력은 흐려지고 서서히 그 생명은 죽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속한 모든 곳을 복음의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인간이 너무 무지하면 하나님도 감당치 못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한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스스로가 자율적으로 감당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너무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선 하나님도 어떻게 은혜를 주실 수가 없으십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구원하시길 기도하고 바라고만 있다고 하나님이 알아서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교회에 데리고 나와 하나님과 구원에 대해 배우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고, 진리에 대해 알아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삼손과 그 이전 사사들의 헛점과 부도덕과 엉뚱한 모습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조차도 시대의 무지와 악습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사람들도 패륜을 저지르면서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내세웁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며 그 말씀이 아닌 자기소견대로 행하던 때가 사사시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소견을 따르지 않도록 하나님은 성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8장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도다
왜 이렇게 두꺼운 성경책에 만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이걸 다 알아야만 할 정도로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한 두마디로 우리의 무지가 벗겨지지 않습니다.
사사기 시대의 암울함은 그 서두에서 이미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모세대가 자식세대에 신앙을 바르게 가르치지 않아서 다음세대가 아니라 다른세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이런 경고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구원을 무력하게 못합니다.
삼손은 무지함 속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만 어쨌든 블레셋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합니다.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도도히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이 이끌고 이루신다는 것이 사사기의 교훈입니다.
삼손은 이런 엉뚱하고 충동적인 사사로 짧은 일생을 살고 죽지만 히브리서는 믿음의 영웅들 중에 삼손을 넣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는 연약한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든 죄인 된 자녀들의 대표주자입니다.
방법은 틀렸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원수 블레셋에게 당당하게 대항해 나라를 구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이 시대의 무지를 뛰어넘지 못하고 불행한 최후를 마쳤지만 히브리서는 13장 믿음의 전당에 다윗과 사무엘과 동등한 줄에다 당당히 삼손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사기는 거듭 하나님을 배신한 백성들의 무지와 타락, 지도자가 된 사사들의 불완전한 모습을 역사에 그대로 기록합니다.
그래서 결국 왕을 세우지만 나아지기는커녕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을 궁지에 쳐 넣은 것이 다음 열왕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하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오실 수밖에 없다는 처참한 인간의 처지를 역사를 통해 입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삼손의 생애에는 많은 부분 그리스도를 은밀히 예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탄생에 관여하신 이유이고, 그것은 다음 주에 삼손2탄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깊이 새기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으셨습니까?
하나님을 벗어난 인간의 죄악상과 비애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말씀을 모르는 무지가 불러오는 야만성과 비천함입니다.
그리고 삶의 토양에 신앙적 양분이 넓고 풍부하게 퍼져있지 않으면 올바른 믿음으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나와 우리 자녀들, 가족들이 안전하고 거룩하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삶의 터전에 더 깊고, 넓게 영적 자양분을 공급해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삶의 한구석 자리가 아니라 삶 전체를 받쳐주는 주추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우고 마땅히 행할 바를 지키며 우리 신앙이 자녀세대로 경건하게 이어져 가도록 힘쓰는 모두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2016년9월11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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