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단 두 부류라고 생각해봅니다.
하나는 구원받은 사람, 또 하나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죠.
오늘 본문에는 구원받은 자 빌립과 구원받아야 할 자 에디오피아의 여왕 내시가 등장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분명합니다.
듣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둘 가운데 어딘가에 속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에게 주신 구원과 예수님을 다시한번 발견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본문의 전도자 빌립은 예수님의 12제자 빌립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너희가 본 대로 땅 끝까지 주님의 부활과 재림을 증거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가 크게 부흥 해 사람으로 넘치게 되자 사도들이 행정적인 일까지 감당하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교회를 도와줄 7집사를 뽑게 되는 데 오늘 본문의 빌립이 바로 초대교회에서 세운 7집사 중에 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도행전6장5절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크게 부흥되자 유대인들을 앞세운 사탄의 대항이 만만찮게 일어납니다.
일곱 집사 중 한사람인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됩니다.
이 일을 시작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는 데 그로 인해 사도들만 예루살렘에 남고 다른 사람들은 다 여기저기 도망가고 흩어지게 됩니다.
이 때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 덕분에 사마리아가 신속하게 복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때로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 가운데 뜻 하지 않은 어려움과 환난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고난과 시험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오늘 건강과 돈과 가정 문제와 뜻 모를 고난으로 인해 안락했던 내 둥지가 흔들거리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하실 일이 있으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텅 빈 둥지에 믿음의 자녀를 낳기를 원하시는 지도 모릅니다.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 땅에 놀라운 복음 전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8장5절부터 8절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26절에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가사로 내려가 광야 길로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사마리아에는 놀라운 말씀 전파의 능력이 임하고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데 성령께서는 빌립더러 광야로 나가라고 하십니다.
빌립은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주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명령하십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해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주님의 섭리 가운데 종종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후 를 알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더라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그것이 우리를 위해 백번 옳은 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장25절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성령의 음성을 들은 빌립은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광야 길은 그리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물이 없고 메마른 사막, 숨막히는 태양이 내리쬐고 전갈과 뱀이 있는 곳입니다.
먼지 바람을 뽀얗게 일으키며 떼 강도가 출현하기도 합니다.
그 곳으로 빌립은 성령님의 말씀을 따라 혼자서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수레를 타고 가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데 그는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였습니다.
오늘날 재무장관 정도 되겠죠?
성령님은 오늘 이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정확한 때에 빌립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연히 찾아왔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에게 바짝 다가가라고 지시하십니다.
그의 신분으로 본다면 평범한 빌립이 다가가기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수행원을 대동했을 테고 경우에 따라선 오해를 받아 목숨이 위태로울 수 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빌립은 성령의 모든 음성에 완벽하게 순종합니다.
복음 전파의 성공 여부는 우리의 완벽한 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은 바로 저 사람에게 지금 복음을 전하라는 감동을 주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모른 척하고 성령의 말씀을 외면한 전과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가 사라져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빌립이 다가 간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내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남들이 보기에 출세했고 권세를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엔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한들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었습니다.
죽으면 자기의 이름을 기억해 줄 아무도 없고 그가 가진 부와 권력은 다 남의 소유가 될 판입니다.
그는 자신의 현재의 삶에 허무를 느꼈고 그래서 종교를 찾게 됩니다.
27절에 보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에디오피아 전설에 의하면 솔로몬왕을 찾아왔던 스바의 여왕이 돌아가서 아들을 낳았는 데 그 아들이 메넬리크 왕조를 세워 에디오피아 왕국을 건설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게다가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법궤를 이 아들에게 주어 지금도 에디오피아의 성 메리교회에 법궤를 모셔놓았다고 주장합니다.
외부에 절대로 공개하지 않는 이 비밀의 법궤는 한 사제에 의해 지켜지고 있으며 일반인이 가까이 가면 불에 타 죽는다고 위협해 아무도 실제 그 법궤를 본 사람은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일부 에디오피아인들은 자신의 조상을 유대인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종교성을 갖고 있고 또 영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이들도 보면 무섭다고 소리지르면서도 괴기 영화 귀신 영화를 엄청 좋아합니다.
무서워하면서도 인간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것들은 영적인 것을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내면의 영적인 자리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기에 그것으로 인해 항상 영적인 허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채워야 할지 모르고 끊임없이 헤매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그래서 자기 방식으로 영적인 세계에 접속하려고 애를 씁니다.
구원에 대한 길을 찾아가려고 여기 저기 문을 두드려 봅니다.
인도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 찌는 듯한 햇볕 아래서 못이 박힌 널빤지 위에 누워 있는가 하면, 일생을 벙어리로 살 것을 서약하는 사람도 있고, 수백 Km나 되는 곳을 기어서 순례 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행위나 어떤 이름으로도 결코 구원을 받을 수 는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죄를 지고 고생하다가 죄 가운데 죽을 뿐입니다.
유대인의 속담에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할 수 없고 임신한 여자가 임신한 여자를 업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아무도 자신의 죄와 남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원죄 없이 성령으로 잉태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습니다.
내시는 이 영적 허기를 채우기 위해 헤매다 유대인의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나라에 왜 종교가 없었겠습니까?
아프리카와 가나안지방에 만연한 우상 종교는 발에 차일 정도 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우상종교의 조악하고 치졸함이란 결코 섬기고 의지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 윤리성은 숭고하기는 커녕 세속적인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신앙이었던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들이 왕 제우스신의 아내 헤라는 자기가 낳은 아들 헤파이토스가 너무 못생겼다고 내다 버리는 패륜을 저지릅니다.
물론 제우스도 왕이 되기 위해서 아버지인 크로노스를 정복해 멸망시키고 왕위를 빼앗은 전적이 있습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술의 신 바카스는 12시 넘어 먹자골목에 가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사람들과 너무 비슷하지 않습니까?
세계를 재패한 대단한 나라 로마의 신들이라는 게 한결 같이 잔인하고 난폭하며 참을 성이 없고 불륜을 저지르는 우리 인간과 꼭 같은 참 별볼일 없는 형상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만든 종교에는 인간 자신과 꼭 닮은 신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시는 유대교의 여호와 하나님은 근동의 신들과 다름을 알았습니다.
유대교의 계명들이 엄격한 것을 알면서도 그는 왠지 유대교에 끌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양심을 가진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할 길을 창조하신 자연 세계를 통해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사의 천재 과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 없이 우주가 질서 정연하게 궤도 대로 움직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 많은 생물과 자연이 우연히 만들어 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다 알 만한 것입니다.
로마서1장 19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이 싫어서 가까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또래모임반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고 싶은 학생 손들어 보라고 했더니 한명도 없더군요.
인간은 그냥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불편하고 힘든 겁니다.
죄 짓는 게 더 자연스러운게 인간이거든요.
그러나 내시에게는 당장 구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예배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시였기에 사실은 신명기23장1절에 기록된 대로 예배하러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밖에서 바라만 보다 돌아가는 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얼마나 영적으로 갈급하였는지 돌아가는 수레 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는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지 않은 저기 밖의 사람들이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아니요, 그들은 자신도 못 느끼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로 인해 잔뜩 화가 나 있습니다.
이것, 저것에 매달려 보지만 아무 것도 자신을 채워주지 않는 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내시는 종교를 통해 무언가를 얻고 싶었기에 유대인이 하는 것 처럼 소리 내서 깨닫지도 못하는 이사야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3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라며 빌립을 청해 수레에 올라 앉게 합니다.
광야의 흙먼지에 꼬질 꼬질해진 나그네가 단지 유대인 같이 생겼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그의 수레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가 얼마나 진리를 알기에 갈급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34절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청컨대 내가 묻노니 제발 좀 가르쳐 주시오.
우리는 인생의 해답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지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내시가 인생의 해답이 궁금해서 애가 탈 지경이듯이 교회에 무관심해 보이는 사람들도 내심 이 안에 뭐가 있나 궁금해지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혹시 저 안에 내가 왜 이렇게 갑갑해 하는지 그 무엇에 대한 해답이 있지 않을까 그거 아니겠습니까?
오늘 내시는 임자를 제대로 만났습니다.
내시가 들이민 두루마리 성경은 이사야서에 예언 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 탄생 800여년 전에 이스라엘에서 활약한 선지자입니다.
예수님 탄생을 서기 1년으로 잡는 다는 것은 다 아시죠?
지금이 2010년이니 예수님 탄생하신지 2010년 째 되는 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예수님이 단군 신화에 나오는 환웅처럼 신화 속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인물사전에 나와 있는 분이십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 나와 있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20세기 세계인구의 1/3이상이 믿는 기독교의 창시자. 아버지 없이 성령으로 잉태 된 동정녀 탄생설이 유력하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회개하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결국 정치적 반란자로서 로마 법에 따라 형을 선고받았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이 간추린 예수님에 대한 백과사전의 기록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탄생과 고난에 대한 많은 예언을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기 위해 한 민족을 선택하셨는 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예언에도 불구하고 메시야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배척하고 결국은 죽이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 32절과 33절에 나타난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란 예언의 말씀은 메시야가 이 땅에서 수난을 당하고 죽을 것이라는 대표적인 예언입니다.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에 대해 이스라엘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로마의 속국이던 자신들의 나라를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를 꿈꿨습니다.
대단한 권력과 군사력을 이끌고 와서 로마제국을 압제하고 위풍당당하게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인물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오해이고 착각이었습니다.
이미 많은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메시야는 인류의 죄를 지고 대신 죽어야할 존재로 이 땅에 보내질 거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32절에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체포되어 심문 당하실 때 그들의 거짓 증거와 거짓 증인과 억측에 대해 잠잠히 서 계셨습니다.
마태복음26장62절에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라고 독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15장 4절에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라고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변호 하실 처지가 아니셨기에 묵묵히 심문 받는 과정을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미 하나님께 받은 제사법 대로 자기의 죄를 위해 어린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려왔던 것 같이 메시야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어린 양과 같이 죽임을 당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33절에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라는 부분은 예수님이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사형 판결을 받은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체포되어 제사장의 뜰에서 빌라도의 법정으로 그리고 헤롯에게로 끌려 다니며 한 밤중에 긴급 소집 된 공회에 의해 말도 않되는 재판을 받습니다.
왜 그들은 야심한 시간에 법석을 떨며 재판을 열어 정당한 변호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정치 못한 판결을 다급하게 내려버린 것일까요?
강도, 살인자도 아닌 예수님에게 십자가 사형판결이라니요.
예수님이 체포되고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히기 까지 2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재판이 어디 었고 이런 사형언도가 어디 있으며 이런 형 집행이 어디있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내시는 이사야의 이런 예언이 쓰여진 두루마리를 읽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이 억울한 상황에서 아무런 변호도, 난동도 부리지 않고 불리한 판결을 받고 죽은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했습니다.
어쩐지 답답한 자기의 마음과 같을지 모르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몹시 궁금했으나 아무도 그것을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빌립은 복음을 전합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의 말씀이 바로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것이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 된 후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당신을 살리기 위해 죽은 대속의 죽음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당신이 그토록 찾아다니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내시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는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드디어 그의 눈이 번쩍 뜨이고 구원의 이치를 깨달은 것입니다.
당장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겠노라고 수레에서 내려 물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의 기쁨이 얼마나 충만했던지 그는 물에서 나올 때 성령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빌립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기쁨에 겨워 제 길을 갔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내시가 구원을 받은 이 장면이 저는 참 좋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며 저는 내시의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그가 소유했던 많은 부와 권력은 그를 더욱 공허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물려줄 자식이 없고 함께 할 가족이 없기에 자신을 선택해 그 모든 것을 맡기고 누리라고 하는 왕비는 얼마나 잔인한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 나를 정말로 위하는 마음으로 내게 무언가를 주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요?
세상은 다만 거래를 할 뿐 아닙니까?
그의 덩그렇게 텅빈 화려한 숙소에서 그는 얼마나 많은 허무와 밤새 사투를 벌였길래 그 먼 사막의 위험을 건너 예루살렘까지 순례의 길을 떠났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을 다 보고 있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그에게 주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제 내시는 그가 그렇게 찾았으나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 충만하여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에디오피아 정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되는 작은 초석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제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 세상에는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아야 할 자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할 일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할 일은 이 세상에서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10장16절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까?
로마서10장14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을리요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가 그 이름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래 전에 풍요의 땅 고국을 떠나 망망한 대해를 죽음과 싸우며 우리에게로 와 복음을 전해준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싫다 눈치를 줘도 속도 없이 다가와 복음을 주기 위해 애썼던 그 누군가가 우리 곁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집사 빌립은 광야의 위험을 무릎쓰고 성령의 음성을 따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복음은 목숨을 내걸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이 이것을 위해 목숨을 겁니다.
영화 창끝이 저자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의 아버지 네이트 세인트와 짐 엘리엇 등 5명의 선교사는 50년전 잔인한 전쟁과 사술에 매여 죽어가는 아마존의 와오다니 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정글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와오다니족 전사들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선교본부에서 연락이 끊긴 그들을 찾아와서 발견한 것은 해변에 처참하게 죽은 다섯명의 청년들의 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들의 손에 들려 있던 권총이 단 한 발도 발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죽자 이번에는 죽은 선교사들의 부인과 여동생들이 아이들을 들쳐 업고 배를 저어 정글의 부족들에게로 갑니다.
여인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봉사에 충격을 받은 추장이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냐고 물을 때 그들은 당신이 죽였던 그 선교사의 아내라고 대답합니다.
그 후 와오다니 부족은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짐 엘리옷을 찔렀던 사람은 와오다니 족의 목사가 됩니다.
죽임을 당할 때에 겨우 다섯 살이었던 창끝의 저자 스티브 선교사는 마침내 그 아버지를 창으로 찔렀던 자들을 알게 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올 3월에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네명의 자녀를 데리고 와오다니 족에게 다시 돌아가 그들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복음은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죄를 속하기 위해 젊고 고귀하신 목숨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뒤를 따라 복음을 주기 위해 자신을 버립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길면 칠십, 강건해도 팔십이라고 시편기자는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고 계다가 신속히 날아간다고 얘기합니다.
오늘 본문의 에디오피아 내시는 그의 부와 권력으로 해결 받지 못한 인생 근본의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의 기쁨이 마음에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기쁨이 충만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믿으십니까? 아멘.
그렇다면 구원받지 못한 우리 주변에 그 좋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복음을 전하십시오.
일본 사람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보았는 데 질문에 응답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단 한번도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전도대상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온전한 성품과 착한 행실로 그 분들을 섬겨야 하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진지하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관계가 어색해 질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랑과 진실로 전한다면 마음은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 39절을 보니 전도의 사명을 감당한 빌립에게 하나님은 사막의 위험을 다시 감수하며 되돌아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빌립은 순식간에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공간이동을 통해 아소도에 나타나 복음 전도활동을 계속합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은 우리를 고난과 괴로움 가운데 두시는 것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고난을 통해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이루고 성숙한 믿음으로 나간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은 그 고통의 현장에서 우리를 건져내신다는 것을 믿으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 수첩에 아직 천국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이 몇 명이나 적혀 있습니까?
그들이 구원을 받기까지 기도를 쉬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지혜를 구해 복음의 핵심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의 기쁨이 곧 그 분들의 기쁨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곧 하늘에 있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기쁨임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15장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 보다 더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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